사회주의 강령을 토론하자!
강령 논의의 활성화로 사회주의 정당 건설의 사상적 토대를 형성하자-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4호를 발간하며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4호가 다소 늦게 동지 여러분을 찾게 되었다. 4호 발간이 늦어지게 된 것은 우선 여러 가지 활동들이 겹쳐지면서 글을 기고할 동지들의 글 작성이 늦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4호가 늦어지게 된 더 큰 이유는 3호의 발간사에서 독자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3호 발간사에서는 “앞으로, 생태문제에 대한 더욱더 심화된 토론을 활성화할 뿐만 아니라, 여성문제에 대한 사회주의적 관점의 토론을 적극적으로 활성화할 계획임을”임을 밝혔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편집위원회는 4호에 여성문제에 관한 글을 싣기로 기획하고, 이미 편집위원회에서 진행하고 있던 여성문제에 대한 학습과 토론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여성 억압의 근본 원인을 정식화하는 데에서 당초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게 되고 편집위원들이 다른 일로 시간을 충분히 할애할 수 없어 불가피하게 4호의 발간 시점이 늦추어지게 되었다.
현재까지의 노력으로 여성 억압의 근본 원인을 정식화하는 데에서 편집위원회는 대강의 내용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미진한 부분이 있어, 이와 관련된 본격적인 글은 다음호에 싣는 것으로 하고, 편집위원회는 현 수준에서라도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는 내용의 글을 논쟁적인 방식으로 4호에 싣기로 하였다. 전체글 보기 » »
-
여성문제, 계급문제에 대한 이원론적 접근 비판
들어가며
2008년부터 일어난 전세계적인 경제대공황은, 전 세계 민중들에게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실현해야 한다는 대중적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관심 밖으로 내몰렸던 자본론이 다시 인기를 얻고, 경제공황의 타격을 직접적으로 받았던 유럽에서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여론조사가 진행되기도 한다. 한국사회에서도 삶과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주장이 대중적으로 제기되고 있는데, 이는 이러한 상황의 반영인 것이다.그런데 자본주의의 위기는 경제시스템 자체의 문제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역사적 생산양식의 하나인 자본주의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인간과 인간들간의 관계들조차 자본주의 방식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인간의 삶 전반을 철저히 파괴하고 위기에 처하게 만들고 있다. 생태문제만 보더라도 자본주의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서는 궁극적 해결전망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자본주의에 대한 극복은 단순히 경제제도의 문제를 넘어 어떠한 사회를 인류가 추구해 나가야 하는지 의문을 던지는 것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실현하려는 대중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운동 자체도 자신을 반드시 혁신, 현대화해야 하는데, ‘(가칭)한국사회주의 노동자당 강령 초안’(이하 강령초안)은 이를 위한 핵심 중의 하나로 현대사회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는 여성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능동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여성문제가 현대사회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은, 현대에 들어 여성문제가 새롭게 나타났다는 뜻은 아니다. 엥겔스의 주장을 보더라도 여성억압은 계급의 등장과 더불어 출현한 것으로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여성억압에 맞선 투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본주의 출현 이후에 본격화되었고, 20세기를 관통하면서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는 뜻에서 그렇다. 현재 한국 사회만 보더라도 여성문제는 다양하게 등장하여 제도적으로 일부 진전이 되기도 하고, 이제 막 문제의식이 싹트거나 벌써 논란거리가 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남성 중심의 호주제는 철폐가 되었고, 여성의 정치참여를 높이기 위한 할당제가 도입되기도 하였다. 낙태 허용, 간통죄 폐지 문제는 현재 논란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성들은 노동자로서 착취를 당하는 것과 함께, 같은 남성에 비해서도 차별을 받고 있고, 가정에서는 가사,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이중착취에 고통받고 있다. 여성들은 통계에도 잘 잡히지 않는 가정폭력에 고통받기도 하고, 직장 내에서는 성희롱과 성폭력으로 억압받고 있다. 대부분의 성소수자는 여전히 사회의 따가운 시선과 제도의 장벽으로 인해 억압받고 있다. 전체글 보기 » »
-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
