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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회주의 강령을 토론하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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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강령 논의의 활성화로 사회주의 정당 건설의 사상적 토대를 형성하자</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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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세계대공황의 본격적인 전개와 사회주의노동운동의 대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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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7 Aug 2011 04:07:20 +0000</pubDate>
		<dc:creator>강령토론</dc:creator>
				<category><![CDATA[전체토론]]></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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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편집부] 8월이 접어들면서 세계대공황이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의 조건은 아직까지 이러한 세계대공황의 의미를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지 못한 실정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글은 현재 더욱 심화되고 있는 세계 대공황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고, 사회주의자들이 이러한 정세 속에서 어떠한 실천을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위해 작성된 것입니다. 동지여러분의 일독과 많은 의견을 부탁드립니다.</span></p>
<p><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p=1110" class="more-link">Read more on 세계대공황의 본격적인 전개와 사회주의노동운동의 대응&#8230;</a></p>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편집부] 8월이 접어들면서 세계대공황이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의 조건은 아직까지 이러한 세계대공황의 의미를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지 못한 실정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글은 현재 더욱 심화되고 있는 세계 대공황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고, 사회주의자들이 이러한 정세 속에서 어떠한 실천을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위해 작성된 것입니다. 동지여러분의 일독과 많은 의견을 부탁드립니다.</span></p>
<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성 두 현 (노동해방실천연대(준) 지도위원)</strong></span></p>
<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h2>들어가며</h2>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1/08/global-Economic-Crisis.jpg"><img class="alignleft size-full wp-image-1119" style="margin: 10px; border: black 1px solid;" title="global-Economic-Crisis" src="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1/08/global-Economic-Crisis.jpg" alt="" width="273" height="295" /></a></span>미국의 채무한도 협상 합의 이후 잠시 상승세를 보였던 주가는 전세계적으로 급락하고 있다. 이유는 미국의 더블딥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더블딥은 이미 오래전에 ‘우려’가 아니라 현실이 되어 있었다. 그러면 문제는 더블딥인가? 더블딥은 재침체를 말하는데 이것은 이전에 회복이 이루어진 것을 전제한다. 언제 회복된 적이 있었단 말인가?</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진실을 말하면, 현재 미국과 전세계는 세계대공황을 전혀 벗어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야 세계대공황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국면에 들어서 있다. 세계대공황은 막대한 공적자금투입이라는 아편주사로 잠시 주춤했을 뿐이며 아편주사의 효과가 다함에 따라 본격적으로 그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세계자본주체제의 모순이 본격적으로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어느 나라보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1)은 가장 먼저 세계대공황의 본격적 전개의 직격탄을 맞게 될 것이다. 이명박은 ‘2008년 세계경제위기를 한국이 가장 빨리 극복했다’고 자랑해왔는데, 그것은 어느 나라보다도 대외의존도가 높아, 세계대공황이 전세계적인 대규모 공적자금투입으로 ‘일시적’으로 주춤하자, 한국에서 그 현상이 가장 빨리 나타난 것에 불과했다. 똑같은 이유로 세계대공황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한국은 가장 빨리 그 직격탄을 맞게 될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수년전에 세계대공황의 정세가 시작되었고, 그것의 본격적인 전개가 예상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한국 노동운동의 대응태세는 남유럽을 비롯한 전세계의 노동운동과 비교하여 매우 취약한 상태에 놓여있다. 그 이유는 노동운동이 청산주의적, 개량주의적 경향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여 이념적인 무장해제상태를 여전히 힘있게 극복하지 못한채, 최근년 ‘민주대연합’ 노선이 강화되면서 기회주의가 오히려 강화되고, 민주노조운동이 관료주의로 인해 무력화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노동운동내에 조합주의가 여전히 관성적으로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객관적 정세는 반자본주의정치투쟁의 본격화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지만, 사실상 반자본주의정치투쟁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나 현재 운동내에 취약한 측면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취약한 측면과는 대조적으로 ‘대학 등록금’투쟁에서처럼, 현실에 대한 분노와 투쟁이 분출하고 있으며, 민주노총이 투쟁을 책임지지 못하는 사이 ‘희망버스’처럼, 기존 운동과 다른 내용과 형식의 운동이 출현하고 있다. 이 모두는 자본주의적 억압에 대한 분노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에 대한 저항과 투쟁이 본격화해가는 것을 상징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우리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세계대공황이, 주체적 대응에 따라, 더욱 심각한 운동의 침체와 반동의 계기가 되기도 하고,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운동의 고양과 새로운 세상 건설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당연히 우리가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세계대공황을 새로운 혁명운동의 고양과 새로운 세상의 건설의 계기로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이며, 지금은 이를 위해 우리가 발빠르게 움직여야 할 시기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 글에서는 먼저, 현재의 국면이 2008년에 시작된 세계대공황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국면임을 자료들을 통해 분명히 드러낼 것이다. 이후, 이글은 곧바로 사회주의노동운동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최대한 압축적으로 밝힐 것이다. 속도감있게 토론하고 실천할 것을 제안하며 이 글을 제출한다.<span id="more-1110"></span></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h2>1. 세계대공황의 본격적인 전개</h2>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최근 미 상무부의 발표에 의하면 2분기 성장률은 1.3%로 당초 전망치 1.8%에도 미치지 못했다. 1분기 성장률은 1.9%로 발표되었지만 실제로는 0.4%였던 것으로 하향수정되었다. 7월 ISM제조업지수는 50.9로 2년래 최저수준을 보였고, 실업률은 6월 9.2%였는데, 7월에도 9.2% 일 것으로 블룸버그통신은 예상했다. 톰슨 로이터 미시간대 소비자신뢰지수는 6월 71.5에서 7월 63.7로 하락했다. 미 상무부의 발표에 의하면 6월 소비지출이 지난 달보다 0.2% 줄어 지난 2009년 9월 이후 21개월만에 첫 감소세를 기록했다. 지난 6월 기준 미국의 개인소득은 0.1% 늘어나 지난해 11월 이후 증가율이 가장 낮았다. 이러한 경제지표들이 미국의 더블딥 ‘우려’를 야기하여 전세계적으로 주가 급락을 가져오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런데 더블딥은 이미 오래전에 ‘우려’가 아니라 현실이 되어 있었다. 이번 세계대공황의 직접적 계기가 된 미국 주택시장의 경우, 더블딥은 이미 기정사실로 되어 있었다. “주택시장은 이미 더블딥에 빠졌다는 게 중론이다. 캐피털이코노믹스에 따르면 미국 주택가격은 2006년 정점에 비해 33% 추락했다. 이는 1920년대 대공황때의 낙폭을 능가하는 것이다. 미국의 주요 대도시 주택가격을 반영하는 스탠더드앤드푸어스(S&amp;P)/케이스셀러 지수도 지난 1분기 한 해 전에 비해 4.2%하락했다. 지수를 내는 S&amp;P지수위원회의 데이비드 블리처 의장은 미 주택시장이 더블딥에 빠졌다고 공식확인했다.”(아주경제, 2011.6.6) 6월 신축주택 판매는 전월 대비 1% 감소했으며, 지난 5월 주택가격지수는 전년 동기 대비 4.5% 감소했다. ISM제조업지수는 이미 5월에 53.5로 19개월래 최저수준으로 급락했다. 실업률은 2010년 11월 9.8%에서 3월에 8.8%로 낮아졌다가 4월 9.0%, 5월 9.1%로 다시 상승하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현재 벌어지고 있는 더블딥은 세계대공황이 본격화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2008년의 사태는 세계대공황의 서막에 불과하였으며, 이제 그 본막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2008년 사태 이후 전세계 자본가정권들이 쏟아 부은 막대한 공적자금투입은 세계대공황의 전면화를 일시적으로 지체시키고 ‘경기침체 종료’2)라는 착시를 만들어내었지만 실상은 이것과는 전혀 달랐다. 막대한 공적자금투입이라는 아편주사의 약효가 끝나 세계대공황의 본 모습이 드러나고 세계자본주의체제의 모순이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앞으로 세계대공황의 전면화가 예상되는 것은 <strong>누적된 ‘거품’이 실로 엄청난 규모이며, 자본가정권들이 공황대처로 이미 대부분의 재정금융 수단을 사용하여 뚜렷한 대처 수단이 남아있지 않고, 이미 사용한 수단이 새로운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블딥, 유럽의 재정위기, 중국의 거품붕괴가 동시에 전 세계를 덮치고 있기 때문이다.</strong> 자본주의의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대위기가 자본주의를 기다리고 있으며 그 해결점은 자본주의의 타도, 사회주의혁명밖에 없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h3>1) 유례없는 규모의 거품 형성, 과잉생산, 과잉자본</h3>
<p> </p>
<h4>① 유례없는 규모의 거품형성, 과잉생산, 과잉자본</h4>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번의 세계대공황은 엄청난 규모의 거품이 붕괴하면서 시작되었다. &#8216;그린스펀(전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장) 거품&#8217;으로 불리듯이 이번의 거품은, 2001년 IT공황(2001년에도 미국은 공황상태에 빠졌었다.)이 확대되어 미국경제가 경착륙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린스펀이 취한 정책에 의해 조장되었다. 당시 그린스펀은 IT부분에서의 과잉투자에 의해 초래된 공황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연속적으로 금리인하조치3)를 취해 인위적으로 주가하락과 소비수준의 격감을 막으려고 하였고 여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부동산경기, 특히 주택경기를 부추긴 것이었다.4)</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미국경제의 경착륙을 막았지만 당시 &#8216;터졌어야 할&#8217; 거품을 오히려 유례없이 증폭시키는 결과(서브 프라임 모기지, 파생금융상품 등)를 야기하였다. 이것이 또한 전례없는 과잉생산, 과잉자본양상을 가져왔고, 이렇게 엄청나게 커진 거품은 시한폭탄과 같이 터질 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조건에서 2007년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는 &#8216;광란의 거품&#8217;이 붕괴되기 시작하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한번 시작된 거품의 붕괴는 정부의 개입(베어스턴스사 인수 자금지원, 패니메이와 프레디맥 정부 인수)에도 불구하고 제어되지 않은 채 2008년 미국의 4위 투자은행인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보호신청과 3위 투자은행인 메릴린치의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 의한 인수로 이어졌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2008년 세계공황은 자본가들과 그 정부들이 생각하듯이 통제되지 않는 금융시스템에 의해 초래된 단순한 금융위기가 아니며, 본질에서 전세계적인 과잉생산공황5)이다. 전세계 자동차산업전반의 과잉생산과 GM의 몰락은 이를 상징적으로 입증해준다. 금융위기는 전반적 과잉생산공황의 부분적인 한 측면일 뿐이다. 그리고 과잉생산공황은 다시 자본주의적 생산, 자본주의적 축적이 안고 있는 모순이 발현된 것일 뿐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번 거품의 유례없는 규모는 몇가지의 예를 통해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주택가격은 2000년부터 2006년까지 거의 100%에 가깝게 상승했다. 이에 비해 같은 기간에 주택을 구입한 노동자의 소득증가율은 2%에 불과했다. GDP 대비 금융자산가치는 대략 2001년 850%에서 2007년 1,000%를 뛰어넘었다. 이는 같은 기간에 민간부채가 급증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GDP 대비 가계 부채비율은 2001년 76%에서 2007년 100%로 증가하였다. 즉, 미국은 IT공황의 확대를 막기 위해 이자율인하로 인위적으로 소비, 주가수준을 유지하려 하였고, 여기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 주택거품 조성이었다. 이것은 소득 증가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가계부채 증대를 조장하는 방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점은 미국의 가처분소득 대비 저축비율이 1988년 7.2%였던 것이 2000년 2.3%로 하락하고, 공황 이전인 2005년에 -0.4%에까지 이른 것에 의해서도 확인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리고 곧바로 6)에서 다룰 것이지만, 대규모 경상수지적자를 누적해가던 미국이 과잉소비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 기축통화국의 지위를 갖고 있으면서, 중국, 일본, 한국 등이 무역수지 흑자의 대부분을 미국의 채권, 주식 등의 매입에 사용하여 미국으로 달러를 환류시켰고, 이것이 소비를 지탱하는 대출 자금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h4>② 유례없는 규모의 거품이 형성된 이유, 이번 공황의 특징</h4>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면 이번처럼 사상 유례가 없는 규모의 거품이 형성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점은 현재의 세계대공황이 얼마나 큰 세계자본주의의 위기를 함축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데에서 중요하기 때문에 밝혀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점을 밝히는 과정에서 이번 공황의 특징도 보다 분명히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런데 이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먼저 명확히 해야 할 점은 다양한 모습으로 공황이 발생하지만, 자본주의에서 공황은,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기본모순 자체 때문에 발생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strong>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전유의 사적 자본주의적 형태</strong>라는 기본 모순을 안고 있다.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생산은 갈수록 사회화한다. 그러나 생산이 점점더 사회화하는 것과 달리, 생산과정에서 창출된 잉여가치는 자본가의 몫이 된다. 즉, 잉여가치는 사회의 것이 되지 않고 자본가의 것으로 남는다. 그리하여 생산의 사회화가 점점더 고도화하는 것과 달리 전유는 사적, 자본주의적 형태로 남아 이들 사이에 모순이 생기고, 이 모순은 갈수록 커지며 이것이 끊임없이 공황을 야기한다.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은 구체적으로 생산과 소비 사이의 모순과 생산의 무정부성을 야기하고 이것이 결국 공황을 발생시킨다(.보다 자세한 내용은 미주 6) 참조)6)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번 공황도 그 발생의 근본 이유는 자본주의의 기본 모순에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공황과 전혀 차이가 없다. 그러면 이러한 기본모순이 어떻게 심화되고, 어떤 특수한 요인이 작용하여 이번의 거품이 자본주의의 역사상 최대위기를 야기할 정도로 커지게 된 것인가?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와 관련해서 가장 먼저 지적하여야 할 것은 70년대 이후 자본주의가 구조적 장기불황 상태에 빠져서 아직까지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두 번째로 지적해야 할 것은 구조적 장기불황에서 헤어나기 위해 자본가들이 신자유주의를 강행하였는데, 이에 의해서도 구조적 장기불황이 극복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자본주의의 위기를 더욱더 증폭시켰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측면에서 검토해야 하지만, 이는 다른 기회에 다루는 것으로 하고 여기서는 신자유주의가 생산과 소비 사이의 모순을 얼마나 증폭시켰고, 결국 얼마나 커다란 거품을 만들어내었는가에 집중하도록 하겠다. 신자유주의는 30여년의 기간 동안 빈부격차를 대폭 확대시키고 노동자소득의 정체를 가져와 자본주의사회에 존재하는 생산과 소비 사이의 모순을 더욱더 확대시켰다. 다음의 표-1은 지난 30여년 기간 동안의 가계소득의 분포를 보여주고 있는데 최하위 40%층의 소득분포는 1973년 17.4%에서 이번 공황전인 2006년 13.5%로 감소한 반면 최상위 5%의 소득분포는 15.%에서 21.5%로 크게 증가하였다.</span></p>
<p style="text-align: center;">표-1 가계소득의 분포7)</p>
<p style="text-align: center;"><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1/08/table11.jpg"><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1116" title="table1" src="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1/08/table11.jpg" alt="" width="516" height="155" /></a><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1/08/table1.jpg"></a></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6월 27일자 파이낸셜타임스에 의하면 “1975년이래 미국 중산층의 소득은 물가를 감안할 때 정체했지만, 국내총생산(GDP)은 급격히 성장했다. 1인당 GDP에서 중산층의 소득이 고정되어 있다면 늘어난 다른 부분은 다른 어디론가 가야한다. 미국에서는 정확하게 상위 부유층으로 그 부분이 집중되었다. 1974년에 미국 상위 1%의 부자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에 불과했으나, 2008년에 그 비중은 18%까지 2.5배로 늘어났다. 물론 상위 1%내의 상위 1%가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크게 늘어났다.”8)</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신자유주의는 이렇게 증폭된 생산과 소비 사이의 모순, 격차를 채무경제9)로 메웠다. 즉, 생산과 소비 사이의 격차 확대를 빚잔치를 벌이게 하는 것으로 메웠는데 이는 거품을 누적적으로 키웠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세 번째로 지적해야 할 것은 2001년 IT 거품의 붕괴를 더 큰 거품 키우기로 막으려 한 자본의 공황대처가 최악의, 최대의 거품을 만들어 내어 스스로를 속수무책의 궁지에 내몰았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그린스펀은 IT공황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자율을 계속 인하하고, 주택거품을 조장하였는데, 이것이 최악의, 최대의 거품을 만들어 내어 자본을 속수무책의 궁지로 몰아넣었다(IT거품의 잔여거품+서브프라임, 파생금융상품 거품).</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다음으로 넘어가지 전에 추가로 하나를 더 언급하면, IT공황때에 중국, 인도가 예외였던 것과 달리 이들도 같이 휩쓸려 들어가 이번 공황이 명실상부하게 전 세계적인 대공황이라는 점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h3>2) 속수무책의 자본가, 자본가정권들</h3>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2008년 사태가 급속하게 악화되자 제국주의나라의 정부대표들은 회동하여 세계자본주의의 위기에 공동대처하기로 합의하고 각각의 나라에서 천문학적인 규모의 구제금융을 쏟아부었다. 미국은 GDP의 79.6%에 해당하는 7870억 달러를 구제금융에 투입하였고, 영국 70.9%, 스웨덴 53.9% 등 여타 나라들도 막대한 자금을 구제금융에 투입하였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나 이 구제금융은 거의 전부가 ‘거품’ 조성의 주범이자 ‘거품’의 최대 수혜자인 독점금융자본을 살려내는 데 사용되었을 뿐10)이었고, 저소득 주택자금대출자들은 주택압류의 처지로 내몰렸다.11) ‘즉, “이익이 날 때는 금융계가 이익을 모두 가져가고, 손실이 날 때는 국민의 혈세로 메운다.”는 귬융과두제의 원칙이 그대로 관철된 것이다.’12)</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철저히 독점금융자본살리기에 돌려진 막대한 구제금융은 그러나 세계대공황을 종식시키는 데에서 완전히 실패하였다. 그것은 세계대공황의 전면화를 일시적으로 뒤로 미루는 아편주사에 불과했다. 두차례에 걸쳐 진행된 이른바 양적완화(달러찍어 뿌리기) 역시 세계대공황을 종식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이유는 대규모 구제금융과 양적 완화조치에도 불구하고 1)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번 거품의 규모가 사상유례가 없이 크고, 거품의 붕괴가 아직 본격화되지 않아, 막대한 과잉자본이 여전히 파괴되지 않은 채 남아 있기 때문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본가, 자본가 정권이 속수무책의 궁지에 몰린 것은, 이제는 무력한 수단조차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 2008년 이후 사용된 재정수단은 유럽에서는 재정위기를 새롭게 야기하고 있고, 미국은 채무한도 협상합의로 앞으로 오히려 재정지출을 삭감해야 할 처지에 놓여있다. 미국의 3차 양적완화는 무역, 환율 전쟁에서 중국, 유럽 등을 자극하고, 인플레이션을 야기할 위험 때문에 제약을 받고 있다. 한마디로 곳곳에 세계대공황이 본격화될 요인들만이 가득차 있는 형국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h3>3) 미국의 더블딥</h3>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미국이 더블딥에 빠졌는가 아닌가는 더 이상 논쟁거리가 아니다. 논쟁은 현재의 세계대공황이 어느 정도로 전면화될 것인가, 이에 따라 세계질서가 어떻게 변화되어 갈 것인가, 또, 어떻게 변혁해갈 것인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자본가들은 아마 이런 논쟁 자체에 두려움을 느끼고, 다시 곧 좋아질 것이라는 자신의 희망을 현실에 투사하여, 이 희망에 맞는 예측만을 앞으로 내놓을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경제지표는 그것을 과학적으로 읽어내는 자에게는 매우 유용한 자료가 된다. 그러나 경제지표는 현실을 반영하는 부분적인 지표일 뿐이다. 때문에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에서 보다 유용한 것은 현실의 모순과 그 운동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미국은 노동자들의 소득이 수십년간 정체상태에 있었음에도 2008년까지 전체적으로 높은 수준의 소비를 유지하였다. 빈부격차가 갈수록 커지는데13), 그리고 대부분의 소비를 담당하는 층이 소득이 몰린 상위계층이 아니라 하위계층인 마당에 미국이 높은 수준의 소비를 유지해 올 수 있었던 수단은 대다수 민중을 부채에 의존하게 하는 방법(빚쟁이 만들기)밖에 없었다. 주택거품은 이때 매우 좋은 수단이었다. 모기지로 주택을 구입하고, 주택가격이 계속 상승하면 부(wealth)의 효과로 소비는 늘고, 주식가격은 올라간다. 그러나 이것은 거품이 계속 커져갈 때에만 그러하다. 사실상 이때조차 주택대출을 받은 사람은 빚더미 위에 이미 올라서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아직 문제가 터지지 않아 그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거품이 터지게 마련이고 미국에서 2007년 실제로 주택거품이 터지기 시작하였다. 곧바로 채무불이행자가 속출했다. 더 이상의 채무경제의 지속은 불가능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의 소비수준은 유지될 수 없게 되고, 이제 소비는 실제의 소득수준에 맞추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면 미국의 실제 소득수준은 어느 수준의 소비를 가능하게 하는가?</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미국에서는 연일 소비, 고용관련 경제지표에 신경이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자명한 사실은, 채무경제가 붕괴된 마당에 소비는 자신의 소득수준에 맞추어 질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미국은 이미 빈부격차가 엄청난 상황이라 국민대다수는 쉽사리 과거의 소비수준으로 되돌아 갈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strong>‘채무경제의 붕괴⇒저소득층의 자기 소득에 기초한 소비’에 ‘빈부격차의 확대⇒저소득층의 소득감소 내지 정체’가 더하여 과거 소비수준으로의 회귀는 불가능해졌다.</strong> 여기서 소비관련 지표가 좋아질 구석을 발견하려는 자는 머저리일 것이다. 고용 역시 비슷하다. 공식적인 실업률 조차 9%수준에서 요지부동이다. 오히려 대규모 감원이 자행되고 있다. “지난 7월 한달 동안 미국기업이 발표한 감원 숫자는 6만 6천 4백여 명으로 집계됐습니다. 감원이 한 달 전인 6월 보다 60%나 급증했습니다. ……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감원을 주도하고 있는 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달 시스코와 머크, 보더스, 록히드 마틴, 그리고 보스턴 사이언티픽 등 대기업 5개사가 대규모 감원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이들 기업에서만 3만 8천여명이 일자리를 잃게 돼 전체 감원 규모의 57%나 차지했습니다. 의약과 소매, 방위산업 등을 대표하는 이들 대기업들은 그동안 비교적 고용이 안정된 곳이어서 연쇄 감원의 충격이 확산되고 있습니다.”(YTN, 2011.8.4)</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미국은 기축통화국이라는 이점만 갖고 있지 않다면 이미 수 차례 IMF구제금융을 받았어야 할 나라다. 막대한 규모의 경상수지 적자를 누적시키고 있으며14), 몇 년 사이에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30% 이상 상승하는(2000년 57.6%, 2011년 96.8%) 나라면서 파산하지 않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 기축통화국이라는 미국의 특성이 이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15) 그러나 미국 역시 다른 형태로 문제를 겪고 있는데, 그것은 미국이 채무한도 협상 합의로 재정운영에서 커다란 제약에 처했다는 점이다. 이것 역시 미국이 세계대공황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한 요인이다. 이른바 양적 완화도 무역전쟁, 환율전쟁을 격화시킬 가능성 때문에 더 이상 쉽사리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h3>4) 악화일로의 유럽 재정위기</h3>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아래의 글이 유럽재정위기의 현상을 비교적 잘 압축 요약하고 있어 인용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발발 1년이 지난 남유럽 재정위기는 진정되기보다 위기의 심각성이 커지고 있다. 그리스는 6월 30일 재정긴축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킴으로써 당장의 국가부도는 면하게 되었지만 추가 금융지원이 없으면 3/4분기부터 또 채무불이행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그리스의 국가채무는 규모에 비쳐 볼 때 부채조정을 하지 않고는 해결이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의 부채조정은 아일랜드, 포르투갈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이들 국가의 국채를 보유한 은행들의 위기, 세계금융시장의 위기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EU는 주요 은행과 금융기관들의 자본확충과 부실채권의 ECB로의 이전을 통해 보유채권의 가치하락을 견뎌낼 수 있을 때, 그리스의 부채조정을 허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채무 문제가 완화된다 하더라도 근본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현 위기의 근본 원인은 유로존이 ‘최적 통화지역’이 아니라는 데 있기 때문이다. 남유럽 국가들이 채무조정과 급한 수혈을 여러 차례 받는다 하더라도 환율조절을 통한 자국의 경쟁력 회복 수단을 상실한 상태에서 자력회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결국, 재정위기의 극복과정은 유로존의 구조적 결함을 치유하는 과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현재의 유럽 정치지도자들의 다수는 유럽단일주권을 추구하는 유럽연방주의에 우호적이기 때문에 연방제적 재정통합을 시도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유럽의 개별 국민국가들이 강한 민족적 연대감을 가진 정치공동체인 상황에서 개별국가의 주권을 현저히 약화시키는 연방제적 재정통합은 이들 국가들의 국민정서와 충돌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재정통합을 현실적 대안으로 여기지 않는 정당들의 반발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은 유로체제는 해체 혹은 분할로 갈 것이라는 견해들도 많다. 이와 같이 유럽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상당히 길고도 고통스러운 정치경제적 갈등과정을 거쳐야 할 것 같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이 과정에서 유럽에서 나타날 수 있는 중대한 결정이나 구조변화가 세계경제에 예기치 않은 파장을 몰고 올 수도 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신흥국의 경우에는 대외충격에 취약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 3,000억 달러가 넘는 외환준비자산을 보유하고 있지만, 지난해부터 도입하기 시작한 자본유출입 완화 및 거시건전성 확보를 위한 규제의 강화 기조를 유지함으로써, 유사시 자본이동의 변동성이 확대될 수 있는 여지를 사전에 제한할 필요가 있다.”(「근본대책 마땅찮은 남유럽위기」LG경제연구원, 유승경, 배민근, 2011.7.6)</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유럽의 현 재정위기는 세계대공황에 대한 자본의 초기 대처가 만들어 낸 것이다. 즉, 공항에 대한 대처가 새롭게 공황을 격화시킨 형국이다. 나라마다 특수한 사정이 있지만 대체로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국가채무는 파산상태의 금융기관을 살리기 위해 지출한 공적자금 때문에 증가했다. 이처럼 유럽 전반에서 국가채무가 증가하는 과정에서 유럽에서 약한 고리를 형성하는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에서 먼저 재정위기가 발생하고, 이것이 스페인, 이탈리아의 재정위기로 확산되었다. 이들 나라에서 재정위기가 더욱 악화된 것은 채무불이행을 우려한 국제금융자본이 국채매입을 거부하거나 국채 이자율의 인상을 요구하고, 신용평가사들이 신용등급을 하락시켰기 때문이다.16)</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유럽의 재정위기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것은, 이상의 이유로 재정위기가 완화되지 않고 심화되고 있은 것에 더하여, 독일, 프랑스 등 EU의 핵심 국가들이 제국주의적인 자국 이해 때문에 서로 부담을 안지 않으려고 갈등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EU내에서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지만, 동시에 주변국의 위기해결을 위해 필요한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도 서로 투쟁하고 있다. 이러는 사이 유럽의 재정위기는 점점 더 확대되어 세계대공황을 더욱더 증폭시키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리스는 위의 글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조만간 다시 채무불이행 사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는 EU가입으로 인한 탈산업화 때문에 자력으로 회생할 가능성이 없다. 사실상 채무 이행능력을 상실한 상태이며, 그리스의 디폴트가 미칠 파장(그리스의 디폴트는 미국 등을 포함한 관련 금융기관과 정부에 일련의 타격을 가할 것이다.) 때문에 파산시기가 늦추어지고 있을 뿐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미국의 더블딥, 유럽의 재정위기 증폭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세계대공황의 규모와 강도를 증폭시키고 있는 중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h3>5) 중국의 위기-세계자본주의체제에 결정타를 먹일 최대의 복병</h3>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2001년 IT공황은 급속히 고도화된 세계화를 반영하여, 공황의 세계적 차원에서의 동시 진행이라는 특성을 보였다. 그러나 이때에 중국과 인도는 예외였으며 이것이 당시 공황의 강도를 완화시켰었다. 그리고 이번 공황의 초기국면에서 중국은 세계대공황의 충격을 부분적으로 흡수 완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 사정은 달라졌고 세계대공황이 본격화하는 현재의 국면에서, 중국은 세계자본주의체제에 결정타를 먹일 가능성이 높은 나라로 등장하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현재 중국은 미국과 EU에 못지 않은 거품을 형성하고 있다. 중국은 부동산, 특히 주택시장에 대규모 거품이 형성되어 있어 거품이 붕괴될 때 급전직하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은 이를 우려하여 조심스럽게 긴축정책을 실시하고 있지만 중국이 연착륙할 가능성은 희박하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중국은 현재 이미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미국, EU 등을 살려낼 물밖의 구원자로서 역할 할 것을 기대 받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착각 중에서도 착각이다. 중국은 구원자가 아니라 정반대로 세계자본주의체제에 결정타를 먹일 최대의 복병으로 등장할 것이다. 현재 전세계 자본가들과 자본가 정권들은 미국과 유럽의 위기만으로도 넋을 잃고 있어 다가오는 중국의 위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늠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고 있는 미국의 더블딥, 유럽의 재정위기 증폭에 태평양 서안의 중국의 위기가 더해질 때 세계자본주의체제는 대파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h3>6) 미제국주의중심의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붕괴와 제국주의세력간 무한경쟁</h3>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h4>① 현재의 세계대공황은 기축통화국이자 세계 제1의 제국주의나라인 미국에서 발발하여 미국이 끊임없이 위기를 증폭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더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다.</h4>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만약 미국이 현재의 위상을 갖고 있지 않다면 미국은 이미 파산하고, 세계대공황은 대규모 자본파괴를 야기하면서 세계자본주의체제는 새롭게 재생산구조를 확보해 갔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여전히 특별한 위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세계대공황은 더욱더 복잡하고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다. 미국은 막대한 규모의 쌍둥이 적자국임에도 기축통화국이라는 위상 때문에 파산을 모면하고 있고, 이번 세계대공황의 진원지이면서도 역설적으로 미국의 국채는 여전히 가장 안전한 채권의 지위를 갖고 있다. 또한 이로 인해 국채이자율도 낮으며, 미달러는 그 가치가 갈수록 불안해지고 있음에도 유동성확보 수단에서 여전히 우선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런 역설이 가능한 것은, 대부분의 대미 무역흑자국들이 미국자산매입을 통해 달러를 미국으로 환류시키고 있으며, 달러가치의 불안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다른 화폐표시 자산으로의 전환에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과 중국은 매우 특이한 국제공조체제를 형성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서로 간에 제1의 잠재적 적국이면서도, 중국은 미국시장의 붕괴를 두려워하고, 미국은 중국의 자본철수를 두려워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은 달러가치의 하락에도 불구하고, 보유하고 있는 미국국채(2010년 현재 1조 1601억 달러)를,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다른 화폐표시 자산으로 전환하고 있지 않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h4>② 세계경제질서의 급격한 변화를 회피하면서도 제국주의나라간 살아남기 경쟁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2008년과 같은 국제공조는 이미 불가능해졌다.</h4>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당장의 세계경제질서의</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급격한 변화는 세계대공황의 상황에서 전세계 자본가들에게는 묵시론적 대재앙을 의미하기 때문에 전세계 제국주의나라들은 이를 회피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과는 달리 제국주의나라간 살아남기 경쟁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제 2008년 리먼 브라더스 파산 직후 세계자본주의체제의 붕괴를 막기 위해 제국주의나라들이 취한 국제공조는 불가능해졌고, 공황대처를 위해 쓸 수 있는 수단마저 남아있지 않아, 제국주의나라들의 각자살아남기 경쟁은 더욱더 치열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다시 공황을 더욱더 심화시키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h5>㉠ 무역전쟁, 환율전쟁</h5>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살아남기 경쟁에서 제국주의나라들이 가장 집중하고 있는 것이 수출을 늘리는 것이다. 자국시장이 침체상태에 빠지자 제국주의나라들은 수출을 늘려 이를 보충하려 했고, 이는 불가피하게 무역전쟁을 격화시켰다. 파렴치하게도 무역전쟁의 포문을 연 것은 어떤 다른 나라가 아니라 이번 세계대공황의 진원지인 미국이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미국은 5년내 수출을 2배로 늘린다는 목표하에 2010년 3월 수출위원회를 부활하고, 대통령 직속 수출각료회의를 출범시켰으며.17) 수출증가를 목표로 의도적으로 달러가치하락 공세(1, 2차 양적완화)를 취했다. 동시에 중국 위안화의 평가절상 등 타국 통화에 대한 절상 압력을 가하였다. 2010년에는 압력수단으로 중국산 동 파이프에 대해 반덤핑관세를 부과하기도 하였다.18) 이러한 미국의 공세에 당연히 다른 제국주의나라들은 격렬하게 반발하였다. 미국의 양적완화에 대해서는 UN, IMF조차 나서서 강하게 비판했다. 미국의 집중 타겟이 된 중국은 위안화 절상압력에, ‘미국의 경상수지적자가 미국이 안고 있는 문제점-낮은 저축과 투자-때문이라고’ 비판하는 것으로 맞섰고, 미국의 반덤핑관세에 대해서는 미국산 닭고기에 대한 반덤핑관세 부가로 대응하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h5>㉡ EU회원국간 신경전</h5>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앞에서 언급하였듯이 EU의 핵심국가인 독일, 프랑스는 자국부담을 줄이기 위해 서로 신경전을 벌이며 재정위기국가에 대한 지원에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이는 국제공조가 이미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h4>③ 세계대공황을 경과하면서 미제국주의중심의 세계자본주의 체제는 붕괴하거나 혹은 대폭 약화될 것이다.</h4>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미 미제국주의는 쇠퇴해가고 있었는데, 이번 세계대공황은 그 쇠퇴의 속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국이 디폴트 직전까지 갔다는 사실자체가 미국이 역사적으로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은 세계 제1의 제국주의나라라는 위치를 배경으로 수십년간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이미 과거와 비교하여 미국의 몰락이 뚜렷해지고 있음에도 미국은 관성에 의해 기축통화국의 역할을 여전히 계속하고 있고, 당분간 앞으로도 그 역할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세계대공황을 경과하면서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질서는 중대한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번 세계대공황의 초기국면에서조차 기축통화로서의 달러의 위상은 커다란 손상을 입었다. 당장의 대안이 없는 조건에서 달러가 기축통화로서의 역할을 하고, 유동성확보 수단에서 여전히 달러가 우선 순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달러 가치의 불안전성이 커지면서 기축통화로서의 달러의 위상은 크게 흔들리고 있다. 물론 투기적 요소가 깊이 개입하고 있지만, 달러의 가치하락속에서 금값이 상승세를 지속하고 있는 것은 보유자산으로서(퇴장화폐, 국제결제수단으로로서)의 달러의 역할이 축소되고 있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낸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미국이 쇠퇴하고 있는 동안 자본주의의 불균등발전에 따라 중국과 EU의 비중은, 특히 중국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커졌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제국주의간 세력관계의 변화는 새로운 갈등-전쟁까지 포함하는 갈등-을 유발하고, 갈등 속에서 새로운 역할배분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미국이 중심국으로서의 역할을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필요하면 전쟁이라는 수단도 동원하겠지만 세계대공황속에서 미국의 역할이 축소되게 될 것은 분명하다. 올해 세계은행이 발표한 「다극체제: 새로운 글로벌 경제」라는 문건이 미래 국제 통화체제의 세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이 중에서 가장 가능성 높은 것으로 다통화체제를 제시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 문건은 이 시나리오 하에서 “미국 달러의 현재의 우위는 2025년 전 언젠가 끝나고, 달러, 유로, 인민폐 각각이 완전히 자격을 갖춘 국제통화로서 역할하는 통화체제로 대체될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h2>2. 무엇을 할 것인가?</h2>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지금 자본주의의 역사상 최대의 위기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세계대공황이 본막이 오르면서 인류 앞에는 1930년대 대공황을 능가하는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이 고난으로부터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한 빨리 탈출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h3>1) 노동자, 민중의 고통 심화와 자본에 맞선 노동자, 민중의 투쟁</h3>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2008년 세계대공황의 발발 이후, 전세계의 노동자, 민중은 곳곳에서 삶의 파탄으로 고통받아 왔다. 자본은 자신이 만들어낸 대공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든 위기를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하며, 노동자, 민중을 삶의 벼랑끝으로 몰아 넣었다. 가장 먼저 자본가들이 빼어든 수단은 대량해고였다. 과잉생산으로 파산에 직면한 GM19)과 같은 제조업에서부터 재정긴축으로 감축을 강요당한 공공부문(미국 연방, 주, 지방정부 공무원 해고,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등의 공무원 해고)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대량 해고와 감원이 줄을 이었다. 대량해고와 신규채용의 대폭 축소로 전세계에서 실업률은, 특히 청년층의 실업률은 급증했다. 미국에서는 공식적인 실업률조차 9～10%에 이르고, 유럽의 경우도 10%에 이른다. 재정위기에 몰린 남유럽의 그리스 경우에는 실업률이 2011년 16.2%까지 올랐다. 특히 18~24세 청년실업률은 무려 42%나 된다. 스페인은 44.3%이다. 유럽연합(EU) 발표에 따르면 EU 전체의 청년 실업률은 20.4%라고 한다. 높은 실업률로 노동자들의 임금은 정체하거나, 오히려 삭감되었다. 또한 지구의 한편에서는 디플레로 물가가 떨어지고 있는 것과 정반대로, 미국의 양적 완화조치로 달러가치가 하락하여 북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등 지구의 다른 한편에서는 높은 물가상승률로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세계대공황은 세계 곳곳에서 노동자, 민중의 삶을 파탄내고 있는 것과 동시에 세계 곳곳에서 노동자, 민중의 저항과 투쟁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세계대공황의 진원지인 미국에서는 위스콘신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예산삭감과 인원감축에 맞서 주의회 의사당을 점거하고 투쟁을 벌였으며, 재정긴축, 해고에, 남유럽의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의 노동자들은 대규모의 총파업으로 맞섰다. 노동자뿐만 아니라 청년과 일반민중도 거리에서 격렬하게 투쟁에 나서고 있다.20) 튀니지, 이집트에서는 독재와 높은 물가상승률, 실업률에 반대하여 민중이 봉기하였다. 2010년에 들어 중국의 노동자들은 전국적으로 연이어 파업투쟁에 돌입하고 있다. 이들 투쟁들은 다양한 요구와 쟁점을 내걸고 전개되고 있지만, 세계대공황이 만들어낸 삶의 파탄에 저항하여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약한 고리에서 터져나오고 있는 투쟁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세계대공황은 자본에 맞선 노동자, 민중의 국제적인 투쟁전선을 과거에 볼 수 없었던 규모와 범위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h3>2) 사회주의노동운동의 강화, 반자본주의정치투쟁전선의 형성</h3>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어느 나라보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가장 먼저 세계대공황의 본격적 전개의 직격탄을 맞게 될 것이다. 가장 일차적으로 수출부문이 집중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세계대공황이 ‘일시적’으로 주춤하자, 한국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빨리 ‘위기로부터 탈출한 것처럼 보였다.’ 이런 현상이 발생한 것은, 한국이 세계경제의 동향을 가장 빨리 반영하는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똑같은 이유로 세계대공황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한국은 가장 빨리 그 직격탄을 맞게 될 것이며 이번 세계대공황을 초기국면에서 잘 피해간 것처럼 보인 산업부문이 가장 격렬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파국적인 상황을 앞두고, 한국의 노동운동은 심각한 취약점과 희망적인 측면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당장은 전자의 측면이 우세하다. 우리가 경각심을 갖고 최대한 발빠르게 전열을 정비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한국의 노동운동은 세계대공황의 상황에서, 전세계적으로 노동운동이 반자본주의투쟁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오히려 우경화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노동운동이 청산주의적, 개량주의적 경향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여 이념적인 무장해제상태를 여전히 힘있게 극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최근년에는 탈계급적인 ‘민주대연합’ 노선이 강화되면서 기회주의가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10여년간 확립되었던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조차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집행부에 의해 폐기되고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세력과의 협조 연대노선인 ‘민주대연합’ 노선이 활개를 치고 있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들이 집권한 10년의 기간이야말로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공세가 기승을 부리고, 노동자, 민중의 삶을 파탄낸 것이 분명함에도, 기회주의자들은 마치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와의 연대가 노동자, 민중의 삶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노동자, 민중을 호도하고 있다. 이들 기회주의자들에게는 반자본주의투쟁으로 나서야 한다는 목표의식조차 없다. 이러한 기회주의와 민주노조운동의 관료주의적 변질이 결합하여 민주노조운동은 무력화되었다. 다른 한편, ‘민주대연합’노선에 반대하는 세력의 경우에도 조합주의적 관성이 여전히 반복되어 반자본주의정치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그 결과, 객관적 정세는 반자본주의정치투쟁의 본격화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지만, 사실상 반자본주의정치투쟁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만약 이러한 경향이 지속된다면 한국의 노동운동은 세계대공황의 본격적인 전개라는 쓰나미 앞에서 힘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휩쓸려 버리게 될 것이다. 지금보다도 더 타락한 계급협조노선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나 현재 운동내에 취약한 측면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취약한 측면과는 대조적으로 ‘대학 등록금’투쟁에서처럼, 현실에 대한 분노와 투쟁이 분출하고 있으며, 민주노총이 투쟁을 책임지지 못하는 사이 ‘희망버스’처럼, 기존 운동과 다른 내용과 형식의 운동이 출현하고 있다. ‘대학 등록금’투쟁은 억눌렸던 대중의 분노와 잠재적 열망이 터져 나온 것이다. 이 투쟁이 최근년에 보기 어려웠던 대중적 지지를 짧은 기간 동안에 확보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대학 등록금’ 투쟁의 잠재력은 이 투쟁이, 화약고와도 같은 비정규직 문제와 실업, 청년실업문제 등이 새롭게 투쟁의 전면으로 등장하게 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학등록금’투쟁은 한국 사회의 뇌관을 건드려 잠재된 대중의 분노와 잠재력을 연속적으로 폭발시킬 가능성이 높은 투쟁이다.21) 민주노총은 투쟁하지 못하는데, 대규모의 ‘희망버스’투쟁이 가능한 것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이는 투쟁 역량이 부재해서 투쟁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민주노총이 투쟁의 잠재력을 현실의 것으로 만드는 데 철저히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즉, 문제는 투쟁을 질곡 속에 빠뜨리는 내부적 요인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글의 본래의 목적이 세계대공황의 본격적 전개에 맞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밝히는 것이라 여기서는 이 문제를 더 이상 자세히 다루지 않도록 하겠다. 이 글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노동운동의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희망적 요소가 꿈틀대고 있고, 따라서 세계대공황의 본격적 전개에 대응하는 것이 비록 뒤늦은 것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전열을 정비할 시간은 남아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대학 등록금’ 투쟁, ‘희망버스’투쟁, 이 모두는 자본주의적 억압에 대한 분노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에 대한 저항과 투쟁이 본격화해가는 것을 상징한다.</span></p>
<h4>사회주의노동운동의 강화, 반자본주의정치투쟁전선의 형성</h4>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세계대공황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정세에서 우리는 에두르지 말고, ‘문제는 자본주의다’라는 것을 대중들에게 공공연히 말하고 실천해야 한다. 또한 대안은 사회주의밖에 없다는 것도 대중들에게 공공연히 말하고 실천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는 현재의 위기, 삶의 고통에서 헤어날 수 없다는 것은 다른 누구가 아니라 자본가들이 입증해주고 있다. 2008년 ‘세계경제위기’를 벗어났다고 호언장담한 것이 누구인가? 바로 자본가들이다. 아직도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조만간 위기를 극복하게 될 것이니, 과민반응을 보이지 말라고, 넋두리만 반복하고 있는 것이 누구인가?, 더 이상 쓸 수단도 없이, 이 와중에 혼자 살아남기 위해 공황을 더욱더 증폭시키는 행동만을 하고 있는 것이 누구인가? 바로 자본가들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현재 한국사회에는 수많은 자본주의적 모순이 누적되어 있다.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실천하는 것을, 이 모두를 지상으로 끌어내어 반자본주의정치투쟁전선을 형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자!</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우선 정체상태에 빠져있는 ‘대학등록금투쟁’을 다시 전면화하자! ‘야권연대’의 좁은 틀에 갇혀 ‘반값’ 등록금투쟁에서 맴돌고 있는 투쟁을 무상교육쟁취투쟁으로 확장하자!</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등록금 투쟁의 지평을 확장할 뿐만 아니라 이 투쟁을 실업문제 해결, 비정규직 철폐투쟁으로 확장하자!</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은행과 독점재벌의 국유화, 노동자통제를 쟁점화하자!</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공기업 사기업반대투쟁을 전개하자!</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SM 등 소상인 몰락의 문제를 쟁점화하고 투쟁을 만들어가자!</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h2>맺으며</h2>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세계대공황이 본격화하고 있다. 이번 대공황은 2008년에 시작되었지만 잠시 주춤하다가 그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1930대 공황이 1930～1938년간 전개되고 이후 세계질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것 이상으로 이번 공황은 장기간 계속되며 인류의 미래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인류의 앞에는 두 가지 길이 놓여있다. 오랜 기간 대공황이 계속되고, 연이어 장기침체와 반동이 뒤따라 인류가 미증유의 장기적인 고통에 허덕이느냐, 아니면 사회주의혁명을 통해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한 빨리 이로부터 탈출하느냐이다. 자본주의는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지만, 사적 소유에 기초한 생산관계가 지속되면서 자신이 만들어낸 생산력을 파괴하여야만 그 체제가 유지되는 모순을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그 모순은 인류의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을 정도로 심화되었다. 현재의 세계대공황은 인류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세계대공황의 직격탄을 맞게 될 한국에서 반자본주의정치투쟁전선의 형성은 가장 당면한 절박한 과제이다. 낡은 운동틀이 한계를 드러내고, 운동에 질곡이 되고 있는 사이, 이미 다른 한편에서는 대중들의 분노와 투쟁이 분출하고 있으며, 새로운 운동의 내용과 형식도 출현하고 있다. 새로운 것이 온전히 발전하기 위해서는, 낡은 틀은 파괴되어야 한다. ‘민주대연합’노선이라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배신은 분쇄되어야 한다. 반자본주의정치투쟁전선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조합주의와 철저히 단절해야 한다. 태양이 뜨기 위해서는 먹구름이 걷혀야 한다. 세계대공황의 본격적인 전개에 정면으로 대응하기 위해 시급히 반자본주의정치투쟁전선을 형성하자!</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어느 때보다도 속도감있게 토론하고 실천할 때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글을 마친다.</span></p>
<p> </p>
<h2>[각 주]</h2>
<p><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 2009년도 현재 한국의 수출 의존도는 43.3%로 수출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일본(11.4%), 중국(24.5%), 독일(33.8%)과 비교해도 월등히 높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2) 미국의 경기침체 진입과 종료 시점을 선언하는 전미경제조사국(NBER)은 미국의 경기침체가 2009년 6월 종료됐다고 2010년 9월 20일(현지시간) 발표했다. NBER는 2007년 12월 시작된 경기침체가 2009년 6월로 끝나 18개월간 침체가 지속됐다고 밝혔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3)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2001년 한해 동안 11차례에 걸쳐 연방기금금리를 6.5%에서 1.75%로 인하했다. 이어 2002년 12월에 1.25%로, 2003년 5월에 1%로 인하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4) 공황은 자본주의적 모순의 폭발이지만 동시에 새롭게 재생산의 조건을 확보하기 위한 자본주의적 방식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는 자본파괴를 통해 재생산의 조건을 다시 확보하려고 한다. 만약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거품은 빠지지 않고, 재생산의 조건은 제대로 다시 확보되지 않는다. 때문에 다음의 공황은 더욱더 증폭된 규모와 형태로 발생한다. 그린스펀은 공황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미봉책을 취했는데, 그것은 거품붕괴를 막기 위해 인위적으로 거품을 키우는 것이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5) 여기서 과잉생산은 사람들의 필요보다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자본가들이 이윤을 남기기에는 많이 생산되어 발생한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6) “사적 자본주의적 전유형태 아래에서는 가능한 한 많은 이윤을 획득하는 것이 생산의 제일 목적으로 된다(이윤의 극대화). 그리고 이윤획득을 위해서, 끊임없는 생산확대, 자본축적이 벌어져서, 생산을 위한 생산, 축적을 위한 축적(무제한적인 생산확대, 무제한적인 축적 충동)이 자본에게 지상명령으로 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런데 생산확대와 자본축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본은 노동자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잉여가치를 착취하지 않으면 안되고, 그 결과 노동자대중의 소비력은 좁은 한계내로 제한된다. 이러한, 협소한 소비력을 기반으로 하면서, 무제한의 생산확장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은 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모순(생산과 소비의 모순)이고 이것이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의 직접적인 현상이다. <strong>“언제나 모든 현실적 공황의 궁극적인 원인은 생산력을 발달시키려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충동〔마치 사회의 절대적 소비능력만이 생산력 발달의 한계를 설정하고 있는 것처럼 생산력을 발달시키려고 한다.〕에 대비한 대중의 궁핍과 제한된 소비에 있다.”</strong>(맑스, 「자본론」). 그러나 이것은, 과소소비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노동자의 소비부족이 공황이 원인이라든가, 따라서, 임금을 인상하면, 공황을 없앨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의 내적 모순이 생산과 소비의 모순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적 분업이 이루어지는 어떤 사회에서도, 사회의 총노동이 사회의 각종재화의 생산을 위해서, 각각의 재화에 대한 사회적 욕망에 적합한 비율로 배분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 없이는 사회는 유지될 수 없다. 그런데 총노동의 배분이 이루어지는 방식은 각각의 사회에서 다르다. 원시공동체에서는 이 배분은 경험이 풍부한 추장의 지휘아래에 이루어지고, 봉건 영주의 지배 하에서는 다양한 금지명령에 의해 이루어졌다. 사회주의적 계획경제에서는 노동배분이 가장 포괄적이고, 합리적인 형태로 이루어진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런데 이것과 달리 자연발생적인 상품생산 사회에서는 이 노동배분은 계획적으로 행해질 수 없다. 이 사회에서는 생산이 서로 독립적인 상품생산자의 사적 행위로서 맹목적으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이 사회에서는 각각의 재화에 대해서 어느 만큼의 사회적 요구가 있는지는, 생산물이 시장에 나와서, 가격변동을 통해서 사후적으로 인식될 뿐이다. 즉, 요구에 비해서 많이 생산된 경우, 가격은 하락하고, 반대로 요구에 비해서 적게 생산된 경우 가격은 올라 적절한 노동배분은 사후적으로만 인식될 뿐이다(생산의 무정부성). 상품생산사회에서의 생산의 무정부성은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에 이르러 증폭된다. 자본주의는 거대한 사회적 생산력을 만들어내고, 각각의 공장의 내부에서의 계획성, 조직성을 높인다. 그런데, 이와 대조적으로 자본주의는 사회의 내부에서의 생산의 무정부상태를 제거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정반대로 이것을 한층 더 격화시켰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생산과정이 사회화되고, 다수의 생산부문이 서로 분립하면서 또 서로 의존하고 있는 결과, 사회적 노동의 균형적 배분을 둘러싸고 복잡한 조건들이 성립한다. 그런데, 최대한의 이윤을 획득하려고 하는 자본들간의 치열한 생산확대경쟁은, 이 재생산의 조건을 파괴해버린다. 파괴가 어느 한도까지 진행한 때, 재생산의 조건은 강력하게 자기를 관철하려고 한다. 균형적 배분의 법칙이 자기를 관철한다. 이것이 공황이다.”(노동자정치학교 강의 자료집, 56, 57, 58쪽)</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7) 김수행, 「세계대공황」, 돌베개, 130쪽에서 재인용.</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8) 뉴스핌 2011.6.29일자 기사는 ‘정체하는 소득이라는 유령이 전세계를 휩쓸고 있다.&#8217;라는 6.27자 파이낸셜타임스(FT)의 기사를 인용하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 중산층, 지난 수십년간 소득 정체 혹은 감소</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영국 지게차 기사의 2010년 평균 임금 소득은 1만 9068파운드(원화 3300만 원 상당)인데, 물가 상승률을 감안하고 1978년과 비교하면 오히려 5% 감소한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미국 평균 남성의 소득은 1975년 이래 전혀 증가하지 않았으며, 일본의 평균 가계 세후 소득은 2000년대 중반까지 10년 동안 감소했다. 또 독일의 경우 최근 10년 동안 가계 소득이 감소세를 지속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런데 중간계층의 소득 압박은 일시적으로는 가계가 자신이 번 것보다 더 쓸 수 있도록 해주는 이른바 &#8216;신용 호황(credit boom)&#8217;을 가장하고 나타났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가장 최근 &#8216;저렴한 돈&#8217;이 흥청대던 시절로부터 금융 위기가 발생한 지 3년이 지나는 지금, 주요국 경제가 어떻게든 과거의 성장세를 회복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상황에서 전 세계 중산층이 또다시 소득이 쥐어짜이는 상황에 처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세율 인상과 재정지출 축소를 통해 공공재정 건전성을 회복하겠다는 정치인들에게 이런 상황은 경종을 울린다. 게다가 수명 연장과 인구 노령화에 따라 어떻게든 조정 과정을 거쳐야 하는 나라들은 더욱 그렇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렇다면 최근 30여년 동안 선진국 가계 소득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1975년이래 미국 중산층의 소득은 물가를 감안할 때 정체했지만, 국내총생산(GDP)은 급격히 성장했다. 1인당 GDP에서 중산층의 소득이 고정되어 있다면 늘어난 다른 부분은 다른 어디론가 가야한다. 미국에서는 정확하게 상위 부유층으로 그 부분이 집중되었다.</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 양극화, 혹은 부유층으로 소득의 집중</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1974년에 미국 상위 1%의 부자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에 불과했으나, 2008년에 그 비중은 18%까지 2.5배로 늘어났다. 물론 상위 1%내의 상위 1%가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크게 늘어났다.</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그런데 이 같은 미국식 양극화 현상은 이제 미국만의 얘기가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 198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말까지 관련 자료가 충분한 22개 선진국들 중에서 17곳에서 소득불평등이 크게 강화된 것을 확인했다.</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OECD는 최근 보고서에서 &#8220;소득불평등이 점차 공통적이면서 또 더 높은 비율의 현상으로 수렴되는 조짐이 있다&#8221;면서 &#8220;덴마크, 독일 그리고 스웨덴과 같이 전통적으로 불평등 정도가 낮은 나라들도 더이상 이런 추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8221;고 지적했다.</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 처럼 거의 모든 나라에서 공통된 특징이 된 소득불평등 강화는 고용시장의 추세에서 귀결되는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거의 대부분의 OECD 국가들은 임금 불평등 확대를 줄이고자 국가 지원금을 늘리고 저소득층의 급여세를 경감하였으나 임금소득 불평등은 강력한 세제 및 복지시스템 강화 의지와 노력을 훌쩍 넘어섰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런 소득불평등 추세에는 중간정도 숙련노동장에 대한 수요가 줄어든 것도 한 몫 했다. 선진국 경제 전반에서 고용시장은 사랑받는 직종과 혐오 직종으로 양분되어갔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런던정경대학 경제성과연구센터의 앨런 매닝 교수는 지난 1993년부터 2006년 사이 거의 모든 선진국에서 중간 수준의 임금을 받는 일자리는 줄어든 대신 고소득 및 저소득 일자리는 증가하는 특징을 보였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 같은 추세는 각국의 경제적 특징이나 정치문화와는 상관이 없었는데, 이는 그 고용시장 변화의 힘이 이런 조건을 극복할 정도로 더욱 컸다는 것을 보여준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 불평등 심화의 배경, 고용시장의 변화 추세</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불평등 심화와 노동시장의 수요 변화 추세를 유발한 배경에 대해 설명하는 이론들도 존재하지만, 몇 가지 새로운 추세도 등장하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소득 분배의 상층에서는 의사소통의 혁명으로 인해 잘 나가는 사람들이 지역시장에서 글로벌시장으로 판매와 수입의 원천을 확장했다. 또 금융부문 등 특정한 분야는 다른 사람들의 돈을 굴려 행운을 거머쥐는 기회를 찾았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 다음 대학 졸업자들은 컴퓨터와 인터넷이 좀 더 신축적인 기술숙력도를 보충해주는 역할을 했고 이에 따라 더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출판업자는 컨텐츠를 전 세게로 배포할 수 있게 되었으며 회계사나 건축가들은 자기 지역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고객들도 대응할 수 있는 세상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교수들도 소속 연구소나 대학의 강연보다 매일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더 많은 전 세계의 청충들을 만날 수 있다. 더 높은 숙련도를 지닌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한 세대 이상 대학졸업생 수의 증가 속도를 앞질렀고, 소득 증가를 이끈 요인이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소득 분위의 하층에서는 첨단기술의 적용이 되지 않고 있다. 청소나 노인 돌보는 일에 첨단기술을 사용할 곳은 거의 없다. 그러나 첨단기술은 단순 숙련노동자에 대한 수요를 급격하게 줄어들게 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공장 노동자에서 은행 사무원 그리고 지게차 기사까지 그 동안 단순 숙련노동자들은 선진국 경제성장의 근간이었으나 찬밥 신세가 된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동화된 유통창고에서 지게차 기사로 근무하는 것은 전혀 즐거운 일이 아니게 됐다. 이것이 바로 중간계층의 일자리와 임금 소득의 현실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하지만 조만간 중요한 대선 일정이 오게 되면 선거 당락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이들 중간층이다. 정치인들이라면 이런 대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FT는 지적했다.”(강조는 인용자)</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9) 김대중 정권 시절 IMF사태로 대다수 민중의 소득이 감소하였음에도 소비를 진작시키기 위해 신용카드발행을 남발한 것과 같은 성격임.</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0) “JP모건 체이스는 2010년도에 174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는데 이것은 2009년도에 비해 48%가 증가한 것입니다. 이것은 중앙은행으로부터 거의 0%로 자금을 얻어와서 주식․ 국채․ 회사채․ 금․ 석유․ 농산물 등에 투자한 결과입니다. 주가지수는 중앙은행의 값싸고 풍부한 자금 방출로 말미암아 2009년 3월 이래 거의 80%나 상승했습니다. 더욱이 월가에서는 5대은행-뱅크오브아메리카, JP모건 체이스, 시티그룹, 웰스파고, 골드먼삭스-이 자산 8조 6,000억 달러를 통제하고 있는데, 이 규모는 모든 금융기업 자산의 13.3%에 해당되며, 3대 상업은행은 미국 총예금의 33%와 주택대출총액의 50%이상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월가는 자유경쟁이 아니라 금융과두제가 지배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김수행, 「세계대공황」, 돌베개, 226쪽)</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1) 미국의 저소득층의 경우 사실상 모기지 업자들의 꼬임에 주택담보대출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평’하게 하려면 정부는 독점금융자본에 혜택을 주는 만큼 이들에게도 부채탕감이라는 혜택을 주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주의의 본성’에 맞지 않는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2) 같은 책, 173쪽.</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3) 문화일보 2011.7.12자 기사참조</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美 소득 격차 대공황 이후 최대, 사회불안 가중·경제성장 ‘발목’</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근로자 실질 평균임금 1969년 비해 적어 </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부유한 사람은 더 많이 벌고, 가난한 사람은 더 적게 버는 소득의 양극화 현상이 미국 사회에서 지속되면서 소득 불평등이 경제·사회 불안정을 증가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미국 공영라디오 NPR는 11일 “지난해 미국 최고경영자(CEO)의 임금은 23% 인상된 반면 근로자의 평균임금은 0.5%밖에 오르지 않았고, <strong>지난 30년간 CEO의 임금이 10배 오를 때 근로자 임금은 9%밖에 오르지 않았다</strong>”면서 “소득 불평등은 장기적으로 미국 사회의 불평등을 확산시키며 사회적 불안, 범죄를 가중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방송은 특히 <strong>“미국의 소득격차는 1928년 대공황 이래 최대 규모”라면서 “당시 극심한 임금격차에 따른 경제적 불평등은 주식시장 붕괴로 이어지면서 대공황의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강조, 현재 미국의 극단적 임금격차 상황은 사회적 불안정에서 나아가 경제시스템 전반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임을 시사했다.</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문제는 고소득층은 훨씬 많이 벌고, 저소득층은 더욱 적게 버는 가운데 중산층의 실질소득도 계속 하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strong>미국의 최상류층 1%는 총소득의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나 중간층의 실질소득은 뒷걸음질치고, 하류층의 소득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strong>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에 따르면 연간 5만달러를 버는 미국 중산층의 경우 지난 2년여에 걸쳐 실질소득은 20%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세라 블룸 라스킨 FRB 이사는 이미 지난 6월 한 연설에서 미국의 빈부격차 심화 문제와 관련, “경제적 불평등이 커지면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기반이 위협받고, 사회 진보 또한 이뤄지기 힘들다”고 경고한 바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라스킨 FRB 이사는 NPR 인터뷰에서 “미국 경제는 중산층의 소비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다는 점에서 중산층은 미국 경제의 엔진이라 할 만하다”면서 “90% 미국인의 수입이 정체되거나 축소되고, 중산층 규모도 점점 쪼그라들 경우 미국 경제의 엔진 자체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고 지적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는 특히 “계층간 소득 불평등은 경제적 불평등에 그치지 않고 저축률 저하, 주택가격 하락, 주식시장 폭락, 기업 파산 증가, 범죄율 증가로 이어져 결과적으로 경제 성장기반을 와해시키며 사회 불안을 증가시키는 요인이 된다”고 지적했다. 최근 ‘탐욕의 시대’란 저서를 펴낸 역사학자 제프 메드릭은 <strong>“미국 보통사람들의 임금이 장기간 정체되면서 요즘 남성 근로자의 평균임금은 40년 전인 1969년에 비해 적은 상태가 됐다”</strong>면서 “이 같은 평균임금 정체는 소득 양극화를 부채질해 미국은 이제 인도나 나이지리아, 이집트보다도 빈부격차가 큰 나라가 됐다”고 비판했다.” (강조는 인용자)</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4)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2000년 4,163억 달러, 2001년 3,966억 달러, 2002년 4,572억 달러, 2003년 5,191억 달러, 2004년 6,285억 달러, 2005년 7,458억 달러, 2006년 8,006억 달러, 2007년 7,103억 달러, 2008년 6,771억 달러, 2009년 3,766억 달러, 2010년 4,709억 달러이다(BEA 미국 상무부 경제분석국). 11년간만을 계산해도 누적 경상수지 적자규모가 6조 1,990억 달러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5) 기축통화국으로서의 위상이 흔들리는 점은 곧바로 6)에서 다룬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6) IMF 사태를 경험한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IMF와, S&amp;P 등 신용평가사들은 한통속이 되어 위기에 처한 나라를 찾아다니며 위기를 증폭시키는 하이에나와 같은 존재들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7) 삼성경제연구소, 「고조되는 환율갈등의 배경과 전망」, 2010.10.6, 7쪽</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8) 1930년 6월에 발효한 스무트-홀리 관세법 참조. 1930년대 대공황시 미국은 스무트-홀리 관세법을 통해 2만개가 넘는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급격히 인상하였다. 이는 보복관세를 초래하여 대공황을 더욱더 심화시켰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9) “미국정부는 자동차산업을 구조조정(또는 재편)하기 위해 TARP자금으로 GM에 총 495억 달러를 투자하면서 2009년 6월 8일 옛 GM을 파산시켰고, 수익성 없는 공장이나 제도는 모두 버리고 수익성이 있는 것만 추려 7월 10일에 출범하는 새 GM에 이전시켰습니다. 이 구조조정의 핵심 중 하나는 수익성이 없는 공장을 폐쇄하여 종업원을 대규모로 해고시키고, 종업원에 대한 보수를 삭감하고, 퇴직자의 연금과 건강급여에 관한 제도를 변경하는 것이없습니다. 새GM은 노동조합인 UAW(United Auto Workers)로부터 큰 양보를 받아내어, 현재 일하고 있는 정규노동자에게는 시간당 28달러의 임금을 주되 새로 고용되는 노동자에게는 시간당 14달러를 주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리고 옛 GM이 50만 퇴직자(및 퇴직자가 죽은 뒤에는 그 배우자)에게 직접 주고 있던 연금과 건강급여-이 제도는 GM이 세계자동차 산업을 지배할 동안 노동조합이 투쟁을 통해 쟁취한 것입니다-는 사라지게 되었습니다.”(김수행, 「세계대공황」, 돌베개, 193, 194쪽)</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20) “유럽의 아스팔트가 ‘분노의 여름’으로 달궈지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서민의 삶은 곤두박질치는 가운데, 긴축재정을 내건 각국 정부가 교육·복지 혜택마저 대폭 줄이면서 유럽 전역에 ‘복지 전선’을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일촉즉발의 국가 부도 상황에 내몰린 그리스에서는 15일(현지시각) 정부의 긴축재정 정책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아테네 시내 곳곳으로 뛰쳐나왔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그리스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럽연합(EU)으로부터 추가 구제금융을 받기 위해 세금 인상, 국유자산의 조속한 민영화, 복지지출 축소 등을 뼈대로 하는 추가 긴축재정 프로그램을 도입하려 하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신타그마 광장에 모인 2만명의 시위대 사이에선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총리의 사임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자주 터져나고, 국회의사당을 향해선 돌멩이와 화염병이 날아갔다. 경찰은 최루탄을 쏘아대며 맞섰다. 공공노조연맹(ADEDY)과 노동자총연맹(GSEE)은 이날 ‘24시간 총파업’에 돌입했다. 올들어 3번째 파업이다. 파업으로 국립학교와 은행 등이 문을 닫았고 국립병원들은 비상체제로 운영됐다. 버스와 철도를 비롯해 그리스 전역의 대중교통 운행도 중단됐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날 스페인의 카탈루냐 의회 앞에서도 2000명이 참여하는 시위가 열렸다. 카탈루냐 의회가 공공 지출 및 사회복지 예산의 10% 삭감을 논의할 것이란 얘기가 나온 데 따른 것이다. 시위대는 카탈루냐 의회 입구를 막아서고 의원들의 입장을 저지했다. 이 때문에 아르투르 마스 카탈루냐 주 총리를 비롯한 25명의 의원들이 헬기를 타고서야 의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날 모인 시위대의 목소리는 높은 청년 실업률 등 정부의 경제 정책 실패에 항의하며 지난주까지 마드리드 광장을 3주 간 점거했던 시위대들과 다르지 않다. ”(한겨레, 2011.6.16)</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21) 이러한 잠재력을 현재의 투쟁은 현실화하고 있지 못하다. 그 이유는 이 투쟁을 ‘민주대연합’, ‘야권연대’ 틀안에 가두어두려는 일부의 기회주의적 태도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는 조만간 돌파될 것이다.</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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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농업문제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태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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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2 May 2011 01:44:47 +0000</pubDate>
		<dc:creator>강령토론</dc:creator>
				<category><![CDATA[「강령토론」호수별 분류]]></category>
		<category><![CDATA[전체토론]]></category>
		<category><![CDATA[제 6호]]></category>
		<category><![CDATA[강령토론]]></category>
		<category><![CDATA[강령토론 6호]]></category>
		<category><![CDATA[계급동맹]]></category>
		<category><![CDATA[농민문제]]></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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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6호]]></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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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성 두 현 (노동해방실천연대(준) 지도위원)</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한국에서 자본주의는 급속한 속도로 발전하여 독점자본주의의 단계에까지 이르렀으며, 제국주의적 특성조차 보이고 있다. 이러한 급속한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 것은 우선, 노동자계급의 착취였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착취에 못지않은 역할을 한 것이, 특히 공업화초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소농을 중심으로 한 농민의 수탈이었다. 소농의 수탈은 공업화초기에 자본축적을 위한 잉여의 형성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저미가 정책으로 대표된 저농산물 가격 정책, 세금, 고물가 등으로 소농은 수탈당하였다. 소농의 수탈은 공업화초기에만 머문 것이 아니다. 이는 고도로 자본주의화 된 단계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1970년대 후반 수출주도의 독점자본의 이해를 위해 비교우위론을 이유로 농산물 수입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이래 이는 80년대, 90년대, 2000년대를 걸쳐 확대일변도의 길을 달려왔다. 독점자본은 끝없이 소농을 수탈하고 있다.</span></p>
<p><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p=1078" class="more-link">Read more on 농업문제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태도&#8230;</a></p>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성 두 현 (노동해방실천연대(준) 지도위원)</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한국에서 자본주의는 급속한 속도로 발전하여 독점자본주의의 단계에까지 이르렀으며, 제국주의적 특성조차 보이고 있다. 이러한 급속한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 것은 우선, 노동자계급의 착취였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착취에 못지않은 역할을 한 것이, 특히 공업화초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소농을 중심으로 한 농민의 수탈이었다. 소농의 수탈은 공업화초기에 자본축적을 위한 잉여의 형성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저미가 정책으로 대표된 저농산물 가격 정책, 세금, 고물가 등으로 소농은 수탈당하였다. 소농의 수탈은 공업화초기에만 머문 것이 아니다. 이는 고도로 자본주의화 된 단계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1970년대 후반 수출주도의 독점자본의 이해를 위해 비교우위론을 이유로 농산물 수입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이래 이는 80년대, 90년대, 2000년대를 걸쳐 확대일변도의 길을 달려왔다. 독점자본은 끝없이 소농을 수탈하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농업정책이 결과한 한국농업의 현주소는, 25%에 이르는 식량자급율로 표현되는 농업위기의 심화, 소농의 전반적 몰락, 초고령화, 농촌의 공동화, 중산간지역의 황폐화 등 비참한 모습이다. 도시와 농촌 사이의 모순은 극한 지점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한국의 농업은 벼랑 끝에 몰려있으며 이는 누구라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런데 이러한 전반적인 농업의 위기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고 있는, 정확히 말해 잘 인식되지 않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농업의 위기 속에서, 또 그 위기 때문에 1990년대 중반 이후 농업에서 자본주의화가 급속히 가속화되어 왔다는 점, 이에 따라, 농촌에서의 계급분화도 급속하게 가속화되어 왔다는 점이다. 도시에서 대규모 자본에 의해 소자산가들이 무자비하게 구축되고 있는(동네 슈퍼마켓이 SSM에 의해 구축되는 것을 보라!) 정도 이상으로, 농촌에서 소농은 독점자본에 의해 대규모로 구축되어 몰락하고 있으며, 토지, 가축 등의 생산수단은 급격한 속도로 집중되고 있다. 독점자본가의 이해를 대변하는 자본가정권의 농정도 이러한 과정에 박차를 가하는 방향으로 급격히 전환되고 있다. 농촌은 현재 격심한 변화 속에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이 한국농업의 위기를 정확히 파악하고, 농업문제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농업위기의 현상적인 측면만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농업위기 속에서 농촌에서 모순이 어떻게 진행, 심화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즉, 농업의 불균형한 발전, 농산물 수입개방, 식량자급율의 급격한 하락이라는 현상뿐만 아니라 이러한 현상을 만들어낸 본질적인 원인과 농업에서의 자본주의의 급속한 진행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여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사회주의자들은 농업문제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하고, 농업문제의 해결 방향을 한국자본주의의 전체와 연결하여 밝혀 낼 수 있고, 왜 농업문제의 해결이 사회주의혁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를 분명히 밝혀낼 수 있게 될 것이다. 동시에 이렇게 해야만 농촌에서의 각 계급에 대한 올바른 정책도 도출해 낼 수 있게 될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먼저 한국농업에서의 자본주의화를 검토한 후, 이에 기초하여 사회주의자의 농업문제에 대한 태도를 밝힌다.<span id="more-1078"></span></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 글은 엄밀하게 말해, ‘농업문제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태도’의 초안에 해당하는 성격의 글이다. 이 글은, 한국 사회주의자, 맑스주의자가 맑스주의적 방법을 사용하여 농업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이론적인 글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 점이 이 글의 성과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한계도 많다. 가령 농촌에서의 농업프롤레타리아트의 실상, 반프롤레타리아트의 규모는 관련 통계의 부재로 정확히 밝히지 못하였다. 이 주제는 관련 통계의 부재라는 벽을 뚫고 앞으로 사회주의자들이 보다 명확하게 밝혀야 할 주제이다. 이와 관련된 정부통계가 지금보다 더 명확하게 발표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이 이를 직접 조사해야 한다. 금융자본에 대한 소농 등, 농민의 종속의 실상도 충분히 다루지 못하였다. 또한 일차로 핵심주제를 해명하는 데에 주안점을 둔 관계로, 식량자급문제나 토지국유화문제, 생태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였다. 이 점은 앞으로 다루어야 할 주제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2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1. 한국 농업에서의 자본주의화</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1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strong>1) 농업에서의 자본주의화에 대한 잘못된 주장들과 그 비판</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일반적으로 자본주의는 공업과 농업에서 불균등하게 발전한다. 공업에서 자본주의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농업에서는 자본주의가 느린 속도로 발전하며1), 소생산자들이 해체되는 속도도 공업에서와 비교하여 일반적으로 농업에서는 매우 느리다(도시의 소생산자가 대규모 생산에 의해 축출되는 속도에 비해 소농이 축출되는 속도는 상대적으로 매우 느리다.). 이것은 공업과 비교하여 농업에서 자본의 운동이 상대적으로 제약되는 조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2)</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나 이것이 농업에서는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는다는 것, 농업은 비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진실은, 농업에서도 자본주의가 발전한다는 것, 다만, 공업에서와 비교하여 농업에서는 그 발전의 속도와 형태 등만이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농업에서도 자본주의가 발전하며, 대규모 생산자가 소규모 생산자를 축출하는 것은 공업에서와 다를 바가 없다. 이 점은, 10년, 20년의 짧은 기간이 아니라, 긴 기간의 조망 속에서 농업발전의 흐름을 포착할 경우,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에서는 예외 없이 관철되는 진실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명확한 진실을 전세계 부르주아 경제학자, 부르주아민주주의자, 수정주의자 등, 노동운동내의 기회주의자들 대부분이 반복하여 부정해왔다.3) 이들은 서로 간에 조금씩의 차이점을 갖고 있지만, 공업에서와 달리 농업에서는 자본주의적 발전과는 구별되는 특수한 발전법칙이 관철되며, 공업에서와 달리 소규모 경영이 대규모 경영보다 오히려 유리하고, 소농은 자본주의하에서도 안정적이며 생명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해 온 점에서 매우 놀라울 정도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때문에 이들과 과학적 사회주의자, 즉, 맑스주의자들 사이에서, 이 점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반복하여 전개되었으며, 이러한 논쟁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부르주아경제학자,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수정주의자들을 한편으로 하고,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을 다른 한편으로 하여 벌어진 논쟁이다. 이 논쟁은 이후 벌어진 논쟁의 핵심적 내용 대부분을 이미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부르주아 경제학자, 소부르주아 경제학자, 수정주의자들에 의한, 농업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입장 비판의 요지는 맑스의 지대론이 오류라는 것, 농업에서의 생산 집적 법칙 역시 오류라는 것, 농업은 자본주의 발전과 다른 특별한 법칙에 따라 발전한다는 것, 농업은 “수확체감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 농업에서 결정적인 것은 인간 노동이 아니라 자연이라는 기본적인 힘이라는 것, 농업에서 대규모 생산이 소규모 생산에 비해 유리하지 않으며, 오히려 후자가 더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소농 경제가 안정적이고 대규모 자본주의생산보다 유리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많은 사실과 통계를 동원하였는데, 대부분이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왜곡, 은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예가 독일의 수정주의자 다비드의 주장인데, 그는 공업의 기계적 생산과 농업의 유기적 생산을 이들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로 규정하고, 농업에서는 노동의 계절적 중단, 동일 노동자에 의한 다른 노동의 수행, 따라서 분업의 배제, 노동, 따라서 노동수단의 장소적 이동, 노동대상의 자연적 생육에 의한 제약, 경영규모의 확대는 토지면적의 확대를 필요로 하지만 이 때문에 노동자의 감독이 어렵게 되는 것 등의 이유로 대경영은 곤란하고 소경영의 쪽이 유리하다는 것을 주장하였다(「경제학사전」, 암파서점).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주장을 반박한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카우츠키4)와 레닌이었다. 이들은 정반대의 방향에서 사실과 통계를 동원하여, 부르주아 경제학자, 소부르주아 경제학자,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였는데, 이 중 핵심을 이루는 것은, 실제로 농업에서도 생산의 집적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소경영이 생존하는 것은 대경영보다 유리해서가 아니라 <strong>소농의 과소소비와 과도노동</strong> 때문이라는 것, 비판이 소경영이 우세하다고 사례로 들고 있는 부분에서 실제로 대경영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 등이었다. 특히 레닌은, 당시의 가장 중요한 자료와 농업통계를 요약하고 분석하여, 치밀하게 비판의 오류를 반박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인 성과물이 「농업문제와 “맑스비판가”」이다. 시간 부족과, 글의 분량 때문에 이 글을 자세히 소개하지 못하는데, 논쟁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서 독자 여러분들이 반드시 일독할 것을 권한다. 앞으로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이를 자세히 소개하는 별도의 글을 작성했으면 한다. 그런데, 부르주아 경제학자, 소부르주아 경제학자, 수정주의자들에 대한 반박이 필요했고 중요했던 이유는, 이 문제가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에서 매우 실천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들의 다양한 그룹들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농업에서의 자본주의화와 농민들의 분화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데, 부르주아지들과 수정주의자들은 이를 왜곡하고, 은폐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때 이들이 노린 것은 농촌에서 소농 중심의 ‘농민 일반’이 존재하는 것으로 농촌현실을 치장하여, 농촌에서의 계급투쟁과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와 농업프롤레타리아트, 반프롤레타리아트, 소농 사이의 계급동맹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1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strong>2) 한국 농업에서의 자본주의화</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다음에서 곧바로 밝히듯이, 한국에서 소농이 전반적으로 이미 몰락하거나 몰락 직전에 있으며, 대규모 농업에 토지 등 생산수단이 급속한 속도로 집중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는 더욱더 가속화될 것이라는 것, ‘기업농’이라는 명칭의 농업자본가가 향후 농업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점은,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분명해졌다. 과거와 달리 부르주아 경제학자 중에 ‘소농(가족농)경제’를 옹호하는 자가 한 명도 없을 정도로 현실의 농업은 이미 오래전에 자본주의적 농업으로 전환되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본주의적 농업의 현실이 얼마만큼 깊숙이 진행되어 있는가는 1993년의 한 농업경제학자의 글과 2007년의 다른 한 농업경제학자의 글을 비교하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본격적으로 한국 농업에서의 자본주의화의 실상을 검토하기 전에 ‘현실’이 어떻게 농업경제학자들의 ‘의식’의 변화를 급속하게 강요하였는지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글에서 비교 검토하는 두 글은 14년의 시차를 갖고 발표된 글인, 정기환의 「농가의 성격 변천에 관한 연구」(1993)와 김정호, 박문호, 이용호의 「농가의 경제사회적 성격 변화와 전망」(2007)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먼저 1993년의 정기환은, 대농으로의 농지의 집중이라는 핵심문제에 대해서 부정한다.5)</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1980∼90년 사이에 농지 1.0ha 미만의 영세농가 호수는 24.5%, 1.0∼2.0ha규모의 농가호수는 13.7% 감소하였지만 이들이 경작하던 농지는 일부분만 대농층으로 집중되었을 뿐 대부분의 농지는 대농층으로 집중되지 않았다”(79쪽).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와 달리 14년 후에 김정호 등은 대농으로의 농지의 급속한 집중을 확인하고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논 3ha 이상 농가는 호수 비중으로는 1990년의 1.2%에서 2005년에 5.4%로 증가하였으나, 면적 비중으로는 1990년의 6.2%에서 2005년에 29.5%로 빠르게 증가하였다.” (57, 58쪽)</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한국농업에서의 자본주의화에 대해서 정기환은 1993년도의 시점에서조차 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한국의 경제체제가 자본주의를 표방하고 있고, 비농업 부문에서는 세계자본주의 체제와 깊숙한 관계를 맺으며 발전하고 있으면서도 유독 농업분야에서 자본주의식 농업이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경제적인 이유에서라기보다도 정치 이데올로기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121, 122쪽)6)</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와 비교하여, 김정호 등은 비록 자본주의라는 말을 명시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급속한 자본주의화를 사실상 함축하는 표현들을 곳곳에서 사용하여 1990년대 이후의 농업구조의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전문가들은 1990년대 이후의 농업구조의 변화가 농정 반세기를 압축할 정도로 커다란 변화였으며, 특히 농업생산이 시장수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농가 간 또는 산지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앞으로 DDA와 FTA 등 농산물 시장개방의 진전에 따라 농업경영의 규모화 및 전문화로 특징지어지는 농업구조조정은 지속적으로 진행될 것이며, 동시에 농가의 경영체 성격 및 인력구조도 크게 변화할 것으로 예상된다.”(2쪽).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두 글의 차이점은 가족농(사실상 소농의 다른 표현)과 기업농(사실상 농업자본가의 다른 표현)의 비중에 대한 관점에서도 나타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정기환은 1993년에 가족농이 중추적 역할을 해야 하고, 기업농은 철저히 가족농을 보완하는 역할에 머물러야 함을 강조하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한국 농업의 국제화와 농산물 시장 개방에 대비하여 규모가 큰 기업농을 육성하는 길이 한국농업의 진로라고 하는 주장이 거세게 일고 있지만 규모가 큰 기업농을 육성하면 한국 농업도 국제적 경쟁력을 갖추게 되고 비교우위를 갖게 될 것이라는 발상은 현실적이 아니다. 경종농업 분야에서 기업농의 출현이 불가피한 것은 급격한 산업화의 충격과 불균형 성장에 의한 가족농의 쇠퇴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125쪽) “아무리 가족농이 쇠퇴한다고 해도 가족농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지난날에 비해 그 수가 격감하고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그들의 비중이 감소하는 현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농은 이미 소멸할 운명에 처해 있으니, 외국의 기업농과 경쟁하기 위해서 우리도 대규모 기업농을 육성해야 한다는 주장은 현재 한국의 상황에서는 현실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농업경영의 중추는 가족농이 되어야 하고 기업농은 가족농의 기능을 보완하고 강화하는 입장에서 육성되어야 마땅하다.”(126쪽)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나 14년이 지나 기업농에 대한 정기환식의 제한은 제거되고 거리낌 없이 기업농이 옹호되고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오늘날 기업농에 대한 인식도 바뀌고 있으며, 농업현장에서는 기업적 농업경영이 빠르게 확산될 것으로 전망된다. 첫째는 농업생산력 측면에서의 유리성이다. 노동집약적 생산방식하에서는 가족농이 활력을 가졌으나, 기계화․자동화 등으로 기업조직이 무리없이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는 경영기술 측면에서의 유리성이다. 상업농 진전으로 생산부터 판매 내지는 소비동향까지 파악하고 대응하는 기술이 불가결하며, 특히 마케팅전략과 기술은 기업경영이 유리하다. 대부분의 농가가 농산물 생산에 전념하고 판매는 산지유통센터를 비롯하여 전문유통업체에 의존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셋째는 경영체로서의 영속성이다. 가족내의 협업 기능이 약화되면서 농가간의 협력 내지 공동 경영을 도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가족농은 후계자 단절로 농업경영이 소멸할 수 있으나, 기업농은 신규인력을 통하여 경영의 영속성이 확보되는 이점이 있다.”(77쪽)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따라서 정부의 농업정책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지난 1990년대까지를 농가 중심의 농정 시대였다면, 앞으로는 농가 이외의 다양한 경영체를 육성하는 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물론 앞으로도 상당기간에 걸쳐 가족농이 농업의 중심세력이 될 것은 사실이지만, 농가 중심의 농정체제가 바뀌어야 할 전환기를 맞고 있다.”(요약 ⅴ).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처럼 두 글(그런데 두 글 모두는 관변 연구단체인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글이다. 따라서, 단순한 개인의 시차를 둔 의견 차이만을 표현하고 있지 않다) 사이에 현격한 차이점을 유발할 만큼 지난 14년간에 전개된 한국 농업의 변화는 격심하고 이의 핵심은 농업에서의 자본주의화의 급격한 가속화이다. 지금부터 이 점을 검토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한국자본주의는 소농을 중심으로 한 농민의 희생을 일방적으로 강요하여, 소농을 수탈하는 체제로서 소농의 몰락을 재촉해왔다. 소농 중 가장 먼저 몰락하여 프롤레타리아트화함으로써, 60년대 이후 가장 높은 감소율을 보인 층은 1ha미만의 영세소농이었다.7) 1ha 미만에서 출발하여 전체 농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감소하는 계층은 점차 1985년 1.5ha, 1990년 2ha로까지 올라갔다. 이는 영세소농뿐만 아니라 소농 대부분이 점차 하강분해한 현상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이후 이전과 비교하여 두드러지는 점은 0.5ha 미만과 3ha이상의 계층이 빠르게 증가하는 반면 이들 사이의 중간계층이 감소한다는 점이다. 이는 소농뿐만 아니라 중농의 몰락도 본격화되어 영세농층과 대농층으로의 양극분화가 가속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를 보다 정확히 규정하면, 1990년대 중반 이후 대농으로의 집중이, 이전과 비교하여 현저하게 강화되고, 중농의 몰락이 본격화되고, 고령으로 농촌을 떠날 수 없는 영세소농이 농촌에서 침전하여 과거와 달리 영세농층의 비중이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가하는 역전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중농층에까지 본격화된 소농의 전반적 하강 분해</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60년대 이후 진행되어온 소농의 몰락8)은 중농층에서도 본격화되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중농으로 불리는 계층이 사실상 소농이라는 점9)에서 이는 소농의 전반적인 하강분해의 연장선에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영세소농층 증가의 의미</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경종 농가 중 0.5ha 미만의 농가는 1990년대 중반까지 그 비중이 계속하여 감소하다가 이후 증가세로 돌아섰다. 이는 현상적으로 보면 양극분화이지만 실제의 내용을 검토하면 고령영세소농이 침전하여 만들어낸 비극적인 현상일 뿐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경종 농가는 계속하여 전체 농가수가 감소하고 있다. 여기서 가장 감소세가 큰 계층은 0.5ha 미만의 영세소농층이 아니라 0.5∼3.0ha의 계층이다. 증가세로 돌아선 영세소농층의 구성을 보면, 이들 계층 경영주의 평균연령은 62세이고 65세 이상이 48.1%를 차지하고 있는데, 곧바로 고령층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농촌을 떠날 수 없어, 농촌에 침전된다. 중간의 다른 계층은 감소하는 데, 이들 계층은 감소할 수 없는 사정이 이들의 상대적 비중을 높인 것이다. 이들은 앞으로 지속적으로 농가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영주의 인간적 수명이 다함에 따라 짧은 기간안에 소멸해 갈 것이다.10)</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은폐된 프롤레타리아트, 겸업농 </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한국의 농업통계는 전업농, 겸업농 자료를 발표하고 있다. 여러 사정이 있겠지만 겸업을 하는 주된 이유가 농가소득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겸업농은 소농+노동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사회에서 소농이 농가소득 이외에 소득을 확보할 수 있는 방식이 노동자로서 일하는 것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만약 농업통계가 실제의 겸업내용을 조사한다면 이는 분명한 형태로 입증될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농업통계가 대부분 그러하듯이 한국의 농업통계는 현실의 계급구조를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의 조사를 회피한다. 즉, 겸업농의 프롤레타리트적 성격을 은폐하려고 한다.</span></p>
<p style="text-align: center; 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겸업농의 실상을 밝혀야 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2001년에 발표한 「농외소득 증대의 방향과 전략」에는 겸업의 구체적 내용을 추정할 수 있게 하는, 주목할 만한 표가 다음과 같이 인용되어 있다. <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1/04/table1.jpg"><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1022" title="table1" src="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1/04/table1.jpg" alt="" width="416" height="211" /></a></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인용된 표는 1995년 초에 정명채 등이 충남 4개 마을에서 조사한 자료로 만든 것인데, 1995년 비농업취업 중 피고용비율이 81.5%를 차지하고 공장 생산직, 21.3%, 미장 일용건설노동, 26.9%, 경비원, 택시 등 서비스업,17.6%로 대부분 노동자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비율이 곧바로 전국적인 상태를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겸업의 대부분이 노동자로서의 취업임은 충분히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충남지역이 아니라 공업이 집중되어 있는 울산, 창원 인근지역에 대한 사례조사를 하면 겸업에서 차지하는 공장 생산직의 비율은 훨씬 높아질 것이다. 이점은 사실 누구나 쉽게 추정할 수 있는 것인데, 이와 관련된 조사가 부족하고, 통계가 이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성되지 않아, 명확한 형태로 확인되지 않을 뿐이다. 때문에 겸업농은 농민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반프롤레타리아트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전체농가 중 겸업농가의 비율이 40%11)수준이라는 점에서 농촌에서 광범한 반프롤레타리아트 층이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대농으로의 토지, 가축 등의 집중</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한국 농업에서 자본주의화가 급격하게 가속화하고 있음은 대농으로의 토지, 가축 등의 집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현상이 가장 먼저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양돈, 양계 등 축산과, 시설원예부분이었다. 앞서 인용한 「농가의 성격 변천에 관한 연구」(1993)에서 정기환 조차 이미 17년 전에 양돈과 양계에서 고도의 집중이 이루어짐을 인정하고 있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양돈과 양계업의 경우 대규모 사육가들은 이미 가족농의 범위를 벗어나 빠르게 공장식 농업(industrialized agricu- lture)으로 변모하고 있으며 이들은 생산뿐만 아니라 가공과 유통부문의 수직적인 통합으로 빠르게 기업농으로 변하고 있다. …… 양돈과 양계업의 집중도 심화로 이 부문에 종사하던 소규모 양축농가수와 그들이 사육하는 가축수가 급속히 감소하고 있다.”(82쪽)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990년대 축산과 시설원예에서의 집중은 더욱더 가속화되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돼지 1천 두 이상을 사육하는 농가는 호수 비율로는 1990∼2000년 동안에 0.2%에서 9.8%로 늘어났으나, 두수 비율로는 같은 기간 13.3%에서 62.1%로 늘어났다. 그래서 2000년 당시 9/8%의 농가가 전체 돼지의 62.1%를 사육하고 있다. 또, 닭 1만 수 이상을 사육하는 농가는 호수 비율로는 1990∼2000년에 1.8%에서 2.7%로 늘어났으나, 마릿수 비율로는 같은 기간 59.2%에서 94.1%로 늘어났다. 2000년 당시 2.7%의 농가가 전체 닭의 94.1%를 사육하고 있다.”12)</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시설 면적 2천 평 이상을 경영하는 농가는 호수 비율로는 1990∼2000년 동안에 6.1%에서 10.5%로 늘어났으나, 면적 비율로는 같은 기간 25.5%에서 47.1%로 늘어났다. 그래서 2000년 당시 10.5%의 농가가 47.1%의 시설원예를 재배하고 있다.”13)</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나 1990년대 이후 대농으로의 집중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특징적인 것은 축산과 시설원예에서뿐만 아니라 논농사와 밭농사에서도 집중이 급격히 가속화된 점이다.14) 논 경영규모 3ha 이상 농가수와 면적의 비율은 1990년 1.2%, 6.2%에서 2000년 3.8%, 20.0%로 증가하였으며, 2005년에는 연이어 5.4%, 29.5%로 증가하였다. 밭 경영규모 2ha 이상 농가수와 면적의 비율은 1990년 1.6%, 12.6%에서 2000년 3.2%, 24.0%로 증가하였으며, 2005년에는 3.7%, 27.7%로 증가하였다. 그 결과 3ha이상 논농사 농가는 15년 사이에 호수로는 4.5배, 면적으로는 4.76배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2ha 밭농사 농가는 같은 기간에 호수로는 2.31배, 면적으로는 2.20배로 두 배 이상 증가하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상을 종합하면 1990년대 이후 대농으로의 토지, 가축 등의 집중은 급격한 속도로 진행되어 왔다. 이는 논란의 여지없이 통계에 의해서 확인되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추세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점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이러한 농가계층 분화의 추이를 반영하여 1990년 이후의 변화율을 연장하는 방법으로 향후 10년 후의 농가계층 비율을 추정하여 규모별 분포를 전망하기로 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먼저, &lt;표 4-9&gt;에서 보면, 논 3ha 이상을 경작하는 농가는 2005년에 호수로 4.9%, 면적으로 26.4%를 차지하였으나, 2015년에는 호수 비율이 9%, 면적 비율이 36.8%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또, &lt;표4-10&gt;에서 밭 2ha 이상을 경작하는 농가는 2005년에 호수로 3.9%, 면적으로 29.9%를 차지하였으나, 2015년에는 호수 비율이 5.7%, 면적 비율이 41.9%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농가의 경제사회적 성격 변화와 전망」, 58, 59쪽)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span></p>
<p style="margin-bottom: 10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농업에서의 임노동-자본관계</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농업통계에서 가장 잘 포착되지 않고 있는 것이 농업에서의 임노동-자본관계이다. 때문에 통계숫자만으로는 이를 전혀 파악할 수 없다. 가장 거칠게 피상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통계청의 ‘농가경제조사’ 중 노동력 형태별 농업노동 투하량을 보면 고용노동이 차지하는 비율은 2004년 14.41%, 2005년 13.58%, 2006년 13.64%, 2007년, 14.41%, 2008년 12.87%, 2009년 12.63% 로 대략 12∼15% 수준에서 변동하고 있는데 이 통계로는 한국에서 농가가 평균적으로 필요한 노동 중 12∼15%를 고용노동으로 충당하고 있다는 정도만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때문에 우리가 농업에서의 임노동-자본관계의 실태를 파악하려면 축산, 시설원예 등 자본주의적 농업이 가장 앞서 진행되는 부분과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농업단위에 집중하여 조사를 진행하여야 한다. 이러한 구체적인 조사를 진행하면 우리는 상당히 광범위하게 임노동-자본관계가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우리는 농업에서는 단위별 고용노동자의 수가 공업에서와 비교하여 현저하게 작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즉, 공업에서와 달리 농업에서는 가령 5인의 고용이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주의하며 농업에서의 임노동자의 실태를 조사해야 한다. 그리고 농업에서의 고용노동자의 경우 상시고용노동자만이 아니라 계절별 고용노동자, 일일고용노동자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오히려 후자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주의하며 조사해야 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통계를 통해서 임노동-자본관계의 실태를 당장 명확히 확인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향후 이 관계가 급속하게 확대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것은, 생산의 집중이 향후 더욱더 강화되고, 향후 ‘기업농’이 크게 강화됨에 따라, 이와 병행하여 고용노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15) 사회주의자로서는 이 점에 특별한 관심을 쏟아야 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양극분해를 가속화한 농산물 시장개방, 정부와 금융자본</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소농의 몰락과 대농으로의 집중 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이것이 1990년대에 들어 가속화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속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농산물 시장 개방이 본격화된 것, 정부와 금융자본이 대농에 자원을 몰아 준 것이었다. 농산물 시장 개방의 본격화는 그동안 한계 지점에서 버티던 소농의 몰락을 급격하게 재촉하였다. 중농의 몰락이 시작된 것도 같은 이유이다. 그리고 정부는 이른바 ‘가족농’ 체제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판단 하에 사실상 자원을 대규모 경영에 몰아주는 정책을 강화하였다. 그 결과 전반적으로 농업이 희생을 강요당하는 조건에서 양극분해는 가속화되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2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2. 농촌에서의 계급 및 사회주의자의 태도</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농업문제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태도를 결정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이를 사회주의혁명의 과제라는 전체적인 관점과 밀접히 결합시키는 것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농업문제를 한국자본주의전체와 밀접히 결합시켜 바라보는 것, 또한 철저히 실천적인 관점에서 농업문제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한국에서 농업위기의 급속한 심화와 농촌에서의 계급분화의 급격한 가속화는 한국자본주의 전체의 진행을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다. 독점자본의 이해는 이미 진행된 농업과 공업의 불균형을 더욱더 확대할 것을, 농업의 희생을 더욱더 강화할 것을 강요한다. 또한 농업위기의 급속한 심화를 돌파하기 위해, ‘가족농중심’ 농업이라는 ‘위선적’ 농정을 포기하고, 자본주의적 농업을 가속화하는 농정으로 전환할 것을 노골적으로 요구한다. 이것이 1990년대 농촌에서의 계급분화의 급격한 가속화를 야기했던 것이고, 향후 독점자본은 이를 더욱더 강화할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농업문제를 철저히 한국자본주의 전체와 밀접히 결합시켜 바라보아야 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또한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혁명의 실천이라는 철저히 실천적인 관점에서 농업문제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여야 한다. 농업문제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태도에서, 지엽적인 개별정책이 아니라, 농촌에서의 계급들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계급정책이 핵심이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농촌에서의 계급은 각각의 범주가 서로 중첩하고, 그 구분선이 칼로 자르듯이 분명하지 않다는 특징을 갖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각각의 특징을 갖는 범주별 구분은 가능하고, 또한 필요하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농촌에서 노동하고, 착취당하는 계급은 농업프롤레타리아트, 반프롤레타리아트, 그리고 소농으로, 이들이 농촌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농업프롤레타리아트는 농업에서 임금노동자로 연별, 계절별, 일일별로 노동하는 계급이다. 이들 계급을 독립적으로, 농촌의 다른 집단과 별도로 조직하고, 이들 사이에서 집중적으로 선전, 선동하는 것이 사회주의자의 기본 임무이다. 자본주의적 농업이 급속하게 확대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그것이 대폭적으로 강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현재, 농촌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규모와 관계없이 이 점은 농촌에서의 사회주의자의 활동에서 기본 출발점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농업 반프롤레타리아트는 부분적으로는, 작은 자기 소유의 토지, 혹은 임차지에서 노동하는 것에 의해, 부분적으로는 농업 그리고, 농업 외에서 임노동자로 노동하는 것에 의해 생활수단을 확보하는 계급이다. 이 계급은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겸업농 등의 형식으로 농촌에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의 존재와 특별한 지위는 부르주아지의 대변자들에 의해 과소평가되고 은폐된다.16) 이들은 단순히 ‘농가’ 중 경작규모가 작은 그룹으로 다루어진다. 2005년 현재, 통계상 전체 농가 중 무려 36.5%가 0.5ha미만을 경작하고 있는데, 이들 중의 상당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소농은 자기 가족이 경작할 수 없을 정도로 크지 않지만, 자기 가족의 생활을 꾸려나갈 수 없을 만큼 작지 않은 토지를 소유, 혹은 임차하여 경작하는 계급이다.17) 소농은 임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반프롤레타리아트와, 외부노동을 고용하지 않는 점에서 중농, 대농과 구분된다. 한국에서 소농은 계통적으로 몰락하여왔지만 여전히 농촌 인구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고 있는 계급이다. 소농은 역사적으로 자본의 수탈대상으로 기능하면서 공업화에 잉여와 노동자계급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1990년대 독점자본의 이해를 위해 강행된 농산물 수입확대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연이어 몰락하고 있다. 한국 자본주의 아래에서 이들에게 남겨진 운명은 몰락밖에 없다. 소농은 “자본주의 전체체제에 반대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투쟁 밖에서는 아무런 희망이 없으며”18), 사회주의혁명을 통해서만 자신의 비참한 처지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소농은 사회주의의 전망 속에서만 희망을 발견할 수 있으며, 사회주의자는 소농의 소소유자적 측면을 고려하면서도, 소농 사이에서 진정으로 혁명적인 선전, 선동, 조직사업을 전개해야 한다. 소농을 사회주의로 인도하는 데에서 사회주의자는 협동조합으로의 조직을 특별히 강조하여야 하며, 협동조합으로의 조직도 오직, 모범과 설득의 방식에 의하여, 또한 실질적 지원을 통하여 이루어내야 한다.19)</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들 세 계급이 농촌에서 노동하는 피착취 민중을 구성하며 농촌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20) 이들은 한국 자본주의 아래에서 자본에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계급으로서 농촌에서 노동하는 빈곤층이며, 사회주의혁명에서 도시의 산업 노동자계급과 동맹할 수 있는 계급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한국에서 중농은 소농과 중첩되며, 사실상 소농과 뚜렷이 구별되지 않는다. 특히 2∼3ha 경작규모의 농가를 중농으로 분류할 때 그러하다. 범주 상 중농을 소농과 구별하는 기준점은 소농과 달리 잉여를 생산하여 조건이 좋은 해에는 이를 자본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점과 매우 빈번하게 피고용노동에 의존한다는 점인데21), 한국에서 2∼3ha의 농가가 이러한 특징을 보이는지는 실제의 자료에 의해 확인되지 않는다. 