황 정 규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편집위원회 편집부장)
들어가며
갈수록 심각해져가는 생태문제는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해가야 한다. 그러나 생태문제의 심각성은 많이 인식되고 있지만, 사회주의자들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이 문제를 다뤄야 하는지는 깊이 논의되지 못한 실정이다. 이제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을 올바로 세우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사회주의자들의 과제가 되고 있다. 이 글이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이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풍부한 논의를 시작하기 위한 단초가 되길 기대한다.본격적인 글의 전개에 앞서, 이 글의 문제의식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현재의 생태문제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서 나온 문제라는 것이다. 맑스는 인간이 자연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물질대사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는데, 이 관계는 각 사회구성체마다 고유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과거의 다른 사회구성체에서 환경파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자연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며, 이 파괴가 인간에 대한 생존의 위기로까지 발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자본주의 특유의 물질대사 형태에서는 이윤의 추구, 생산을 위한 생산이 체제의 핵심원리가 되면서, 자연에 대한 무제한적인 수탈이 벌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생태문제와 자본주의의 연관성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전체글 보기 » »
-
파멸을 말하는 생태학(The ecology of Destruction)
존 벨라미 포스터 (「먼슬리 리뷰」 편집자)
이 글은 포스터가 편집자로 있는 “먼슬리 리뷰” 2007년 2월호에 실렸다. 포스터는 최근 맑스주의적 관점의 생태론에 대해 진전된 성과물들을 생산하고 있는데, 독자들이 그 내용을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번역 게재한다.
본문은 「http://www.monthlyreview.org/0207jbf.htm」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질로 폰테코르보의 1969년 영화 ‘Burn!’을1) 언급하는 것으로 여기서 내가 ’파멸을 말하는 생태학‘이라고 부르는 것에 관한 나의 분석을 시작하고자 한다. 폰테코르보의 웅장한 영화는 우리가 사는 시대를 염두에 둔 정치적, 생태적 비유로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19세기 초반 ’Burn’이라 불리는 상상 속에 존재하는 카리브 해의 한 섬을 배경으로 설정하였다. ‘Burn’은 세계 경제 안에서 환금작물인 설탕 수출에 의지하며 설탕 생산 단작을 하는 포르투갈 지배 하의 노예 섬이다. 오프닝 신은 우리에게 처음에 포르투갈 식민지배자들이 토착민들을 정복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 섬 전체에 불을 놓아 이곳의 모든 사람들을 죽이고 나서 그 이후에 노예들이 새로 경작된 사탕수수를 베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수입되었다는 사실에서, 섬이 그 이름을 얻었다는 정보를 알게 해준다. 전체글 보기 » »
-
성두현 동지의 의견에 대한 간략한 재답변
이 장 규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연대 회원)
「사회주의 강령을 토론하자!」제2호에 실린 성두현 동지의 ‘이장규 동지의 의견에 대한 답변’을 잘 읽어보았다. 답변의 일부는 필자와 성두현 동지의 생각이 서로 다름을 확인한 부분도 있었고, 일부는 필자의 의견이 명확히 표현되지 못해서 성두현 동지가 약간 오해한 부분도 있었다고 보인다. 따라서, 간략하나마 재답변을 통해 이런 부분들을 밝혀보고자 한다.
1. 원리적 부분
소련사회가 ‘관료가 지배하는 공동생산체제’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던 물적 토대를 사적유물론에 의거해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필자의 주장에 대하여, 성두현 동지는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 단계에서는 노동자국가가 토대를 형성해나가기 때문에 사적유물론 일반을 과도기 사회에 곧바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성두현 동지의 의견대로, 과도기 단계에서는 정치가 이행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맞다. 또한 노동자민주주의의 변질이 공산주의적 생산관계의 변질에 선행적이라는 것도 옳다. 그런데 필자의 문제의식은, 그렇다면 이렇게 정치가 이행을 위한 올바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노동자민주주의를 변질시킨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전체글 보기 » »





최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