때문에 소농에 대한 계급정책과 중농에 대한 계급정책은 한국에서 뚜렷하게 구별하지 않는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한국의 관변 농업경제학자들의 대부분은 3ha 이상의 농가를 대농으로 분류하고 있다. 대체로 여러 명의 피고용노동자를 고용하는 농민을 대농의 특징으로 볼 때, 축산과 시설원예를 제외한 농업에서 한국에서 3ha 이상을 대농으로 분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이상의 경작규모를 대농의 구분점으로 할지와 무관하게 한국에서 대농 층이 존재하고 이 층이 현재 급속하게 확대되고 있음은 분명하다.22) 이 층은 농촌부르주아지에 해당한다. 이들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정책은 도시 부르주아지에 대한 정책에 준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대농 수준의 범위를 훨씬 뛰어 넘어, 역사상 존재했던 외국의 대토지소유자에 준하는 대규모 경영에 대한 사례는 한국에서 축산을 제외하고는 실태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별도의 통계자료도 없다. 그러나 현재는 일부에 존재하고, 미래에는 다수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은 경영단위라는 점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이에 대한 태도를 원칙적으로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대규모 경영단위는 사회주의혁명과 함께 최선의 기술적 지원을 받는 모범 국영농장으로 전환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첫째, 한국자본주의가 축적한 생산력과 과학기술은 이미 이를 가능하게 할 수준에 충분히 이르렀기 때문이고, 둘째, 이러한 선도적 사례가 대규모 경영의 이점을 모범적으로 드러내어 소농, 중농의 협동조합적 조직화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2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맺으며</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한국에서 급속하게 자본주의가 발전한 것은 노동자계급의 착취와 소농의 수탈을 통해서였다. 한국자본주의의 소농수탈은 공업화초기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고도로 자본주의화된 단계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1970년대 후반 수출주도의 독점자본의 이해를 위해 농산물 수입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이래 이는 확대일변도의 길을 달려왔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농업정책의 결과 식량자급율이 25%에 이를 정도로 농업위기가 심화되고 소농은 전반적으로 몰락하였거나 몰락직전에 있으며, 농촌은 초고령화사회로 되어 아기 울음소리를 듣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고, 또 공동화 되었다. 도시와 농촌 사이의 모순은, 다른 자본주의나라와 비교해서도,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극한 지점에 이르렀다. 다른 한편 농업의 위기 속에서, 그리고 그 위기 때문에 1990년대 중반 이후 농업에서는 자본주의화가 급속히 가속화되어 왔으며, 이에 따라, 농촌에서의 계급분화가 급속하게 가속화되어 왔다. 도시에서 대규모 자본에 의해 소자산가들이 무자비하게 구축되고 있는 정도 이상으로, 농촌에서 소농은 독점자본에 의해 대규모로 구축되어 몰락하고 있으며, 토지, 가축 등의 생산수단은 급격한 속도로 대규모 경영에 집중되고 있다. 독점자본가의 이해를 대변하는 자본가정권의 농정도 이러한 과정에 박차를 가하는 방향으로 급격히 전환되고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농업, 농촌 현실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농업문제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농업위기의 현상적인 측면만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현상을 만들어낸 본질적인 원인을 밝히고, 농업위기 속에서 농촌에서 자본주의화가 얼마나 급속하게 가속화되고 있는지, 농촌에서의 모순이 어떻게 진행, 심화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1990년대 한국농업에서의 급속한 자본주의화와 계급분화를 구체적으로 검토한 후, 이를 토대로 농촌에서의 계급 현황과 농업문제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태도를 밝혔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상에서 분명해졌듯이, 한국에서 농업문제를 극단적으로 심화시킨 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한국 자본주의자체이다. 현재 자본가들과 자본가정권은 자신들이 야기한 농업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 자본주의적 농업을 더욱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이러한 정책은 결국 농업문제를 더욱더 악화시킬 것이다. 결론적으로 농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농업문제를 극단적으로 심화시킨 한국자본주의 전체에 대해 반대하여 투쟁하는 것 이외에 길은 없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농업문제의 해결은 사회주의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부르주아개량책으로는 농업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처럼 몰락 위기에 처한 소농에게 소부르주아개량책을 제시하는 것은 죽어가는 자에게 진통제를 제공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회주의자들은 몰락위기에 처한 소농들에게 현실의 모순을 그대로 폭로하고 또한 그들의 희망은 오직 사회주의혁명을 향해 노동자계급과 함께 투쟁하는 것에 있음을 당당하게 밝히고, 이들이 투쟁에 함께 할 것을 적극적으로 선전, 선동하고 조직해야 한다. 사회주의자들은 도시뿐만 아니라 농촌을 사회주의혁명투쟁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한국에서의 농업문제에 대해 사회주의자들이 가져야 할 태도의 핵심이자 요체이며, 동시에 이 글이 주장하는 내용의 핵심이기도 하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1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미 주]</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1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 이 때문에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산업 전체에서 차지하는 공업의 비중은 비약적으로 커지는 반면, 농업의 비중은 작아지며, 생산력의 증대에서 농업과 공업은 커다란 격차를 보인다. 가치산출량, 노동인구비율 모두에서 농업의 비중은 점점 작아진다. 자본주의가 독점단계에 이르면서 이 격차는 더욱 증폭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2) 농업에서의 물적 생산조건은 제조업과 광업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보다 더 자연적인 조건의 성격을 갖는다. “회전기간의 장단이 진정한 노동기간[즉, 시장에 나갈 생산물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기간]에 의존하는 한, 그 장단은 각종 투자의 제 각기 주어진 물적 생산조건에 달려 있으며, <strong>이 생산조건은 농업에서는 자연적 생산조건의 성격을 보다 많이 띠고 있고</strong> 제조업과 채취산업에서는 생산과정 자체의 사회적 발전에 따라서 변화한다.(강조는 인용자)”(「자본론」2권, 366, 367쪽).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로 인해 노동기간과 생산기간의 불일치가 크고, 노동기간도 상대적으로 길다. 때문에 자본의 회전에 많은 제약이 가해지고 이는 자본의 운동에 제약을 가한다. 이것이 농업에서 자본주의적 발전이 느린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자세한 내용은 「자본론」2권 제2편 자본의 회전 참조할 것. 그러나 주의할 것은 이러한 농업에서의 물적 조건이 결코 부르주아경제학자, 수정주의자, 기회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자본주의의 발전과 다른 발전법칙이 농업에서 관철되게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맑스 역시 농업에서 자연이 갖는 역할을 충분히 인식하였지만 이들처럼 잘못된 주장은 하지 않았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3)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농업의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이론은, 힘머씨가 옹호하는데, 정말로 전세계 부르주아 교수들과 부르주아민주주자들, 또한, 그들과 똑같은 부르주아민주주의자들의 최신 부류인 노동운동내 기회주의자들 다수의 이론이다. 이 이론이 부르주아사회 전부가 그 아래에서 허덕이는 환상, 몽상, 기만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레닌,「 농업에서의 자본주의의 발전을 지배하는 법칙들에 대한 새로운 자료」, 1916)</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4) 이 당시만 해도 카우츠키는 아직 맑스주의적 입장에 서서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5) 정기환는 농지와 달리 가축사육두수의 대농으로의 집중은 이미 인정하고 있다. “일반 경종농업에서 영세농가가 경작해오던 농지가 대농층으로 집중되지 못한 것과는 달리 양돈과 양계 등 축산부문에서는 가축사육두수의 집중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 반면 1,000두 이상을 사육하는 양돈 농가의 비율은 1981년도에 0.016%였으나 1992년도에는 0.52%로 증가하였으며 이들이 사육하는 가축수의 비율은 1981년도의 15.1%에서 1992년도에는 24.2%로 증가하였다. …… 양돈과 양계의 경우 사육규모의 대형화와 사육 두수의 집중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즉, 양돈의 경우 10.0%의 농가가 81.8%의 가축을 사육하고 있으며 양계의 경우는 3.0%의 농가가 전체 가축수의 97.9%를 사육하고 있다.” (79, 82쪽)</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6) 이러한 정기환의 판단은 바로 앞의 주에서 인용한 자신의 글과도 모순된다. 그는 축산에서 이미 자본주의가 확고하게 자리잡은 것을 사실상 인정하지 않았던가? 전반적으로 정기환의 글은 산만하고 일관성이 없는데, 이는 정기환의 글이 자기 주장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성되지 못한 것을 반영하는 측면도 있겠지만 보다 큰 이유는 그가 현실의 변화를 아직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여 이를 일관성있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의 글을 절충적인 내용으로 가득차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7) 이들과 이들의 자제들이, 6, 70년대 대규모로 형성되는 도시에서의 산업프롤레타리아트의 주력이 되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8) 소농은 소규모의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점에서 노동자와 구별된다. 때문에 노동자는 자신이 창출한 가치 중 임금에 해당하는 부분만 받고 그 나머지는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것과 달리 소농은 원리적으로는 자신이 창출한 가치 전체를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에 비해 열악한 위치에 있는 소농은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이 경우에 소농은 이를 감수하며 생산하고 판매한다. 더 열악한 위치에 몰리면 소농은 ‘가상적으로’ 임금에 해당하는(소농은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임금으로 표현하는 것은 가상적인 것이다) 부분도 자기 것으로 하지 못하는 것을 감수한다. 즉, 자신의 재생산비 이하도 감수하고 저소비와 과도노동으로 생존해간다. 그래서 부르주아 경제학자와 수정주의자, 기회주의자들이 주장했던 소농의 유리성, 생명력은 소농의 비참한 처지를 아름다운 것으로 치장한 왜곡에 불과하다. 버티는 것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 소농은 자신으로부터 탈출, 즉, 몰락한다. 한국자본주의는 열악한 소농을 수탈하고, 한계지점으로 몰아넣어 계통적으로 몰락시켰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9) 한국에서 중농을 어느 정도의 경작규모로 대략 구분해야 하는지가 문제가 된다. 관변 경제학자들의 경우 이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고 농가 계층 분석을 하고 있다. 어느 경제학자는 2ha이상을 대농으로 간주하고 어느 경제학자는 3ha이상을 대농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과 동부독일과 달리 전통적으로 소농의 비중이 컸던 프랑스 등에서도 최소한 10ha 이상 정도는 되어야 대농으로 분류한다. 상대적으로 경지면적이 작은 한국의 조건을 고려하더라도, 3ha 이상을 대농으로 분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때문에 한국에서 중농으로 분류되는 2∼3ha의 계층은 사실상 소농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0) 한국자본주의는, 이제 고령으로 농촌을 떠날 수도 없는 수십만의 고령 영세소농이 향후 조용히 소멸해갈 것을 계산에 넣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와 같은 농업 경영주의 연령 분포하에서 앞으로의 농지유동화를 어떻게 전망할 수 있는지를 검토하기로 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lt;표5-7&gt;은 2000년 농업총조사에서 경지규모별로 농업경영주 연령에 따른 농가의 분포를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대체적인 경향은 영세농 계층에서 고령농가가 분포하며, 대농일수록 젊은 층이 분포한다는 점이다. 즉, 1ha 미만 계층에서는 40대 이하가 21%인 반면 60대 이상은 57%를 차지하고 있으며, 60대 이상의 농가 비중은 1∼2ha 계층이나 2∼3ha 계층에서 각각 49%와 36%를 차지하고 있다. 반면에 40대 이하의 농가 비중은 3∼5ha 계층에서 42%, 그리고 5ha 이상 계층에서 53%를 차지하고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한편, 영세고령농가의 은퇴는 농지유동화를 위한 청신호이기도 하다. &lt;표5-8&gt;에서 집계한 바와 같이 2000년 당시 60세 이상 경영주의 보유농지는 65만 ha(그중 70세 이상은 15.8만ha)에 달한다. 특히 60세 이상 ‘독신+부부’나 단독 농가의 보유 농지는 41만 ha로서, 이들 고령 경영주는 2010년 무렵까지 자연 은퇴하게 될 것이므로 앞으로 농지 유동화가 빠르게 진전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김정호, 김태곤, 김배성, 이병훈, 「1990․1995․2000 농업총조사에 의한 농업구조변화분석」, 77, 78쪽)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1) 1990년 40.4%, 1995년 43.4%, 2000년 34.8%, 2005년 37.4%</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2) 김정호, 김태곤, 김배성, 이병훈, 「1990․1995․2000 농업총조사에 의한 농업구조변화분석」, 99, 100쪽, 한국농촌경제연구원</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3) 같은 책, 98, 99쪽</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4) 경작규모 만으로는, 집중화의 정도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기계의 사용정도 등을 종합하여야 집중화의 정도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 이 점을 전제로 논농사, 밭농사에서 경작면적만으로 집중화의 정도를 대략적으로 파악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5) 물론 기계화의 진행을 감안할 경우, 고용노동의 증가율은 그렇지 않을 경우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작아질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6) “농촌의 노동하는 인구의 이 그룹(반프롤레타리아트-인용자)은 모든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매우 많은 수이다; 그 존재와 특별한 지위는 부르주아지들의 대변자들과 제2인터내셔널에 속하는 황색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노동자들을 교묘하게 속이는 것에 의해, 부분적으로 소부르주아적 견해의 관례에 맹목적으로 굴종하고, 이 그룹을 “농민” 대중과 한 묶음으로 처리하는 것에 의해 과소평가된다.”(레닌, 「농업문제에 대한 테제 예비 초안」, 1920)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7) 엥겔스,「프랑스와 독일에서의 농민문제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8) 레닌, 「농업문제와 “맑스 비판가들”」, 1901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9) 소련에서의 농업집단화는 반면교사의 사례로 들어야 할 정도로, 전형적으로 이러한 원칙을 훼손한 경우이다. 여기서는 이 점만을 언급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20) 한국에서 소농을 경작면적 5ha 미만으로 하든, 3ha 미만으로 하든, 아니면 2ha 미만으로 하든, 전체 농가에서 소농이 차지하는 비율은 2005년 현재 최소 85% 이상이다. 중농을 5∼10ha로 할 경우, 소농, 중농, 대농의 비율은 97.4%, 2.13%, 0.49%이고, 3∼5ha로 할 경우, 92.57%, 4.83%, 2.62%, 2∼3ha로 할 경우, 85.14%, 7.43%, 7.45%이다. 이 글에서는 잠정적으로 중농을 2∼3ha 규모로 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21) 레닌, 「농업문제에 대한 테제 예비 초안」, 1920</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22) 2005년 농업총조사 자료에 의하면 경작규모 7ha 이상 농가가 14,993, 10ha 이상 농가가 6,106이다. 서유럽식의 기준으로도 대농은 2005년 현재 이미 6,106 농가가 존재한다.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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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대자본에 의한 소상인의 몰락과 사회주의자의 태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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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2 May 2011 01:43:42 +0000</pubDate>
		<dc:creator>강령토론</dc:creator>
				<category><![CDATA[「강령토론」호수별 분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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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이 상 진 (노동해방실천연대(준) 회원)</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1/05/24013452_IMG_0636.jpg"><img class="alignleft size-medium wp-image-1090" title="24013452_IMG_0636" src="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1/05/24013452_IMG_0636-300x200.jpg" alt="" width="300" height="200" /></a>소상인의 몰락이 심각한 상황이다. 불과 10여년 만에 우리 주변에 동네 서점1)들이 문을 닫았고, 동네 제과점2)들도 다수가 대기업 프렌차이즈 제과점으로 바뀌었다. 가게를 새로 여는가 싶으면 어느새 간판을 바꾸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최근에는 기업형 슈퍼마켓인 SSM(Super SuperMarket)3)이 소상인의 골목 상권까지 침범하면서, 소상인들의 생존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이미 지난 1996년 유통시장의 개방과 함께 곳곳에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꾸준히 진행된 상황이었지만, 이제는 대형마트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기업형 슈퍼마켓이라는 SSM이 들어서서 더욱 빠른 속도로 소상인들을 몰아내고 있는 것이다. SSM이 들어오면 어차피 경쟁이 안되기 때문에, 이에 반대하여 생존권을 지키려는 소상인들의 투쟁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소상인들이 SSM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농성을 하거나 분신을 하는 상황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span></p>
<p><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p=1075" class="more-link">Read more on 대자본에 의한 소상인의 몰락과 사회주의자의 태도&#8230;</a></p>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이 상 진 (노동해방실천연대(준) 회원)</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1/05/24013452_IMG_0636.jpg"><img class="alignleft size-medium wp-image-1090" title="24013452_IMG_0636" src="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1/05/24013452_IMG_0636-300x200.jpg" alt="" width="300" height="200" /></a>소상인의 몰락이 심각한 상황이다. 불과 10여년 만에 우리 주변에 동네 서점1)들이 문을 닫았고, 동네 제과점2)들도 다수가 대기업 프렌차이즈 제과점으로 바뀌었다. 가게를 새로 여는가 싶으면 어느새 간판을 바꾸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최근에는 기업형 슈퍼마켓인 SSM(Super SuperMarket)3)이 소상인의 골목 상권까지 침범하면서, 소상인들의 생존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이미 지난 1996년 유통시장의 개방과 함께 곳곳에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꾸준히 진행된 상황이었지만, 이제는 대형마트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기업형 슈퍼마켓이라는 SSM이 들어서서 더욱 빠른 속도로 소상인들을 몰아내고 있는 것이다. SSM이 들어오면 어차피 경쟁이 안되기 때문에, 이에 반대하여 생존권을 지키려는 소상인들의 투쟁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소상인들이 SSM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농성을 하거나 분신을 하는 상황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상황에서 자본가정권은 2010년 말 유통법4), 상생법5)이라 불리는 법안을 통해 재래시장 500m이내 SSM을 금지하고, 가맹점 형태의 SSM 또한 규제대상으로 포함시키는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문제는 이것이 미봉책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미 상생법이 통과되기 전인 2009년도와 2010년도 상반기에만 300여개가 넘는 SSM이 들어선 상황이다. 또한 이 두 법률이 통과된 이후에는, 이 두 법률이 대형마트와 SSM에 대한 규제만을 담고 있기 때문에 변종 SSM(예를 들어 편의점형 슈퍼마켓) 등 새로운 방식으로 소상인들을 몰아내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다. SSM입점에 대해 사업조정권고가 내려지더라도 무시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6) 이처럼 대자본은 어떤 편법을 써서라도 골목 상권을 치고 들어오려고 하고, 이러한 상황에서 소상인들은 상생법, 유통법의 통과로도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span id="more-1075"></span></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얼마 전 한참 논란이 되었던 이마트 피자는 대자본이 어떻게 소상인을 몰락시킬 수 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이마트 피자는 다른 영세 피자점들보다 가격 대비 높은 품질을 앞세워 주변 피자가게 소상인들을 공격했다.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은 대기업이 ‘피자로 동네가게 울리는 짓 하지마라’며 이마트 피자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서민들이 저렴하게 드실 수 있는 맛있는 피자를 개발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한 번 드셔보시고 말씀해주세요.” “문제의 핵심은 최종소비자가 좋은 상품을 싸게 손쉽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유통업의 사명이기도하고요.” “요즘 마트가시면 떡볶이 오뎅 국수 튀김 등 안파는게 없죠 근데 특히 피자가 문제인가요.”</span></p>
<p><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본주의의 정신’을 너무나 잘 표현한 말이다. 값싸고 좋은 제품을 대량으로 만들어 이윤을 남기는 것이 자본주의인데 왜 시비를 거냐는 것이다. 소상인이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고, 정당한 경쟁의 결과인데 무슨 문제가 있냐는 태도다. 한술 더 떠, 이마트 피자를 가지고 비판하는 것을 ‘유통업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더 나아가서는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비판하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반면 이에 대한 대응은 대자본이 도덕적으로 너무한 것 아니냐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다. 대기업의 영역이 있고, 소상인의 영역이 있는 것인데 너무하다는 것이다. 영세 자영업자가 살아야 지역경제가 산다는 논리로 영세 자영업자에 대한 지원을 이야기 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소수의 자본가들이 유통시장 자체를 독점하고 있다는 문제로까지 나아가고 있지는 않다. 이러한 인식에서 적당히 나온 대책이 바로 유통법과 상생법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점점 더 생산과 유통이 집중되어 사회화되고 있는데, 이 거대한 흐름을 몇몇 개의 법안으로 막아낼 수 있는 것인가는 매우 회의적이다. 그렇다면 소상인은 자본주의 하에서는 어차피 몰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인데, 소상인을 보호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인가 하는 반문도 생겨날 수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물음에 대해 사회주의자의 태도는 무엇이어야 하는지 밝히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2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1. 대자본에 의해 몰락하고 있는 소상인</strong></span></p>
<p><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에 앞서 먼저 흔히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는 자영업자와 소상인이 어떠한 계층인지에 대해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현재(2010년 8월 기준) 한국에는 전체 취업인구 약 2400만 명 중 1700만 노동자를 제외한 700만명 정도가 임금이 아닌 형태로 소득을 버는 ‘비임금근로자’로 존재하고 있다. 비임금근로자는 자영업자와 임금을 받지 않는 가족구성원(무급가족봉사자)로 나누는데, 100만 명 정도의 무급가족봉사자를 제외하면 자영업자의 규모는 대략 600만명 정도로 볼 수 있다. 자영업자는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고용주’와,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고 혼자서 일하거나 무급가족봉사자의 도움을 얻는 ‘자영자’로 구분할 수 있다. 자영업자는 규모를 떠나 생산수단을 자신이 직접 소유하고 있는 계층이며, 계급적으로 보면 대규모의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자본가계급, 소규모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소부르주아 계급 모두를 포함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영업자를 산업별로는 농림수산업, 광공업, 건설업, 도소매·음식숙박업, 전기·운수·통신·금융업, 사업·개인·공공서비스업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우리가 이 글에서 주로 다루고자 하는 소상인은 주로 도소매, 음식숙박업, 개인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자영업자 중, 자본규모가 작은7) 자영업자이며 그 규모는 현재 대략 28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8)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식당, 슈퍼, 여관, 제과점, 이용/미용실, 세탁소, 목욕탕, 노래방, 피시방 등의 주인이 바로 소상인이다. 아래에서는 최근 소상인이 구축되고 있는 상황과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힐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strong>(1) 소상인이 몰락하고 있다.</strong></span></p>
<p><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소상인이 몰락하고 있는 상황은 소상인의 규모변화를 통해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상인에 대한 직접적인 통계자료 자체가 부족하다는 한계 때문에, 통계청에서 발표하는 자영업자 통계를 통해 소상인의 몰락을 살펴보고자 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소상인을 포함하는 도소매, 음식숙박업, 개인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자영업자(여기서부터는 이러한 자영업자들을 상인으로 통일하여 부를 것이다)의 규모는 표1에서 보듯 2007년 343만 명에서 2010년 307만명으로 약 36만명이 줄어들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이들 중 90%정도가 소상인인데, 이를 감안하여 해석하면 줄어든 36만명 중 대다수가 소상인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기간 사이에 새로 소상인들이 생겨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보다 훨씬 많은 소상인들이 몰락하고 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9)</span></p>
<p style="text-align: center; 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1/04/table2.jpg"><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1031" title="table2" src="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1/04/table2.jpg" alt="" width="365" height="181" /></a></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다른 방식을 통해서도 소상인의 몰락은 뚜렷하게 알 수 있다. 아래 표2에서 알 수 있듯이, 상인들 중 고용원이 있는 상인은 같은 기간 2만 7천명이 줄어드는데 그친 반면, 고용원을 두지 않는 경우 2007년부터 2010년 사이에 33만 2천명이 줄어들었다. 앞서 5인 미만의 고용원을 둔 상인들을 소상인이라고 했는데, 이 기준에 따르더라도 상인들 중에서도 영세한 상인, 소상인의 몰락이 뚜렷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span></p>
<p style="text-align: center; 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1/04/table3.jpg"><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1032" title="table3" src="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1/04/table3.jpg" alt="" width="371" height="181" /></a></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소상인들의 소득수준 또한 매우</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열악하다. 여기서도 소상인들만의 직접적인 통계가 부족하여, 중소기업청에서 조사한 소상공인 통계를 참조하면, 소상공인 월평균 순이익은 149만원으로 조사되고 있고,10) 아래 표3에서 보듯 적자인 경우도 26.8%를 차지하고 있다. 소상공인은 소상인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소상인들의 소득수준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span></p>
<p style="text-align: center;"><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1/04/table4.jpg"><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1033" title="table4" src="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1/04/table4.jpg" alt="" width="401" height="126" /></a></p>
<p style="margin-bottom: 11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strong> </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1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strong>(2) 대자본에 의해 소상인들이 구축되고 있다.</strong></span></p>
<p><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앞서 살펴보았듯이, 한국에서 소상인은 자신들의 영역에서 구축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소상인들이 몰락하고 있는 원인은 무엇인가?11) 아직도 소상인들은 자신들의 몰락을 주변 상인들과의 경쟁으로 매출이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12) 하지만 전체적인 흐름으로 볼 때, 소상인의 몰락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대규모의 독점자본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예로 든 서점, 제과점, 피자점, 슈퍼마켓이 대표적인 경우이며, 현재 주유소 등도 대형마트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먼저 대형마트들이13) 재래시장의 소상인들을 어떻게 몰락시키는지 살펴보자. 대형마트와 재래시장은 판매품목이 겹치기 때문에 대형마트의 매출액 증가는 곧바로 재래시장의 매출액 감소로 그대로 이어진다. 실제로 재래시장의 매출액은 2002년 41.5조원에서 2008년 25.9조원으로 15.6조원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 매출액은 2002년 17.4조원에서 2008년 30.7조원으로 13.3조원이 증가하였다. 2007년, 2008년 대형마트와 재래시장의 매출액이 비슷해졌는데, 당시 대형마트가 전국에 400개, 재래시장은 전국에 1600개 정도이므로, 이는 대략 대형마트 1개가 추가로 들어서면 4개의 재래시장이 망하는 구조로 볼 수 있다. 또한 고용이라는 면에서 살펴보면 2007년 기준으로 대형마트에 고용된 노동자가 12만 명, 재래시장에 종사하는 자영업자가 36만명 정도인데, 대형마트 1개가 추가로 들어설 때마다 300개의 일자리가 생기지만, 반대로 900명의 자영업자는 몰락한다는 대략적인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이처럼 대형마트의 증가는 그 자체로 재래시장의 소상인을 구축하는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다.</span></p>
<p style="text-align: center; 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1/04/table5.jpg"><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1034" title="table5" src="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1/04/table5.jpg" alt="" width="355" height="176" /></a></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와 더불어 더욱 중요한 것은 대형마트 상당수가 빅3라고 불리는 신세계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 등 대자본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대형마트 매출기준으로 신세계 이마트 32%, 홈플러스 25%, 롯데마트 14%로 전체 대형마트 매출액의 71%를 세 개의 대형마트가 점유하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런데 대형마트가 포화상태14)에 이르자 이제는 중소유통업까지 진출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기업형 슈퍼마켓이라 불리는 SSM이다. 2001년 이후 증가한 SSM 700여개 중 420여개가 2007년 이후 증가하는 등, 최근 들어 매우 급증하고 있다. 2006년부터 2009년까지 빅3기업의 점포수는 3배(223개), 매출액은 평균 2.2배(115.6%)가 증가하였다. 특히 가장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홈플러스 익스프레스의 매출액은 이 기간 동안 4.6배(355.9%)가 증가했다. 이에 따라 빅3 기업의15) 전체 슈퍼마켓 시장 점유율도 높아져 2006년 6.2%이던 점유율이 2009년에는 11.2%를 기록했다. 반면, 동네 슈퍼마켓의 점포수와 매출액은 급감하였다. 2009년 소형 슈퍼마켓(매장면적 150㎡이하)의 점포수는 7만 9천 2백 개로 2005년에 비해 2만개 이상이 줄어들었으며, SSM 인근 소매 점포들의 매출액은 평균 48%가 감소했다. 이미 빅3 기업을 중심으로 한 10개의 대형유통회사들이 8만개의 소형 슈퍼마켓를 비롯한 수십만개 소매점포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상황이며, 수많은 중소상인들의 생계 터전이 소수의 독점자본에 의해 사라져 버렸다. 특히 SSM은 동네슈퍼 등 중소유통업과 경쟁관계가 있는 것으로, SSM의 확대는 곧바로 동네슈퍼 등 소상인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있음은 너무나 명확하다.16)</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2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2. 소상인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태도</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한국에서 소상인이 급속히 몰락하고 있다. 핵심 원인은 자본주의 하에서 대자본이 소상인의 영역까지 확대되어 독점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유통부분에서 대형마트와 SSM으로 대표되는 독점자본의 확대강화와 이로 인한 소상인의 몰락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생계를 위협받으며 몰락하고 있는 소상인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태도는 무엇이어야 하는가?</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1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strong>(1) 몰락하는 소상인에 대한 자본가와 사민주의자의 대안은 임시방편이다.</strong></span></p>
<p><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앞서 각주 11에서 본 이헌재 전 부총리의 말에서도 확연히 드러나지만, 자본가 정권은 소상인의 몰락을 불가피하게 치러야 하는 일시적인 고통정도로 여기고 있다. 신세계 이마트 정용진 부회장과 같이 자본가들은 대기업이 품질 좋은 제품을 값싸게 파는 것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무슨 문제냐며 펄쩍 뛰고 있다. 이처럼 자본가계급은 한국의 소상인의 비율이 선진국에 비해서 높고, 경영에 있어서도 영세하고 비효율적이며 정보력, 영업기술적인 측면에서도 뒤떨어지는 것 등을 근거로 소상인을 구조조정의 대상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를 통해 소상인들은 자신들의 영역에서 구축되고, 이 영역은 독점자본의 차지가 되고 있다. 이처럼 이들은 오로지 자본의 이윤확대라는 관점에서 소상인들의 몰락을 가속화하고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하지만 너무 갑작스런 소상인의 몰락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적당한 규제를 만들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유통법과 상생법이었다. 또한 소상인의 갑작스런 몰락은 선거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아직까지 보수정당이라 불리는 한국의 자본가정당 상당수 조직력이 동네 중소상인들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정치공학적인 판단이 그나마 규제조치라는 생색이라도 취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한편 사민주의자17)들은 소상인의 몰락에 대해 그 근본원인을 정확히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소상인의 몰락이 자본주의에서 대자본의 독점강화라는 원인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은 얼버무리고 있으며, 소상인의 몰락을 가속화하는 이명박 정권의 무분별한 규제완화는 비판하지만 정작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은 빠져 있다. 자본주의를 극복하겠다는 전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소상인의 상권까지 넘보는 대자본의 횡포라는 도덕적 정서에 기대어 대책을 제시하는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민주노동당이 제시하고 있는 대형마트와 SSM에 대한 허가제는 현재 개정된 유통법, 상생법 보다는 강화된 법안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이것으로 소상인의 몰락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서두에서 이야기 했듯이, 이미 봇물 터지듯 늘어난 SSM으로 인해 소상인의 몰락은 계속되고 있고, 변종 SSM등의 방식으로 자본은 계속 소상인의 영역을 침투해 오고 있다. 허가제의 도입은 대자본의 대형마트와 SSM의 신규진출을 완전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조건을 부과할 뿐이기 때문에,(이 조건 또한 자본가계급의 이윤확대 논리에 의해 약화될 가능성이 크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자본이 소자본을 구축하는 상황은 다시 강화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허가제 도입은 소상인의 몰락을 잠시 유예하는 정책일 뿐인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또한 사민주의자들은 소상인의 몰락에 대한 지원대책을 제시하는데 이는 소상인의 몰락을 막을 수 없다. 소상인들의 높은 신용카드 수수료를 대형마트 수준으로 인하한다고 해도 자본주의적 대경영과의 경쟁에서 이겨내기 어렵고, 업종전환을 지원하거나 고금리 사채를 벗어나기 위해 융자를 해 주는 것도 일시적인 완화책은 될 수 있지만 대자본에 의해 전반적으로 소상인이 구축되는 상황에서는 가계빚만 늘리는 것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에 더해 사민주의자들은 소상인을 보호하기 위해 대기업과 중소유통기업의 균형발전과 지역경제활성화라는 기준을 종종 제시하는데, 이미 한국의 경제가 독점자본에 좌지우지되는 상황에서 이를 그대로 두고 균형발전과 지역경제활성화라는 전망 자체를 제시하는 것은 환상을 불어넣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처럼 사민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소상인의 몰락의 원인이 자본주의의 독점강화에 있는데도 이를 문제 삼지 않기 때문에, 그 대책 또한 임시방편적이며 전망 또한 환상적인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1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strong>(2) 사회주의자는, 자본주의에서 대자본의 독점강화로 소상인이 몰락하고 있기 때문에, 소상인이 노동자계급의 입장에 서서 자본주의와 투쟁할 때 자신의 전망을 확보할 수 있음을 분명히 하고, 소상인이 노동자계급의 입장에 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strong></span></p>
<p><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미 앞에서도 보았듯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상인의 몰락은 단순히 대자본의 횡포라는 도덕적 문제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본질적 문제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미 150여 년 전 공산당선언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대자본과 경쟁에서 소상인들이 이겨내지 못해 구축되고 있는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지금까지의 소중간 신분들, 즉, 소공업가들, 소상인들과 소금리 생활자들, 수공업자들과 농민들 등의 이 모든 계급들은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하는데, 이는 일부는 그들의 소자본이 대공업의 경영에 충분치 않고 더 큰 자본가들과의 경쟁을 이겨내지 못하기 때문이며, 일부는 그들의 숙련이 새로운 생산 양식들에 의해 무가치하게 되기 때문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현대 문명이 발전한 나라들에서는 새로운 소부르주아층이 형성되었는바, 이들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 사이를 떠다니며 부르주아 사회의 보완적 부분으로서 부단히 새로 형성되고 있지만, 그 구성원들은 경쟁에 의해서 계속해서 프롤레타리아트로 내팽개쳐지고 있으며, 그리하여 대공업이 발전해 나감에 따라 그들은 어떤 시점, 즉 자기들이 현대 사회의 독자적 부분으로서는 완전히 소멸되고 상업, 제조업, 농업에서 노동감독과 고용인들로 대체되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음을 보게 되기까지 한다.” (맑스, 「공산당 선언」)</span></p>
<p><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따라서 사회주의자는 소상인에 대해 다음과 같은 태도를 가지고 투쟁해야 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첫째, 소상인의 몰락은 대자본의 독점강화라는 자본주의 속성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다. 이렇게 몰락한 소상인들은 빈곤층이 되거나, 노동자계급의 일원으로 전환되며, 이러한 상황은 향후 확대 강화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대자본을 그대로 두고 몇몇 규제법안을 만든다고 해서, 또는 일시적인 금융지원을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소상인들이 스스로를 해방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사회주의로 나아가려는 노동자계급의 입장에 서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임을 제시하고, 소상인들이 노동자계급의 입장에 설 수 있도록 설득하고 투쟁해야 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둘째, 유통부분 대자본은 사회화한다. 한국에서는 생산뿐만 아니라 유통에서 사회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진척되어 있고, 이는 사적소유와 모순이 되고 있다. 따라서 유통자본을 사회적 소유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소상인들의 경우, 협동조합으로 조직하여 대경영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대경영이 문제가 되는 것은 대경영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을 더욱 착취하여 이윤을 소수 자본가가 독차지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소상인이 소소유에 기초한 개인경영에 매여 있는 상황에서는 자본주의적 대경영에 의해 구축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은 소상인들에게 자본주의 방식의 대경영이 아니라 공동의 이해에 기반한 대경영을 가능하게 하는 협동조합을 대안으로 제시해야 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셋째, 첫째, 둘째의 기본입장을 견지하면서, 대자본에 맞선 소상인의 생존권 투쟁을 지지, 엄호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소상인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올바른 태도가 필요한 것은, 소상인의 문제가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사회문제로 드러났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중간계급(소부르주아계급) 중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280만 소상인을 노동자계급의 동맹세력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파리콤뮨이 실패한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인구의 다수를 차지했던 중간계급인 농민을 파리 노동자의 동맹세력으로 만들지 못했던 것에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상기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2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마치며</strong></span></p>
<p><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유통법과 상생법이 통과된 지금도 소상인들이 투쟁하고 있다. 통과된 법 자체도 문제가 있지만, 법을 무력화시킬 자본가들의 움직임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소상인들의 투쟁 또한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이처럼 최근 몇 년 사이 두드러지게 문제가 되고 있는 소상인의 몰락에 대해 그 원인을 정확히 하고, 사회주의자의 태도를 정확히 한다는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그 이유는 노동자계급이 중간계급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가지지 못하면, 소상인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소소유와 개인경영을 옹호하는 등 현실과 쉽게 영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 글에서는 소상인의 몰락은 다른 원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SSM 등 대자본의 독점강화로 인해 나타나고 있는 것임을 밝혔다. 이에 대해 자본가세력은 대자본의 이해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유통법, 상생법이라는 법제도를 통해 일부 규제하는 임시방편에 그치고 있으며, 그 조차도 철저하게 집행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소상인의 몰락을 가속화하고 있다. 또한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시민단체 내의 사민주의 세력은 대자본의 독점강화, 즉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정확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규제법안의 마련과 균형발전, 지역경제활성화 등을 명분으로 한 소상인 지원방안에 머무르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대책은 소상인의 몰락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아니라, 몰락을 잠시 연기시키는 방안에 불과한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마지막 결론으로 소상인의 몰락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태도를 세 가지로 밝혔다. 첫째는 자본주의의 독점강화가 소상인 몰락의 근본 원인임을 분명히 하고, 소상인이 노동자계급의 입장에 설 때에만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 둘째로 유통부분 독점자본은 사회화하고, 소상인의 경우에는 협동조합으로 조직(협동조합으로의 전환은 충분한 지원과 모범의 형성 등 설득의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하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점, 셋째로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상인들에 대한 자본의 직접적인 횡포에 맞선 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점을 이야기 하였다. 소상인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확립하여 사회주의 실천을 더욱 풍부히 해 나가자!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미 주]</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 “조사에 따르면 1998년 4천8백여 개였던 전국의 서점은 2007년 2천여 개로 줄었다. 또한 2003년부터 2007년에 걸친 5년 간 지역별 서점은 서울을 비롯해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 등 대도시 중심으로 현저하게 감소했다. 실제로 서울 중랑구는 IMF이후 40군데였던 서점이 9개로 감소했고, 울산 지역은 10년 동안 100여 개 서점이 문을 닫았다고 한다. 이는 대형서점과 온라인 서점이 서점가를 장악해 동네 소규모 서점이 심각한 타격을 입으면서 빚어진 결과로 분석된다. 소위 동네서점이라 불리는 33㎡(약 10평) 내외 규모의 서점이 2003년 9백여 개에서 2007년 1백30여 개로 약 7배 감소했다는 통계는 이러한 분석을 충분히 뒷받침하는 근거다.” (독서신문, 2009년 10월 30일)</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2) “지난해 9월 대한제과협회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02년에 비해 자영제과점은 전국적으로 1천665개소가 문을 닫은 반면 파리바게뜨 등의 프랜차이즈 제과점은 357개소가 증가하는 등 갈수록 자영제과점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비대위는 맛과 기술 등으로 인한 내적 요인이 아닌, 제휴 카드를 등에 업은 프랜차이즈 제과업체의 무차별한 할인 공세가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월간식당, 2006년 1월 9일)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3) 일반슈퍼마켓과 달리 기업형 슈퍼마켓인 SSM은 대부분이 대기업이 직영하고 있으며, 점포크기도 330제곱미터에서 3000제곱미터에 이르는 중대형으로 일반슈퍼마켓보다 크며, 대기업 직영이라는 이점을 이용해 물류나 서비스에서 일반슈퍼마켓과 차별을 보인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4) 유통산업발전법 제8조 : 시장, 군수, 구청장은 대규모 점포 등의 위치가 전통상업보존구역(전통상점가의 경계로부터 500미터 이내의 범위)에 있을 때에는 등록을 제한하거나 조건을 붙일 수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5)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 제32조 : (대기업, 대기업 직영 소매점포, 대기업이 지배하는 중소기업 등이) 사업을 인수, 개시 또는 확장함으로써 해당 업종의 중소기업 상당수가 공급하는 물품 또는 용역에 대한 수요를 감소시켜 경영안정에 나쁜 영향을 미치거나 미칠 우려가 있다고 인정할 때에는 중소기업청장에게 사업조정을 신청할 수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6) 2011년 3월 31일, 지난해 11월 유통법과 상생법이 통과된 이후 처음으로 사업조정대상인 SSM매장(홈플러스 테스코)이 서울 노원구에서 오픈하였다. 홈플러스는 주민들이 사업조정을 신청하자, 직영점이 아닌 가맹점 형태로 재추진을 했고, 서울시가 다시 일시정지 권고를 내렸지만, 권고는 구속력이 없는 행정조치인데다 지분 50%이상을 개인사업자에게 양도했기 때문에 상생법의 규제대상에 해당되지 않아 문제가 없다는 이유로 매장을 열었다고 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7) 중소기업청에서 발행한 ‘2010년 전국 소상공인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소상공인은 ‘소기업 중 상시근로자수가 5인 미만(도소매업, 음식업, 숙박업, 서비스업 등), 혹은 10인 미만(제조업, 건설업 및 운수업)인 사업자를 말함’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한다면 소상인은 도소매, 음식숙박업, 개인서비스업에 종사하며 상시근로자수가 5인 미만인 자영업자로 볼 수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8) 통계청 발표자료, ‘시도·산업·종사자규모별 사업체수, 종사자수’에 따르면, 도매 및 소매업, 숙박 및 음식점업 등에서 전체 사업체수의 약 10%정도가 5인 이상 사업체수로 집계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2010년 도소매, 음식숙박업, 개인서비스업 종사자 307.5만 명(표2 참조)의 약 10%를 5인 이상 상시근로자를 고용하는 자영업자로 판단할 수 있는데, 이를 제외한 약 280만명이 상시근로자수가 5인 미만인 자영업자, 즉 소상인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9) 국세청 통계에 따르면 2007년에만 74만 8천명의 자영업자들이 폐업을 하였고, 2008년 또한 79만 4천여 명이 폐업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0)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자영업자의 78.7%가 연매출 4800만 원 이하의 간이과세자로 파악되었고, 중소기업청 소상공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소상공인들의 매출액 대비 순이익비율은 평균 25.82%로 파악되어, 이를 단순 계산해 보면 80%에 달하는 자영업자들이 매월 103만원 미만 수익을 올린다고 할 수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1) 자본은 대자본의 이윤확대의 관점에서 이러한 몰락을 정당화하고 있다. 2004년 당시 이헌재 부총리는 ‘자영업자 과잉론’을 펴며 자영업자들도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부총리는 당시 미국 방문 때 “현재 가사 종사자를 포함해 40%대에 육박하는 자영업자 비율이 미국처럼 5%대로 낮아질 때까지는 구조적 전환기에 따르는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다”며 “미국에서 과거 작은 상점의 주인이나 농사짓던 사람이 대형 슈퍼마켓의 종업원이나 임금 노동자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이 밖에 이헌재 부총리는 당시 “자영업자가 많은 것은 경제의 고도화를 지연하고 저소득층을 형성하게 하는 원인”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자영업자들도 규모와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면 임금 노동자로 전환해야 한다고 하였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2) 중소기업청이 발행한 ‘2010년 전국소상공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소상공인 사업체의 주된 경쟁 상대를 묻는 질문에 ‘주변의 소형업체’라는 응답이 41.2%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은 ‘주변의 대형업체’가 25.0%로 뒤를 이었음. ‘인터넷 또는 TV홈쇼핑’은 4.5%였으며, ‘특별이 없다’는 응답도 28.9%로 높게 나타났음”이라고 하고 있다. 부동산등 자영업의 경우 주변의 소형업체를 주된 경쟁상대로 뽑은 반면, 소매업의 경우 ‘주변의 대형업체’가 주된 경쟁상대라고 답한 비율이 높다. 다수 소상인들은 대자본의 독점강화에 의해 소상인들이 구축되는 현상에 대해 주변 상인들과의 경쟁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3) 우리나라 유통시장은 1989년부터 외국인투자가 단계적으로 개방되어 1993년에 본격화되었다. 이후 국내 유통시장에 대형점의 출현이 가능해졌는데, 실제로 국내 유통업은 1996년 유통시장이 전면 개방된 이후 세계 1~2위의 다국적 유통그룹인 월마트나 까르푸가 등장했다. 최근에는 다시 국내 재벌그룹이 운영하는 대형유통업체로 재편되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4) 2001년 삼성경제연구소는 한국의 대형마트가 270개에 달하면 포화상태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하였고, LG경제연구원도 대형마트가 217개에 이르면 포화상태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했다. 2009년 7월 기준 우리나라 대형마트의 수는 426개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5) 2010년 6월 현재 총 787개의 SSM(10개 대형유통회사 기준)이 전국에 개설되었다. 특히 SSM업계의 빅3라 불리는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롯데슈퍼, GS수퍼의 과열경쟁으로, SSM에 대한 사업조정신청이 봇물처럼 터진 2009년 한 해 동안만 무려 200개의 SSM이 개설되었고, 2010년 상반기에도 114개의 점포가 증가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6) ‘2009년 기업형 SSM 입점이 중소유통업에 미치는 영향’(중소기업청)에 따르면 동네슈퍼 등 중소유통업 79%가 “SSM 입점후 경기가 악화되었다고”하고 있으며, SSM입점을 기준으로 1일 평균매출액은 129.3만원에서 85.2만원으로 약 34.1%가 감소했고, 1일 평균 고객수도 127.8명에서 80.8명으로 약 36.7% 감소했으며, 평균부채는 2097만원에서 2437만원으로 16.2%가 증가했다고 한다. 이 통계는 2009년 5월 기업형 SSM 3사(롯데슈퍼,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GS슈퍼), 주변 소매업체(슈퍼, 정육점, 과일/야채가게 등) 300개를 조사한 결과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7)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의 상당부분이 사민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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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8220;노동자민중의 대체권력&#8221;을 주장하는 사노준 강령초안의 문제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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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2 May 2011 01:42:25 +0000</pubDate>
		<dc:creator>강령토론</dc:creator>
				<category><![CDATA[「강령토론」호수별 분류]]></category>
		<category><![CDATA[전체토론]]></category>
		<category><![CDATA[제 6호]]></category>
		<category><![CDATA[강령토론]]></category>
		<category><![CDATA[강령토론 6호]]></category>
		<category><![CDATA[계급동맹]]></category>
		<category><![CDATA[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임무]]></category>
		<category><![CDATA[노동자국가의 중요성]]></category>
		<category><![CDATA[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6호]]></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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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황 정 규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편집위원회 편집부장)</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2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들어가며</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제 5호의 “사노준이 제출한 강령초안 비판”이라는 글을 통해, 성두현은 사노준이 3월 27일자로 제출한 “‘21c 사회주의’ 건설을 위하여[강령초안]”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 이 글은 사노준의 강령을, 우선 체계에서는 맑스주의적 강령체계를 벗어나고 있으며,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폭로로부터 시작하지 않는 반신자유주의 수준의 강령에 불과하며, 내용에서는 사회주의의 핵심적 원리적 내용들 전부가 누락되고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피상적이고 절충적이라고 비판하였다. 특히 강령의 핵심적 내용인 노동자국가의 수립 필요성을 누락시키고, 사회주의경제론을 애매하게 처리하였으며, 여성주의, 생태주의와 타협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span></p>
<p><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p=1072" class="more-link">Read more on &#8220;노동자민중의 대체권력&#8221;을 주장하는 사노준 강령초안의 문제점&#8230;</a></p>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황 정 규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편집위원회 편집부장)</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2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들어가며</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제 5호의 “사노준이 제출한 강령초안 비판”이라는 글을 통해, 성두현은 사노준이 3월 27일자로 제출한 “‘21c 사회주의’ 건설을 위하여[강령초안]”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 이 글은 사노준의 강령을, 우선 체계에서는 맑스주의적 강령체계를 벗어나고 있으며,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폭로로부터 시작하지 않는 반신자유주의 수준의 강령에 불과하며, 내용에서는 사회주의의 핵심적 원리적 내용들 전부가 누락되고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피상적이고 절충적이라고 비판하였다. 특히 강령의 핵심적 내용인 노동자국가의 수립 필요성을 누락시키고, 사회주의경제론을 애매하게 처리하였으며, 여성주의, 생태주의와 타협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렇듯 사노준의 강령초안은 사회주의정당의 강령으로서는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노동자국가의 수립을 누락한 것은 사노준의 강령초안 전체에서도 가장 눈에 띠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사노준의 강령초안에는 아주 일관되게 노동자국가라는 표현이 누락되어 있으며, 반면에 애매하기 짝이 없는 “노동자민중 권력”, “대체권력”, “노동자민중의 대체권력” 등의 표현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사회주의강령을 자처하면서 노동자국가 수립을 누락한 것은 사회주의혁명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자국가가 사회주의혁명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사회주의 사상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더 나아가 노동자국가 수립의 문제가 누락되게 되면, 강령의 또 다른 중요한 내용인,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성격 및 역사적 임무가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게 되며, 자본주의로 고통받는 다른 피지배계급이 노동자계급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며, 노동자계급이 이들에게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라는 강령의 다른 중요내용 역시 제대로 드러날 수 없게 된다. 사노준의 강령초안이 범한 문제점이 바로 이러한 것들이다. 이렇게 사회주의강령의 핵심이 다 빠진 강령은 노동자계급에게 사회주의혁명에 대해 올바로 제시하고 노동자계급의 의식을 발전시키는 역할을 하기는커녕, 노동자계급에게 더 큰 혼란만을 가중시킬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 때문에 강령에서 노동자국가를 누락하는 것은 가볍게 넘어갈 문제가 아닌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 글은, 사노준의 강령초안이 노동자국가를 누락한 것이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를 더욱 명확하게 밝히고자 한다. <span id="more-1072"></span></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2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 </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2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1. 사회주의 혁명의 핵심적인 내용인 노동자국가가 누락된 사노준의 강령초안</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1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strong> </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1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strong> </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1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strong>1) 일관되게 “노동자국가” 용어를 배제하고 “대체권력”, “노동자 민중권력”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사노준의 강령초안</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노준의 강령초안은 노동자국가를 누락하고, “노동자민중 권력”, “대체권력” 등의 표현을 일관되게 고집하고 있다. 이 강령초안에는 노동자 혁명의 첫걸음으로서 노동자국가의 수립의 내용은 “노동자 민중의 아래로부터의 투쟁”, “아래로부터의 대체권력의 창출”이라는 식으로 신조어들로 대체되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노준의 강령초안에서 노동자국가 수립의 내용을 누락하는 것이 얼마나 일관된 것인지는, 이 강령초안이 “코뮨”과 “소비에트”를 평가하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사회주의자에게, “코뮨”과 “소비에트”가 역사상 존재하였던 노동자국가의 형태라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사노준의 강령초안은 “코뮨”과 “소비에트”를 노동자국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민중의 권력”, “대체권력”의 예로 거론하고 있다. 이렇게까지 사노준의 강령초안은 고집스럽게 노동자국가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노동자민중 권력”, “대체권력”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1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strong>2) 사회주의혁명과정에서 노동자국가를 반드시 수립해야 하는 이유</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노동자국가 수립을 누락한 것이 왜 문제인지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당연히 사회주의 혁명과정에서 노동자국가의 수립이 왜 필요한지 검토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바로 이것을 알 때, 노동자국가의 수립이라는 내용을 강령에서 누락하고 이를 “노동자민중의 대체권력”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대체한 것이 단순히 용어사용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노동자국가는 패배하였지만 사리지지 않은 구 지배계급의 저항을 분쇄하는 역할을 한다.</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주의사회의 건설은 하루 밤사이에 이루어지지 않는 긴 변혁의 과정이다. 노동자계급은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노동자국가를 수립하여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고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대해 커다란 일격을 가하지만, 그것은 사회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뗀 것에 불과하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주의 혁명 이후 기존의 지배질서, 생산관계에 커다란 일격을 가하였다고 하더라도, 자본가계급은 패배를 하였을 뿐 역사적으로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다. 생산수단에 대한 국유화, 사회화가 수행되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대한 결정적인 일격이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이전의 생산관계와 계급자체가 완전히 폐지되지 못한 채 잔존하고 있을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노동자국가는 패배하였지만 소멸하지는 않은 구 지배계급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노동자국가의 필요성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맑스가 무정부주의자들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주장하였던 내용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역사적으로 무정부주의자들이 노동자국가의 수립에 대해서 공격했던 가장 큰 근거는 혁명 후 노동자국가를 수립하는 것이 새로운 지배체제를 낳을 뿐이며, 노동자의 이름으로 노동자를 지배하는 지배집단을 낳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맑스의 시대부터 이러한 비판이 존재하였는데, 이러한 입장을 전형적으로 대변한 것은 바로 바쿠닌이었다. 바쿠닌은 “프롤레타리아가 지배계급이 된다고 하면, 누구에 대해서 지배를 하겠다는 것인가?”라고 공격한 바 있다. 이러한 바쿠닌의 공격에 대해 맑스는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착취자로부터의 모든 저항을 진압할 수 있게 할 정치권력”(해방연대(준) 강령초안)으로서 노동자국가가 필요하다고 설명하였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다른 계급들, 특히 자본가 계급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들에 대해 투쟁하는 한(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가 정부권력을 획득하였을 때, 그들의 적들과 낡은 사회조직은 아직 소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강제적 수단들을, 따라서 정부의 수단을 채택해야만 한다. 그들은 그자체로 여전히 한 계급이며, 계급투쟁과 계급의 존재가 생겨나는 경제적 조건들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며, 강제적으로 길에서 제거되거나 변혁되어야 한다. 이러한 변혁과정은 강제적으로 서둘러져야 한다.”1)</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span></p>
<p style="margin-bottom: 10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 </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노동자국가는 공산주의적 생산관계의 형성과 발전에 있어서 적극적 조성자의 역할을 한다.</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노동자국가가 공산주의적 생산관계의 형성과 발전에 있어서 적극적인 조성자의 역할을 한다는 점 역시, 매우 중요한 노동자국가 수립의 의의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공산주의적 생산관계는 단순히 혁명을 통해 부르주아 국가를 폐지하고 자본주의 관계를 철폐한다고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노동자국가를 수립하고 지배계급으로 조직되어, 생산수단을 국유화, 사회화하고, 중앙집중적인 힘을 통해 생산을 재조직하고 관리해갈 때 형성될 수 있다. 생산수단의 국유화, 사회화를 실행하는 것, 사회구성원이 생산과 유통을 민주적으로 계획하고 통제하는 것, 이를 통해 사회적 필요에 입각하여 사회적 생산을 조직하는 것, 아울러 생산영역과 사회에서 노동자민주주의를 심화시키는 것 등 공산주의 생산관계의 형성과 발전에 있어서 노동자국가는 적극적인 조성자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2)</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노동자국가 수립의 의의는 「강령토론」창간호의 글에서 이미 설명된 바 있다. 성두현의 “부르주아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의 차이”라는 글은 부르주아 혁명의 특징과 비교하여 사회주의 혁명에서 노동자국가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봉건사회의 내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하여 봉건사회를 해체해들어가며 부르주아 정치혁명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봉건사회의 해체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발전에 박차를 가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부르주아혁명의 가장 급진적인 형태를 보여준 프랑스혁명은 이의 가장 전형적인 예이다. 프랑스 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봉건사회의 태내에서 서서히 발생하고 발전해왔다. 부르주아정치혁명보다 오래 전 18세기 초에 이미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발전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발전하면서 구질서와의 모순은 심화되고 구질서가 참을 수 없는 질곡으로 전화될 때 부르주아혁명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부르주아혁명은 자본주의적 발전에 박차를 가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부르주아혁명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발생하고 발전하고 있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발전에 박차를 가할 뿐이라는 점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이와는 달리 공산주의적 생산관계는 자본주의사회 내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에 반대하는 투쟁 속에서 스스로를 지배계급의 지위로 높이고 민주주의를 쟁취하며, 이 정치적 지배를 이용,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실현하여(맑스, 엥겔스, 1848, 「공산당선언」), 공산주의적 생산관계의 기본조건을 확보함으로써 비로소 발생하게 된다. 즉, 공산주의적 생산관계는 자본주의의 태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노동자국가를 수립한 후에야, 노동자계급의 의식적 실천에 의해서 비로소 발생하게 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이 점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자본주의사회의 발생, 발전과 공산주의적 생산관계, 공산주의사회의 형성, 발전이 갖는 근본적인 차이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span></p>
<p style="margin-bottom: 11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strong>3) 노동자국가를 누락한 사노준의 강령초안은 사회주의 사상의 기초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노동자계급은 스스로를 해방하기 위해서 단순히 부르주아 국가를 폐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회주의 혁명의 실현을 위해서는 노동자국가가 반드시 수립되어야 한다. 노동자국가의 수립은 노동자계급이 수행할 사회주의 혁명의 매우 중요한 내용이자, 맑스주의의 핵심적 구성요소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혁명을 지향하는 정당의 강령에 노동자국가 수립의 내용이 포함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렇기 때문에 노동자국가의 내용을 강령에서 반영하고 안하고는 단순한 용어를 넣고 빼고 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사노준은 고집스럽게 “노동자민중의 대체권력”을 주장하면서 노동자국가를 강령초안에 넣는 것에 대해 거부하고 있다. 노동자국가의 수립 필요성이 사회주의 사상의 기본 중의 기본이라는 점에서 사노준의 강령초안은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결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게다가 사회주의정당의 강령은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혁명에 대해서 올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사노준의 강령초안은 노동자국가를 수립해야 한다고 노동자들에게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민중의 대체권력”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노동자계급에게 올바른 견해를 주기는커녕 오히려 혼란스럽고 잘못된 견해를 줄 수밖에 없다. 사노준의 강령초안은 노동자들이 이 강령을 보고 얼마나 스스로가 쟁취해야할 역사적 임무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지게 한다. 사실 상 사노준의 강령초안은 노동자계급이 혁명을 통해 스스로가 해방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지배계급으로 스스로를 조직하여야 함을 자신있고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강령인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강령에 노동자국가를 누락한 사노준의 강령초안은, 사회주의의 기본조차 충실히 이해하지 못한 채 작성된 것으로, 사회주의강령이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2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2. 사노준의 강령초안은 노동자국가의 수립 필요성을 누락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성격과 역사적 임무를 제대로 정식화할 수 없게 만들었다.</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노동자국가 수립의 의의를 완전히 누락시킨 강령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성격과 역사적 임무를 제대로 정식화할 수 없게 만든다. 따라서 노동자국가를 누락시킨 사노준의 강령초안은 강령의 다른 핵심적 내용인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성격과 역사적 임무에 대해서도 큰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사노준이 강령초안에서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성격과 역사적 임무에 대해서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에 대해서 검토하기 전에, 일단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성격과 역사적 임무가 어떠한 내용인지를 우선 다루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1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strong>1)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성격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며, 노동자계급은 어떠한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여야 하는가?</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자본주의는 “더 높은 생산형태”인 사회주의를 위한 물질적 조건과 이를 이용하여 사회주의혁명을 수행할 주체인 노동자계급을 만들어 냈다.</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노동자계급이 혁명적인 이유는, 노동자계급에게 뭔가 선천적인 능력이나 도덕성이 존재하기 때문도 아니고, 단순히 자본주의 하에서 고통받고 있는 세력이어서만도 아니다.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성격은, 자본주의의 등장이 낳은 물질적 조건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자본주의는 이윤추구를 목표로 하는 사회이자 임금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계급적대에 기반을 둔 계급사회이지만, 이러한 특징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이 착취와 억압에서 해방되고 계급이 철폐된, 사회주의 사회를 위한 조건을 마련하였다는 데에 자본주의의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첫 번째로 자본주의는 생산의 사회화를 심화시켰다. 자본주의에서 생산의 사회적 성격의 강화는 사회주의를 위한 조건을 창출한다. 생산과 노동의 사회화는 직접 생산자인 노동자계급이 거대해지고 집중화된 생산수단을 자본가들의 수중에서 이전하여 노동자계급과 사회전체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합리적이고 계획적으로 생산을 운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두 번째로 자본주의는 생산력을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생산력의 발전은 자연에 대한 이해와 자연을 이용할 수 있는 인간 능력의 발전을 의미한다. 이러한 발전을 통해 인간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생활수단을 확보할 수 있는 능력을 신장시킨다. 그리고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토대 위에서,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전면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마련된다. 따라서 생산력의 발전 자체가 인간해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산력 발전은 인간해방을 위한 중요한 물질적 조건을 놓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자본주의는 해방을 위한 물질적 조건 자체를 형성하기 위해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본성인 자본의 이윤추구와 축적욕구, 생산을 위한 생산, 자본 간의 생존 경쟁 등은 자본가들이 생산력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도록 강제한다. 그 결과 창출된 막대한 생산력이 사회 구성원들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이 된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맑스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역사적 성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의 발달은 자본의 역사적 사명이며 자본의 정당화의 근거이다. 바로 이것에 의하여 자본은 무의식적으로 더 높은 생산형태를 위한 물질적 조건을 창조한다.”(맑스, 「자본론」 3권 15장) 요컨대 자본주의는, ‘더 높은 생산형태’인 사회주의를 위한 물질적 조건을 이루는, 생산의 사회적 성격의 심화와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을 낳는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마지막으로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를 위한 이러한 물질적 조건과 함께, 주체적 조건 역시 함께 만들었다. 즉 “부르주아지는 자신에게 죽음을 가져올 무기들을 벼려 낸 것만이 아니다; 그들은 이 무기들을 쓸 사람도 만들어 내었다”(맑스, 엥겔스, 「공산당선언」) 자본주의 하에서 착취받지만 자본주의의 발전한 생산력을 대변하는 계급, 이러한 생산력과 자신이 처한 생산에서의 위치를 활용하여 스스로를 착취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계급인 노동자 계급이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등장한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자본주의가 만든 물질적 조건을 토대로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을 폐지하고, 이를 통해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와 억압을 일소시키고 계급 일반을 없애 인류를 해방시킬 수 있기 때문에, 오직 노동자계급만이 자본가계급에 대립하는 계급 중 참으로 혁명적인 계급이다. </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잉여노동의 착취를 위해 노동자계급을 필요로 하는 자본주의의 특성 상,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가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함께 성장하는 계급이다. 자본주의는, 협업과 기계제 대량생산 등의 생산방식의 발전, 축적과 생산의 확대 등의 과정 속에서, 노동자계급을 인구의 다수로 만들었다. 이러하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몰락해가는 다른 피지배계급과는 달리,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상승하는 계급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더욱이 생산규모의 확대, 발전한 생산력의 적용, 사회적 노동의 활용, 이를 위한 자본의 대규모 사용을 생산조건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노동자계급을 노동을 통해 서로 결속시킨다. 이러한 결속은 급속한 수적 증가, 노동자 공동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단결, 모든 지역적 한계를 분쇄해가는 연대,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성격, 경제의 요충지점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집중에 의해 강화되어 간다. 또한 노동자계급은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생산에 의해 조직성과 규율에 익숙해져 있으며, 따라서 다른 어떤 계급보다도 목적의식적이고 조직화된 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착취, 지배관계는 노동자가 자본가에 대항하여 계급투쟁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 투쟁은 임금과 노동조건의 개선이라는 경제적 요구부터 사회적, 정치적 권리의 획득 등의 정치적 요구까지 폭넓게 진행된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이 이러한 착취, 지배관계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착취와 억압 상태로 만드는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소유와 임금노동을, 자본주의적 계급지배를 철폐해야만 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과정은 자본주의적 계급적대를 철폐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는다. 노동자계급은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의 착취와 억압을 철폐하는 것과 함께 수천 년 동안 계속되어 온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와 억압을 모두 철폐하고 계급 일반을 없애어 인류를 해방시킨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노동자계급이 이러한 보편적 해방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발전과 노동자계급의 특징에 기인한다. 우선 자본주의는 생산력과 생산의 사회화를 높은 수준으로 진척시켜, 한 인간집단이 다른 인간집단에 대해 착취와 억압을 하지 않고서도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발전시켰다. 그 결과 자본주의 생산관계, 즉 “현대의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는 계급 대립에, 즉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들의 착취에 근거하는 생산물의 생산 및 전유의 최후의, 그리고 가장 완성된 표현”(맑스, 엥겔스, 「공산당선언」)이 되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만든 물질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와 함께 상승하는 계급이 되었으며, 발전된 생산력을 대변하는 계급으로, 자신을 얽매는 자본주의적 착취를 철폐하고 인간 전체의 해방을 이룰 수 있는 계급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임무가 지닌 의의는 과거의 혁명의 특징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엥겔스는 과거의 혁명이 지닌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우선 “이제까지의 모든 혁명은 어떤 특정한 계급 지배를 통한 다른 계급 지배의 구축으로 귀결되었다.” 두 번째로 이제까지의 혁명은 다수가 참여하였다고 하더라도 소수의 지배하에 이루어졌으며 혁명의 과실은 소수의 지배자들이 가지고 갔다.(엥겔스, “칼 맑스의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 단행본 서설”) 요컨대, 과거 역사에서 한 사회에서 다른 사회로의 이행하는 혁명은 한 착취자에서 다른 착취자로의 변화로 귀결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피착취계급으로서 자신이 처해있는 착취와 억압을 근절하려는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해방을 통해 새로운 착취, 지배관계를 만들어 내려는 것이 아니다. 이는 기존의 계급 지배의 대체가 새로운 계급 지배의 구축을 가져온 과거의 혁명과는 완전히 다른 특징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본주의에서 착취, 억압받고 있는 노동자계급은 혁명을 통해, 새로운 계급 지배를 구축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옭죄고 있는 자본주의의 착취와 억압을 철폐하며 이와 함께 수천 년 동안 계속되어 온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와 억압을 모두 철폐하고 계급 일반을 없애어 인류를 해방시키고자 한다.3)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임무 때문에 “자본가계급에 대립하고 있는 계급들 중에서 오직 노동자계급만이 참으로 혁명적인 계급”(해방연대(준) 강령초안)인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1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strong>2) 사노준의 강령초안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성격과 역사적 임무를 분명히 설명하기보다는, 잡다한 유보조건을 제시하여 되레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성격을 승인하고 있는 것인지 확신을 주지 못하는 강령이 되었다. </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노동자계급이 혁명적 계급인 이유는 바로 스스로의 해방을 통한 인간의 보편적 해방이라는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임무에 있다. 이러한 임무는 관념적인 지향이나 바람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발전 속에서 형성된 물질적, 주체적 조건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성격과 노동자계급이 쟁취해야할 역사적 임무는 맑스주의의 핵심적인 내용이기도 하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렇다면 사노준의 강령초안이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노준의 강령초안에서 노동자계급에 대해서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은 ‘3. 노동자와 계급투쟁’ 부분에서이다. 사노준은,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하에서 억압, 착취 받고 있으며 자본주의 하에서 계급투쟁이 격화되고 있고 투쟁의 국제적 성격이 더 커지고 있음을 상당히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정작 왜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 혁명의 중심에 서고,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계급일반을,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와 억압을 폐지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정식화도 찾아볼 수가 없다.4) 오히려 사노준의 강령초안이 이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노동자계급이 지닌 혁명적 성격, 노동자계급이 혁명을 통해 수행해야 하는 역사적 임무를 인정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게 한다. 사실 이는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해방을 위해 정치권력을 획득해야 한다는 노동자국가 수립의 필요성을 자신있게 제시하지 못하고, 노동자민중의 대체권력을 주장할 때 이미 어느 정도 예측될 수 있는 것이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노준의 강령초안을 살펴 보면, 노동자계급이 “21c 혁명의 전위로 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하기는 하지만, 이 부분에서도 장황하게 나열한 5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때에만 노동자계급이 혁명의 전위가 될 수 있다고 유보조건을 제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5) 이 강령초안의 작성자는 이러한 조건들의 제시가 노동자계급에 대해서 매우 현실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이 혁명적인 이유는 노동자 개개인 심리, 투쟁력, 의식수준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처해 있는 물질적 조건에 의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노동자계급을 혁명적 존재로 만드는 물질적 조건이 그대로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의식으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런 저런 조건을 붙이고 그걸 실행하면 혁명적이라고 하는 접근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사회주의 정당이라면, 이러저러한 부대조건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에게 자신의 물질적 조건에서 나오는 혁명적 성격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고, 이러한 혁명적 성격을 실제로 실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점에서 사노준 강령초안은 노동자계급이 혁명적인 계급임을 분명하게 표명하고 노동자계급이 이를 자각하게 해주는 강령이 아니다. 노동자계급이 “21c 혁명의 전위”로 나서려면 충족시켜야할 이런저런 장황한 부대조건을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저러한 부대조건을 충족시켜야 혁명적이라면, 노동자계급은 본질상 혁명적인 성격을 지니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노동자계급이 반드시 혁명의 전위여야 할 필연성도 없게 될 것이다.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이 강령초안이 노동자계급을 정말 혁명적 계급으로 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만들 뿐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2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3. 사노준의 강령초안은 노동자계급과 자본주의 하에서 억압받는 다른 피지배계급 사이의 관계에 대한 내용을 완전히 누락하고 있는데, 이는 자본주의 하에서의 다른 피지배계급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태도와 정책을 올바로 제시할 수 없게 한다.</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누차 말하지만, 사노준의 강령초안은 “노동자국가”를 누락하고 “노동자민중의 대체권력”을 주장한다.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가 등장하는데, 바로 노동자계급이 다른 피지배계급에게 취하는 태도, 계급정책의 문제이다. 사노준의 강령초안은 노동자와 민중이 어떠한 조건에서 함께 하게 되는지, 노동자계급이 민중이라고 불리는 다른 피지배계급에게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노동자민중”이란 표현을 반복해서 쓰고 있을 뿐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노동자계급을 제외한 자본주의 하에서 고통받는 피지배계급은 사실 상 소자산가, 소생산자로 표현되기도 하는 소부르주아 계급이다. 이들에 대한 태도의 문제는 단지 “노동자민중”이라는 표현을 강령에서 사용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특징과 이들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확인해보는 것으로 검토를 시작해볼 필요가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1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strong>1) 자본주의 하에서 고통받는 소자산가계급의 특징과 이들에 대한 사회주의적 태도</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1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소자산가 계급은 자본주의 하에서 대자본에 의해 끊임없이 축출되어 몰락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있다.</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본주의 체제에서 핵심적인 계급관계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이지만, 자본주의에 의해 고통받는 계급은 비단 노동자계급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계급과 더불어 인구의 상당수를 구성하는 소자산가계급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의해 고통받게 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본주의는 잉여가치의 획득을 위해 끊임없이 축적을 진행하고 생산규모를 확대하고자 한다. 그리고 모든 생산영역을 자본의 이윤획득의 영역으로 편입시키고자 한다. 따라서 자본은 무수한 소자산가, 소생산자들을 축출하고 파멸시키고, 소자산가, 소생산자가 점하였던 영역을 대자본의 발 아래 둔다. 자본의 집적과 집중은 이를 더욱 가속화시킨다. 즉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소규모의 독립적 생산자들은 점점 더 큰 규모로 축출”(해방연대(준), 강령초안)된다. 따라서 자본주의 하에서 소자산가 계급은 대자본에 의해 축출되어 몰락해가는 운명에 처해 있다고 규정할 수 있다. 소자산가가 겪게 되는 축출과 몰락, 그들의 고통은 바로 자본주의 체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소자산가 계급의 축출 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최근의 예로는 SSM의 대두로 몰락하고 있는 소상인들을 들 수 있다. 자본은 그 본성 상 유통의 영역까지도 모두 장악하고자 하며, 한국에서 이는 대형마트의 등장이 전형적인 현상이었다. 이제 대형마트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상업자본은 중소규모 슈퍼마켓 사업에도 뛰어들고 있다.6) 그 결과 소상인들은 상업자본의 침투에 몰락해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있다. 이외에도 노점상 등의 빈민들은 상당수가 이미 자본의 집적과 집중 과정에서 몰락한 다양다종의 계급, 계층 속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자본주의에 의해 고통받는 소자산가계급은 노동자계급의 관점을 받아들이고 노동자계급과 함께 투쟁할 때에 비로소 혁명적일 수 있다. </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나 이들이 자본주의 모순으로 고통 받고 있다고 해서 곧바로 노동자계급과 같이 혁명적인 성격을 갖는 것은 아니다. 다소의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이들은 자신의 생업부문이 대규모 자본에 의해 흡수됨에 따라 몰락과 분해의 과정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일부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이해하고 노동자계급의 편에 서서 자본에 맞서 함께 싸울 수도 있지만, 다른 일부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생산수단에 집착하면서 대규모 자본이 등장하여 자신의 생업을 짓밟기 전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하거나, 대자본의 편에 서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반동적 세력의 일부를 이루게 되기도 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따라서 소자산가 계급이 혁명적이게 되는 것은, 바로 자신이 겪는 고통이 바로 자본주의의 발전, 끊임없이 증식하고 확장하려는 자본의 본성에 의해 온다는 점, 그리고 자본주의를 극복할 때에만 이러한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이해하고, 자본주의의 극복과 사회주의의 수립을 자신의 과제로 삼고 있는 노동자계급의 관점을 받아들이고 노동자계급과 함께 투쟁할 때이다.7)</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1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strong>2) 사노준의 강령초안은 노동자계급과 자본주의 하에서 억압받는 다른 피지배계급 사이의 관계에 대한 내용을 완전히 누락하고 있는데, 이러한 강령으로는 자본주의 하에서의 다른 피지배계급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태도와 정책을 올바로 제시할 수 없다.</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실 상 사노준의 강령초안은, 노동자계급과 자본주의에서 고통받는 다른 피지배계급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다만 “노동자민중”이라는 용어를 관성적이라고 할 만큼 수없이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노동자민중”이라는 표현을 쓰는 방식으로 사노준은 사회주의 혁명의 대중적 기반이 확대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노준의 강령이 민중, 즉 노동자계급이 아닌 다른 피지배계급이 자본주의 하에서 고통받고 있으며, 자본주의에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혁명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이는 소자산가 계급의 특징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한 채 주관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노동자와 다른 피지배계급이 처한 사회적 경제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이 조건에서 나오는 이들의 전망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노동자계급은 자신의 물질적 조건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노동자국가를 수립하여 스스로를 지배계급으로 고양시키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을 자신의 역사적 과제로 부여받는다. 반면 다른 피지배계급은 자신의 물질적 조건에서 이런 과제가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는다. 소규모이지만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소자산가 계급의 자산가적 특징, 생산수단에 대한 집착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본주의에 대립하는 다른 피지배계급은 자신이 자본주의 하에서 겪게 되는 고통이 바로 자본주의 자체에서 왔다는 것을 인식하고 자신이 해방되는 길은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에 노동자와 함께 설 때임을 이해할 때, 즉 이들이 노동자계급의 관점에 설 때에, 자본주의에 대해서 혁명적일 수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실천적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소자산가 계급에 대한 입장은 감나무 밑에 누워 감이 떨어지기만을 바라는 관조적인 것이어서는 안된다. 사회주의자들은 소부르주아 계급에게 자본주의 자체에 의해 끊임없이 축출, 몰락하게 되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운명이 야기된다는 것을 폭로하고, 자신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혁명을 위해 노동자계급과 함께 투쟁해야 한다고 선전, 선동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소자산가 계급을 조직해야 한다. 이때에만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강고한 계급동맹이 형성되고 혁명의 대중적 기반이 확대될 수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하기 때문에 노동자계급과 자본주의에 대립하고 있는 다른 피지배계급 사이의 관계가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강령에 명백하게 정식화 되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은 노동자계급이 다른 피지배계급에게 대하는 태도와 계급정책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지도원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내용을 담지 못하고 있는 강령은 분명히 제대로 된 강령이 아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더욱이 노동자계급과 민중을 단순히 자본주의에 대립하고 있다는 점만을 본 채, 정확하지 못한 “노동자민중”이라는 표현으로 이 양자를 한묶음 취급을 한다면, 노동자계급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하에서 고통받고 있는 피지배계급의 특징을 잘못 표현하는 강령이 될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2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마치며</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노준은, 2010년 4월 27일 장문의 강령초안을 자유게시판을 통해 공개하고 난 지 몇 달 안 되어, 8월 21일 해산하였다. 사노준의 해산과 함께 사노준이 제출한 강령초안은 어정쩡한 상태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준이 제출한 강령초안은, 사노준이 해산되었다 하더라도 사노준을 구성하였던 정치세력의 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역사적 문서임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사노준이라는 조직 실체는 사라졌지만, 이 강령초안이 대변하는 사상적 경향은 여전히 사노위 속에서 현존하고 있다. 따라서 이 강령초안이 대변하는 사상에 대한 투쟁 역시 조직이 해산되었다는 이유로 무의미해진 것은 아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성두현은 지난 5호의 글에서 “사노준이 제출한 강령초안이 사회주의강령체계를 이탈했다는 점, 이로 인해 원리, 실천적 부분 모두에서 부실한 강령이 되었다는 점을 비판했다. 또한 사회주의노동운동에 대한 평가를 회피하고 노동자국가를 강령초안에서 누락시키는 기회주의적 태도를 표출하였으며,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맑스주의에 대한 노골적인 수정을 이론화하고 있다는 점 등을 비판하였다.” 이번의 글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성격과 역사적 임무, 노동자국가수립의 의의 등 사회주의강령의 핵심내용을 애매하게 다루거나 일관되게 누락한 사노준의 강령초안의 문제점에 대해서 검토하였다. 이 글은 사노준이 이러한 내용을 누락시키고, 애매하게 다룬 것이 왜 문제인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성격과 역사적 임무, 노동자국가수립의 의의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검토를 통해 분명히 하고자 하는 바는, 사노준의 강령초안은 사회주의 사상의 기본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노동자계급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교육적 역할을 전혀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반대로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오히려 방해”하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 글의 핵심은 이미 제 5호의 “사노준이 제출한 강령초안 비판”에서 짧게 설명한 바 있다. 이 글의 전체 내용을 요약하는 것이기에 5호의 글을 다시 상기해보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사노준은, 자본가계급에 대립하고 있는 계급들 중에서 오직 노동자계급만이 참으로 혁명적인 계급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다른 계급들은 노동자계급의 관점에 설 경우에만 혁명적일 수 있다는 점, 사회적 혁명의 필수적인 정치적 조건은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착취자로부터의 모든 저항을 진압할 수 있게 할 정치권력, 계급의 폐지와 함께 그 필요성이 다해 스스로 소멸해갈 정치권력을 노동자계급이 획득하는 것, 노동자계급이 노동자국가를 수립하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국가의 수립이 아닌 노동자 민중 권력의 수립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노동자계급내로 전파하려고 하고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즉, 사노준은 노동자계급외의 민중은 노동자계급의 관점에 설 경우에만 자본주의에 대해 혁명적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사회적 혁명의 필수적인 정치적 조건은 노동자 민중권력의 수립이 아니라 노동자국가의 수립이라는 점, 노동자국가의 민중적 기반의 확대는 이를 노동자 민중권력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그 노동자계급적 성격을 관철하는 것에 의해 성취된다는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기회주의적 속물주의에 빠져 있다. 뿐만 아니라 이에 이어 노동자국가의 수립이 아닌 노동자 민중 권력의 수립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노동자계급내로 전파하려고 하고 있다”(「강령토론」 제 5호, 53쪽)</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 </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미 주]</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 맑스, “바쿠닌의 ‘국가주의와 무정부주의’에 대한 개요”를 참고함.</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2) 예를 들어, 사회주의 경제의 운영원리의 핵심인 민주적 계획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노동자국가가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만 한다. 사회주의에서의 민주적 계획은 바로 노동자국가를 통한 중앙집중적 계획으로 실현되는데, 사회주의에서 중앙집중적 계획이 필요한 이유는 생산을 사회 전체의 통제 하에 두고, 사회적 필요에 입각한 생산을 조직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중앙집중적 계획은 생산의 사회적 성격을 유지하면서 발전된 생산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리 노동자가 개별 경제단위를 자주관리한다고 해도, 사회전체의 차원에서 생산이 계획되지 않는 분산된 형태의 계획은 무정부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상품생산에서 나타나는 생산의 무정부성을 유지시키게 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중앙집중적 계획은 최초의 노동자국가인 파리코뮌에서부터 이미 나타난 사회주의 혁명의 특징이기도 하다. 당시 파리코뮌은 “폐쇄된 공장들에 대한 통계표 작성, 노동자들을 협동조합으로 결합하여 이들의 힘으로 공장을 경영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것에만 그쳤다면 분산적 노동자 자주관리체들이 무정부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 것에 불과했을 것이다. 콤뮨은 이 조합을 “거대한 연합체로 조직할 계획 작성을 명령”하여 “노동자자주관리체들이 시장을 통해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인 계획을 통해 결합”되게 만들고자 하였다. 파리콤뮨이 단명으로 끝나면서 이러한 시도가 현실화되지 못하였지만, 맑스는 이 파리코뮌의 시도에 대해 “협동조합들이 모두 공동 계획에 의거하여 국민적 생산을 조절하고 따라서 생산을 자기 자신의 지휘 아래 두어 자본주의적 생산의 운명인 지속적인 무정부 상태와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경련을 끝장낸다면”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라고 평가하였다.(맑스, 「프랑스 내전」)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노동자국가는 노동자 자주관리체들이 공동 계획에 의거하여 국민적 생산을 조절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3)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임무는 「공산당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만일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필연적으로 계급으로 단결되고 혁명을 통해 스스로를 지배 계급으로 만들고, 또 지배 계급으로서 낡은 생산 관계들을 폭력적으로 폐기하게 된다면, 그들은 이 생산 관계들과 아울러 계급 대립의 존립 조건들과 계급 일반을 폐기하게 될 것이고, 또 이를 통해 계급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지배도 폐기하게 될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그렇게 되면] 계급과 계급의 대립이 있었던 낡은 부르주아 사회 대신에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하나의 연합체가 나타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4) 사노준의 강령초안과 대조적으로 해방연대(준)의 강령초안은 이러한 내용을 1-4에서 하나의 항목으로 정식화하여 설명하고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5) 노동자계급이 혁명의 전위가 되기 위해 사노준의 강령초안이 제시하는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자본이 강요하고 포섭하는 성·규모·고용형태·국적·산업 등에 따른 분할과 위계화를 넘어 모든 노동자가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해 나가고, (2) 노동자계급이 더 나은 임금과 노동조건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넘어 생산에서의 권리와 정치적 권리 확보를 위한 투쟁에 나서고, (3) 노동자계급이 초국적 자본과 국제적 자본가 기구들, 자국의 정부에 저항하는데서 스스로를 민주적으로 조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농민과 도시빈민, 환경주의자, 여성주의자, 전투적 민주주의자들과 연대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4) 더 거세질 자본의 공세가 계급타협에 안주해 왔던 선진 자본주의국에서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을 다시 일깨워, 그들이 개량주의의 환상과 경제적 민족주의⋅국가주의를 뛰어넘어 국제주의적 관점과 역량을 갖게 되고, (5) 지난 세기 말 자본의 지구화로 세계 자본주의 체제로 인입된 수억의 노동자계급이 제국주의 질서가 강요한 ‘민족’ 혹은 ‘종속’이란 굴레에서 벗어나 세계 노동자계급의 일부로 투쟁에 나선다면,”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6) SSM에 의한 소상인들의 축출의 실상과 이들과의 계급동맹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번 호에 실린 이상진의 『대자본에 의한 소상인의 몰락과 사회주의자의 태도」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7) 이러한 소부르주아계급의 특징은 「공산당선언」에서도 정확하게 정식화되어 있어 참고할 필요가 있다. “중간 신분들, 즉 소공업가, 소상인, 수공업자 및 농민, 이들 모두는 중간 신분으로서의 자기의 존립을 몰락으로부터 지켜 내기 위하여 부르주아지와 투쟁한다. 따라서 그들은 혁명적이지 않고 보수적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반동적이다. 그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려고 한다. 그들이 혁명적이라면 그들이 그들에게 임박한 프롤레타리아트로의 이행을 목도하는 한에서인데, [이때] 그들은 그들의 현재의 이익이 아니라 미래의 이익을 옹호며, 그리하여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에 서기 위하여 그들 자신의 입장을 포기한다.”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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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프랑스와 독일에서의 농민문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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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2 May 2011 01:40:30 +0000</pubDate>
		<dc:creator>강령토론</dc:creator>
				<category><![CDATA[「강령토론」호수별 분류]]></category>
		<category><![CDATA[전체토론]]></category>
		<category><![CDATA[제 6호]]></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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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강령토론]]></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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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계급동맹]]></category>
		<category><![CDATA[농민문제]]></category>
		<category><![CDATA[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6호]]></category>
		<category><![CDATA[엥겔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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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프리드리히 엥겔스 (번 역 : 성 두 현))</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이 글은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 6권(박종철출판사)에 번역문이 실려 있는데 심각한 오역이 있어 이 부분 교정을 포함하여 전반적으로 다시 번역하여 실었음을 밝힌다.</span></p>
<p><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p=1069" class="more-link">Read more on 프랑스와 독일에서의 농민문제&#8230;</a></p>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프리드리히 엥겔스 (번 역 : 성 두 현))</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이 글은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 6권(박종철출판사)에 번역문이 실려 있는데 심각한 오역이 있어 이 부분 교정을 포함하여 전반적으로 다시 번역하여 실었음을 밝힌다.</span></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부르주아 정당들과 반동정당들은, 지금 갑자기 도처에서 농민문제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에 매우 놀라고 있다. 응당 그들이 놀라고 있어야 할 것은 오래 전에 이것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아일랜드로부터 시칠리아에까지, 안달루시아로부터 러시아 및 벨기에에 이르기까지 농민은 인구, 생산 및 정치 권력의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서유럽의 두 지역만이 예외이다. 대브리튼 본토에서는 대토지 소유와 대농업이 자영 농민을 완전히 구축하였다; 엘베 강 동부의 프로이센에서도 동일한 과정이 수 세기 전부터 진행되고 있으며, 그리하여 여기에서도 농민은 점점 더 ‘추방당하고’ 있거나 적어도 정치 경제적으로 뒤로 밀려 나가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농민이 정치 권력의 한 요소로 자신을 드러내었던 것은, 지금까지는 대부분 농촌 생활의 고립성에 근거하고 있는 그들의 무관심에 의해서뿐이었다. 주민 대다수의 이러한 무관심은, 빠리와 로마의 의회의 부패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전제 정치의 가장 강력한 버팀목이다. 그러나 무관심은 결코 극복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노동 운동이 발생한 이후로 서유럽에서는, 특히 농민의 분할지 소유가 지배적인 곳에서는, 사회주의적 노동자란 partageux, “나눠 갖기”를 원하는 사람들로서, 농민의 재산에 눈독을 들이는 나태하고 탐욕스러운 도시인들로서 농민의 환상 속에 의심스럽고 증오스러운 것으로 부르주아지가 만드는 것은 특별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848년 2월 혁명의 막연했던 사회주의적 열망은 프랑스 농민의 반동적 투표에 의해서 급속히 소멸되었다; 자신의 평온을 원했던 농민은, 이제 자신의 추억의 보물창고에서 농민의 황제인 나뽈레옹에 관한 전설을 끄집어내어 제2제국을 창조하였다. 농민의 이 행위가 프랑스 인민에게 어떠한 대가를 요구하였는가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 결과로 인해 프랑스 인민은 오늘날까지도 고통받고 있다.<span id="more-1069"></span></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나 그때 이후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자본주의적 생산 형태의 발전은 농업에서의 소경영의 생명줄을 절단하였다; 소경영은 걷잡을 수 없이 몰락하고 쇠퇴하고 있다. 남북 아메리카와 인도의 경쟁자들은 유럽시장을 값싼 곡물로 범람시켰는데, 그것은 국내 생산자 어느 누구도 그들과 경쟁할 수 없을 만큼 값싼 것들이었다. 대토지 소유자와 소농민은 모두 한결같이 몰락이 면전에 있음을 본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토지 소유자이고 농촌 주민이기 때문에, 대토지 소유자는 소농민의 이해를 대변하는 전위 투사로 자처하고, 소농민은―대체로―이 전위투사를 인정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는 동안에 서유럽에서는 강력한 사회주의 노동자당이 생겨 성장했다. 2월 혁명 당시의 희미했던 예감과 감정은 분명해지고, 모든 과학적인 요건을 만족시키고, 명확하고 실체적인 요구들을 담고 있는 강령으로 넓혀지고 깊어졌다; 계속해서 증가해 가고 있는 사회주의자 의원들은, 독일과 프랑스와 벨기에 의회에서 이 요구들을 옹호하고 있다. 사회주의 정당이 정권을 쟁취하는 일은, 가까운 장래의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정권을 쟁취하기 위하여 이 당은 우선, 도시에서 농촌으로 가야하며 농촌에서 하나의 권력이 되어야 한다. 사회주의 정당은 다른 모든 정당들에 앞서 경제적 원인과 정치적 결과 사이의 관계를 통찰하고 있으며, 농민의 주제넘는 벗인 대지주의 양가죽 아래 숨어 있는 늑대의 형상을 오래 전에 간파해 냈다―이러한 사회주의 당이, 몰락의 운명에 있는 농민이 산업노동자의 수동적 적대자에게 적극적 적대자로 전화할 때까지 그들을 거짓 보호자의 수중에 가만히 놓아두어서야 되겠는가? 이리하여 우리는 농민 문제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된 것이다. </span></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Ⅰ.</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우리가 호소할 수 있는 농촌 주민은 매우 다양한 구성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한 각 지역들마다 크게 변화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프랑스와 벨기에처럼 독일의 서부에는, 분할지 농민의 소규모 경작이 지배적인데, 이 분할지 농민의 대다수는 자신의 농토를 가지고 있는 소유자이고 소수가 차지농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북서부―저지 작센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는, 대농과 중농이 우세한데, 이들은 예속된 자, 하녀, 심지어는 일용노동자조차 없으면 일을 해나가지 못한다. 바이에른의 일부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엘베강 동부 프로이센과 멕클렌부르크에는, 농장 고용인과 소작인과 일용 노동자를 사용하는 대토지 소유와 대규모 경작 지역이 있다. 사이에 끼어,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고, 감소하는 비율로 소농과 중농이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중부 독일에는, 이 모든 경영 형태들과 소유 형태들이 지역에 따라 상이한 비율로, 상당히 넓은 지역에서 어느 하나의 형태가 특별히 우세를 차지하는 일이 없이 섞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 밖에도, 범위가 상이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경지나 임차한 경지가 가족을 부양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아서 가내 공업 경영의 지반으로만 역할하는 지역들이 있다. 그리고 후자가, 이렇지 않다면 이해할 수 없는 낮은 임금을 확고히 한다. 이 낮은 임금이 생산물에게 모든 외국의 경쟁자에 대항하여 판로를 제공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와 같은 농촌 주민 가운데 사회 민주주의 당은 어떤 부류를 손에 넣을 수 있는가? 물론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대략적으로만 고찰한다; 우리는 아주 뚜렷한 형태들만을 끄집어낸다; 지면이 부족하여 중간 단계들과 혼합된 농촌 주민에 대한 고찰은 어렵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소농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소농은 모든 농민들 가운데 서유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할 뿐만 아니라 문제 전체에 결정적인 경우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우리가 소농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한다면, 우리는 농촌 주민의 다른 구성부분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정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거점을 갖게 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여기에서 소농이란, 대체적으로 자신의 가족으로 경작할 수 있는 것보다는 크지 않지만,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것보다는 작지 않은 약간의 땅의 소유자이거나 차지인을―특히 전자를―의미한다. 이 소농은 소수공업자와 마찬가지로 노동자이지만, 자신의 노동수단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 프롤레타리아트와 구별된다; 요컨대, 소농은 과거의 생산 방식의 잔재이다. 소농은, 자신의 선조들인 농노, 예농, 혹은 매우 예외적이긴 하지만 지대와 봉건적 부역의 의무를 지니고 있는 자유농과는 세 가지 점에서 구별된다. 첫째, 프랑스 혁명을 통하여 소농은 장원 영주에게 바쳤던 봉건적 부담과 부역으로부터 해방되었고 또 대부분의 경우 적어도 라인 강 좌안에서는 자신의 농지를 자유로운 재산으로서 갖게 되었다. 둘째, 소농은 자치적인 마르크 공동체의 보호와 여기에 참가할 권리를 상실하였으며, 그리하여 이전의 공동의 마르크를 이용할 수 있는 자신의 몫을 상실하였다. 공동의 마르크는, 일부는 이전의 봉건 영주들에 의해, 일부는 로마법에 입각해 있는 개화된 관료적 입법에 의해 탈취되었으며, 그 결과 현대의 소농은 사료를 구입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역축을 기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마르크 이용의 상실에서 오는 손실이 봉건적 부담의 폐지로 인한 이익을 훨씬 초과한다; 자신의 역축을 기룰 수 없게 된 농민의 수는 부단히 증가하고 있다. 셋째로, 오늘날의 농민은 이전의 자신의 생산 활동의 절반을 상실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전에는 자신이 만든 원료로 자신이 필요로 하는 공업 생산물의 대부분을 자신의 가족과 함께 만들어 내었다; 그 밖에 필요한 것은 부락의 이웃들이 조달해 주었는데, 그들은 농사에 더하여 수공업에 종사하였고 대개 교환 물품이나 품앗이 노동으로 지불받았다. 가족은, 더욱이 촌락은 자족적이었으며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생산하였다. 그것은 거의 순수한 자연 경제였으며, 화폐는 거의 필요치 않았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화폐 경제와 대공업을 매개로 하여 이러한 상태를 종결지었다. 그런데 마르크 이용이 농민이 생존하기 위한 기본조건이었다면, 부업으로서의 공업은 또 다른 조건이었다. 따라서 농민은 날이 갈수록 더욱더 몰락해 갔다. 조세, 흉작, 상속 재산 분할, 소송 등은 잇달아서 농민들을 고리 대금업자에게로 내몰았다. 부채는, 더욱더 일반적인 것이 되어가고, 각자에게 더욱더 무거워져 갔다- 요컨대, 우리의 소농은 과거의 생산방식의 모든 유물과 마찬가지로 걷잡을 수 없이 몰락해 가고 있다. 그들은 미래의 프롤레타리아트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처지 때문에, 소농은 사회주의 선전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몸에 배에 있는 소유욕 때문에 그는 당분간은 여전히 그것에 호응하지 않을 것이다. 위험에 처해 있는 자신의 땅뙈기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 그에게 힘에 겨우면 겨울수록, 그는 더욱더 필사적으로 그 땅뙈기에 매달리며, 또한 그럴수록 그는 더욱더 토지 소유를 사회 전체에 양도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회 민주주의자들을 고리대금업자와 변호사와 마찬가지로 위험한 적으로 간주한다. 사회민주주의는 이러한 편견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사회민주주의는 몰락해 가고 있는 소농에게, 자기 자신에 불성실하지 않고 무엇을 줄 수 있는가?</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맑스주의 경향의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농업 강령에서 우리는 하나의 실천적 거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강령은 소농 경제의 전형적인 나라에서 나왔기 때문에 더욱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892년 마르세유 대회에서 당의 최초의 농업 강령이 채택되었다. 그것은 토지를 갖고 있지 않은 <strong>노동자</strong>(즉 일용노동자와 머슴)를 위하여 다음과 같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 : 노동조합과 지방 자치체 의회에 의해 확정된 최저임금; 반수는 노동자들로 구성되는 농촌 노동 재판소; 공유지의 매각을 금지할 것과 국유지를 지방 자치체에 임대할 것. 지방 자치체는 자기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와 임차한 토지 전부를 임금 노동자의 사용 금지와 지방 자치체의 감독 하에 공동 경작을 위해 무산 농업 노동자 가족들의 연합체에 임대할 것; 대토지 소유에 대한 특별세를 재원으로 하는 연로연금과 폐질 연금.</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소농</strong>―이 중에서 여기에서는 차지인이 특히 고려되고 있다―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요구되고 있다: 지방 자치체는 농기계를 조달하여 실비로 농민에게 임대할 것; 비료, 배수관, 종자 등의 구입과 생산물의 판매를 위한 농민 협동조합을 설립할 것; 그 가치가 5,000 프랑 미만인 소유지의 양도 소득세를 폐지할 것; 과도한 차지료를 인하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만두는 차지농과 분익농들(me&#8217;tayers)에게 그들이 이룬 토지의 가치 상승분을 보상하기 위하여 아일랜드의 범례를 따라 중재 위원회를 설치할 것; 토지 소유자에게 수확에 대해 선취특권을 주는 민법 2,102조를 폐지할 것, 자라고 있는 작물을 압류할 수 있는 채권자의 권리를 폐지할 것; 농기구, 작물, 종자, 비료, 역축, 한마디로 생업을 위해 농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모든 것에 대해서는 압류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할 것; 오래 전에 낡아 버린 일반 토지대장을 개정할 것과 그것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각 지방 자치체에 의해 지방에 따라 개정할 것; 마지막으로 무료의 농업교육과 농업 실험장.</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보는 바와 같이 농민의 이해를 위한 요구―노동자를 위한 요구는 여기에서는 당분간 관련시키지 않겠다―는 그리 광범위하지 못하다. 그 중 일부는 이미 다른 곳에서 실행되고 있다. 차지농 중재 재판소는 명백히 아일랜드의 모범을 따르고 있다. 농민 협동조합은 라인 주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토지대장의 개정은 서유럽 전역에서 모든 자유주의자들과 심지어 관료들조차도 항상 품고 있는 경건한 염원이다. 그 밖의 사항들도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질서에 어떤 본질적인 훼손도 가하지 않은 채 실현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단지 강령을 특징짓기 위한 것이다; 비난이 의도되지 않고 있다; 그 반대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 강령으로 당은 프랑스의 아주 여러 지역에서 좋은 성과를 이루었기 때문에―식욕은 먹을 때 생긴다는 격언대로―그들은 그것을 가일층 농민의 기호에 맞추게 강제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것이 위험한 땅을 걷는 것이 된다는 것이 감지되었다. 장래의 프롤레타리아트로서가 아니라 소유자로서의 농민을, 사회주의의 일반적 강령의 기본 원칙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도울 수 있겠는가? 이러한 반대에 답하기 위하여, 새로운 실천적 제안에 이론적인 이유설명이 도입되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을 통해 몰락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몰락에서 소농적 소유를 보호하는 것은 사회주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이제 금년 9월의 낭뜨 대회에서 채택된 요구들 자체와 그 이유설명을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 이유설명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당의 일반적 강령의 문구대로 생산자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한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여;</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공업분야에서 생산수단은 이미,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인 형태로서만 생산자들에게 반환될 수 있을 정도로 자본주의적으로 집중되어 있다는 것; 그러나―적어도 오늘날의 프랑스에서는―농업분야에서는 사정은 이와 매우 달라서 생산수단 즉 토지는, 아주 많은 지역들에서 아직도 개별적 소유로서 개별 생산자들의 수중에 있다는 것을 고려하여;</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분할지 소유를 특징으로 하고 있는 이 상태가 걷잡을 수 없는 몰락의 운명에 처해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주의는 이러한 몰락을 가속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왜냐하면 사회주의의 임무는 소유와 노동을 분리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의 분리가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한 노동자들의 예속과 빈곤을 함축하는, 모든 생산의 이들 두 요소들을 동일한 손에 결합시키는 데 있기 때문이다―을 고려하여;</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한편으로 대영지를 지금의 무위 도식하는 소유자로부터 몰수하여 다시―집단적이거나 사회적인 행태로―농업 프롤레타리아트의 소유로 만드는 것이 사회주의의 임무라면,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땅뙈기를 소유하고 있고 자신의 노동으로 살아가는 농민을 국고와 고리 대금업자, 신흥 대지주의 침해로부터 보호해 주는 것 역시 그에 못지 않게 사회주의의 필수적인 임무라는 점을 고려하여;</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차지농과 분익농(me&#8217;tayers)이라는 이름으로 남의 땅을 경작하는 생산자들, 즉 비록 일용 노동자들을 착취한다 하더라도 그들 자신이 착취를 당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생산자들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보호를 뻗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을 고려하여;</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노동자 당―무정부주의자들과는 반대로, 사회 질서를 개조하기 위해 빈곤을 강화하고 확대하는 것에 의지하지 않고 농촌 및 도시 노동자의 조직화와 그들의 공동 노력에 의해서만, 그들의 정부와 입법권의 장악에 의해서만, 노동과 사회 일반의 해방을 기대하는 노동자 당―은 다음과 같은 농업강령을 채택하였는바, 이는 농업 생산의 모든 요소들, 다양한 법적 명칭 하에서 국토를 이용하는 모든 활동들을 다음의 공통의 적에 대항한 투쟁에 결합시키기 위해서이다: 토지 소유의 봉건성.”</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제 이러한 ‘고려 사항’들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먼저 생산자들의 자유는 생산수단의 소유를 전제로 한다는 프랑스 강령의 명제는 그것에 곧바로 뒤이어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보충되어야 한다: 생산수단의 소유는 두 가지 형태만이 가능하다는 것: 생산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존재한 적이 결코 없었으며, 공업의 진보에 의해 날이 갈수록 더욱 불가능해지고 있는 형태인 개별적 소유; 혹은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 그 자체를 통해 그 형태의 물질적, 지적 전제들이 이미 마련되어 있는 공동 소유; 따라서 생산수단의 <strong>공동체적</strong> 소유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뜻대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와 같이 여기에서는 생산수단의 공동소유가 달성되어야 할 유일한 주요 목표로서 제시되고 있다. 지반이 이미 준비되어 있는 공업분야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따라서 농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강령에 따르면, 개별 소유는 모든 생산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된 적이 결코 없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그리고 공업의 진보는 그렇지 않아도 개별 소유를 제거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그것을 유지하는 데 조금도 이해를 갖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의 제거에 이해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그리고 존재하는 한에서는, 그것은 공동 소유를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가 그 강령을 인용하는 이상, 강령 전체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이 강령 전체는 낭뜨에서 인용된 명제를 아주 현저하게 수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강령 전체는, 거기에서 표명된 일반적-역사적 진리를, 그 아래에서만 그것이 오늘날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진리일 수 있는 조건들 하에서 비로소 파악하기 때문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오늘날 개별 생산자들에 의한 생산수단의 소유는, 이 생산자들에게 현실적인 자유를 더 이상 주지 못하고 있다. 도시의 수공업은 이미 몰락하였으며, 심지어 런던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이미 완전히 소멸하였고, 대공업과 고한 제도 그리고 파산으로 살아가는 비참한 서투른 직공들이 이를 대신하고 있다. 자영 소농은 자신의 땅뙈기를 확실히 소유하고 있지도 못하며 또한 자유롭지도 못하다. 그의 집, 그의 농장, 그의 얼마 안 되는 전답과 마찬가지로 그는 고리 대금업자에 속해 있다; 그의 생존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생존보다 더 불안하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적어도 때로는 편안한 날을 경험할 수 있으나, 시달리고 있는 채무 노예에게는 그러한 날은 오지 않는다. 민법 2,102조를 삭제하라, 농기구와 가축 등등을 차압할 수 없다는 것을 농민에게 법률로 보장하라, 그러나 이것은, 그가 자신의 가축을 ‘자발적으로’ 팔고,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고리 대금업자에게 바칠 수밖에 없으며, 사형 집행의 유예를 얻은 것에 기뻐해야 하는 억압상태로부터 그를 보호할 수 없다. 소농에게 그의 소유를 보호해 주려는 당신들의 시도는 그의 자유가 아니라 그 예속의 특수한 형태만을 보호해 줄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그가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상태를 연장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들의 강령 제 1절을 인용하는 것은 여기에서는 전혀 적당하지 않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 이유설명에 따르면, 오늘날의 프랑스에서는 생산수단 즉 토지는 아주 많은 지역들에서 아직도 개별적 소유로서 개별 생산자들의 수중에 놓여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임무는 소유와 노동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모든 생산의 두 요소를 동일한 손에 결합시키는 것이라고 한다.―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후자는 일반적으로는 결코 사회주의의 임무가 아니다; 오히려 사회주의의 임무는 생산수단을 <strong>공동 소유</strong>로서 생산자들에게 양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간과하자마자, 상술한 명제는 당장에 우리를 오류로 즉 사회주의는 전답에 대한 소농의 현재의 가상적 소유를 현실적 소유로 전환시켜야만 하며 또한 소차지농을 소유자로, 채무를 지고 있는 소유자를 채무에서 벗어난 소유자로 전환시켜야만 하다는 오류로 이끈다. 물론 사회주의는 농민의 소유의 이러한 가상을 소멸시키는 데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식은 아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어쨌든 우리는 이제, 이유설명이 다음과 같은 것을 사회주의의 임무라고 심지어는 필수적인 임무라고 단언할 수 있다는 데까지 와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자신의 땅뙈기를 소유하고 있고 자신의 노동으로 살아가는 농민을 국고와 고리대금업자, 그리고 신흥 대지주의 침해로부터 보호할 것.”</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리하여 이유설명은 앞 구절에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설명했던 것을 사회주의에게 수행해야 할 필수적인 의무로 넘긴다. 이유설명은, 농민의 분할지 소유가 “걷잡을 수 없는 몰락의 운명에 처해 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분할지 소유를 ‘보호하는’ 것을 사회주의에 넘긴다. 국고, 고리 대금업자, 신흥 대토지 소유자, 이것들이야말로 자본주의적 생산이 이러한 불가피한 몰락을 집행할 때 의지하게 되는 도구들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어떠한 수단들로 ‘사회주의’가 이 삼위일체로부터 농민을 보호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아래에서 보게 될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나 소유에서 농민만이 보호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차지농과 분익농(me&#8217;tayers)이라는 이름으로 남의 땅을 경작하는 생산자들, 즉 비록 일용 노동자들을 착취한다 하더라도 그들 자신이 착취를 당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생산자들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보호를 뻗치는 것”</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또한 마찬가지로 “적절한” 일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여기에서 우리는 이미 아주 기묘한 영역에 들어서 있다. 사회주의는 아주 특별히 임금 노동의 착취에 반대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프랑스 소작농이 비록 “일용 노동자를 <strong>착취한다</strong>”―문자 그대로 이렇게 쓰여 있다!―하더라도 그들은 보호하는 것이 사회주의의 필수적인 의무로서 설명되고 있다. 게다가, “그들 자신이 착취를 당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유로 삼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일단 경사면에 들어서게 되면, 얼마나 쉽사리 그리고 유쾌하게 미끄러져 내리는 법인가! 이제 독일의 대농과 중농이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을 찾아와서, 자신들이 하인과 하녀를 착취하는 것을 독일 사회 민주주의 당이 보호해주도록 당 수뇌부에게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고, 고리대금업자, 세무 관리, 곡물 투기업자, 가축상에 의해 “그들 자신에게 자행되는 착취”를 호소할 때―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우리의 농업에 종사하는 대토지 소유자가 그들에게 카니츠 백작을 파견하여(사실 이 사람도 곡물 수입의 국영화와 관련하여 그들과 유사한 제의를 제기한 바 있다) 증권 거래소, 고리 대금업자, 곡물 투기업자에 의해 “그들에게 자행되는 착취”를 호소하면서 마찬가지로 농업 노동자에 대한 자신들의 착취를 사회주의자들이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누가 보장하겠는가?</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나 우리의 프랑스 벗들은 보기와는 달리 악의를 품고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 또한 말해야겠다. 요컨대, 상술한 문구는 오직 다음과 같은 특별한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다: 프랑스 북부에서는 우리나라의 사탕무 재배 지역과 마찬가지로 농민들은 아주 부담이 큰 조건에서 첨채를 재배해야만 하는 의무를 지닌 채 땅을 빌린다; 그들은 첨채를 특정한 공장에 그 공장이 정한 가격에 팔아야 하고, 특정한 종자를 구매해야 하며, 지정된 비료를 정한 양만큼 사용해야 하고, 더욱이 인도할 때 사기를 당한다. 이 모든 것은 독일에서도 알려져 있다.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이 이러한 부류의 농민들을 보호하려 했다면, 그것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분명하게 말해야 했다. 문구에 있는 것처럼, 아무런 제한이 없는 일반적 형태에서 그것은 프랑스의 강령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의 일반의 기본 원칙까지 직접적으로 훼손한다. 그리고 이 태만한 편집이 자신들의 견해와는 아주 다른 방면으로 이용되더라도 그 작성자들은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을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동일한 오해가 이유설명의 결론부분에도 있을 수 있다. 그것에 따르면 사회주의 노동자 당은 다음과 같은 과제를 갖는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농업 생산의 모든 요소들, 다양한 법적 명칭 하에서 국토를 이용하는 모든 활동들을, 다음의 공통의 적에 대항한 투쟁에 결합시키는 것: 토지 소유의 봉건성”</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나는, 어떠한 나라의 사회주의 노동자 당도 농촌 프롤레타리아트와 소농 이외에 중농과 대농 혹은 심지어 대토지의 차지농, 자본주의적 목축업자, 기타 국토의 자본주의적 이용자까지도 자신의 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임무를 갖고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부한다. 토지 소유의 봉건성은 그들 모두에게 공통의 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떤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들과 함께 나아갈 수 있고,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일정한 기간동안 그들의 편에서 싸울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당에 온갖 사회 계급 출신의 개인들이 들어오게 할 수는 있으나, 어떤 자본주의적 이해집단과 중간 부르주아 이해 집단, 그리고 중농의 이해 집단에 대해서는 결코 그럴 수 없다. 여기에서도 보기와는 달리, 악의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작성자들은 이 모든 것을 분명히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일반성에 대한 욕구가 그들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걸고넘어진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닌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런데 이유설명 다음에는, 강령 자체에 새로이 포함된 보충이 나타난다. 그것들도 이유설명과 마찬가지로 경솔한 편집을 드러내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지방자치체는 농기구를 조달하여 그것을 실비로 농민들에게 임대해야 한다는 조항은, 지방 자치체는 첫째 이 목적을 위하여 국고 보조를 받고, 둘째 기계를 소농들에게 무료로 사용케 해야 한다는 것으로 변경되고 있다. 이렇게 한층 더 양보하더라도, 그것은 그 농토와 경영 방식 자체 때문에 좁은 범위에서만 기계를 사용할 수 있는 소농들에게는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할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 다음:</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현재의 모든 직접세와 간접세를 3,000 프랑 이상의 모든 소득에 대한 단일 누진세로 대체할 것.”</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유사한 요구가 최근 몇 년 사이의 거의 모든 사회민주주의적 강령에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특히 소농의 이해 속에서 제기되고 있다는 점은 새로운 것이며 이 점은 그들이 그것의 의의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지 못한가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영국을 예로 들어보자, 그곳은 국가 예산이 9천만 파운드 스털링에 달한다. 그중 1,350만에서 1천 4백만 파운드는 소득세에 의한 것이고, 나머지 7천6백만 파운드는 아주 적은 부분만이 영업세(우편, 전신, 인지)에 의한 것일 뿐 거의 대부분은 대중 소비품에 대한 과세, 즉 모든 주민 그러나 주로는 가난한 주민의 소득으로부터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소액이지만 합치면 수백만에 이르는 금액을 부단히 반복해서 빼낸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국가 지출을 메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영국에서 9천만 파운드 전액이 120파운드 스털링=3,000프랑 이상의 소득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에 대한 직접적 누진세를 통해서 징수한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연평균 축적, 즉 국부 전체의 연증가는 기펜에 따르면 1865-1875년에 2억 4천만 파운드 스털링에 달했다. 그것이 현재에는 매년 3억 파운드가 된다고 하자; 9천만 파운드의 세금부담은 전체 축적액의 거의 3분의 1을 흡수하게 될 것이다. 달리 말하면, 사회주의 정부 이외에는 어떠한 정부도 이러한 것을 기도할 수 없다; 사회주의자들이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을 경우에는, 그 옆에서는 이러한 세제 개혁도 일시적이며 아주 보잘 것 없는 삭감 지불의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게 하는 일을 실행해야만 한다. 이 경우에 소농에게는 아주 새로운 전망이 열릴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들은, 농민들이 이 세제 개혁을 다소 오랫동안 기다려야만 한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그들은 ‘당분간은’ 다음과 같은 것을 농민들에게 약속하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자신의 노동으로 살아가는 모든 농민을 위한 토지세의 폐지와 저당 잡혀 있는 모든 땅뙈기 에 대한 이 세금의 경감.”</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 요구의 후반부는, 가족만으로도 경작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농민의 땅에만 해당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또다시 “일용 노동자를 착취하는” 그러한 농민을 비호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리고 또:</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들짐승과 물고기, 그리고 자라나고 있는 작물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것 이외의 어떤 다른 제한도 없는 사냥과 고기잡이의 자유.”</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것은 상당히 인기 있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앞문구1)가 뒷문구를 파기하고 있다. 대체 현재의 농촌의 들녘 전체에서 각 농가에게 얼마나 많은 토끼, 자고, 가물치, 잉어가 주어질 수 있는가? 기껏해야 농민 각각은 일년에 하루만 사냥하고 고기잡이를 할 수 있을 뿐이지 않는가?</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법정 이율과 관습상의 이율의 인하”―</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는, 따라서 새로운 고리대법이며, 2천년 전부터 언제 어디에서나 실패를 거듭해 온 경찰 조치를 실행하려는 새로운 시도이다. 소농이 고리 대금업자에게 가는 것이 보다 작은 불행이 되는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는, 고리대금업자는 고리대법에 저촉됨이 없이 소농의 고혈을 빨아먹는 수단을 언제나 발견한다. 이 조치는 기껏해야 소농을 달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소농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반대로 그것은, 소농이 대부를 아주 필요로 할 때 그가 그 대부를 얻는 것을 방해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무료 치료와 의약의 실비 공급”―</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것은, 아무튼 특별히 농민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는 아니다; 독일의 강령은 더 나아가 무료 의약도 요구하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징집된 예비병 가족에 대한 복무 기간 동안의 보상”―</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은, 아주 불충분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특별히 농민을 위한 요구가 아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비료, 농기계 및 생산물의 운임률 인하”</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는, 독일에서는 기본적으로 실행되고 있는 것이며 게다가 이것은 주로―대토지 소유자의―이익에 부합하는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토지 개량과 농업 생산의 제고를 위한 공공사업 계획의 준비 작업에 즉시 착수할 것”―</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것은 모든 것을 막연함과 아름다운 약속의 넓은 범위에 머물게 하고, 마찬가지로 무엇보다도 대토지 소유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요컨대, 이 이유설명의 강력한 모든 이론적인 출발 후에 새로운 농업 강령의 실천적 제안들은, 프랑스 노동자당이 그들 자신이 말한 대로 걷잡을 수 없는 몰락의 운명에 처해 있는 소농들의 분할지 소유를 어떻게 확실하게 보호해 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더욱더 아무런 결론도 내려주지 못하고 있다. </span></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Ⅱ.</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한 가지 점에서는 우리의 프랑스 동지들이 무조건 옳다: 프랑스에서는 소농에 <strong>적대적이어서는</strong> 어떠한 영속적 변혁도 가능하지 않다. 다만 내가 보기에, 그들은 농민들을 획득하기 위하여 지렛대를 정확한 지점에 대지 못한 것 같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들은, 당장, 가능하면 다음 총선거를 위하여 소농을 획득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들은 극히 모험적이고 일반적인 확약을 통해서만 그것에 이를 수 있는바, 그 확약을 변호하기 위하여 훨씬 더 모험적인 이론적 고려를 내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좀 더 자세히 고찰해 보면, 그 일반적 확약은 자기모순에 빠져 있으며(걷잡을 수 없는 몰락의 운명에 처해 있다고 그들 자신이 설명하고 있는 상태를 보존하겠다는 약속) 몇몇 조치들은 전혀 쓸모없는 것이거나(고리대법) 혹은 노동자들의 일반적인 요구이거나 대토지 소유에도 유리한 것이거나 마지막으로 그것의 의의가 소농의 이익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강령에서 직접적으로 실천적인 부분은 잘못된 최초의 출발을 스스로 시정하고 있으며 이유설명 부분의 일견 위험해 보이는 호언장담을 실로 무해할 정도로 축소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보자: 경제적인 처지 전체, 교육, 고립된 생활 방식에서 기원하며, 부르주아 언론과 대토지 소유자에 의해 길러진 편견들이 존재하는 한, 우리 스스로도 우리가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어떤 것을 소농 대중들에게 약속하는 경우에만 우리는 그들을 단시간 내에 획득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들을 엄습하는 모든 경제 세력들로부터 그들의 소유를 보호해 줄 뿐만 아니라 이미 현재 그들이 받고 있는 부담에서 그들을 해방시켜 줄 것이라는 것을 약속해야 한다: 차지농을 자유로운 소유자로 전환시켜 주고, 저당에 시달리고 있는 소유자의 채무를 변제해 주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새롭게 현재의 상태를 필연적으로 낳게 될 상태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농민을 해방시키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단지 사형 집행유예를 주게 되는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나 당장 농민을 획득하였다가 우리가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됨으로써 농민이 그 다음에 우리를 다시 떠나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이로운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자신의 분할지 소유를 영구화해 줄 것을 기대하는 농민을 우리는 당원으로 필요치 않는바, 이는 장인으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영구화하려는 수공업 장인을 필요치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반유태인주의자들의 편에 속한다. 이들은 반유태인주의자들에게로 가서 그들로부터 자신들의 소경영에 대한 구원을 약속받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 현란한 문구들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그리고 반유태인주의적 천국으로부터 어떠한 바이올린 멜로디가 연주되고 있는지를 경험하게 되면, 그들은 약속은 더 적게 하면서 전혀 다른 방향에서 구원을 찾고 있는 우리야말로 더욱 믿을만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갈수록 깨닫게 될 것이다. 프랑스인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반유태인주의자들의 소란스러운 데마고기를 갖고 있었다면, 낭뜨에서의 과오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렇다면 소농들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무엇인가? 그리고 국가권력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첫째로, 프랑스 강령의 다음과 같은 명제는 무조건적으로 옳다: 우리는 소농의 불가피한 몰락을 예견하고 있으나, 우리의 개입을 통해서 그 몰락을 가속시키는 사명은 결코 갖고 있지 않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리고 둘째로, 우리가 국가 권력을 소유하고 있을 때 우리가 대지주의 경우에 해야 할 것처럼 소농을 폭력적으로 몰수하는 것을(보상을 하든 보상을 하지 않든 간에) 우리는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것도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 소농에 대한 우리의 과제는 무엇보다도 그들의 사적 경영과 사적 소유를 협동 조합적 경영과 소유로 이끄는 데 있는바, 그것은 폭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례와 이러한 목적을 위한 사회적 원조의 제공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지금도 소농이 분명히 알 수 있도록 해야 하겠지만, 그때 가면 당연히 우리는 그것이 소농에게 우리하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수단을 충분히 갖게 될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신의 나라에 단 하나의 도시―코펜하겐―만을 갖고 있어서 그 도시 이외에서는 거의 농민을 대상으로 한 선전에만 의지하였던 덴마크 사회주의자들은, 약 20 년 전에 이미 이와 같은 계획을 내놓았다. 촌락, 혹은 교구의 농민들―덴마크에는 큰 개인 농가들이 많다―은 자신들의 토지를 하나의 큰 농장으로 만들어, 공동의 계정 하에 경작하고 합쳐진 땅덩이, 현금 출자액, 노동 급부에 따라 수확을 분배하게 된다. 덴마크에서는 소토지 소유가 부차적인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이념을 분할지 지역에 적용하면, 분할지를 합해서 그 전체 면적을 대규모로 경작하는 경우에는 지금까지의 취업 노동력 중의 일부가 남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정확히 이러한 노동 절약 속에 대규모 경작의 주요한 이점이 놓여 있다. 이 노동력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일에 쓰일 수 있다. 인접한 대농장으로부터 더 많은 구역을 농민 협동조합이 쓰도록 하든가; 아니면 비록 주로 자가 소비를 위한 것이라도 공업 분야에서의 부업을 위한 수단과 기회를 그 노동력에 마련해 주든가 하는 것이다.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경우에나 농민들은 경제적으로 보다 나은 처지에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사회적-일반적 지도가 필요한 영향력을 획득함으로써, 점차적으로 농민 협동조합을 보다 높은 형태로 이행시키고 그리하여 협동조합 전체와 그 개별회원들의 권리와 의무를 대공동체 사회의 여타 부분이 갖는 권리와 의무와 균등하게 할 것이다. 각각의 특별한 경우에 그것을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 하는 것은, 그 경우들의 상황과 공권력을 우리가 장악하게 될 때의 상황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마도 이러한 협동조합들에 더 많은 이점을 제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자를 대폭 인하하여 그들의 저당 채무 전액을 국립 은행에 떠맡기게 될 것이며, 대규모 경영을 조직할 수 있도록 공공자산을 선대하게 될 것이고(이 선대는 특별히 화폐로 국한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며, 필요한 생산물들로 이루어질 것이다: 기계, 인조 비료 등등), 그 밖의 다른 이점도 있을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우리는 협동조합적 소유와 경영으로의 전환을 통해서만 농민들의 가옥 소유와 경작지 소유를 구원할 수 있고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이다. 농민들은 몰락으로 내몰고 있는 것은, 바로 개인 소유에 의해 조건 지워진 개인 경제이다. 개인경영을 고집한다면, 그들은 가옥에서 쫓겨날 것이고 그들의 낡은 생산 방식은 자본주의적 대경영에 의해 구축될 것이다. 사태는 바로 이러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경영조차 자본가의 계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농민 자신들의 공동의 계정을 위해서 실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농민들에게 보여 준다. 이것은 그들 자신의 이익이 된다는 것, 이것은 그들에게 유일한 구원 수단이라는 것을 농민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불가능하겠는가?</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우리는 분할지 농민들에게 자본주의적 생산의 위세로부터 개인 소유와 개인 경영을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할 수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단지, 그들의 의지를 거슬러 가면서 폭력적으로 그들의 소유 관계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만을 약속할 수 있을 뿐이다. 더욱이 우리는, 소농에 대한 자본가와 대토지 소유자의 투쟁이 오늘날에도 가능한 한 부당하지 않은 수단으로 진행되도록 하고 너무나 빈번하게 일어나는 직접적인 약탈과 사기를 가능한 막아 주겠다는 것만을 보증할 수 있다.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성공할 수 있다. 발전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에서는 그 누구도 어디에서 공정함이 끝나고 어디에서 사기가 시작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공권력이 사기꾼의 편에 서 있는지 사기 당하는 자의 편에 서 있는지는 언제나 중대한 차이를 낳는다. 우리는 단연코 소농의 편에 서 있다; 그가 자신의 운명을 더욱 견딜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가 결심을 했다면 그가 협동조합으로의 이행을 용이하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고 심지어 그가 아직 결심을 할 수 없는 경우에도 자신의 분할지에 대해서 좀 더 오랜 기간 생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자신의 노동으로 살아가는 소농은 우리에게 가담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보기 때문만이 아니라 당의 직접적인 이익을 위해서이다. 프롤레타리아트로 현실적으로 전락하는 것을 우리가 모면케 해 주었고 아직 농민인 채로 우리의 편이 될 수 있는 농민들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사회적 변혁은 더욱더 빨라지고 쉬워질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도처에서 그 최후의 결말에 이르도록 발전할 때까지, 마지막 남은 소수공업자와 소농이 자본주의적 대경영에 희생될 때까지 우리가 이러한 변혁을 기다려야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다. 농민의 이익을 위하여 공공 자산에서 이러한 의미로 바쳐야 할 물질적 희생은, 자본주의적 경제의 관점에서는 단지 버려진 돈쯤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훌륭한 투자가 된다. 왜냐하면, 그 희생으로 사회 일반의 재조직에 필요한 비용이 열 배 정도는 절약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러한 의미에서는 농민을 훨씬 자유롭게 대할 수 있다. 세세히 파고들어 가서 이러한 방향으로 특정한 제안을 내놓기에 여기는 적당하지 않다; 여기에서는 단지 일반적인 개요들만을 논할 수 있을 뿐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므로, 우리가 분할지 소유의 지속적인 보호를 기도하고 있다는 가상을 조금이라도 일으킬 수 있는 약속을 한다면, 당뿐만 아니라 소농들 자신에게 그것보다 더 해로운 것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농민들이 자신들의 해방으로 가는 길을 직접 막는 것이며 당을 소란스러운 반유태인주의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한 농민들의 처지는 결코 구원될 수 없다는 것, 분할지 소유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 기차가 손수레를 밀치고 나갔듯이 자본주의적 대규모 생산은 무력한 낡은 소경영을 밀치고 나갈 것이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는 것을 농민들에게 설명해 주는 것이 바로 우리 당의 의무이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불가피한 경제적 발전이라는 의미에서 행동하는 것으로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경제적 발전은 농민의 머리가 우리의 말에 대해서 열리게 할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런데 나는, 낭뜨 강령의 작성자들도 본질적으로는 나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는 확신을 표명하지 않고서는 이 문제에서 떠날 수 없다. 그들은, 지금 분할지 소유가 나타나고 있는 지역은 공동 소유로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들 자신도 분할지 소유가 소멸할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라파르그에 의해 작성된 낭뜨대회의 전국위원회의 보고도 이러한 견해를 충분히 확인하고 있다. 그것은 금년 10월 18일자로 베를린의 “사회민주주의지”에 독일어로 발표되었다. 낭뜨 강령에 나타나는 모순투성이의 표현 방식을 통해서, 그 작성자들이 실제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말하려고 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이미 사실로서 나타난 바와 같이, 자신들이 이해받지 못하고 자신들의 언명이 오용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당연히 그들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이다. 어쨌든 그들은 자신들의 강령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게 될 것이고, 다음에 있을 프랑스 대회는 그것을 근본적으로 교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제 규모가 보다 큰 농민으로 넘어가 보자. 여기에는 주로 상속 재산의 분할의 결과로 그리고 또한 부채와 토지의 강제 판매의 결과로, 분할지 농민으로부터 이전의 자신의 경지를 고스란히 혹은 더 나아가 그 이상으로 소유하고 있는 대농에 이르기까지, 여러 범례의 중간 단계들이 온전히 나타나고 있다. 중농이 분할지 농민들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곳에서, 중농은 그 이해와 견해에 있어서 분할지 농민들과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중농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이미 소농으로 전락해 있는가를 당연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농과 대농이 우세하게 나타나고 있고 영농에 일반적으로 예속된 자와 하녀의 도움이 필요한 곳에서는, 사정이 아주 다르다. 노동자 당이 무엇보다도 먼저 임금 노동자, 따라서 예속된 자, 하녀와 일용 노동자의 편을 들어야만 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노동자 당은 당연하게 노동자의 임금 노예제의 존속을 포함하는 그 어떤 약속도 농민에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대농과 중농이 그대로 존속하는 한, 그런 한 그들은 임금 노동자 없이는 해나갈 수 없다. 따라서 분할지 농민들에게 분할지 농민으로서의 자신들이 지속적인 존재를 약속해주는 일이 우리로서는 그야말로 어리석은 짓이라면, 우리가 대농과 중농에게 똑같은 약속을 하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곧바로 배신행위와 같은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여기에서 우리는 도시 수공업자들과의 유사점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이미 농민들보다 더 심하게 멸망하고 있지만, 도제와 함께 직인을 고용하거나 도제에게 직인의 일을 시키는 수공업자들도 있다. 이러한 수공업장인들 중에서 자신의 지위를 영구화하려는 장인들은, 반유태인주의자들에게로 가서 거기에서조차도 자신들이 구원받을 수 없음을 납득할 때까지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자신들의 생산 방식의 몰락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 밖의 장인들은 우리에게로 오고 있으며, 다른 모든 노동자들이 겪게 될 운명을 미래에 함께 할 각오도 되어있다. 대농과 중농도 이와 다르지 않다. 당연히 우리는 그들보다는 그들에게 예속된 자, 하녀와 일용 노동자에 관심을 갖는다. 이 농민들이 자신들의 지속적인 경영에 대한 보장을 원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절대로 그것을 제공할 수 없다. 그것을 원한다면, 그들이 가야할 곳은 반유태인주의자들, 농민동맹원들, 온갖 것을 약속하고도 아무것도 지키지 않는 것에 기꺼이 만족하는 그러한 당파들의 곁이다. 이러한 농민들의 늘어가는 부채와 도처에서 볼 수 있는 멸망이 이 농민들에게 증명하고 있듯이, 우리는 대농과 중농도 자본주의적 경영과 값싼 해외 곡물 생산의 경쟁 앞에 반드시 굴복하게 될 것이라는 경제적 확신을 갖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농장을 협동조합적 경영으로 통합할 것을 권고하는 것 이외에는 이러한 멸망에 대하여 어떠한 것도 행할 수 없는데, 이 협동조합적 경영에서는 임금노동에 대한 착취가 점차로 제거될 것이며, 이 협동조합적 경영은 평등한 권리와 평등한 의무를 갖는 전국적인 대규모 생산협동조합의 여러 부문들로 점차로 전화되어 갈 것이다. 만일 이 농민들이 자신들의 현재의 생산 방식이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그리하여 그로부터 나오는 필연적인 귀결을 이끌어 낸다면, 그들은 우리에게로 올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변화된 생산 방식으로의 이행에서 힘이 닿는 대로 그들의 짐을 가볍게 해주는 것이 우리의 직무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들을 그들의 운명에 맡겨 두고, 우리가 일찍부터 공감을 느끼고 있는 그들의 임금 노동자에게로 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아마 폭력적 몰수에 대해서는 삼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경제적 발전이 한층 더 완고한 이들에게도 분별력을 갖도록 만들리라는 것을 우리는 기대할 수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대토지 소유의 경우에는 사정이 아주 단순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적 경영을 공공연하게 보게 되며, 따라서 어떠한 주저도 있을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앞에 농촌 프롤레타리아트를 목격하게 되는바, 우리의 과제는 명백하다. 우리 당이 국가권력을 갖게 되자마자, 당은 공업에서의 공장주와 꼭 마찬가지로 대토지 소유자를 수탈해야 한다. 이 수탈에 대해 보상이 따르느냐 여부는, 대부분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권력을 갖게 될 당시의 상황과 특히 대토지 소유자 신사분들 자신들의 태도에 달려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보상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허용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 무리로부터 모두 사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가장 값싼 대가를 치르게 되는 셈일 것이라는 의견을 맑스는 나에게―그것도 여러 번!―말한 바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것은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사회 전체에 환원된 대농장들을, 그것들을 현재 경작하고 있고 또한 협동조합으로 조직되게 될 농촌 노동자들에게 사회 전체의 통제 하에 이용할 수 있도록 넘겨주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어떠한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지금으로서는 어떤 것도 확정할 수 없다. 어쨌든 자본주의적 경영의 사회적 경영으로의 전환은 여기에서 충분히 준비되어 있는 셈이며, 크룹 씨와 슈툼 씨의 공장이 보여 주는 바로 그 경우처럼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농업 협동조합의 예를 통해서 아직까지도 저항하고 있는 최후의 분할지 농민들도 그리고 다수의 대농들도 협동조합적 대규모 경영의 이점들을 납득하게 될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리하여 여기에서 우리는 농촌 프롤레타리아트들에게, 공업 노동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빛나는 전망을 열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엘베강 동부 프로이센 농촌 노동자를 획득하는 일은 우리에게는 시간문제,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문제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엘베강 동부 농촌 노동자들과 함께 한다면, 곧바로 독일 전체에 아주 다른 바람이 불게 될 것이다. 엘베 강 동부 농촌 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사실상의 반농노제적 상태는, 프로이센 융커 지배의 주요한 기초이며 따라서 독일에 특유한 프로이센의 패권의 주요한 기초이다. 관료와 군대 장교단 특유의 프로이센적 성격을 낳았고 또 유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점점 더 부채와 빈곤 상태, 국비와 사비에 의한 기생으로 몰락하고 있고,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자신들의 지배권에 폭력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엘베강 동부의 융커이다 ; 프로이센 국민의 독일제국―이것이 당시로서는 바람직한 민족적 통일의 유일한 형태로서 당분간은 불가피하다는 것이 이해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이 국내에서는 그토록 증오의 대상이 되고 국외에서는 그 빛나는 모든 승리들에도 불구하고 존경을 받기 힘들었던 것은, 바로 그들의 거만과 편협함과 불손 때문이었다. 이 융커의 권력은, 그들이 구 프로이센의 7개 지방의 전체 지역에서―제국 영토 전체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지역에서―정치적, 사회적 권력을 수반하는 토지 소유를 좌지우지하고 있으며, 토지 소유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설탕 공장과 양주 공장을 매개로 그 지역의 주요 공업들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 독일의 여타 지역의 대토지 소유자도, 대공업가들도 이와 같이 유리한 처지에 있지는 못하다; 전자도 후자도 제국 전체를 좌지우지하지는 못한다. 양자는 넓은 지역에 산재해 있으며, 상호간에 그리고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다른 사회적 요소들과 경제적, 정치적 패권을 놓고 경쟁하고 있다. 그러나 프로이센 융커의 이와 같은 권세는 점점 더 그 경제적 기반을 잃어가고 있다. 부채와 빈곤화는 온갖 국가적 원조(그런데 프리드리히 2세 이후로 이 원조는 정규적인 융커 예산에 포함되어 왔다)에도 불구하고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있다; 입법과 관습에 의해 승인되어 오고 있는 사실상의 반농노제적 상태와 이것을 통해 가능하게 된 농촌 노동자에 대한 무제한적 착취만이 침몰하고 있는 융커를 간신히 물 위에 떠있게 하고 있다. 사회민주주의의 씨앗을 이 노동자들 속에 뿌리고 그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케 할 용기와 결집을 준다면, 융커의 지배는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다. 유럽전체에 대해서 러시아 짜리즘이 그러했던 것처럼 독일에 대해서 똑같이 야만적이고 약탈적인 요소들을 대표하고 있는 이 대반동 권력은, 터진 거품처럼 한꺼번에 몰락할 것이다. 프로이센 군대의 ‘정예부대’는 사회민주주의적으로 될 것이며, 그와 동시에 그 태내에 완전한 변혁을 품고 있는 권력 이동이 일어날 것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엘베강 동부 농촌 프롤레타리아트를 획득하는 일은, 독일 서부의 소농이나 심지어는 독일 남부의 중농을 획득하는 일보다 훨씬 더 큰 중요성을 갖는다. 여기 엘베강 동부 프로이센에 우리의 결정적인 전장이 있는 셈이며, 따라서 정부와 융커는 우리가 여기에 다가가는 것을 전력을 다해 막을 것이다. 그리고―우리가 협박당하고 있듯이―우리 당의 확대를 막기 위하여 새로운 폭력적 조치들이 취해진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엘베 강 동부 농촌 프롤레타리아트를 우리의 선전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마찬가지이다. 어쨌든 우리는 농촌 프롤레타리아트를 획득할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894년 11월 15일에서 22일 사이에 씌어짐.</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출전:『신시대』,</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3년차, 1894/1895, 제 1권, 제 10호.</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맑스․ 엥겔스 저작집,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제22권, 483-505면</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미 주]</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 [역자] 한글과 원문의 독일어는 어순이 다르다. 때문에 독일어 원문에서 뒷문구는 앞문구가 되고 앞문구는 뒷문구가 된다. 한글로 번역할 때 이점을 고려했다.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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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교육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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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9 Apr 2011 21:50:32 +0000</pubDate>
		<dc:creator>색안경</dc:creator>
				<category><![CDATA[전체토론]]></category>
		<category><![CDATA[교육과 청소년]]></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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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 class="바탕글">교육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면서</p>
<p>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얼마전 해방연대(준)의 이사를 하고난 후 회식자리에서 본인은 사노위의 강령초초안중 제4인터내셔녈 남한사회주의노동자당(가칭) 강령(이후 4인터)중에서 &#8220;교육노동자, 학부모, 학생이 주체가 되는 학교위원회에 참가“하여 거부권 및 의결권을 행사 할 권리가 있음을 제시 했다. 또한 사노위의 3인안을 보면 ”2-4-1.······· 학교의 경우 학생 &#8211; 교사 &#8211; 학부모의 자주적 조직을 건설하고 이들이 학교운영의 주체가 되도록 투쟁한다.”고 되어있다. 해방연대(준)의 강령 &#8211; 17) 공교육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방자치기관에 의해 관리되어야 한다. 바람직하지 않은 교사를 해임할 권리를 갖는 주민들이 직접 교사를 선출한다.- 과 비슷한 내용으로 나타나지만, 사노위의 5인안 강령초초안에는 없는 내용인 관계로 동지들에게 교육위원회에 학부모의 참여가 타당한 것인가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이러한 내용의 전재는 자본주의가족들이 존속한다는 것을 가정으로 하고는 있지만 본인을 제외하곤 모두가 다 참여가 타당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유는 무엇일까? 한 동지의 말이 기억에 남는데 그 내용은 성인이 되지 않은 미성년자들은 판단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라고 반박을 했다. 이는 청소년 및 아동들은 자유와 자율의 의미도 모르고 책임감의 주체로서 자질이 떨어짐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은 없고 배우는 과정이기에 학교의 책임의 주체로써 면제가 된다는 내용이 아닐까? 결국은 학생은 주체가 아니고 줄에 매달려 움직이는 꼭두각시 같은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교육의 주체로 학생이 부적합 것이 아닐까? 판단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사리에 맞는(?) 판단을 못하는 존재는 금치산자, 한정치산자의 의미를 가지고 바라만 보게 되는 것은 어른이 되지 못한 피터팬은 늘 판단력의 결핍과 부족으로 존재하고 어린왕자는 꽃의 시들어 죽어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능력을 지녀 늘 그 상태로 존재하는가? 여러 가지의 의문이 든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일까?<span id="more-1049"></span></p>
<p> </p>
<p><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p=1049" class="more-link">Read more on 교육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며&#8230;</a></p>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class="바탕글">교육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면서</p>
<p>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얼마전 해방연대(준)의 이사를 하고난 후 회식자리에서 본인은 사노위의 강령초초안중 제4인터내셔녈 남한사회주의노동자당(가칭) 강령(이후 4인터)중에서 &#8220;교육노동자, 학부모, 학생이 주체가 되는 학교위원회에 참가“하여 거부권 및 의결권을 행사 할 권리가 있음을 제시 했다. 또한 사노위의 3인안을 보면 ”2-4-1.······· 학교의 경우 학생 &#8211; 교사 &#8211; 학부모의 자주적 조직을 건설하고 이들이 학교운영의 주체가 되도록 투쟁한다.”고 되어있다. 해방연대(준)의 강령 &#8211; 17) 공교육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방자치기관에 의해 관리되어야 한다. 바람직하지 않은 교사를 해임할 권리를 갖는 주민들이 직접 교사를 선출한다.- 과 비슷한 내용으로 나타나지만, 사노위의 5인안 강령초초안에는 없는 내용인 관계로 동지들에게 교육위원회에 학부모의 참여가 타당한 것인가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이러한 내용의 전재는 자본주의가족들이 존속한다는 것을 가정으로 하고는 있지만 본인을 제외하곤 모두가 다 참여가 타당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유는 무엇일까? 한 동지의 말이 기억에 남는데 그 내용은 성인이 되지 않은 미성년자들은 판단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라고 반박을 했다. 이는 청소년 및 아동들은 자유와 자율의 의미도 모르고 책임감의 주체로서 자질이 떨어짐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은 없고 배우는 과정이기에 학교의 책임의 주체로써 면제가 된다는 내용이 아닐까? 결국은 학생은 주체가 아니고 줄에 매달려 움직이는 꼭두각시 같은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교육의 주체로 학생이 부적합 것이 아닐까? 판단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사리에 맞는(?) 판단을 못하는 존재는 금치산자, 한정치산자의 의미를 가지고 바라만 보게 되는 것은 어른이 되지 못한 피터팬은 늘 판단력의 결핍과 부족으로 존재하고 어린왕자는 꽃의 시들어 죽어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능력을 지녀 늘 그 상태로 존재하는가? 여러 가지의 의문이 든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일까?<span id="more-1049"></span></p>
<p>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그러면 미성년자의 기준은 무엇일까? 판단력이 높아진 상태의 기준은? 사회의 발전은 그런 기준을 수도 없이 변화를 주었으며 나이와 경험, 지식과 관련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통속적인 기준은 사회의 일반적인 이데올로기에 편입되어 지배적인 사상에 따르게 되어있다. 지금은 자본주의 사회의 도덕적인 기준으로 미성년의 기준을 나눈다. 먼저 이러한 의미를 자세히 알고자 한다면 교육의 의미와 확장되어진 모습들과 내용을 찾아보자</p>
<p>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1. 교육이란?</p>
<p>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교욱이 가지고 있는 목적은 최소한의 생존력을 길러주고 사회에 적응 하는 인간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인간이 변화하고 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지만 하나의 객체가 아닌 전체의 인간과의 조화를 위한 것으로 개개인간의 부분적인 특성의 변화가 아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땐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한 지짓을 습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먹고살아가는 모습, 사냥 채집 농사를 짓는 법,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을 생산 관리 판매, 자본을 유지 확장 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교육의 체계는 공교육 또는 사교육의 형태를띄며 한국에선 사학이라는 민간학교재벌이 존재한다. 교육은 사회체제를 유지발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며, 사회경제적발전의 모습은 생산력의 발전에 다음세상이 맛을 보여주는 까닭에 일부의 불순세력들은 교육의 진보적인 기능을 중시하여 불순세력을 규합하는 만행까지도 저지른다. 이는 일부에 지나지 않고 특수한 경우이기에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다. 교육의 핵심은 사회의 통제이데올로기를 양산하며, 사회공동체의 의미를 강화하고자 도덕과 윤리 철학을 중심으로 하여 기능공을 양성하고 있는 것이다. 기능공들은 일반적인 사람들보단 부를 취득하는 수단이 쉽은 까닭에 대중들에게 높은 교육열을 사회적인 부를 개인적으로 더 많이 취득하는 수단으로서 나타난다. 법을 판단하는 변호사 판사 검사, 00박사, 통·번역 등등의 모습은 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자리를 갖는다는 것은 편하게 일을 할 수 있다고 느껴지고, 더 많은 물질적인 풍요를 누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적 지상주의, 시험에 올인하는 형태, 그러한 것을 최고의 선이라고 시험을 잘 보기위한 것이 청소년들이 살아가는 지상목표로 만들어 났다 서울대, 연대 고대 등 SKY계열의 의미는 교육이 낳은 사생아의 모습이다.</p>
<p>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교육은 사회통제를 목적으로 강요하기 때문에 비록 시험에 나오지않거나, 축소되어진 모습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도덕교육은 계급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수 요소로서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은 미국의 고등학생들의 순결교육, 우리나라의 체육시간에 행해졌던 제식교육, 일주일 마다 교장선생님의 훈시 및 종례와 조례 등이 존재한다. 이러한 교육의 모습은 계급사회의 국가가 추구하고 지향하고자 하는 목표를 달성하고자 자신들의 얼굴을 바꾸어 왔다. 중세시대엔 교육이 부유한 상인의 일부와 귀족 자녀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의무교육이 되어 누구나 받아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자본주의 사회는 알아야만이 상품을 유지 관리 생산하기 때문이다.</p>
<p>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우리는 일반적으로 교육이라면 학교교육을 생각한다. 많은 시간을 시험성적에 자신을 맞추어 왔던 관습이 남아 있기 때문이고, 또래들과 함께 어울려 왔던 공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교육은 현장감이 떨어지지 않는다. 자신이 존재하는 그곳, 어느 곳에 있던 간에 정보와 소식의 홍수 속에서 수시로 이루어진다. 사회적인 재교육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육은 학교교육과 학교교육의 외적인 부분 즉 가정에서의 교육과 사회적인 교육의 모습이 존재한다. 실제적으로 자본주의사회에 살아가는 대부분의 삶이 가정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가정교육의 의미는 어머니에 대한 자식 사랑에 대한 표현으로 나타나면 엄숙한 아버지의 잣대는 집안의 기둥으로 자라를 잡아 실생활에 습관적으로 굳어진 상태이기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 조차 하지 않는다.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에서 “······ 배고픈 사람들이 도둑질을 했다거나 착취당한 노동자가 파업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들 중 대다수는 왜 도둑질을 하지 않는가, 도 착취당하고 있는 사람들중 대다수는 왜 파업을 하지 않는가라는 사실”(파시즘의 대중심리 P55 빌헬름라이히)에 주목하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뿌리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p>
<p>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사회의 억압적인 통제를 깨뜨리고 나가기 위한 첫걸음은 아니지만 예방적인 차원에서라도 우리는 교육이 제일먼저 이루어지는 가정에서의 교육부터 시작 해 도록 한다. 예로부터 자식농사를 잘 지어야만이 집안이 평안하다고 했다.</p>
<p>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2. 가정교육</p>
<p>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이 내용은 동지들은 누구나 알고 있다라고 판단되어 본인의 허접한 글 솜씨보단 빌헬름라이히의 글을 일부 발췌한다. 책은 성혁명이며 새길출판사본을 하며 PP144~153에 해당되는 내용이다.</p>
<p>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5. 교육장치로서의 강제적 가족</p>
<p>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보수주의 이데올로기의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가장 중요한 장소는 강제적 가족이다. 그 가족의 기본유형은 아버지 어머니 자녀라는 삼각형이다. 보수적인 관점은 가족에서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인간사회의 ‘세포’ 근거를 보는 반면에, 우리는 역사발전과정에서 가족의 변화나 각 시대의 가족의 사회적 기능을 연구하면서 가족이 특정한 경제구조의 산물임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족을 머리돌이나 기반으로 생각하지 않고, 특정한 사회의 경제구조의 결과(모계가족, 부계가족, 자드루가[세르비아 인들이나 불가리아인들 사이에 있는 가부장적 세대 공동체], 일부다처제적 가부장과 일부일처제적 가부장등),라고 생각한다.········ 가족의 사회적인 의미는 전적으로·····</p>
<p>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첫째, 경제적으로 &#8211; 가족은 자본주의초기에는 경제적인 소기업이었으며, 또한 지금도 농업이나 소규모 자영업에서는 그러하다.</p>
<p> </p>
<p class="바탕글">둘째, 사회적으로 &#8211; 가족은 권위주의 사회에서는 경제적으로나 성적으로 권리를 빼앗긴 여성과 어린이를 보호하는 중요한 기능을 지닌다.</p>
<p> </p>
<p class="바탕글">셋째, 정치적으로 -······가적은 직접적인 경제적인 토대는 의미를 잃었고,·····정치적으로 대체되었다. 보수적인 과학과 보수적인 법들이 가장 많이 지키려고 한 가족의 핵심과제는 권위주의적 이데올로기와 보수적[성적]구조의 공장으로서의 자신의 특징이다. 가족은 예외없이 거의 모든 사회성원이 처음 숨을 위면서부터 통과해야만 하는 교육장치이다.······· 가족은 보수적인 세계관의 의미에서 어린이이게 영향을 끼친다.····· 가족은 자신의 형태나 직접적인 영향을 통해 현존 사회질서와 보수적인 사고방식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를 전달.</p>
<p>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그러므로 가족의 교육적 중요성을 관찰할 때, 청년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가족교육에 기여하는 구체적인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영향과 ‘삼각형구조’ 자체의 직접적인 영향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나누어서 연구해야만 한다.</p>
<p>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결혼 상황과 가족 배치가 아무리 비참하고 암담하고 고통스럽고 참기 어려워도 가족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가족성원에 의해서 내외적으로 보호되어야 한다.</p>
<p>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결혼 및 가족에 대한 교육은 처음부터 아이를 양육하기 위한 목적이다.</p>
<p> </p>
<p class="바탕글">가족 결혼은 실천적으로 개인주의적이며 그 어린이가 하루에 몇 시간을 유치원에서 보낸다 할지라도 어린이 집합체의 좋은 영향을 배제한다는 사실을 과소 평가해서는 안된다. 가족이데올로기는 유치원이 가족 교육에 미치는 것보다 훨씬 더 실제적으로 유치원에 영향을 끼친다.</p>
<p> </p>
<p class="바탕글">그러므로 어린이는 가족 속에 강제 편입되며, 그래서 성적이고 권위적인 측면에서 부모에 고정된다. 어린이는 부모의 권위가 엄격하건, 그렇지 않건 관계없이 신체가 작기 때문에 부모의 권위에 압박당한다.</p>
<p>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가족교육의 더 나아간 특징은, 부모가 특히 어머니가 집밖에서 생계를 꾸려나가는 소득을 올리지 않는 한 자신의 삶의 내용을 점점 더 자신의 어린이에게서 찾고, 어린이는 사람들이 사랑하고 마음대로 괴롭힐 수 있는 강아지 역할을 하고, 부모의 정서적 태도는 교육에 완전히 부적합하게 만들어진다는 것이다.</p>
<p>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강제적 가족이 권위주의 사회와 경제적으로 얽혀져 있기 때문에, 강제적 가족의 작동을 이 사회 안에서 없애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사태에 완전히 무지한 것이다. 이러한 작동은 가족 상황 자체에 놓여 있으며 충동구조의 무의식적 메커니즘을 통해서 특이한 개인 안에 제거할 수 없게 뿌리박고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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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그러므로 가족은 두 가지 정치적 역할을 지닌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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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첫째, 가족은 사람들을 성불구자로 만듦으로서 스스로를 재생산한다. 가부장적인 가족이 유지됨으로써, 성 억압 자신이 가져온 성 장애, 신경증, 정신병, 성범죄 등의 결과와 함께 보존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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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둘째, 가족은 권위를 두려워하고 삶을 불안해하는 복종자를 만들고, 그로 인해 한줌의 권력자에 의한 대중이 지배될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새롭게 만들어 낸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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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이렇게 가족은 보수주의자에게는 그가 긍정하는 사회질서의 보루라는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다.······ 가족은 (반동적인 의미에서) ‘국가와 사회를 유지하기’ 때문이다.“(성혁명중에서)</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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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가정교육, 가정이 가지는 의미 즉, 계급사회에서의 가족의 의미와 계급이 해체되었을 때 가족의 의미와 형태는 틀리다. 강령에서 무상급식, 무상보육은 자본주의적 가족관계의 해체를 촉진하며 여성의 사적노동을 사회적노동으로 변화시켜는 직접적인 계기가 될 것이다. 사회의 경제적관계가 변화가 이루어지면 사회문화적인 변동이 온다. 경제적인 변화가 멈추면 정와 문화는 반동의 길로 접어든다. 그예는 소련의 모습에서 이미 구현되었다. 정치적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집권으로 계급사회의 가정이 무너져 갔지만 스탈린체제는 무너져가는 계급사회의 가정을 복구하여 문화에서도 반 프롤레타리아의 길로 간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사회의 가정은 당연히 해체가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진다. 억압과 통제가 없는 새로운 유형의 가정이 경제적 토대에 맞추어 나타나게 될 것이다. 무너지는 것은 계급사회의 문화이며 기지개를 펴는 것은 무계급사회의 문호다. 그러나 계급사회에서 습관적으로 행해져 왔던 가족의 모습은 운동의 전위에게 조차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소련에서의 일시적인 계급사회의 가족의 해체는 선진노동자계급에서조차 힘들어하여 스탈린이 옛 모습으로 가족의 복귀를 주장하고 강제 했을 때, 반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도움을 주었다. 전통적인 가족의 모습으로 복귀하는 모습은 권위주의적 가족의 해체와 계급사회와의 연결고리를 자세히 보여준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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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3.학교교육</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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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인간의 성장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교육의 현장은 학교다. 교육이 가지는 의미를 여과 없이 그대로 전달을 하고 주입시키며, 생활 속에 강제를 한다. 학교교육은 유아기와 어린이 청소년의 모습을 가지며 현재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강제화 시켰다. 유아(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의 교육은 지식을 심어주는 곳이라는 모습을 가지지만 질서 지키기, 예의 차리기, 나라에 충성하기 등을 중점으로 하여 당근과 채찍이 공존하는 사회의 현실의 단면을 보여준다. 자본주의 사회의 전통적인 교육에서 아동이나 청소년들은 대부분의 생활을 시험과 숙제에 매달리고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모와 교사의 권위에 복종하라고 강제한다. 이러한 교육은 아동 및 청소년들을 복종에 강제함으로써, 능동적인 발전형태보다는 타율적으로 만든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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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교육은 학교가 중심이 되어 청소년과 아동들에게 문자해독능력과 정보 및 지식의 축적을 시키는 교습으로만 인식하고 있지만 국가에서 촉진하고 지향하고자 하는 목표로 실천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교육부의 지침에 의해서, 정부의 시책에 의해서 교육의 내용과 형식은 늘 변해 왔으며, 그 내용의 핵심은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을 전망으로 하여 이데올로기, 관습 및 전통을 유지시켜 습득하게 함으로써 사회의 보수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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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일부 몰지각한 사상을 가진 자들에 의해서 전통적인 교육의 장은 일시적으로 약화되어 있으나 주류와 힘으로, 비주류는 그 안에 통합되어 질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대안학교*의 운영은 학교운영의 진보적인 모습으로써 생태와 인간과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아동들의 개인의 의식화 및 개인적 지성의 완성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협력을 하나의 기본과제로 하여 기본규범인 상호성의 의미를 찾아 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대안학교는 아동에 극한되어 지거나 지체장애인을 위한 한정된 공간으로 자리를 잡고 있어, 결국에 시험과 성적에 매달리는 현실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그 안에 정착을 시킨다. 계급사회는, 특히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는 개인적인 자유라는 명칭으로 부르주아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수가 희생을 강요하는 기계적인 모습을 강제시키고 있는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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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교육의 주체로서, 대행자가 아닌 주체는 당연히 자신들의 행동의 동기와 더불어서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가져야 함을 배운다. 그러한 것이 사회를 유지하는 교육의 의미 일 것이지만, 학교교육은 개인이 선택한 규율과 전 인격적으로 협력하여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닌 이상 계급사회의 비주체성으로 전락되어 수동적인 사회적인 성격을 가지고 이미 익숙해진 권위와 사회의 맹목적적인 안정을 추구하는 핵심주체로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모난 돌은 정을 맞는 법이며, 군대의 줄은 가운데에 서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인 통념의 강하는 SKY라는 학벌을 조장하였고, 이는 사회의 줄서기 편한 상층부로의 이동을 위한 징검다리로 만들게 된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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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교육은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지만, 인류의 중심사상으로 관통하고 있는 것은 인간과 자연이 병행하여 질서에 편입되는 과정을 느끼고 배우는 것이며 &#8211; 진정한 가르침의 원리를 구성하는 것은 사물의 질서이다. &#8211; 수동적인 모습의 질서가 아니고 능동적인 질서의 모습을 깨우쳐가는 것이다. 여기에선 외국어, 수학, 도덕의 형식적인 모습의 교육의 현장이 담겨 질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교육의 참다운 모습으로 변해가기 위해선 교육의 주체와 객체는 엄격하게 분리 시켜야 하는 것이다. 권위와 선입견을 아동과 청소년으로부터 격리시켜 사회의 참다운 일군으로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사회주의교육의 목적은 자기들끼리 협력할 수 있는 자율적인 인격을 형성해주고 자신의 자기중심주의와 집단적 구속의 전제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학교 자체에서 학생들의 자발적인 사회생활이 필요하다. 자발적인 사회생활은 학부모, 선생의 권위와 복종에 대한, 억압과 통제·차별에 대한 저항을 가지게 되고 스스로의 자유를 위한 선택을 강제한다. 학교교육이 무계급적인 색상을 가지기 위해선 정치적인 혁명이 완수되어야 한다. 정치적인 혁명이 곧바로 교육환경에 반영되지는 않는다. 학교교육의 핵심은 학부모의 권위로부터 학생을 분리하는 것으로 시작되어야하며. 배우고 가르치는 사회의 원모습을 획득하기 위해선 학생의 자유로운 선택권을 보장해야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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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그렇게 하기 위해선</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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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1) 모든 사학을 철폐하고 공(국)유화 시켜야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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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2) 학교의 시험 및 사회에서 성적과 순위를 무기로 하는 시험은 폐지해야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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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3) 학생의 관념적인 교육의 방식을 허물고 사회생활과 함께할 수 있는 실생활 위주의 교육 방식으로 변해야 한다. 이는 현장중심의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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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4) 학생들의 성(性)적 해방을 위한 피임법 및 피임기구를 무상으로 지원하고, 장소를 무상으로 제공한다. 학생들의 성의 억제는 계급사회의 발전 속에서 강제적으로 억압되어 왔으며, 억제는 변형적인 성의 모습으로 나타나 성매매, 윤간, 마조히즘, 사디스트 등등의 모습을 나타나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또 하나의 토대로 자릴 잡고 있다. 자유는 자율이다. 억압과 통제는 계급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청소년의 성문제를 다루는 내용은 빌헬름 라이히의 책을 참조바람)</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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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5) 무상교육. 무상배급. 무상보육이 제공되어야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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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6) 학생자치위원회 건설이 되어야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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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7) 학생자치위원회는 사회의 하나의 축이며 그 안에는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을 부여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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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8) 학생자치위원회와 교사위원회가 학교운영위원회를 구성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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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4. 사회교육</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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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에선 가장 주요한 교육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하여, 생산력의 발전을 따라가기 위한 도태되지 말아야하는 생존욕구로 인한 학교교육의 연장으로 재교육의 이름을 행해지고 있다. 인간 사회는 교육의 사회이다. 재생산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서 무한경쟁으로 내몰리면서 자신 스스로의 발전이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론 자본의 이익을 위한 준비과정이다. 자본을 공경하고 반항해선 안 되는 집안가족의 어른으로써의 자본가의 위치를 인정하며, 상명하복이 사회의 건실한 발전을 일구는 토대라고 강조를 한다. 사회에 한발을 내딛기 전 군대의 의무화는 계급적인 현실을 부담없게 받아들이는 하나의 과정으로 존립한다. 사회에서의 재교육은 자본가계급이 자신의 비용으로 부담하지 않고 개인적인 상항으로 취급하여 개인과 개인 간의 경쟁으로 만들어 사회의 기본구조인 협력체계를 깨뜨리고, 다른 이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그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구조로 만들어 갔다. 요즘 유행하는 무한경쟁 프로그램의 몇 가지가 대중들의 높은 호응과, 대리만족의 형태로 또한 실력만 있다면 대접받는 평등한 사회라는 것을 인식 심어주는 방송언론매체인 ‘위대한 탄생’ ‘슈퍼스타K&#8217; &#8216;도전자’ ‘기적의 오디션’ 등등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은 자본주의 사회의 방송에 예능 오락물의 주요 트렌드로 자리를 잡아 힘든 취업의 문을 열기위한 젊은이들의 활약상을 보여주어 대중의 염원을 반영도하지만 자본주의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여과 없이 반영을 하여 어려워도 참고 실력을 쌓아간다면, 쥐구멍에도 볕 뜰날이 온다는 것을 보여준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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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사회교육은 방송언론이 주축이 되고, 사설학원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작은 흐름이지만 정부나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기술학원들도 존재하지만, 주축은 아니다. 요즘엔 기술학원에서 취급했던 내용을 고등학교의 교과과정에 편입시켜 취업준비를 돕고 있기도 하다. 사회교육은 방송·언론, 영화, 문화 등을 제외하면, 기술적인 과정을 답보로 한다. 대중의 이데올로기와 사회적인 규범의 창출은 방송과 언론이며, 항상 반복적인 권선징악의 의미, 변화하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보여주면서 사회의 현존질서의 유지를 위해서라면 악당을 제거해야하는 것을 사명으로 존재하는 영웅들의 모습이 주축을 이르고 있는 방송·언론, 영화, 문학 등의 내용들은 계급사회의 전통성을 보여준다. 또한 방송·언론, 영화, 문학 등은 사회의 기존제도와 체제가 원활히 유지 될 수 있도록 하며, 자본주의의 정치, 경제, 문화적 제요소를 발전시켜 나가는데 대중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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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사회교육은 사회적인 약자인 피지배계급의 존속을 강요함을 기본으로 한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설정은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선 안되며, 모르는 것은 손을 대선 안되며, 오로지 보이는 현상, 자신의 주위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으로 인식의 틀을 협소하게 만들어 사회적인 연관관계보단 자신의 전문적인 부분만을 강조하는 신세로 전문화 시킨다. 전문가의 모습은 사회적인 정치·문화·경제 등등의 분야를 하나의 연관관계로 바라보는 총체성을 상실하고 속물화시킨다. 또한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전문영역이라는 형태로 대중과 의사소통을 원활히 하기보다는 계몽하고 시혜를 주는 어른의 자격으로 접촉을 하여 대중을 주인 의식으로 무장하지 못하게 하며, 주는 떡이나 받아먹는 존재로 전락시킨다. 전문가는 자본가의 분신의 역할을 하며, 자본가의 이윤의 일부를 나눠먹으며 관료화 되어,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선 능동적인 자세를 요구하지만, 그 외적인 부분에선 복종하며 규율을 잘 지키는 모범시민이 되기를 대중에게 강요한다. 사회교육의 주요형태가 전문가를 만들어 내고, 전문가를 동원하여 대중의 시각을 한쪽 방향으로 잡는데 이바지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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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5.사회교육의 대안은 무엇인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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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사회주의 교육의 대안은 무엇일까? 학교교육의 대안으로써 강령적인 의미를 내세웠지만 가정교육과 사회교육에 대한 대안은 무엇으로 나타날까? 여기선 학교교육에 대한 내용을 배제하고 사회교육 및 가정교육에 대한 대안을 중점으로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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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먼저 해방연대의 강령을 보자</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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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8) 임시직, 계약직, 파견직 등 모든 형태의 비정규직 고용을 금지하고 완전 고용을 실시한다. 이를 위해 국가는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노동을 할 수 있도록 교육과 일자리를 제공한다.”((가칭)한국 사회주의 노동자당 강령초안 중에서) 즉 노동자들의 재교육을 위한, 재취업을 할 수 있는 교육에 의미를 부여한다. 사회교육에 대한 다른 내용은 없다. 아마 추후 강령의 토론의 활성화에서 첨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다른 정파의 강령도 당연히 그렇게 될 것이라고 판단한다. 다만 현재까지의 강령들의 내용이 이러한 부분을 경미한 사항으로 취급하거나,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은 상항으로 만들어 놓지 않았을까하는 노파심에 한번 더 적어 본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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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노동계급의 재교육의 문제는 중요하다. 그 개개인의 인격적인 세상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것이 교육이며, 하나의 사회의 구성원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련의 혁명이 실패한 원인중의 하나가 대중들이 계급사회에서 배워왔던 습관과, 높은 문맹율과 문화적 소외감에서 나타난, 즉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한 관계로 위에서 시키면 움직이는 수동적인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다. 노동계급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여야하는 소비에트에서, 회사를 운영해야 하는 자주관리면에서 운영의 묘를 살리기 보단 스탈린의 강제와 관습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노동계급의 교육은 그들이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게 만들어야하며 능동적인 삶은 사회에 억압과 통제를 제어하고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 갈수 있는 모습을 만들어 낸다. 능동적인 삶을 재창조 하기위해선 투쟁의 과정에서 나오겠지만 계급사회의 잔재인 재취업을 위한 기술교육을 위주로 하기엔 많은 아픔이 있다. 혁명이후 사회문화혁명의 길이 멀고 험한 이유도 기존에 가져왔던 계급사회의 관습에서 해방될 때만이 비로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듯이, 사회교육은 그 틀을 마련하는 억압과 차별을 철폐할 수 있게 하기위한 것이다. 교육은 정확한 과학적 인식에 기초 하고 있는 기술이다. 사물의 질서를 가르치는 것으로서 인간의 능동성을 개발해 나가야하며 협력과 상호성의 의미에서 완성을 유도 해나가는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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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사회주의 교육은 계급사회의 관습에서의 단절을 의미하며, 사회문화의 사회주의혁명의 완수와 공산주의사회의 진입을 위한 기초를 닦는데 이용한다. 그러나 혁명이전의 상항에선 교육의 한계는 대중이 지배계급에 대한 열정적인 투쟁의 모습에서, 배움의 현장이 존재한다. 지배계급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 대중자신의 생존을 위한 정치·경제투쟁, 그 투쟁의 핵심인 생산시설 점거파업 등은 대중 스스로 지배계급에 저항하는 학습을 만들어 낸다. 파업은 노동자대중이 실제로 현장을 통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학교이자, 학습장소이다. 계급사회에서의 교육은 생생한 파업의 물결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승리의 힘은 혁명의 파고를 높이는 원동력이 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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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대안으로는</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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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1) 실업수당의 최저생활비보상.</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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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2) 모든 구성원에게 노동할 수 있도록 교육과 일자리를 제공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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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3) 사회문화보급을 위한 공간을 확대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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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4) 문화산업에 대한 국가보조금을 지급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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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6. 가정교육은 어떠한 변화를 가져야 하는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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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가족은 해체되어야한다. 계급사회의 전반적으로 자리를 잡아 대중에게 관습처럼 내려오는 전통가족은 사회주의사회의 가치와 부합되지 않는다. 억압과 통제가 아닌 인간다운 삶의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면 하나의 틀에 얽매어 있는 것이 아니며 자신들의 의사가 존중되는 그러한 삶을 살아야한다. 전업주부가 아이들 때문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못하게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가정에서의 일을 사회화시켜야한다. 여성해방은 여성의 일이 사회적일이 아닌 개인적인 또는 가정적인 일로 취급되면서 사회적노동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가정의 노동이 아닌 사회적 노동으로 변화 시키는 것,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게 하여 사회의 울타리인 더 넓은 곳으로 나오게 만들 의무가 있는 것이다. 여성해방과 권위적인 가족의 해체는 하나의 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로 분리 된 것이 아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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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우리의 강령은 사회주의로 나가는 것이다. 강령의 의미로서의 다리는 목표와 과정을 선명히 보여주는 것을 축으로 한다. 사회주의모습과 과정을 함께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다리가 하나의 과정만 서술하고 있다면 결국 최소강령적인 요구로 자신을 국한하게 된다면 개량주의로 빠지게 되고, 최대강령적인 요구에 집착을 한다면 기회주의로 빠지게 된다. 가정에서의 교육은 자본주의적 가족관계의 해체를 원하며, 이는 최대강령의 요구이며 필연이다. 이미 맹아적인 모습에서 찾아 볼 수 있지만 아직도 부모의 의미에서 자신의 자식을 챙기고자하는 관습은 쉽게 떨쳐 질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원하며, 발전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자.</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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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1)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아동 및 유아들의 교육이 필수적으로 변해 가고 있다. 유아원, 유치원의 보급은 자녀교육의 의미가 이미 사회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맞벌이 부부들의 증가는 24시간 보육원 운영 및 유치원 초등학교의 방과 후 학습 또는 학습시간의 연장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계속적으로 늘어나는 잔업과 야근, 즉 노동시간의 증가로 인한 측면도 있지만 아동들은 자신의 또래하고 어울려 사회적인 관계가 이루어질때만이 협력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울리지 않은 애들은 자신들만의 세계로 빠져들어 이기심을 키워 자신만을 아는 것으로 나타난다. 부모의 보호가 자식을 망치는 이유다. 아이들의 협력 관계는 수동적인 모습을 지양하고 능동적인 모습으로 매순간 스스로 경험과 추론적 방법의 모든 자료들을 자유롭게 펼쳐, 사회적인 이상과 현실에 비판 및 수용을 검증하며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 한다. 사회에서, 집단적인 협력관계의 발전인 또래와의 공동체 생활을 강조하다보면, 하나의 작은 틀이 있는 가정의 교육은 깨질 수밖에 없고, 계급사회의 가정의 구조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24시간 보육원 및 유아원 운영. 부모가 원하는 시간에 유아를 데리고 갈 수 있고, 데리고 올 수 있는 공간 제공.</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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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2) 아동들 및 청소년들의 무상급식. 하루 3끼를 무상으로 제공 한다. 단 가정에서 해결을 원할 경우엔 제공하지 않는다. 무상급식은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사회에서 아동 청소년 노이들을 보육하고 부양하기 위한 기본은 무상급식과 마음 편히 쉴 공간의 실현이다. 자신이 원하면 더 낳은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겠지만, 기본적인 인류의 생존을 위한 식사는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교육감들이 의욕적으로 시행하고자 하는 무상급식을 학교가 아닌 사회적으로 실행되어야 하는 것은 타당하다. 식당은 가정에서의 식사문화를 대중화시키는 데 공헌을 했고, 가정적인 식사문화를 사회화시키는 필수 조건이며, 대중음식점의 확대는 사회주의 사회의 필연이다. 자본주의사회의 상품으로써 식사와는 다른 노동의 잉여생산물의 일부분으로써 사회에 제공되어야 하는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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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3) 결혼의 의미가 퇴색한다. 현재의 결혼은 신고하고 이혼을 하기 위해선 법원에 선고를 받아야 하는 허가제가 계급사회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살아가는데 신고와 허가가 왜 필요한가? 이는 통제를 위해서 필요할 뿐이다. 가정을 유지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유일한 남성들의 안식처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식으며 헤어져 자신의 안식처를 새롭게 만들어 가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사랑이 식어도 자식의 앞날을 위해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사돈과의 돈돈한 경제·문화적인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자 결혼은 유지가 되어야 하는 것이 계급사회의 결혼의 의미다. 결혼·이혼의 허가 및 신고는 계급사회의 가정을 유지하고자하는 발악 일뿐이다. 그럼에도 이혼은 증가 한다. 황혼이혼의 증가는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며 현실이다. 이혼의 가족은 경제적 자립도가 부족한 여성들에겐 치명적이다. 그러나 미워하면서 하나의 지붕에서 살아가지는 못한다, 별거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러한 가정은 해체가 되어야하며, 사랑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자녀들은 사회가 보살피고 키워주며 교육을 시키는 제도가 확립되어야 한다. 결혼과 이혼은 신고만 하면 가능한 사회가 되어야한다. 2)번항의 24시간의 영유아를 위한 보육 시설과 무상급식이 기본적인 삶의 도구인 것이 이런 상항에서 존재하는 까닭이다. 결혼의 의미가 하나의 가정을 만들어 가는 것은 계급사회의 잔존이다. 결혼의 의미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권태기라는 것은 존재해서도 안된다. 하나의 틀을 강요 할 때, 그 사회는 보수화 되고 차별이 생기며 억압적인 구조로 변화하게 된다. 스탈린시대의 독재적 상황은 하나의 틀만을 인정하여 자신의 집권을 위한 토대를 구축했으며, 관료들이 집권하는 시대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부분을 통하여 가부장적제도는 사멸하고 여성해방을 위한 문화적인 토양이 쌓여 간다. (여성의 경제적인 부분은 노동강령의 내용과 여성해방의 내용으로 이미 알고 있다고 판단하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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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이미 자본주의적 가족의 의미는 사회주의의 맹아적인 부분으로 인하여 퇴색되어가고 있으나, 계급사회의 틀이 온존하게 살아 있는 한 그 틀은 깨지지는 않는다. 계급사회의 도덕과 경제 문화적이고 이데올로기에서 가정의 존속을 강력하게 염원하며 장려하고 강조를 한다. 가정이 튼튼해야 나라가 잘살아가는 법이라고 강조를 하면서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가족이 유지되고 발전해야 함을 당연하다고 과학적인 근거가 필요 없이 목소리를 높이 외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족이 해체 되지 않으면 사회발전은 정체될 수밖에 없다. 가족의 해체는 권위적인 교육이 자녀들에게 이루어지지 않아 세습화가 되지 않아서, 아동과 청소년의 자유로운 공동체지향에 하나의 혁신이 이루어진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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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7. 다시한번 더</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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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글을 마치면서 자본주의사회의 교육은 일부진보적인 인식을 가지고 대중에게 전파하여 사회에 비판적 세력을 만드는 일부 형태를 제외하곤 일반적으로 계급사회의 유지와 발전을 토대로 해서 이루어져 있다. 진보적인 사고방식도 계급 의식화되지 않으면 쁘띠부르주아방식으로 함몰되어 보수와 반대의 개념으로 남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진보적인 내용에서 풍부한 사례를 가지고 계급적인 접근을 한다면 사회주의 강령에 더 많은 보답이 이루어질 것이다. 다음은 피아제의 글을 인용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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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우리의 연구결과들이 권위의 방법만큼이나 순수하게 개별화된 방법에도 호의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매우 분명한 사실이다. 뒤르켐과 관련된 논의에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아동의 사회적 삶이 성인권위의 표시라 할 수 있는 내적 복종에 아주 가까운 하나의 규율을 불러일으키도록 충분히 발달 되었을 때 아동에게 완성된 규율체계를 주입하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심지어 도덕적이지 못한 것이다. 다시말해 아동고유의 적극적 연구에 대한 성향과 협동에 대한 열망이 정상적인 지적 발달을 충분히 보증해 줄 수 있을때 외부로부터 아동의 정신을 변형시키고자 시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도덕적 그리고 합리적인 두 측면 모두에서 지배자가 아니라 협조자가 되어야만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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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그러나 역으로 우리가 모든 논리적 규범들처럼 모든 도덕적 규범들도 협동의 산물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깨달았을 때, 양심과 지성이라는 두 가지를 모두 발달 시키기 위하여 전적으로 생물학적 본능에만 의존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학교 안에 공동으로 실행된 개별적인 실험과 숙고들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균형을 잡아 줄 수 있는 하나의 장소를 창조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윤리학과 도덕교육1. 박병기 추병완 지음 인간사랑에서 재인용 P30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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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사회제도를 제거 하고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다면 교육의 혁신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그 혁신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답은 사회주의노동자당의 강령이다. 강령은 구체적으로 그러나 너무 개별화 시켜서는 강령의 의미는 퇴색될 것이다. 교육에 대한 각 정파들의 개념들은 정치·경제적 논리에 밀려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언젠가는 해야 할일이다. 세계의 역사를 들어다 보면 혁명적이 열기에 가장 선두에 서왔던 사람들은 젊은이들이다. 젊음사람들이 선두에 서왔던 경우는 아직 계급사회의 물이 덜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의 활동 에너지가 넘쳐흘러가는 세상을 건설하기위해서는 교육강령의 내용도 시급하다. 생산의 국유화나 사회화 그자체로는 인간의 노예상태에서 작은 변화를 일으키는 필수 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사회의 정치·경제적 과정을 인간 사회의 본질로 중요시하는 것은 아동과 청소년의 보육을 밥만 주면 된다고 취급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인간은 밥만 먹고 살진 않는다. 스탈린의 시대가 계급사회의 원문화적인 요소인 권위적인 사회로 퇴행한 것은 생산성의 향상을 위한 순수한 경제적 생활상 때문이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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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정치·경제와 더불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충분한 문화적환경과 그를 받쳐주는 교육이다. 교육은 삶의 지식을 알려주고, 우리가 나가야하는 모습을 밝혀주는 본래의 참뜻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럴때만이 자유로운 노동민주주의사회가 만들어져 나갈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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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8. 글을 마치면서.</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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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아랍에선 민주화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으나, 세계적으로 노동계급들은 자본주의의 모순의 정점에서 분을 삯이고 있으며, 참고 참고 아직도 참고 있다. 노동운동의 수동적인 태도는 계급사회의 관습과 학습에 의한 효과이며, 주체적인 능력은 결여되어 있다. 자유는 삶의 모든 기능 속에 자발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노력하여 성취해야 하는 것이기에 자유의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참아 왔던 자신의 자유와 생존을 위한 폭발은 하나의 계기를 통하여 나타날 수 있지만,도화선은 어디서 찾아 낼 수 있을까? 억압과 착취를 하나의 계기를 통하여 폭발하기 위해선 그 동안의 그러한 불만이 얼마나 많이 누적되어야만 했던가? 계급사회의 미덕은 지배계급이 사회를 유지하는데 불만이 있다면 지배계급의 발전을 위한 비판적 지적이야 함을 늘 강조해 왔다. 지배계급을 위한 비판적 내용은 권위적인 독재자에 대항해 자신을 보호하기위해선 스스로를 타락시켜왔던 것이 사실이다. 합법적으로 활동한다는 노동운동단체들의 쁘띠부르주아적 계급주의 사상과 더불어서 기회주의적 조류로 변모하는 대부분의 모습은 자신의 생존만을 위한 조직이기주의로 바뀌어 갔음을 잊어서는 안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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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자유를 부르짖는다는 것은 억압된 상태가 있다는 반증이며, 생존을 위한 발악은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생존을 위하여 억압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계급사회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자유로워질 능력이 없는 인민대중들이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선 자신들이 권력을 가져야만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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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권력이 없으면 진실은 아무소용이 없다. 그 진실은 학문적인 것에 불과하다.····· 진실의 추진자가 사회적 권력을 획득하면, 그 진실이 항상 소멸한다는 것은 여가적 사실이다. ‘권력’은 항상 다른 사람들의 복종을 의미한다. 그러나 진실한 사실들은 언제나 복종이 아니라, 확신에 의해서만 관철된다.”(파시즘의 대중심리. P44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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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인민이 자주적인 활동을 시작하고 있는 아랍에서의 혁명의 열기가 한국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대중을 투쟁으로 이끌어 나가야 하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의 의무다. 무엇이 한국의 노동계급의 운동을 폭발시킬지는 아직은 모른다. 어떠한 흐름을 가지고 시작되어 질지도 모르는 것은 사실이다. 민주주의의 열망이 87년 노동자투쟁의 기폭제가 되었듯이, 지나가는 촛불시위와 강렬했던 쌍용자동차점거파업도 기폭제가 되지 못했다. 대중은 열망은 있으나 빙산속의 불길이며, 한발 한발 전진하고 있지만 영원히 거북의 뒤꽁무니를 쫒아가는 형색이다. 시작은 했지만 아직도 안개 속에서 헤매고 있는 형국이다. 현재의 투쟁의 중심은 어디이며, 누가 선두에서 그 힘을 발휘 할 것인가? 누가 혁명의 수레를 이끌어 갈 것인가? 마지막까지 갈 수밖에 없는 자는 노동자들이지만 그 힘의 도화선을 잡아당길 수 있는 계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은 동지들이다. 강령으로 사회주의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대중의 현실을 그렇게 만들어 보자.</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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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9. 사족</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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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문제가 되었던 학교위원회에 학부모의 참여가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답은 충분히 설명이 됐다고 생각이 된다. 학부모의 참여를 원하는 사회주의 그룹들은 하나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가족의 해체가 급속하게 이루어지는 과정에 있다. 계급사회의 가족의 해체는 학부모의 학교위운회의 참여는 없어지게 되고, 학부모의 학교운영위의 참여는 계급사회의 가족관계가 해체되지 않은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과도강령의 이름으로, 이행기강령의 이름으로 다리를 놓는 의미로 봐야 한다고 주장할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주의로 가는 이행적 과정에서의 일시적 상태에 존속하며, 권위주의적 가족의 의미는 혁명의 진행 중에 이미 계급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와해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너무 협소한 생각은 현재를 바탕으로만 두고 판단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혁명의 진전은 계급사회의 폐기물을 없애기는 하지만,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다. 그러나 가족관계는 변화한다. 어떠한 변화이든지 기존에 존재해 오고 있는 계급사회, 자본주의사회의 가족관계와는 다른 모습으로 출현하게 될 것이다. 추정은 하지만 구체적인 모습은 아직 모른다. 여성해방의 모습, 모계사회의 전통을 갖추게 될 것인지, 어떠한 사회의 모습이 그려지게 될 것인지 모른다. 가보지 못한 미래에 대해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미래는 현실로 오는 세계이기 때문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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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과도강령은 사회주의와 현재의 자본주의사회를 연결시켜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최대강령의 의미와 최소강령의 의미를 함께 어울리고, 사회주의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대중을 사회주의 사회를 위한 전선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다. 강령은 명확해야 하며 추상화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거짓으로 유포하거나, 대중을 기만행위하거나 유토피아의 모습을 보여주어선 안 된다. 강령은 미래의 현실을 보여주고 규정하기 때문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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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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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대안학교는 계급사상을 유포하거나, 학생 자유와 협동을 전제한 교육의 방식이 아니라 남한 사회의 성적위주의 학교방식에 반발해서 나온 하나의 모습일 뿐이다. 학교교육에 생태 교육적 방식중 하나의 부분으로써 농사를 체험하고 자연이 인간에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함께하고자 할 때 자연이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삶을 윤택하게 해줄 수 있다는 보여주는 것을 통하여 시험과 성적이 아닌 다른 모습에서의 교육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아닌 교육은 자본주의 사회에도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이러한 방식으로 살아가야하는 것을 가르쳐주고, 자본주의사회가 이러한 모습으로 바꾸기를 원하면서 만들어 낸 쁘띠부르주아적 사고방식의 걸작품이다. 이 학교의 진보적인 측면은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강화하고, 발전 시켜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 한계는 자본주의의 내적비판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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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교육은 양질의 문제가 아니며, 형식의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핵심적인 사항은 능동적인 인간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안학교가 비록 일시적으로 학생들을 능동형으로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전체 학사일정에 따르는 일반적인 교육체계에 혼합이 되어선 그러한 모습은 사라지게 된다. 자본주의발전이 아무리 인간적인 모습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이윤을 위한 생산과 통제가 사라지지 않는 한, 교육은 대다수의 청소년의 반항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수동적인 모습으로 전락하게 만든다. 그런 교육이 계급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켜왔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대안학교가 무수히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아니 초등학교 중등학교의 핵심이 대안학교의 모습을 가지고, 서구유럽의 일부나라에서처럼 시험제도가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계급구조가 무너지지 않은 교육의 모습은 하나의 맹아적인 형태를 뛸 뿐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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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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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6호를 발간하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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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27 Apr 2011 02:53:56 +0000</pubDate>
		<dc:creator>강령토론</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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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1/04/programto.jpg"><img class="alignleft size-medium wp-image-1026" style="margin: 4px; border: black 1px solid;" title="programto" src="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1/04/programto-199x300.jpg" alt="" width="199" height="300" /></a></span>제 6호의 발간이 상당히 늦어졌다. 발간시기가 늦어진 이유는 기획된 한 글의 필자가 자신과 연관된 투쟁 때문에 오랫동안 글을 마무리 짓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지만 발간시점이 상당히 늦어진 점에 대해서 독자들에게 사과드리고 양해를 구한다. </span></p>
<p><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p=1025" class="more-link">Read more on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6호를 발간하며&#8230;</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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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encoded><![CDATA[<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1/04/programto.jpg"><img class="alignleft size-medium wp-image-1026" style="margin: 4px; border: black 1px solid;" title="programto" src="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1/04/programto-199x300.jpg" alt="" width="199" height="300" /></a></span>제 6호의 발간이 상당히 늦어졌다. 발간시기가 늦어진 이유는 기획된 한 글의 필자가 자신과 연관된 투쟁 때문에 오랫동안 글을 마무리 짓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지만 발간시점이 상당히 늦어진 점에 대해서 독자들에게 사과드리고 양해를 구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제5호의 발간 이후, 5호에서 밝힌 대로 우리는 소주제별 토론회, 특히 여성문제 토론회를 조직하기 위해 시도하였다. 그러나 토론회 조직과정에서, 우리가 비판한 입장(사회주의여성주의)에 서있는 토론자 섭외대상자가 여러 사정으로(자신이 소속된 조직에서 여성문제논의가 향후과제로 설정되어 있어, 이것이 일단락되기 전에는 대외적으로 토론자로 나설 수 없다는 것 등) 토론자로 나서는 것을 주저하여 토론회는 당장 성사되지 못하고 계속 유보되었다. 비록 성사되지는 못하였지만 여성문제가 강령토론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 때문에 앞으로도 우리는 토론회를 계속 추진할 생각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제6호에는 세 개의 글과 한 개의 번역문이 실려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번호의 각각의 글은 별도의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한 가지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이 다른 피억압계급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로 임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이다. 이번호에서는 대표적인 피억압계급으로서 소농, 소상인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소농, 소상인에 대한 태도, 두 경우에 모두 해당되는 원칙은 노동자계급이 이들의 소소유자적 성격에 영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반대로 이들이 자본주의사회에서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고, 혁명적인 노동자계급의 편에 서게 하는 방식으로 이들을 대하고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점을 해방연대(준)이 제출한 강령초안은 “자본가계급에 대립하고 있는 계급들 중에서 오직 노동자계급만이 참으로 혁명적인 계급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모든 다른 계급들은 노동자계급의 관점에 설 경우에만 혁명적일 수 있다.”라고 요약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이들의 소소유자적 성격에 영합하는 방식은 계급동맹을 강화하고 사회주의혁명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약화시킨다. 사노준의 강령초안이 비판받아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후자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span id="more-1025"></span></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첫 번째의 글인 성두현의 「농업문제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태도」는 한국의 농업문제를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다룬 이론적인 글이다. 이 글은 농업의 위기 속에서, 또 그 위기 때문에 1990년대 중반 이후 농업에서 자본주의화가 급속히 가속화되어 왔다는 점, 이에 따라 농촌에서의 계급분화도 급속하게 가속화되어 왔다는 점을 밝힌 후, 이를 토대로 하여 농촌에서의 계급현황과 농업문제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태도를 밝히고 있다. 이 글에서 성두현은, 사회주의자들이, 몰락위기에 처한 소농들에게 현실의 모순을 있는 그대로 폭로하고, 소농에게서 미래의 희망은, 오직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투쟁에 함께 하는 것에만 있음을 설득하고, 소농들을 이러한 투쟁으로 인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두 번째 글인 이상진의 「대자본에 의한 소상인의 몰락과 사회주의자의 태도」는 대형마트, SSM 등에 의해 급속히 축출되고 있는 소상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글은, 이 문제를, 농업문제에서와 똑같이 철저히 자본주의와 관련하여 다루고 있다.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유통분야에서는 자본의 집적과 집중이 생산분야와 비교하여 완만하게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 이 분야에서도 자본의 집적과 집중이 급속한 속도로 진행되기 시작하여, 대자본에 의해 소상인의 축출이 무자비하게 진행되고 있다. SSM, 이마트 피자, 통큰 치킨 등등은 이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와 유사한 일들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 글은 이 문제를 자본주의와 관련하여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혁명의 관점에서 그 해결지점도 찾고 있는데, 그것을 세 가지 내용으로 요약하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세 번째의 글은 황정규의 「“노동자민중의 대체권력”을 주장하는 사노준 강령초안의 문제점」이다. 제5호의 「사노준이 제출한 강령초안 비판」이 사노준이 제출한 강령초안 전반을 비판한 것이라면 이 글은 제5호의 글을 보완하는 글로서, 사노준 강령초안 중에서, 특히 노동자국가가 누락된 점을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 글에서 황정규는 노동자국가의 누락이 사회주의의 핵심을 누락시킨 것임을 비판한 후, 이러한 오류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임무가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게 되며, 자본주의로 고통받는 다른 피지배계급이 노동자계급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며, 노동자계급이 이들에게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라는 강령의 다른 중요내용 역시 제대로 드러날 수 없게 된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번호의 첫 번째, 두 번째 글과 이 글의 마지막 비판부분을 연결하여 읽으면 사노준 강령초안이 안고 있는 실천적 문제점이 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마지막 글은 엥겔스의 「프랑스와 독일에서의 농민문제」의 번역문이다. 엥겔스의 글은, 가령 자본주의하에서 소농업경영 몰락의 불가피성, 소농의 협동조합으로의 조직화, 조직시 그 원칙 등, 농민문제에 대한 과학적 사회주의의 기본원칙과 태도가 담겨있는 고전적인 글로서, 사회주의자들이 농민문제의 올바른 해결책을 강구하는 데에서 필독을 권할 만한 글이다. 이 글은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6권(박종철출판사)에 번역문이 실려 있는데 심각한 오역이 있어 이 부분 교정을 포함하여 전반적으로 다시 번역하여 실었음을 밝힌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제 5호에서 우리는 교육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사상투쟁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강령초안논의를 앞으로 진행해갈 것임을 이미 밝혔었는데, 이 점을 「강령토론」발간에도 반영해 갈 예정이다.「강령토론」편집위원회는 앞으로 해방연대(준)이 제출한 강령초안의 내용을 보다 분명하고 날카롭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강령토론」을 발간해갈 것이다. 그리하여 「강령토론」이 과학적 사회주의를 선전보급하고 혁명적 이론을 정립하는 데에서 적극적으로 기여하도록 노력해 갈 것이다. </span></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2011. 4. 27</strong></span></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편집위원회</strong></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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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회주의 여성주의 비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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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2 Aug 2010 04:11:51 +0000</pubDate>
		<dc:creator>강령토론</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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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황 정 규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편집위원회 편집부장)</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960년대 이후 여성해방운동이 대중적으로 성장하면서, 사회주의, 맑스주의와 여성주의를 서로 결합시키려는 시도 역시 등장하게 되었다. 소위 “사회주의 여성주의”로 규정되는 이러한 시도들은 대개가 두 가지 방식에 의해서였다. 우선 맑스주의가 여성억압이라는 특수한 억압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한계를 지니기 때문에, 맑스주의는 생산양식의 발전, 특히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에만 제한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두 번째로 맑스주의는 여성억압을 설명하기 위해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여성억압을 설명해줄 수 있는 여성주의가 맑스주의와 결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span></p>
<p><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p=966" class="more-link">Read more on 사회주의 여성주의 비판&#8230;</a></p>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황 정 규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편집위원회 편집부장)</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960년대 이후 여성해방운동이 대중적으로 성장하면서, 사회주의, 맑스주의와 여성주의를 서로 결합시키려는 시도 역시 등장하게 되었다. 소위 “사회주의 여성주의”로 규정되는 이러한 시도들은 대개가 두 가지 방식에 의해서였다. 우선 맑스주의가 여성억압이라는 특수한 억압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한계를 지니기 때문에, 맑스주의는 생산양식의 발전, 특히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에만 제한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두 번째로 맑스주의는 여성억압을 설명하기 위해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여성억압을 설명해줄 수 있는 여성주의가 맑스주의와 결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맑스주의는 여성억압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여성주의의 견해를 받아들여 서로 결합시켜야 한다는 견해는 하이디 하트만에 의해 전형적으로 드러났다. 하트만의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다. “맑스주의적 분석은 역사발전의 법칙들, 특히 자본의 법칙에 대해 본질적인 통찰을 제공하지만, 맑스주의의 범주들은 성맹목(sex-blind)적이다. 오직 여성주의 특유의 분석만이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들의 체계적 성격을 드러낸다. 그러나 여성주의의 분석 그 자체로는 불충분하다. 그것은 역사에 맹목하고 충분히 유물론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 부족한 맑스주의와 여성주의가 서로를 보완하며 결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1) 그녀는 맑스주의가 성맹목이라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여성억압을 설명할 수 없다고 보았고, 따라서 여성억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론, 새로운 범주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새로운 범주는 바로 “가부장제”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한편 맑스주의가 여성억압을 설명하는 데 한계를 있으며, 이러한 한계는 맑스주의 자체를 수정, 변형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재생산”이라는 범주를 이용하였다. 이들은 생산과 대비되는 범주로서 재생산을 상정하고는, 생산은 기존의 맑스주의로 설명될 수 있는 영역이며, 재생산은 여성억압이 발생하는 맑스주의가 설명하지 못한 영역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설명은 심지어 엥겔스가 쓴 「가족, 사적소유, 국가의 기원」의 서문에 의해 정당화 되는 것처럼 주장되었다.2)</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시도는 모두 이원론이라는 특징을 지니는 것으로, 이에 따르면 현실은 계급문제와 관련된 생산양식 / 생산의 영역과 여성억압과 관련된 가부장제 / 재생산영역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맑스주의는 계급문제, 여성주의는 여성문제를 따로따로 설명하는 것으로, 계급문제와 여성문제를 모두 설명하기 위해서는 맑스주의, 여성주의의 결합이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여성억압의 독자성을 입증하려는 의식의 과잉만을 보여준 채, 여성억압의 원인뿐 아니라 여성억압과 계급억압 사이의 관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맑스주의는 계급사회 분석, 특히 자본주의 계급분석에만 유용한 협소한 것으로 재단하였다. 그 결과 계급문제와 여성문제 모두 제대로 설명하는 데 실패하였던 것이다. <span id="more-966"></span></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미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4호에 실린 이상진의 “여성문제, 계급문제에 대한 이원론적 접근 비판”이라는 글은 여성문제에 대해서 이원론적으로 접근하는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지니는 문제점을 비판한 바 있다. 이 글의 핵심은 사회주의 여성주의 식의 접근이 여성문제를 계급문제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을 하면서 실제로는 여성문제와 계급문제를 분리시킨 후 병렬적으로 결합시키는 이원론적 구조에 빠지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급진여성주의로 귀결되는 경향을 보이며, 또한 여성운동에 대한 자율성, 독자성에 대한 강조가 범계급적 여성운동을 계급투쟁의 우위에 두는 결과를 낳는다고 비판하였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한편 이러한 사회주의 여성주의적 사고방식은 한국에서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이는 사노준의 여성강령과 사노준의 입장을 대변하는 유현경의 글에서 분명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들의 주장은 과거 30년 전 서구에서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의 주장과 대동소이 하다. 이미 사회주의와 여성주의를 기계적으로, 병렬적으로 결합하려는 시도가 성공하지 못하였는데도, 이것이 한국에서 다시금 무비판적으로 재현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셈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제 4호의 글에 이어, 이 글에서는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이원론의 근거가 되는 “가부장제”와 “재생산”, 두 범주가 지니는 오류와 한계를 자세하게 검토함으로써,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지닌 문제점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한국에서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주장을 반복하는 이들의 문제점 역시 분명해지리라 생각한다.</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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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2pt;"><strong>1. “가부장제”는 추상적이고 몰역사적인 개념으로, 여성억압의 원인이나 계급억압과 여성억압 사이의 관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였다.</strong></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가부장제”라는 용어는 여성주의자들이 여성억압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었지만, 이 용어 자체는 그전부터 오랫동안 사용되어 오던 것이었다. 가령 막스 베버는 “아버지가 확대된 친족 연결망의 여타 성원들을 지배하고 가구의 경제생산을 통제하는, 가구조직의 특별한 형태”3)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맑스 역시 가부장제를 가족을 이끄는 남성이 생산을 지휘 통제하는 특정한 생산방식으로 보았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자신의 필요를 위해 곡물, 가축, 실, 아마포, 의복 등을 생산하는 농민가족의 가부장적 생산”에 대해서 설명한 바가 있다. 이때에 가부장제의 기본적인 용법은 다음과 같다. “남성혈통을 따르는 확대된 친족구조에 대한 서술적 용어로서, 하나의 생산단위(때로는 노예노동을 포함한)로서 기능하며, 공동으로 노동하고 소유하고, 사회관계(특히 결혼)와 노동의 배분 문제에 있어서 가부장의 권위를 따른다.”4)</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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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반면 여성주의자들은 가부장제를 여성억압 자체를 설명하기 위한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용어로 사용하였다. 이들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 여성의 억압을 가부장제라는 말로 표현하고자 하였으며, “다양한 사회 영역과 형태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현상들을 포괄하는 총체로서, 성에 기반한 억압관계의 체계”5)로 이해하였다. 즉 가부장제는 여성억압과 사실 상 동의어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부장제 용어를 통해, 여성억압이 모든 역사에서 생산양식과는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존재하여온 것임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가부장제 용어를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이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대표적 인물인 하트만이 사용하는 가부장제 규정을 통해 알 수 있다. 하이디 하트만은 “위계적이지만 남성이 여성을 지배할 수 있도록 남성 사이의 상호의존과 연대를 형성, 창출할 수 있는 남성간의 사회적 관계의 일체”로 정의하였다. 그녀에 따르면, “가부장제는 위계적이고 서로 다른 계급과 인종, 민족 집단의 남자들이 가부장제에서 서로 다른 위치를 점하지만, 그들은 또한 자신들의 여성에 대한 지배관계에 대한 공유로 단결되어 있다.” 이 가부장제의 물적 토대는 “여성의 노동력에 대한 남성의 통제”로 “몇몇 필수적 생산자원에 대한 접근에 여성을 배제하고 여성의 성성을 제한함으로써 이러한 통제를 유지한다.” 그녀는 이러한 통제가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은 채, 이러한 통제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해버렸다. 게다가 하트만은 가부장제에 의해 자본가 남성과 노동자 남성사이에는 동반자 관계가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예를 들어 가족임금은 가부장제에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는 자본가 남성과 노동자 남성의 묵인과 공모의 결과라고 보았다.6)</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가부장제가 보편적인 여성억압의 체계로 이해되는 데에는 급진여성주의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급진여성주의는 여성억압의 고유성과 독자성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고, 여성억압이 모든 다른 억압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여성억압을 설명하는 고유한 사회적 범주를 만들어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급진여성주의가 주장하는 가부장제 개념을 적극 수용하여, 여성억압을 생산양식, 특히 자본주의와 결합시키려고 시도하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나 가부장제를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부장제가 여성억압의 체계라는 것 외에는 어떠한 개념적 동의도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예를 들어 가부장제의 원인과 토대로서 밀렛은 남녀 간의 권력관계를, 파이어스톤은 생물학적 성별분업을 들었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가부장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일치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령 미첼은 이데올로기적, 상징적 남성(아버지)의 지배를, 하트만은 여성노동력에 대한 남성의 통제를 가부장제의 토대로 주장하였다.7) 이는 가부장제가 단지 여성억압의 사회적 체계가 독자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이를 통해 여성운동의 독자성을 주장하기 위해 끌어 와서 자의적으로 사용한 개념이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따라서 여성억압의 보편성과 독자성을 설명하기 위해 들고 나온,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가부장제 용어는 되려 여성문제를 이해하는 데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0/08/feminism.jpg"><img class="alignleft size-medium wp-image-969" title="feminism" src="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0/08/feminism-300x209.jpg" alt="" width="300" height="209" /></a></span></span></span>우선 가부장제가 계급억압과는 구분되는 별도의 여성억압의 사회체계를 상정하기 위해 등장하였지만, 사실 상 여성억압의 원인과 역사적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였다. 가부장제 용어를 사용하는 이들 대부분이 가부장제를 인간역사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초역사적인 현상으로 보았는데, 이는 오히려 여성억압을 구체적으로 보는 것을 저해하였고, 추상론, 보편론으로 빠져버렸다. 인간 역사는 모두 남성지배, 여성종속의 역사였다고 말하는 것이 속은 후련하고 정치적으로 독자세력화하는 데에는 유용할지는 몰라도, 여성억압이 존재하며 이것이 오래된 역사를 지닌다는 현상기술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더욱이 가부장제가 인간 사회에 보편적으로 존재하였다는 것은 역사적 현실과도 부합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성의 억압은 역사적, 사회적 현상으로, 모든 인간사회에서 여성을 억압하고 여성의 지위가 남성에 비해 낮았던 것은 아니었다. 원시 공산주의 사회는 계급이 없었던 사회이면서 동시에, 남녀의 지위가 평등하였던 사회이기도 하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두 번째로 가부장제를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결합시켜 설명하려는 시도 역시 문제를 야기하였다. 이 시도는 전형적으로 이원론적 구조를 보여주는데, 가령 계급체계와 별도로 성별체계가 존재한다고 상정하거나 생산과 재생산, 산업과 가족 등으로 사회를 인위적으로 분리시켜 전자는 자본주의, 맑스주의의 영역, 후자는 여성주의, 가부장제의 영역이라고 규정하는 모습을 띠었다. 이는 맑스주의에 대한 왜곡, 협소화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왜곡, 협소화를 낳았다. 그리고 이러한 인위적 분리를 만든 후, 양자를 기능적, 병렬적으로 결합시키려고 했을 뿐이다. 이러한 결합을 설명하는 방식은 ‘서로가 상대적으로 독자적이며, 서로가 서로에 의존하고,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며, 서로 해결되려면 서로가 극복되어야 한다’는 식의 판에 박히고 상투적인 말장난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였다.8)</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세 번째, 가부장제를 받아들여 여성문제와 계급문제를 결합시키려고 했던 시도들은 불가피하게 급진여성주의로 귀결되는 경향을 낳았다. 이는 제 4호의 글, “여성문제, 계급문제에 대한 이원론적 접근 비판”에서 이미 설명하였던 것으로,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급진여성주의로부터 “가부장제” 용어를 수용하였으며, 따라서 여성억압을 다른 사회관계와 분리시켜 독립적으로 보는 급진여성주의의 문제의식 역시 공유하고 있었다. 또한 바로 위에서 지적하였듯이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여성문제와 계급문제를 사회주의 운동의 총체적 전망 속에서 설명하지 못하고 서로 독립적 영역으로 상정하고 병렬적, 기계적으로 결합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둘 사이의 결합은 불안정하였다. 또한 여성억압의 독자성, 자율성을 강조하고 여성억압을 계급투쟁에 대비하여 바라보는 가부장제 개념의 특성상,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시간이 흐를수록 계급투쟁과 여성해방운동을 분리해서 사고하고 결국에는 독자적 범계급적 여성운동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경향이 불가피하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결국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이 급진여성주의로부터 끌고 들어온 가부장제 용어는 내용적으로 “사회에 여성억압이 오랫동안 존재한다”고 말하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여성문제를 구체적 현실로부터 설명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의미를 지니던 가부장제 개념을 자기 구미에 맞게 변형시키고 나서 현실을 이 개념에 끼워 맞추려고 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2pt;"><strong>2.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여성억압의 고유한 영역으로 “재생산”을 거론하였지만, 사회에 대한 인위적 구분에 불과하였으며, 재생산 범주로 여성억압과 계급억압을 결합하려던 시도 역시 가부장제와 마찬가지로 이원론적 문제점을 반복하였다.</strong></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가부장제”라는 용어와 함께, 여성억압의 고유성, 독자성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것이 “재생산”이라는 범주이다. 심지어 “가부장제” 개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재생산”이라는 범주가 적극적으로 이용되었다고 할 정도로 “재생산” 범주는 여성억압을 설명하는 데 있어 중요하게 부상하였다. 또한 “재생산”은 맑스주의에서도 빈번하게 사용되는 용어였기 때문에,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재생산이라는 범주를 통해 맑스주의와 여성주의를 성공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나 재생산은 가부장제와 동일하게, 사회를 생산의 영역과 재생산의 영역 두 가지로 인위적으로 이분하여 여성문제와 계급문제를 병렬적으로 나열한 후, 이를 기계적으로 결합시키는 이원론적인 구조를 반복하였다. 즉 이제 “가부장제”가 “재생산”이라는 용어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재생산 개념의 자의적인 변형은, 오히려 맑스주의를 왜곡, 협소화 시켰으며, 여성문제를 설명하는 데 있어 문제만을 야기하였다.</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재생산 개념을 통해 여성억압을 설명하려던 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가부장제 용어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이 여성억압의 고유성, 독자성을 입증하려는 의도에서 재생산 개념을 자의적으로 변형시켰다는 데 있다. 이들은 재생산 개념을 자의적으로 규정한 후, 이를 생산에 대립시킴으로써 허구적인 구분을 만들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생산은 맑스주의의 영역이고 재생산은 여성주의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주장을 하였다.9)</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자의적 왜곡과 아전인수는 엥겔스에 대한 왜곡으로 뒷받침되었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엥겔스가 쓴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의 서문을 들어, 엥겔스를 생산과 재생산을 인위적으로 구분한 이원론의 시조로 만들었다. 엥겔스의 서문을 일단 확인해보자.</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유물론적 파악에 따르면, 다음의 요인들이 역사를 종국적으로 규정한다: 직접적 생활의 생산과 재생산. 그런데 이것 자체는 다시 두 측면으로 나누어진다. 한편으로는 그것은 생활수단의 생산, 즉 의식주의 대상들과 그것에 필요한 도구들의 생산이다 ;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인간 자체의 생산, 즉 종의 번식이다. 특정한 역사 시기와 특정한 지역의 인간들이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회적 제도는 두 종류의 생산에 의해 규정된다.”10)</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위의 서문에서 직접적 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을 거론하고 있는 것이 엥겔스가 생산과 재생산을 인위적으로 구분하는 것으로 읽히게 되었다. 즉 “엥겔스의 언급은 사회주의 여성주의운동의 이론적 이원론, 여성의 자율적 조직에 대한 전략적 공언뿐만 아니라 이들이 초점을 맞추는 가족, 노동의 성별분업, 부불 가사노동에 대해 맑스주의가 권위 있는 후원을 제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11)</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나 생산과 재생산을 인위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맑스주의 이론에 대한 왜곡이자 현실에 대한 왜곡이다. 현실에서는 생산과 재생산이 분리된 영역으로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맑스주의는 생산과 재생산을 구분되는 영역으로 사고하지 않았다. 생산을 소위 재화와 용역을 만드는 제한된 산업영역으로 보고, 재생산을 사회의 재생산이나 가족 내에서의 노동력의 재생산, 혹은 출산이라는 생물학적 재생산과 관련된 영역으로 보는 식의 이분법은 맑스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우선 맑스주의는 생산과 재생산을 분리되는 영역으로 보지 않았다. 맑스는 단순재생산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이를 분명히 하였다. 맑스는 생산과 재생산은 어떤 사회적 형태에서든지 존재하는 것이자, 그 각각의 사회적 형태에 따라 구체적 형태가 결정되는 것으로 보았다. 모든 사회적 형태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생산과 재생산의 특징에 대해서 맑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생산과정의 사회적 형태가 어떻던, 생산과정은 연속적이어야 하며 주기적으로 동일한 국면들을 끊임없이 통과해야 한다. … 그러므로 어떤 사회적 생산과정도, 그것을 연속된 전체로서, 끊임없는 갱신의 흐름으로서 고찰할 때에는, 동시에 재생산과정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생산의 조건은 동시에 재생산의 조건이다. 어떤 사회도 그 생산물의 일정한 부분을 끊임없이 생산수단, 즉 새로운 생산물의 요소로 재전환하지 않고서는 생산을 계속할 수 없다. 즉 재생산이 불가능하다.”12)</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 주장의 의미는 명백하다. 생산은 곧 재생산이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는 당연한 상식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느 사회, 혹은 어느 개인도 일회적인 생산만으로 유지될 수는 없다. 생산의 목적은 그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의 생활영위이기 때문에, 인간이 생존하고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생산은 중단되지 않고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생산의 조건이 지속, 유지된다는 것은 생산을 위한 두 가지 조건인 생산의 객체적 조건(생산수단, 즉 노동도구, 원부재료 등)과 실제 생산을 수행하는 생산자인 인간이 끊임없이 갱신되어 생산에 다시 투입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가령 생산의 작은 단위로서 옷을 생산하는 공장의 경우를 보자. 옷 공장은 옷을 생산하기 위한 옷감과 실, 그리고 재봉틀 등의 생산요소들이 옷을 생산하는 데 계속 투입되고, 옷을 만드는 생산자들이 원기를 회복하여 매일매일 생산에 종사할 수 있어야 생산이 유지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조건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공장은 가동이 중단될 것이다. 사회적 범위에서도 사정은 이와 동일하다. 따라서 생산은 동시에 재생산, 즉 생산의 조건들의 끊임없는 갱신이자 중단 없는 생산이라고 할 수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두 번째로, 맑스주의는 생산을 인간이 즉각적으로 소비하는 재화와 용역의 생산으로 협소하게 보지 않았다. 맑스주의에서 생산은 인간의 존재조건을 유물론적으로 파악한 데에서 나온 포괄적 개념이었다. 맑스주의는, 자연 속에서 존재하는 인간은 생존을 위해 노동을 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영위, 지속하기 위한 생활수단들을 만들어가야 함을, 인간 자신의 생활(생존)조건을 계속적으로 생산해야 함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 이는 생산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유지하고 지속시키는 것이 목적임을 말한다. 인간은 인간 개개인 뿐 아니라 사회를 유지하고 인간 종 자체를 유지, 지속해야 하기 때문에, 인간 개개인의 즉각적인 생존을 위한 생산물을 생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엥겔스가 말한 대로 “인간 자체의 생산” 역시 이루어져야만 한다. 따라서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에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의지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일정한 필연적 관계들, 즉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력들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들에 들어선다(강조는 인용자)”라고 말하였던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맑스주의에서 생산의 의미는 맑스와 엥겔스가 공동으로 작성한 「독일이데올로기」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나온다. 여기서 맑스와 엥겔스는 모든 역사의 제 1전제를 “인간은 ‘역사를 만들’ 수 있기 위해서 먼저 생활할 수 있어야 한다”로 규정하였다. 이 제 1전제의 내용은 첫 번째 “물질적 생활 자체의 생산”이다. 두 번째는 “충족된 최초의 욕구 자체 및 그 충족행위와 이미 획득한 충족수단이 새로운 욕구를 낳는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처음부터 역사적 발전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자기 자신의 삶을 나날이 새롭게 만드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만들어 내 번식시키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조건을 이야기 한 후, 이 “사회활동의 세 가지 측면은 세 개의 다른 단계가 아니라, 역사의 여명과 최초의 인류 이래로 동시적으로 존재해 왔고 또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역사에서 관철되고 있는 세 가지 측면”이라고 정리하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독일이데올로기」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맑스주의에서 생산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물질적 재화의 생산 자체 뿐 아니라, 이러한 생산 속에서 새로운 욕구의 발전과 이 욕구의 발전에 의한 생산의 발전, 그리고 인간과 사회가 영속적으로 유지되기 위한 인간들의 번식을 포함하는 폭넓은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이 전제들은 서로 분리된 영역이나 “단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생산 속에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측면”들로 보았다. 따라서 인간이란 종 자체의 유지, 번식과 관련된 영역을 생산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생산과 대비되는 별도의 영역으로 보는 것은, 그 자체로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생산의 내용을 인위적으로 재단하여 협소화하는 것이고, 이와 동시에 맑스주의를 왜곡시키는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요컨대, 생산과 재생산은 서로 구분되지 않는 것으로 생산은 결국 생산조건의 끊임없는 지속과 갱신, 부단한 생산조건의 생산을 의미한다. 맑스주의의 역사유물론에서 생산의 개념은 단순히 우리가 먹고, 쓰는 재화의 생산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인간 그 자체의 유지와 발전으로서의 생산이라는 보다 포괄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13) 따라서 생산과 재생산을 인위적으로 구분하여, 재생산을 여성의 영역으로 한정시키는 것은 현실과도 부합하지 않고, 맑스주의에도 부합하지 않는 관념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따라서 여성억압의 문제 역시 생산의 발전, 즉 생산력의 발전과 이에 따른 생산관계의 발전 속에서 계급문제와 함께 총체적으로 인식하여야 한다.14) 엥겔스의 선구적 연구나, 최근 축적된 인류학 지식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생산의 발전은 원시공산주의를 해체하고 생산에서 여성의 중요성을 하락시키고 남성의 노동력을 더욱 중요하게 만들면서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을 낳았다. 또한 생산의 발전은 잉여생산물의 생산을 낳으면서 계급이 등장하는 토대가 되었다. 생산에서 남성의 노동력이 중시되면서, 계급사회는 남성 노동력을 중심으로 조직되고 형성되었다. 즉 여성억압과 계급억압은 생산의 발전의 결과로 비슷한 시기 발생하였으며, 양자가 서로 관련 맺으며 서로의 관계를 강화시켰다. 이러한 측면에서 자본주의 하에서 여성억압이 계급억압과 연관성이 존재하고 사회주의 혁명과정에서도 여성의 해방과 계급철폐가 연관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계급의 등장뿐만 아니라 여성억압 역시 생산의 발전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나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생산/재생산이라는 인위적 구분을 가지고 여성억압과 계급억압을 결합시키려고 하였다. 여성억압은 재생산과 관련된 것이고 계급억압은 생산과 관련된 것으로 보면서 이 둘을 기능적으로 결합시키는 생각은, 여성억압을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이 스스로 만든 협소한 재생산 영역으로 제한시켜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성억압이 생산의 발전과 관련되어 있고 여성억압과 계급억압은 생산 속에서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의식을 만들기 보다는, 양자가 서로 다른 영역에 존재하는 분리된 문제라는 의식을 조장하였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재생산 개념으로 여성억압과 계급억압, 여성주의와 맑스주의를 결합시키려는 시도는 가부장제 개념과 마찬가지로 이원론적 접근을 다른 식으로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였으며, 이원론적 접근이 지닌 문제점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즉 여성억압과 계급억압을 기계적이고 기능적으로 결합시켰으며, 계급억압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여성억압이라는 인식을 강화하여 계급투쟁과 여성해방운동을 분리시키고 여성해방운동을 우위에 놓는 경향을 낳게 된다.</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2pt;"><strong>3. 여성억압의 원인을 설명하지 못한 채, “불행한 결혼”을 답습하는 이원론을 극복해야 한다. </strong></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렇게 “가부장제”와 “재생산” 개념을 통해서 여성억압을 설명하려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여성문제의 위치를 폄훼하고자 하는 것도, 여성문제보다 계급문제가 우선이라는 판에 박혀있는 오류를 재현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여성의 억압과 남성에 대한 종속이라는 여성문제는 사회주의 운동이 해결해야할 중대한 과제이며, 이는 해방연대(준)의 강령초안에서도 중요하게 강조하였던 것이다. 강령초안의 해설은 보편적 인간해방운동인 사회주의 운동의 고유한 본성을 다시금 복원하는 것이 중요함을 누차 강조하였으며, 사회주의 운동은 “계급적 억압, 민족적 억압, 성적 억압 등 일체의 모든 억압에 반대하는 인간해방운동”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의 복원을 위해 현실에서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의식을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는 사회주의 운동의 진전을 위해서 여성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하며, 여성문제를 사회주의적 총체성 속에서 맑스주의적 방법론에 입각하여 해명해야 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문제는 여성문제를 계급문제와 인위적으로 분리시키고 이를 기계적으로 병렬적으로 결합시키는 이원론적 접근방식이 여성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960년대, 70년대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현실에서 분출하는 여성운동 속에서 계급문제와는 다른 여성문제의 고유한 특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현실을 인위적으로 이분하는 도식적이고 기계적인 사고방식으로 드러났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생산양식 대 가부장제, 생산양식 대 재생산양식, 계급체제 대 성별체제, 산업 생산양식 대 가족 생산양식 등 무수한 이원론 체계를 쏟아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인위적인 이분법은 모두, 현실에서 계급억압과는 별도로 여성억압의 체계가 존재하고, 이론과 운동에서는 맑스주의와는 별도로 여성억압을 다루는 자율적인 이론과 운동이 존재함을 입증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여성억압의 원인과, 여성억압이 여타 사회관계, 특히 계급억압과 갖는 관계를 적절하게 설명하는 데 실패하였다. 단지 여성억압의 영역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여 여성운동의 자율성과 독자성을 드러내려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주관적 목표를 입증하기 위해 이론이 개발되는 상황에서 여성문제를 제대로 설명한다는 것은 애당초 어려운 일이었다. 앞서 “가부장제”와 “재생산” 개념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보았듯이, 현실을 인위적으로 이분하려는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시도는 현실을 심각하게 왜곡하거나 관념적인 추상론, 보편론으로 빠지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은 맑스주의의 한계를 극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맑스주의 이론을 자의적으로 왜곡하고 협소화시켰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리고 제 4호의 “여성문제, 계급문제에 대한 이원론적 접근”에서 올바르게 비판하였던 것처럼,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여성운동의 독자성, 자율성을 강조하고 계급억압에 대비하여 여성억압의 독자적인 존재를 강조하면서 결국에는 급진 여성주의로 귀결되었다. 또한 계급투쟁과 여성해방운동을 긴밀하게 결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범계급적 여성운동을 계급운동의 우위에 두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따라서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계급억압과 여성억압을 인간해방운동으로서 사회주의운동이라는 틀 속에서 유기적으로 결합시키기 보다는, “불행한 결혼”을 낳았다.15)</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와 같이 여성문제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이원론을 계속 답습하는 것은, 여성문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 즉 여성억압의 원인과 발전, 그 해결책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제시하지 못한 채, 계급문제와 여성문제의 대립을 반복해서 야기하게 된다.16)</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2pt;"><strong>4. 사노준의 여성강령과 이를 대변하는 유현경의 글은 사회주의 여성주의적 접근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strong></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서두에서 언급하였듯이, 한국에서 사노준의 여성강령과 이를 대변하는 유현경의 글은 길게 언급한 사회주의 여성주의적 접근방식을 판박이처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유현경의 글, “사회주의노동자정당의 여성해방투쟁을 위하여”의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간추린 내용은 글의 순서와 일치하지는 않는다)17)</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계급억압과 여성억압의 관계</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모든 억압의 근저에는 계급적 억압이 깔려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여타의 억압이 계급적 억압으로 단순 환원되지는 않는다는 점이 인정되어야 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 억압의 기제는 여타의 억압의 기제를 규정하면서 결합되어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사회주의 없이 여성해방 없고 여성해방 없이 사회주의 없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앞서 언급하였듯이 역사적으로 계급의 등장과 여성억압의 등장은 시기적으로 일치하였을 뿐 하나의 억압에서 다른 억압이 나온 것은 아니다. 따라서 계급억압이 여성억압의 원인인 것처럼 환원시키는 것은 문제이다. 또한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계급의 등장과 여성억압의 등장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은 이 둘의 관계를 해명하고 여성억압을 극복할 방향을 찾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나 유현경의 설명은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의 그것처럼 ‘서로가 상대적으로 독자적이며, 서로가 서로에 의존하고,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며, 서로 해결되려면 서로가 극복되어야 한다’ 식의 상투적 설명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여성억압과 계급억압의 관계에 대해 현상을 기술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유현경의 주장을 보면 여성억압과 계급억압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매우 혼란스럽기까지 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유현경에 따르면, 모든 억압의 근저는 “계급적 억압”이라고 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여성억압의 해결은 궁극적으로 계급억압의 폐지에 있다는 주장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반면, 여타의 억압이 “계급적 억압으로 단순 환원되지 않는다”고 하거나 “사회주의 없이 여성해방 없고 여성해방 없이 사회주의 없다”고 하면서 전형적인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을 재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는 한편으로는 유현경이 계급억압과 여성억압 사이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게 한다. 그러나 유현경의 다른 전반적인 주장을 살펴보았을 때, 모든 억압의 근저에는 계급억압이 깔려 있다는 주장(사실 이 주장 자체가 잘못된 주장이다)은 단지 립서비스에 불과함을 확인할 수 있다. 유현경의 가부장제 규정을 확인해보자.</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가부장제의 규정</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가부장제를 통한 여성억압은 자본주의 이전 체제에서부터 공고히 유지돼 왔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자본주의는 가부장제를 통해 여성억압을 더더욱 심화시켜 차별기제로 활용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가부장제와 자본의 직접적 착취 구조는 서로에게 단순 환원 귀결되지는 않지만 서로에 대한 출발점 또는 전제가 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여기서 유현경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와 분리된 별도의 사회체제로서, 가부장제 용어를 당연히 전제하고 쓰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서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가부장제 용어를 여성억압의 보편적 체계로서 사용하고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유현경 식으로 가부장제 용어를 사용하였을 때 발생하는 문제는 사회를 이원론의 입장에서 보기 때문에 혁명론 역시 “두개의 혁명”론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유현경이 말한 바대로 가부장제를 별도의 “체제”로서 “자본주의 이전 체제에서부터 공고히 유지”되어 온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에서 보면, 자본주의가 가부장제와 연관이 있다고는 하지만, 자본주의를 철폐한다고 가부장제가 철폐되는 것이 아니며 가부장제는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 즉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혁명과는 별도로 가부장제를 철폐하는 혁명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유현경은 두 체제가 서로에 대한 “출발점 또는 전제”이기 때문에 혁명이 동시적일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유현경의 주장대로 가부장제가 “자본주의 이전 체제에서부터 공고히 유지”되던 사회체제고 자본주의는 단지 이를 “심화”시킬 뿐이라면, 가부장제가 자본주의의 철폐와 함께 사라질 것이라고 보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따라서 실질적으로는 내용과 주체가 다른 두 개의 혁명(반자본주의, 사회주의 혁명과 반가부장제 혁명)이 각각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되며, 실천적으로 여성억압과 계급억압에 대응하는 투쟁 역시 결합되지 못한 채 분리될 수밖에 없다.</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재생산 범주의 사용</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정치와 투쟁의 영역은 확대되어야 한다. 공/사분리, 생산/재생산 영역의 대한 구분을 허물고 위계를 허물어야 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우리는 정치의 영역을 공적인 것으로 한정해 왔다. 이제 정치 영역의 확장을 위해 사적 영역에서의 정치투쟁의 의미를 강조하는 막대 구부리기가 필요하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여성억압에 있어 자본주의와 결탁한 가부장제는 자본주의의 노동력 재생산 과정과 연관되어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유현경 역시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처럼 사회를 인위적으로 구분하는데 익숙한 모습을 보인다. 위에서처럼 공과 사, 생산과 재생산의 영역의 구분은 사실 상 현실적인 구분이 아니라, 유현경 등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의 관념 속에서의 구분이다. 우선 앞서 누누이 강조하였듯이 생산과 재생산영역의 분리는 순전히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의 관념의 산물이다. 공과 사의 구분의 경우에는 자본주의에서 상대적인 분리가 존재하여, 예를 들어 가족이 과거의 생산양식에서처럼 생산의 단위로서 주로 기능하지 못하고 사회적 생산과 분리된 소비의 단위로 전락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사적 영역이 여성억압의 영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억압이 사적 영역에서만 발생하는 것도 아니며 사적 영역에는 무수한 다른 사회적 내용 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노동력 재생산으로 결합시키는 것 역시 기능적으로 양자를 결합시키는 것이다. 생산은 지속되기 위해 생산수단 뿐만 아니라 생산자인 인간의 끊임없는 생산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생산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노동력의 재생산과정과 결합되어 있다. 이런 당연한 소리를 재생산을 통해 여성억압이 계급억압과 연관되어 있다는 주장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생산은 계급착취의 영역이고 재생산은 여성억압의 고유한 장소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원시공산주의 사회가 계급사회로 이행하면서 동시에 여성억압이 등장하였던 것은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생산에서 여성이 점하는 지위가 하락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억압의 등장은 생산의 발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반면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현실에 대한 인위적인 선긋기에 열중하면서 여성억압의 문제를 자신들의 발명한 재생산 영역에 밀어 넣으려고 할 뿐이다. 이는 여성억압을 설명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자신들만의 영역구축에 몰두하는 태도에 불과하다. </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렇게 간추린 내용에서 확인되듯이, 유현경의 글이 취하는 이론적 입장이 사회주의 여성주의와 동일함을, 그들의 사고와 용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사실 유현경의 글에는 가장 기본적으로 여성문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성억압의 원인은 무엇인지, 여성해방운동이 어떻게 사회주의운동과 연관되어 있는지 구체적인 규정은 하나도 없다. 더욱이 가장 기본적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사용하고 있는 가부장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설명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최소한 30년 전의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지녔던 한계에 대한 진지한 검토와 성찰조차 찾아보기 힘들다고 할 수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결국 유현경의 글과 유현경이 대변하는 사노준의 여성문제에 대한 입장은,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입장으로 그들이 범했던 문제를 그대로 안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는 앞서 강조하였듯이, 유현경과 사노준의 입장이, 여성문제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채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재현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2pt;"><strong>마치며</strong></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미 강조하였듯이, 사회주의 여성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여성문제의 중요성을 폄훼하고자 해서가 아니다. 여전히 여성문제에 제대로 대처하는 것은 사회주의자의 과제이며, 여성억압의 원인 및 해결책, 여성억압과 다른 사회적 억압과의 관계는 명확히 규정되어야 한다. 사회주의자는 인간해방운동으로서 사회주의 운동의 총체성 속에서 여성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여성의 억압의 원인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주의 여성주의는 “가부장제”, “재생산” 등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개념을 통해 여성억압을 설명하면서, 여성억압과 계급억압, 여성주의와 맑스주의 사이에 이원론적, 병렬적 결합을 시도하였다. “가부장제”는 여성억압이 자본주의에만 그치지 않고 모든 긴 역사를 지닌 억압문제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가부장제 개념은 추상적이고 몰역사적인 성격 때문에 여성억압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였다. “재생산”으로 여성의 억압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사회를 생산과 재생산이라는 허구적인 두 영역으로 분리시켰으며, 이러한 분리 하에 여성의 존재를 재생산 영역으로 국한시켜 버렸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여성문제에 대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였다는 만족감은 남겼을지는 몰라도, 정작 여성문제를 설명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이는 장 담그려다 장독을 깨버린 격이다. 이 과정에서 맑스주의 역시 부당하게 왜곡되고 협소화되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실상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한계는 처음 등장한 30년 전 이미 충분히 드러난 바 있다. 누누이 강조하듯이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맑스주의와 여성주의, 계급문제와 여성문제 사이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킨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로 양자의 대립을 재현하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여성문제에 대한 설명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러한 과거 역사로부터 어떠한 교훈도 얻지 못하고 사노준의 경우처럼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범한 길을 다시 걷는다면,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보인 오류를 우리의 운동에서 그대로 답습하는 길이 될 것이다.</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1pt;"><strong>[미 주]</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 하트만, “맑스주의와 여성주의의 불행한 결혼: 보다 진전된 결합을 향하여”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2) 미셀 바렛, “맑스주의 페미니스트 분석의 몇 가지 개념적 문제”, 「페미니즘과 계급정치학」(여성사)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3) 미셀 바렛, “맑스주의 페미니스트 분석의 몇 가지 개념적 문제”, 「페미니즘과 계급정치학」(여성사)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4) 린다 번햄, 미리암 루이, “불가능한 결혼”, 「여성해방이론의 쟁점」(태암), 162쪽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5) 린다 번햄, 미리암 루이, “불가능한 결혼”, 151쪽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6) 하트만, “맑스주의와 여성주의의 불행한 결혼: 보다 진전된 결합을 향하여”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7) 가부장제라는 개념이 어떻게 다양하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정리는 베로니카 비치, “가부장제에 대하여”를 참조할 것.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8) 따라서 사회주의 여성주의 내부에서조차 가부장제라는 용어의 사용에 비판적인 의견이 발생하였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역사적 논의과정을 정리한 바 있는 리즈 보글은 “가부장제 개념은 자주 본질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심리학적 체계라는 급진여성주의의 기원에 깊이 박혀 있다. 이 개념이 보다 유물론적 의미에서 이용되는 곳에서는, 생산관계에 관한 맑스주의적 평가 속으로 충분히 통합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미셀 바렛의 경우에는 “자본주의에서 남녀관계의 독특한 측면을 다루기 위해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언급한다면 어떤 맥락에서는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하나의 명사로서 ‘가부장제’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여성의 억압을 자본주의 생산관계와 관련해 분석할 때 극복하기 힘든 문제점들을 낳게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가부장제 개념의 한계 때문에 게일리 루빈은 “가부장제는 남성지배의 특수한 형태로 이 용어의 이용은 이 용어가 나온 구약의 목축유목민들 혹은 그와 비슷한 집단으로 제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리즈 보글, 「맑스주의와 여성억압, 통일적 이론을 위해」의 2장, 미셀 바렛, “맑스주의 페미니스트 분석의 몇 가지 개념적 문제”, 게일리 루빈, “교류 속의 여성”, 「여성의 인류학을 향해」를 참고함.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9) 리즈 보글은 이러한 실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재생산 개념이 여성억압과 생산과 계급투쟁에 관한 맑스주의적 분석을 이론적으로 연결시켜주는 수단이 되길 기원하였다. 사회주의-여성주의 이론가들은 재생산 과정을 주어진 사회의 특징적인 생산과 비견될 수 있는 그러나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것으로 분석하였다. 종종, 그들은 생산양식과 비교되는 것으로 재생산 양식이라는 용어를 말하였다. 가부장제 개념과 마찬가지로, 재생산 용어의 실질적 의미에 대해서는 동의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리즈 보글, 「맑스주의와 여성억압, 통일적 이론을 위해」의 2장. 에드홀름 등은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재생산 개념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1. 사회의 재생산(전체 생산조건의 재생산), 2. 노동력의 재생산, 3. 생물학적 재생산. 베로니카 비치, “가부장제에 대하여” 참조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0) 엥겔스,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 선집 6권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1) 리즈 보글, 「맑스주의와 여성억압, 통일적 이론을 위해」의 2장. 리즈 보글은 사회의 재생산이라는 범주로 여성억압과 맑스주의를 결합시키려는 시도를 하는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로, 기본적으로 이러한 엥겔스에 대한 해석에 동의하는 태도를 취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2) 맑스, 「자본론」 1권, 23장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3) 엥겔스의 서문 역시, 생산과 재생산을 인위적으로 구분한 것이 아니라, 생산이자 재생산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올바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4) 제 4호의 “여성문제, 계급문제에 대한 이원론적 접근 비판” 역시, 맑스주의의 “역사유물론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사회적 삶의 생산을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려는 “인간의 삶을 유지시키는 모든 측면들을 설명하는 이론”이라고 정리하였으며,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개념을 통해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사회를 설명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5) 이러한 이원론적 설명은 현실 자체에 대한 인위적 왜곡과 구분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성억압과 계급억압의 관계 뿐 아니라 사회의 모든 다른 억압과의 관계에서도 기계론적이고 도식적인 접근을 답습하게 되었다. 이는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이 계급억압을 벗어난 다른 억압에 직면하였을 때 심각하게 드러났다. 즉 계급 뿐 아니라 인종과 민족 문제 등과 같은 다른 억압의 문제에 직면하였을 때, 이들의 이원론적 구조로는 통합된 설명을 하기 어려웠다. 이런 경우, 해결책은 이원론은 삼원론, 사원론, 오원론 등등으로 기능적 결합을 확장시키든지, 아니면 이원론 구조의 문제를 인정하든지 하는 수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제국주의 국가에 의한 약소민족의 억압이라는 문제의 경우, 맑스주의는 단일한 이론틀 내에서 설명한다. 반면,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이원론적 이론구조에서 보면, 이러한 민족문제는 또 다른 고유의 억압이며, 이제 “민족억압, 계급억압, 여성억압이 고유하면서 서로 의존하고 있으며, 서로 해결되기 위해서는 어느 하나만 해결되어서는 안 된다”는 식의 상투적 접근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문제가 등장할 때마다, 이러한 상투적 표현에 단어 하나를 덧붙이는 것이 되어 버린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6) 리즈 보글은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범했던 이원론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들은 시종일관된 비기계적 방식으로 체계들을 관련시키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이원체계 이론들은 사회발전의 분리된 설명들의 신비스러운 공존을 나타낸다. 이 이원성은 대체로 사회주의 여성주의 이론이 극복하고자 시도하였던 여성주의와 맑스주의 사이의 대립을 재현하였을 뿐이다.” 리즈 보글, 「맑스주의와 여성억압, 통일적 이론을 위해」의 2장.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7) 유현경, “사회주의노동자정당의 여성해방투쟁을 위하여”. 여성의 독자적, 자율적 세력화 등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전략은 이 글이 다루는 주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유현경이 주장하는 구체적 전략 역시,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한편 사노준의 강령초안 중 여성강령부분은 전반적으로 사회주의 여성주의적 입장으로 유현경의 입장과 대동소이하다.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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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생태위기의 주범인 자본주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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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2 Aug 2010 03:50:12 +0000</pubDate>
		<dc:creator>강령토론</dc:creator>
				<category><![CDATA[생태문제]]></category>
		<category><![CDATA[제 5호]]></category>
		<category><![CDATA[강령토론 5호]]></category>
		<category><![CDATA[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5호]]></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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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0/08/oil_spill_latest2.jpg"></a>황 정 규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편집위원회 편집부장)</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3호에서는 생태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이는 생태문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는 상황에 비해 이 생태문제를 사회주의자들이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토론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span></p>
<p><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p=960" class="more-link">Read more on 생태위기의 주범인 자본주의&#8230;</a></p>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0/08/oil_spill_latest2.jpg"></a>황 정 규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편집위원회 편집부장)</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3호에서는 생태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이는 생태문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는 상황에 비해 이 생태문제를 사회주의자들이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토론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제 3호의 글에서는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이 발전해오는 방식으로 글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이 발전해오는 과정을 평가하면서, 소위 생태사회주의, 생태주의적 맑스주의 등이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생태문제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하였으며, 더구나 이들은 맑스주의가 생태문제를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사회주의를 포기하는 결과를 낳았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사회주의자가 생태문제에 대해서 올바른 관점을 취하기 위해서는 계급문제, 생태문제 등을 별개로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총체성 속에서 생태문제를 설명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 글은 현재의 생태문제는 인간과 자연간의 물질대사 관계에 균열이 발생하여 일어난 것으로, 이 물질대사 관계는 역사적으로 인간사회가 취해왔던 생산관계에 따라 특유의 형태가 존재하는데,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공존을 파괴하는 물질대사 관계를 낳았음을 강조하였다. 제 3호의 글은 이 물질대사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자본주의는 그 본질적 속성 상 이윤(잉여가치)의 추구를 목적으로 하며, 이 목적을 추구하는 과정은 생산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이윤 획득 과정은 그 한계가 없는 무제한적 과정이다. 또한 자본주의는 이윤의 획득을 위해, 생산규모를 항구적으로 확대 시키려는 경향을 지닌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과의 물질대사 관계도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 이윤을 위해 자연에 대한 약탈을 가속화하는 과정으로 갈 수밖에 없다.”(황정규,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3호)</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간단히 말해 현재 인류가 직면한 생태위기는 인간활동 자체의 결과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제 3호의 글은 맑스주의적 생태론을 전체적으로 제시하려고 하는 목적 때문에, 자본주의가 어떻게 생태문제를 야기하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못하였다. 이 글은 바로 제 3호의 글의 주제 중 하나였던, 자본주의가 생태문제를 낳는 주범임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span id="more-960"></span></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2pt;"><strong>1. 생태문제의 원인에 정면 대응해야 한다.</strong></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어떠한 문제든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가 야기된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문제의 근본원인을 파악하고 여기에서 해결책을 찾지 않을 경우, 결국 겉으로만 드러난 현상만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게 되고, 이는 “대증요법”에 그칠 수밖에 없다. 가령 암이라는 병이 걸렸다면, 암이라는 병으로 인해 신체에서는 다양한 증상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증상들을 완화하는 치료를 해보았자 병 자체를 고칠 수는 없다. 결국 병을 야기한 원인을 진단하고 종양을 제거해야 암은 치료가 될 수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도 이러한 접근방식은 아주 당연한 것이다. 즉 생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태문제가 왜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생태문제의 해결방안이 도출되어야 한다. 그러나 생태문제의 경우에는 이러한 접근방식이 명확하게 적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많은 경우 환경운동은 생태문제의 원인에 대해서는 충분히 규정하지 않은 채, 생태문제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에 포섭된 경우도 적지 않다.1)</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프레디 맥도프와 존 벨라미 포스터는 환경운동의 이러한 한계에 대해서 먼슬리리뷰 2010년 3월호에서 적절하게 비판하고 있기에 잠시 인용해보고자 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일부 환경론자들은, 더 나은 에너지 효율을 도입하고 화석연료를 “녹색” 에너지원으로 대체하거나, 혹은 문제점을 개선하는 기술(발전소에서 나오는 탄소를 포집하여 땅 속 깊이 주입하는 따위)을 찾아내는 식으로 우리의 경제체제를 땜질하는 것으로 우리 문제의 대부분을 해결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녹색” 실천을 마켓팅 도구로 이용하거나, 그런 실천을 활용하고 있다고 공언하는 여타 기업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운동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 운동 안에는, 현재의 생산체제 안에서의 단순한 기술적 조정만으로는 우리가 직면한 극적이고 잠재적으로 재앙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임이 명백하다고 보는 사람도 일부 존재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커티스 화이트는 「오리온(Orion)」에 실린 “야만적 심장: 자본주의와 자연의 위기”라는 2009년 기사를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환경론자들이 질문하는 데 매우 익숙하지 않은 근본문제가 있다. 즉 ‘왜, 이 자연세계의 파괴가 발생하고 있는가?’” 우리가 이 단순해 보이는 질문에 만족스럽게 답할 때까지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해결책들을 찾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2)</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맥도프와 포스터의 말대로 생태문제를 다루는 현재의 환경운동 상당수는 “왜” 생태문제가 발생하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답하지 않거나, 명확한 답을 회피한다. 여기서 나오는 대안은 생태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대증요법에 그칠 수밖에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생태문제를 야기한 원인인 자본주의적 방식에 기대는 처방을 제시하기까지 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가령 이윤을 위해 생산규모를 무제한적으로 팽창시키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과 이를 지탱시켜주는 시장원리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방식은 그대로 둔 채 소비자가 ‘윤리적 소비’를 하거나 소비문화를 바꾸는 것에서 대안을 찾는 모습을 빈번하게 확인할 수 있다. 아니면 탄소포집(발전 등 화석연료 사용 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를 모아 지하 등에 저장하여 대기로 방출되지 않게 처리하는 기술), 에너지효율 향상 등 기술혁신만으로 생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제시한다. 탄소배출권을 거래하는 투기적 탄소시장 창출을 기후변화의 대안으로 포장하는 것은 또 하나의 예이다. 이러한 처방은 되려 생태문제의 해결을 저해하거나 악화시키게 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요컨대 생태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할 수 없는 생태운동은 생태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2pt;"><strong>2. 생태위기를 야기한 것은 자본주의 체제이다.</strong></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1pt;"><strong>1) 생태문제는 인간이 야기한 문제로, 인간이 자연에 가한 영향이 인간 자신의 존립을 위협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대개 많은 환경운동은 자연을,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을 인간과 생물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온화한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 묘사한다. 가령 2009년 코펜하겐 기후변화회의 시 시위과정에서 많이 나왔던 슬로건은 “어머니 지구(mother planet)”를 구하자는 것이었다. 저명한 기후학자이자 “가이아 이론”으로 유명한 제임스 러브룩의 경우에는 지구를 “가이아”라는 대지의 여신으로 비유하면서, “지구가 스스로 기후와 그 구성 성분들을 조절함으로써 살아 있는 모든 생물들에게 적합한 환경 조건을 유지시키는 존재라는 생각, 즉 일종의 살아 있는 생명체로 간주될 수 있다는 생각”3)을 강조한 바 있다. 이러한 견해는 인간과 다른 생물, 그리고 지구 사이의 상호 교류하는 관계를 표현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일정 정도의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유물론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자연을 관념적으로, 목적론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며, 생태문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일면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우선 자연 속에서 물질의 운동은 어떠한 의도와 목적을 지니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법칙이 전개되는 과정일 뿐이다. 예를 들어 지구가 속해있는 태양계의 형성은 170억년 이상 지속되어온 항성의 생성과 소멸 과정의 산물이며, 지구는 태양이라는 항성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이다. 지구에서 생명은 38억 년 전 최초 등장하였다고 보는데, 이 생명의 등장 역시 지구가 태양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적절한 크기와 질량을 지니게 되어서 발생하게 된 산물이다. 그렇다고 지구가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서 그러한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또 다른 예로 지구가 자기를 띄어 밴앨런대(지구 밖 약 3,000km 상공 밖에서부터 형성되어 있다)라는 대기 밖 자기대를 형성하지 않았다면, 태양에서 나오는 유해한 방사선이 지상에 그대로 투과되어 지구의 생물체는 수중에서만 존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밴앨런대가 생명을 지상에 진출시키고 유해한 태양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즉 지구가 인간과 생물 전체가 살아가기 위해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자기 조절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지구는 생명이 등장한 이후로 수많은 격변을 거치면서, 그 결과로서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앞으로 지구가 지금의 상태를 지속하지도 않을 것이다. 인간과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지구의 여러 조건들은 어머니처럼 우리를 감싸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생명을 전멸의 위기로까지 내몰기도 하였다. 가령 생물은 최소한 5번의 거대한 대량멸종을 겪었는데, 그 중 고생대와 중생대를 가르는 기준이 된, 페름기/트라이아스기(P/T) 멸종은 다양한 원인이 결합되어 있지만, 결정적으로는 현재의 시베리아 지역에서 나온 거대한 화산폭발이 원인이 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 시기 생물종 중 95%가 사라졌다고 한다. 화산폭발 등 지질활동은 대륙의 형성 등 생명에 필요한 조건을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생명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기도 하는 것이다. 더욱이 지구는 소위 우주 속에서 항해하는 “우주선(spaceship)”이라는 폐쇄된 자연체계가 아니라 지구 밖의 우주와도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열린 자연체계이다. 중생대와 신생대를 가르는, 백악기와 신생대 3기 사이(K/T)의 멸종은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지름 10km의 운석이 떨어지면서 발생한 것으로, 생물종 2/3를 멸종시켰다. 생물은 이처럼 끊임없는 격변과 위기를 해치고 나와, 이러한 환경에 적응하면서 진화해왔다. 그리고 지금의 지구의 환경은 무수한 격변의 결과이며, 이러한 환경은 금방이라도 변화할 수 있는 역동적인 것이다.4)</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요컨대 지구는 생성과 발전, 소멸을 겪는 물질의 하나로, 단지 변화하지 않은 현재의 환경을 자기조절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변화 발전해왔던 행성이다. 생명은 그 안에서 발생하여 진화해왔으며, 그 안에서 무수한 멸종의 위기를 헤치고 지금에 이른 것이다. 더 나아가 지금의 지구환경은 계속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서 새로운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이 변화는 지금 지구를 살아가는 생물들에게 우호적일 수도, 비우호적일 수도 있다. 이 과정은 예컨대 지구가 “살아있는 모든 생물들에게 적합하게 환경조건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의도적인 과정이 아니라 생성과 발전, 소멸을 반복하는 물질의 운동이 전개되어가는 과정일 뿐이다.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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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렇게 관념적이고 목적론적 관점을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현재의 생태위기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보다 분명히 알기 위해서이다. 앞서 간략히 언급하였듯이 인간과 생물은 지금보다 더한 생존의 위기를 겪은 바 있으며, 향후 새로운 자연의 격변이 심각한 생존의 위기를 낳을 수도 있다. 어찌 보면 그 위기 앞에서는 지금의 생태위기는 사소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위기는 모두 인간이나 생물에게는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직면한 생태위기는, 지구가 겪어온 과거의 다른 자연의 격변과는 그 성격에서 완전히 다른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우선 현재의 생태위기는 바로 인간이 낳은 결과물이라는 점에 과거의 다른 자연재앙과는 다른 차이점을 갖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원래 생물이라는 유기체는 지구의 무기적 환경에 대해서 막대한 영향을 가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30억 년 전 등장한 시아노박테리아(남조류)는 광합성을 통해 지금의 수준까지 산소를 만들어내었다. 그렇지만 유기체 중에서도, 인간은 자신에게 필요한 생산물을 얻기 위해 노동을 하는 과정에서 자연에 막대한 변형을 가져다 줄 수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 노동이라는 인간 고유의 활동은 인간과 자연 사이를 매개하는 과정으로,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스스로의 삶에 필요한 사용가치를 지닌 생산물을 만들어낸다. 이 노동은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자기 자신의 자연(즉 인간본성: 역자)을 변화시킨다.”(「자본론」 1권, 7장)5) 그런데 인간은 다른 유기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킨다. 이와 관련하여 엥겔스는 다른 유기체와 인간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동물은 외적 자연을 그저 이용할 뿐이며, 단순히 자신이 현존하고 있다는 것에 의해서만 자연에 변화들이 생기게 한다; 인간은 자신의 변화들을 통해 자연을 자신에게 복무하도록 만들며, 자연을 지배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 밖의 동물들과 인간의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차이이며, 이러한 차이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또 다시 노동이다.”6)</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인간이 노동을 통해 가하는 자연에 대한 변형의 정도는 심대한 것이어서, 현재는 지구 대부분의 지역에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까지 나아갔다. 따라서 맑스와 엥겔스는 포이에르바하를 비판하면서 “끊임없는 감성적 노동과 창조, 이 생산이야말로 현존하는 감성적 세계 전체의 기초이기 때문에, 그것이 단 일 년만이라도 중단된다면, 포이에르바하는 자연계에서 엄청난 변화를 발견하게 될 것이며, 또한 전체 인간세계와 그의 고유한 직관능력, 더구나 그 자신의 존재마저도 당장 사라지고 말 것”7)이라고 말한 바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인간의 노동과 이에 기반을 둔 인간 사회의 발전은 자연을 변형하고 가공하는 과정에서 순영향만을 낳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악영향을 낳기도 한다. 이미 엥겔스는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소아시아, 알프스 등의 산림남벌을 예로 들면서 “자연에 대한 우리 인간의 승리에 너무 우쭐해 하지는 말자. 그러한 승리 각각에 대해 자연은 우리에게 복수한다. 이러한 승리는 어느 것이나 일차적으로는 우리가 가늠한 결과들을 낳지만, 이차적으로나 삼차적으로는 아주 흔히 그 첫 번째 결과를 폐기시킬 뿐인 예상치 못한 완전히 다른 작용들을 낳는다”고 경고한 바 있다. 현재의 생태위기는 자연을 이용하고 변화시키는 인간의 활동이 낳은 이러한 부정적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두 번째로 생태문제가 중대한 문제인 것은 인간이 자연에 대해 가한 작용과 변형에서 나온 결과물이 인간의 삶을 위협한다는 데에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연의 측면에서 보면 자연은 인간에게 우호적이지도, 비우호적이지도 않다. 자연은 자기의 법칙대로 운동할 뿐이며, 이 법칙 속에서 인간이 가한 작용에 대해서 새로운 평형을 위해 반작용을 할 뿐이다. 우리가 생태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보게 하는 것은, 단지 인간의 활동으로 자연이 파괴되고 수탈되고 있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작용이 인간에게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북극곰의 멸종위기를 우려하는 것은 사라져가는 북극곰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북극곰의 멸종위기가 북극 빙상의 소실 등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기후변화의 악영향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활동이 낳은 자연의 반작용이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우리는 생태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연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하고 변형시킬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발휘되는 과정에서 나온 자연의 반작용이 우리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데에 여타의 자연재앙과는 다른 현재의 생태위기가 지닌 특수성이 존재한다. 따라서 현재의 생태문제는 인간이 야기한 것이기 때문에, 그 해결 역시 인간의 활동방식에서 찾아야 한다.</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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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1pt;"><strong>2) 생태문제는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노동의 일반적 결과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관계를 맺는 특정한 노동형태, 생산관계의 결과물이다.</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렇다면, 생태문제가 인간 활동,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실제로 IPCC(기후변화에 대한 정부 간 패널)의 2007년 보고서는 “1750년 이래 인간 활동의 순효과(net effects)가 지구온난화의 주범 중 하나였다는 것은 극히 확실하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자칫하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생태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이라는 극단적인 답으로도 흐를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생태문제의 원인을 특정한 방식의 인간활동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활동 자체에서 비롯되었다고 봄으로써 생태문제의 본질을 분명히 하는 것을 저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유기체와는 다르게 자연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변형하며, 자연에 대한 지식을 이용하여 자연력을 지배하게 된다고 해서, 인간의 활동 자체가 생태문제를 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인간이 자신에게 필요한 사용가치를 만들기 위해서는, 노동이라는 매개를 통해 인간이라는 생산자와 자연이라는 객체적 조건이 결합되어야 하며 이는 모든 인간사회에서 공통된 특징이다. 그렇지만, 이 노동이 취하는 형태는 그 사회마다 모두 다양하다. 이는 역사유물론의 가장 기본적 원리로, 맑스는 “노동과정이 인간과 자연 사이의 단순한 과정인 한, 그것의 단순한 요소들은 노동과정의 모든 사회적 발전형태들에 공통된 것이다. 그러나 노동과정의 특수한 역사적 형태들은 각각 이 과정의 물질적 토대와 사회적 형태를 더욱 발전시킨다”(「자본론」, 3권, 51장)고 정리하였다. 요약하자면, 각각의 사회마다 고유한 노동의 형태가 존재하며, 우리는 이 노동의 형태로 각 사회를 구분할 수 있다. 이 노동형태를 일반적으로 “생산관계”라고 표현할 수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각 사회마다 고유한 노동의 형태(다시 말해 생산관계)가 존재한다면, 이는 각 사회마다 고유한 인간과 자연사이의 관계가 존재한다고 파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노동이 인간과 자연사이의 관계를 매개한다면, 그 노동이 취하는 각각의 형태는 인간과 자연사이의 각각의 구체적 관계를 규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생산관계를 가진 수많은 사회가 존재하였는데, 그 사회는 그 사회 고유의 특정한 인간과 자연사이의 관계가 존재하였다.8)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과거의 사회를 살펴보면, 우리는 인간의 노동, 자연의 이용이 필연적으로 생태문제를 야기하였던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역사적 사실은 생태문제가 인간활동 자체의 결과가 아니라, 특정한 인간활동, 특정한 노동형태, 생산관계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준다.9) 또한 과거 생태문제가 발생하였던 사회의 경우에도, 그 규모는 지구 전체를 파괴하고 지구의 자정능력을 초과하는 정도는 아니었으며, 지구 전체적으로 보면 여전히 미약하고, 국지적인 것이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본주의가 등장 한 이후, 생태문제는 역사 상 전례 없는 규모가 되었다. 자본주의생산의 특성 상, 자본주의는 생산의 확대를 위해 끊임없이 자연을 수탈할 수밖에 없었고, 생산에서 나온 결과물들이 지구생태계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제 지구 전체는 자본주의의 발전의 결과물들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전에는 인류가 겪어보지 못했던 지구적 규모의 생태위기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수천 년간 인간 문명이 유지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준 지구의 환경을 악화시켜, 결과적으로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렇다면 자본주의의 어떠한 성격이 과거 어느 때와 비교할 수도 없는 질적으로 다른 생태위기를 야기하게 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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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2pt;"><strong>3. 잉여가치(이윤)의 획득이 생산의 목적이고 이로 인해 무제한적 축적, 생산을 위한 생산이 필연적인, 자본주의의 본성이 생태위기를 야기하는 근본원인이다.</strong></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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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본주의 생산관계가 형성된 이후 지구적인 생태문제들이 무수히 발생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자체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수준까지 균열시킨다. 자본주의는 임금으로 생활하는 노동자계급의 노동을 착취하는 계급사회일 뿐 아니라, 자연에 대한 수탈과 파괴를 자행함으로써 인간이 생존해가는 자연조건 자체를 파괴하는 체제이다. 맑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의 원천인 토지와 노동자를 동시에 파괴함으로써만 사회적 생산과정의 기술과 결합도를 발전시킨다”(「자본론」, 1권, 15장)고 비판하였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본주의가 이렇게 심각한 생태위기를 낳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잉여가치(이윤)의 획득이 생산의 목적인 자본주의의 본성이, 무제한적 축적과 생산을 위한 생산을 추구하게 만들고 이것이 자연에 대한 수탈과 파괴를 막대한 규모로 야기하기 때문이다.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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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우선 자본주의의 생산의 목적인 잉여가치의 획득을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모든 사회에서 생산의 우선적인 목적은 사회 구성원들의 욕구, 즉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생활수단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나 상품생산사회에서, 생산의 목표는 생산자 자신의 필요 충족이 아니라, 생산물의 직접적 생산자가 아닌 타인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생산물의 생산이다. 상품의 생산자에게 생산의 일차적인 목표는 자신의 생산한 생산물을 판매함으로써 얻게 되는 교환가치(화폐)이다. 상품의 생산자는 이렇게 획득한 교환가치를 가지고 다른 생산자가 생산한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사회 구성원들의 욕구는 이렇게 생산된 상품이 생산자들 상호간의 교환과정 속에서 충족되게 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과거처럼 사회구성원의 직접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사회의 생산 목표였던 사회에서는 생산이 그 사회의 필요충족 여부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반면 상품생산이 사회에서 발전하기만 해도, 생산은 사회의 필요충족이라는 생산의 질적 내용에 의해서 제약받지 않고, 오직 양으로만 표현되는 교환가치가 우선이 된다. 교환가치는 말 그대로 양으로만 표현되기 때문에 획득될 수 있는 교환가치의 규모에는 애당초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교환가치 획득을 목표로 하는 상품생산에 이미 생산이 무제한적으로 확대될 수 있는 특성이 존재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런데 상품생산이 더욱 발전하여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서면, 생산의 목적은 단순히 판매에서 얻는 교환가치가 아니라, 최초 자신이 투여한 가치보다 더 큰 잉여가치(이윤)를 획득하는 것이 된다. 잉여가치 획득이 목표인 자본주의에서는, 생산물이 상품으로 생산되어 생산물 안에 있는 질적인 내용은 부차화 되고 화폐의 양으로만 표현되는 교환가치, 잉여가치가 생산의 목적이 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본가는 상품이 구체적으로 유용해서가 아니라 상품의 판매를 통해 얻는 잉여가치 때문에 상품을 생산한다. 자본가에게 10억의 이윤은 100억의 이윤보다는 작은 것이며, 이 100억의 이윤은 1,000억의 이윤을 생각하면 성이 차지 않는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는 애당초 추구할 수 있는 잉여가치의 한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자본주의에서는 상품생산이 일반화되면서, 이전에는 거래될 수 있는 상품으로 간주되지 않았던 사용가치가 상품으로 전환되고 사회적으로 비합리적이고 낭비적인 부분까지 거대한 산업이 되는 등, 사회의 모든 부분이 상품으로 전환되면서 잉여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영역을 계속 확대시킨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자본주의 생산의 특성 상, 자본은 오로지 잉여가치만을 지고선으로 추구한다. 잉여가치의 획득이 생산의 목표가 된다는 것은 모든 생산이 화폐량으로만 표현되는 잉여가치의 규모의 증대만을 탐욕스럽게 추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은 노동자계급과 자연에 가해지는 부정적 영향들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며 선의와 윤리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는다.10) 만약 자본이 환경의 파괴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자신의 이윤획득과 관련이 있는 경우일 뿐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한편, 자본주의는 잉여가치의 획득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잉여가치에 대한 무제한적 욕망을 추구하는 체제의 특징 상, 피지배계급으로부터 착취한 잉여생산물을 대부분 소비해버렸던 과거의 생산양식과는 다르게, 더 큰 잉여가치를 위해 획득된 잉여가치조차도 다시 자본으로 전환시켜 생산에 투자하는 특징, 즉 축적을 추구하는 특징을 지닌다. 맑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풍자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이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하는 식의 옛 이야기와 같다. 10,000원의 최초 자본은 2,000원의 잉여가치를 가져오는데, 이것이 자본화한다. 2,000원의 새로운 자본은 400원의 잉여가치를 가져오고, 이 잉여가치가 또 자본화해 제2의 추가자본으로 전환하며, 이것이 또다시 80원의 새로운 잉여가치를 가져온다. 이 과정은 이와 같이 계속된다.”(「자본론」, 1권, 24장)</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축적하라 축적하라! 이것이 모세(Moses)며 예언자(prophets)이다. “근면은 재료를 제공하고 절약은 그것을 축적한다.” 그러므로 절약하라 절약하라! 즉, 잉여가치 또는 잉여생산물 중 가능한 한 많은 부분을 자본으로 재전환하라! 축적을 위한 축적, 생산을 위한 생산, 이 공식으로 고전파 경제학은 부르주아 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표현했다.”(「자본론」, 1권, 24장)</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본주의에서는 이렇듯 잉여가치의 획득, 그리고 이를 위한 잉여가치의 자본으로의 전환이 생산의 목적이기 때문에 자본은 끊임없이 축적되어 그 크기가 계속 커진다. 이와 함께 생산규모 역시 끊임없는 확대가 이루어진다. 심지어 자본주의에서는 이러한 축적이 조금이라도 주춤한다면, 경제에 심각한 위기가 발생한 것으로 간주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또한 가능한 한 많은 잉여가치의 생산을 목표로 하는 체제는 결과적으로 생산이 사회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잉여가치의 획득을 위한 수단이 되어 끊임없는 축적을 진행하기 때문에, 생산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생산을 위한 생산의 체제에서는 생산 규모는 주어진 필요에 따라 결정되지 않고 오히려 그 역이 되며, 생산물들의 총수는 항구적으로 증가하는 생산 규모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잉여가치의 획득을 위한 생산이 필연적으로 낳게 되는 생산을 위한 생산이 생태위기를 낳게 된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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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자본주의의 특성에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생태위기가 발생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고자 한다.</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초국적 농업기업이자, GMO(유전자조작식물) 산업의 거물인 “몬산토”는 화학제품의 생산에서 시작한 기업이었다. 이 기업은 윤활액과 냉각액으로 많이 이용되었으나 인간과 자연에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판명되어 사용이 금지된 PCB(폴리염화비페닐)의 최다 생산업체이자, 베트남전에서 대량으로 살포되었던 고엽제, 에이전트 오렌지의 최다 생산업체였다. PCB와 고엽제에 포함되어 있는 독성 다이옥신은 인체와 자연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는 독성 화학물질이다. 특히 다이옥신의 경우 심각한 독성을 지닌 물질로 다이옥신 1g만으로 2만명의 인명을 살상할 수 있다. 몬산토는 이 물질들을 20세기 초반부터 생산하였는데, 생산 초부터 이 물질들이 인체와 자연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친다는 증거들이 존재하였고, 몬산토 역시 이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몬산토는 이윤을 위해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였고 심지어 이러한 물질들의 무해성을 입증하고자 실험결과를 조작하기도 하였다. 한편 몬산토가 생산하는 “라운드업”이라는 제초제 역시 자연에서 금방 분해되어 친환경적이고 무해하다고 선전해왔지만, 실제로는 제초제의 독성이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몬산토는 여전히 “라운드업” 제품을 계속 판매하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0/08/oil_spill_latest2.jpg"><img class="alignright" title="oil_spill_latest2" src="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0/08/oil_spill_latest2-300x197.jpg" alt="" width="300" height="197" /></a>• 최근 자본주의가 야기한 최악의 환경재앙이 될지 모르는 심각한 석유유출 사건이 멕시코만에서 발생하였다. 지난 4월 20일, 메이저 석유회사인 BP 소속의 시추선, 딥워터 호라이즌호가 폭발과 함께 침몰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정과 가까운 파이프에 구멍이 뚫려 막대한 양의 원유가 대서양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BP는 사건 규모를 축소하며 하루 1천 배럴 씩 유출되고 있다고 발표하였으나, 실제로는 하루 1만 2천-1만 6천 배럴의 원유가 유출되고 있다. 두 달 동안 354만 배럴이 유출되었는데, 태안 유조선 충돌 사고시 배출된 석유의 양이 7만9천 배럴이었다는 것과 비교해보면, 이것이 얼마나 막대한 양인지 알 수 있다. BP의 CEO인 헤이워드는 6월 18일 미의회 청문회에서 사고의 원인은 여전히 확실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발뺌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원유유출 사고의 원인은 BP가 경비절감을 위해 위험성이 높은 유정봉합 방식을 선택한 데에 있다. 또한 언론의 보도를 통해, BP가 경비절감을 위해 온갖 편법으로 안전규정을 무시하였으며, 사건 발생 시에도 작업이 예정보다 5주가 늦어졌고 하루 지연비용이 75만 달러에 달해 노동자들이 심한 압박 속에서 노동하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윤을 위해 무리한 시추작업을 한 것이 멕시코만 원유 유출사고의 핵심 원인인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자본주의에서는, 이전에는 산업화되지 않았던 영역이 이윤추구의 영역으로 전환되는데, 이러한 자본주의 생산영역의 확대는 심한 생태문제를 야기하곤 한다. 대표적 사례는 애완동물 시장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는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마저 엄청난 이윤을 내는 산업으로 바꾸어 버렸다. 애완동물 먹이 시장만 전 세계적으로 420억 달러 규모에 이르며, 애완동물을 위해 들어가는 먹이, 동물병원, 애완동물 용품 등은 막대한 생태 자원을 소비하고 있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통조림의 상당수가 고양이 먹이로 소비되고 있으며, 셰퍼드 종 두 마리가 방글라데시 사람 한명이 소비하는 것보다 더 많은 자원을 사용하고 있다. 애완동물 산업의 성장의 결과, 4월 22일, ‘지구의 날’에 라이브사이언스지가 발표한 “우리가 잘 몰랐던 지구를 위협하는 오염원 7가지” 중에는 애완동물이 포함되기까지 하였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바이오 연료 산업의 성장 역시, 잉여가치 획득만이 지고선이 되는 자본주의가 생태문제를 야기함을 잘 보여준다. 바이오 연료 산업은 자본주의에서는 돈만 된다면 스스로가 야기한 생태문제까지도 장사거리로 만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바이오 연료는 화석연료의 고갈에 대한 대체에너지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바이오 연료 역시 탄소를 배출하는 에너지원이다. 또한 에탄올, 바이오 디젤 등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콩, 옥수수 등 바이오 연료의 원료를 기르기 위한 막대한 경작지가 필요한데, 이는 기존의 산림파괴, 단작화 등으로 새로운 생태문제를 야기한다. 이 원료로부터 바이오 연료를 만드는 과정에서 투여되는 에너지는 정작 바이오 연료를 통해 이용할 수 있는 에너지보다 크다는 연구가 있을 정도로, 효율적인 에너지원도 되지 못하고 탄소배출의 감소에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더욱이 식량생산을 하는 경작지가 바이오 연료 생산을 위한 경작지로 전환되면서 전세계적으로 식량위기의 한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바이오 연료 시장이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자본주의 이후 대규모 공장식 어업의 등장과 이로 인해 야기되는 해양 어종의 고갈은 자본주의의 특징인 생산을 위한 생산이 어떠한 결과를 낳는지 잘 보여준다. 자본주의적 어업은 이윤을 위해 생산의 규모를 무제한적으로 키운 대표적 사례이다. 어업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한 중요한 생산영역이지만, 자본주의가 등장한 이후 어업은 큰 변화를 겪었다. 우선 이윤을 위해 선진적 기술이 어업에 도입되었다. 1900년대 초, 기선이 증기선으로 대체되고 이윽고 냉동시설이 어선에 도입되었다. 냉동시설은 수산물의 판로와 관련하여 지리적 한계를 제거하였다. 이후 어획에서 가공까지 일괄적으로 처리되는 공장식 저인망선이 등장하면서 자본주의적 어업은 팽창을 가속하였다. 남획에 의한 근해 어류의 고갈은 원양어업의 심화를 낳았다. 그렇지만 이윽고 공장식 어업과 원양어업은 원해의 어종 고갈까지 야기하였다. 이미 1930년대부터 공장식 어업은 해양 생태계가 유지되지 못할 수준의 어획을 하고 있었다. 또한 이윤을 위한 무분별한 어획은 판매목적의 어종뿐 아니라 어획과정에서 잡힌 소위 “잡어”들까지 무분별하게 잡아들이며 전체 해양생태계를 유린하였다. 요컨대 남획에 의해 해양 어족이 멸종에 이르고, 이를 통해 해양생태계가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이윤을 위해 남획해온 공장식 어업에 의해 “지난 50년 동안 생선과 조개류, 해양식물 등 29%의 식용 생물이 이미 준멸종(collapse) 상태이며, 2050년이면 더 이상의 자연해산물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이번 세기 안에 우리 밥상에서 해산물은 사라질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자본주의 하에서는 인간의 필요와 이를 지탱해주는 자연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은 채 생산의 팽창이 이루어지면서, 인간문명을 지탱하온 주요 천연자원이 고갈되고 있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철, 구리, 아연, 알루미늄 같은 광물자원이나 핵심 에너지자원인 석유 등이 모두 지금의 자본주의 경제 하에서는 수십 년 내에 고갈될 것으로 예측된다. 이러한 자원은 현재를 살아가는 인류뿐 아니라 후손들의 삶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고, 따라서 인간사회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런 자원들이 합리적이고 계획적으로 이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내일은 없는 것처럼 자원을 무제한적으로 사용하였다. 3억년에 걸쳐 형성된 석유가 200여년 만에 모두 고갈될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는 사실은 생산 자체가 목적이 되어 무제한적인 생산을 추동한 자본주의의 반생태적 성격을 잘 대변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위에서는 몇 가지 사례만 나열하였지만, 자본주의가 생태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는 인간의 필요 충족이라는 측면과는 관계없이 잉여가치의 획득과 축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든지 생산하고, 이를 위해 생산의 규모를 무한도로 팽창시켜나가려는 속성을 지니는데, 이 속성 자체가 바로 지금 인류가 직면한 생태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이라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게 때문이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파괴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자본주의가 지구 생태계를 수탈하고 파괴한 결과, 인간의 삶은 현재 심대한 위협에 처해 있다.</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2pt;"><strong>4. 생태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가 극복되어야 한다. </strong></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위에서 알아본 것처럼, 현재의 생태문제를 야기한 것은 바로 자본주의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원리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 자본주의 하에서도 생태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 생각은 커다란 한계를 지닌다. 가령 기후변화의 예를 들어보자, 기후변화를 실질적으로 막기 위해서는 탄소배출의 대대적 감소가 필요하다. 이러한 탄소배출 감소는 성장을 추구하는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와는 양립할 수 없다. 즉 기후변화만 놓고 보더라도 자본주의를 유지하고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11)</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0/08/316_cartoon_ecology_small_over1.jpg"><img class="alignleft size-medium wp-image-963" title="316_cartoon_ecology_small_over" src="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0/08/316_cartoon_ecology_small_over1-300x215.jpg" alt="" width="300" height="215" /></a>그러나 자본주의를 극복하지 않고도 생태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널리 퍼져있는 생각이라는 점에서 가볍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는 기술혁신으로 생태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보는 견해를 중심으로, 자본주의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 생태문제의 해결책이 지니는 문제점을 알아보겠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예를 들어 자본주의는 무제한적 축적을 추구하기 때문에 에너지를 절약해주는 기술의 도입은 전체적으로 에너지 절약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에너지 총량을 증가시킨다. 환경경제학자들은 이를 “제본스의 역설”이라고 칭한다. 제본스는 「석탄문제」라는 책에서 “석탄 같은 자연 자원을 사용할 때 효율성이 증가하면 수요가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 규모가 커지기 때문에 오히려 증가한다고 주장했다.”12) 이러한 역설적 상황이 발생하는 원인은 생산을 위한 생산, 무제한적 축적을 지향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 자체에 있다. 모든 노동절약적, 에너지 절약적 기술은 결국 다른 자본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그리고 이 경쟁에서 승리하고, 이윤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생산의 규모는 지속적으로 확대시켜야 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하에서는 에너지 절약이 더 큰 에너지의 사용을 낳게 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본주의에서 불가피하게 야기되는 “제본스의 역설”은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원리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 자본주의 하에서의 기술혁신으로 기후변화 등 생태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한계를 지니는지 보여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매우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 가령 탄소배출을 과감하게 축소시키는 기술의 도입이 논의되고 있다. 전기자동차의 도입, 열효율이 높은 건축기술의 발전, 에너지 효율이 높은 가전제품의 등장 등등은 또 다른 예가 될 것이다. 일부에서는 지구온난화를 유발시키는 탄소배출은 그냥 놔둔 채 지표면에 도달하는 태양광의 양을 줄이는 것으로 기후변화를 상쇄시키려는 의도에서, 대기에 황산염(태양빛을 산란하는 역할을 한다)을 배출하는 아이디어나, 지구 밖 우주에 거대한 거울을 설치하여 태양광을 반사시키는 아이디어가 스스럼없이 제출되기도 하였다. 또한 미국태양에너지협회와 시에라클럽은, 보고서를 통해 2050년까지 대기 중 탄소농도를 450-500 ppm로 감축시키는데, 기술혁신과 재생에너지만으로도 감축목표의 60-80%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기술의존적 사고는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생산의 규모를 지속적으로 확대시키고 이를 위해 막대한 소비를 조장하는 자본주의체제 자체는 건드리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체제의 특성상 결국 생산과 소비를 거리낌 없이 더욱 확대시키는 상황을 부추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기술의존적 처방 외에도, 시장이나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존재를 당연시하고 더 나아가 이에 의존하는 처방들이나, 자본주의적 생산을 문제삼지 않고 소비자의 소비윤리의 변화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처방들이 생태문제와 관련하여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방식은 모두 기술의존적 처방처럼 생태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생태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자체를 철폐해야만 한다.</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2pt;"><strong>마치며</strong></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본주의는 체제의 본성상 노동자계급을 착취하고 예속시키며 노동자와 민중의 인간다운 발전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부의 또 다른 원천이자 인간이 살아가는 터전인 자연 역시 심각한 수준으로 수탈하고 있다. 잉여가치의 획득과 축적을 위해 무제한적으로 생산규모를 확대해가는 자본주의 생산은, 지구 생태계 전체가 유례없이 훼손될 때까지 수탈하고 인간과 자연 사의의 공존관계를 파괴하였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기후변화는 자본주의 성립 이후 생산활동의 결과로 대기 중 탄소농도는 산업화 이전 280 ppm에서 2007년 383 ppm으로 상승하였다. 그리고 해마다 2 ppm씩 증가하고 있다. 대기 중 탄소농도를 2050년까지 450 ppm 이내로 막지 않는다면, 극지, 고산지대 빙상의 소멸, 해수면 상승, 기상이변, 6℃ 이상으로 기온의 급격한 상승, 사막화의 진척, 해양의 산성화 등으로 인류는 생존의 위협에 직면할 것으로 예측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종 소멸 역시 심각한 상황으로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의 자료에 따르면 17,000종의 생물이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 특히 해양 어족 자원의 고갈은 심각한 상황으로 주요 어장의 75%가 완전히 착취되거나 고갈되었으며, 대형 포식성 물고기는 90% 이상이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자본주의적 어업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종의 소멸은 당장 인간의 식량자원을 축소시킬 뿐 아니라, 인간과 다른 생물들이 더불어 공진화해온 지구의 생태계에 심각한 파괴를 야기하는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외에도 해양 산성화, 사막화, 토양 영양분 순환의 파괴, 수자원의 고갈 등 셀 수 없는 생태문제가 자본주의적 생산의 결과로 등장하고 있다. 새만금 사업, 4대강 사업 등은 우리가 현재 당장 직면한 문제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생태문제는 자본주의적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땜질식 처방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한 놈을 때리면 다른 놈들이 연달아 튀어나오는 두더지게임처럼 생태문제 하나하나에 대처하는 것으로는 절대 해결을 볼 수가 없다. 맑스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분석하면서 이미 분명히 인식하였던 것처럼 자본주의는 자연과 인간관계에 회복하기 어려운 균열을 만들어내면서 부의 두 가지 원천인 자연과 인간을 파괴하는 사회체제이다. 결국 생태문제를 야기하는 근본원인인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완전히 극복하고,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면서 발전된 생산력을 인류 전체의 필요와 다방면의 발전을 위해 활용하는 생산체제를 만들어 갈 때에만 생태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1pt;"><strong>[미 주]</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 환경운동이 생태문제의 원인을 설명하는 데 있어 철저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심지어 자본과 결탁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4호에 실린 박남일, “‘에코자본주의’의 허상과 생태적 대안 제시의 필요성”에서 비판한 바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2) 프레드 맥도프, 존 벨라미 포스터, “모든 환경론자들이 자본주의에 대해 알아야 할 것”, 먼슬리리뷰, 2010년 3월호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3) 제임스 러브룩, 「가이아: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갈라파고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4) 칼 짐머, 「진화」(세종서적)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5) 이후 맑스의 「자본론」에서 인용한 경우에는 별도의 각주 없이 인용한 곳에 출처를 직접 밝히도록 하겠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6) 엥겔스, “원숭이의 인간화에서 노동이 한 역할”,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5권」(박종철출판사)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7) 맑스,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두레)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8) 인간과 자연사이의 물질대사적 관계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3호에 실린 황정규,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을 참고하기 바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9) 자본주의가 아닌 생산양식 상당수에서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순환적 관계 속에서 유지되었다. 예를 들어 과거 조선시대를 보자. 조선시대에서는 도시와 농촌의 분리가 어느 정도 진척되었지만, 도시에서 발생하는 똥오줌을 다시 농촌의 거름으로 순환시키는 생산형태를 보여주었다. 고대 이집트의 경우에는 나일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제방을 쌓거나 하지 않고 범람을 그대로 이용하여 농경을 하였다. 이 역시 자연의 조건을 십분 이용하여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생산관계를 이룩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반면 과거의 사회 중에서도 지금과 같은 정도는 아니지만, 인간과 자연 사이의 균열을 야기하는 사회도 존재하였다. 예컨대 생산형태 중 하나인 화전의 경우에는 자연에 대해 매우 약탈적인 것이었다. 앞선 인용에서처럼, 엥겔스는 과거 사회에서 산림남벌이 심각한 악영향을 낳기도 하였음을 지적한 바 있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자연과의 관계에서 균열이 생기면서 문명의 쇠퇴가 발생하기까지 한 경우도 있다. 중앙아메리카를 중심으로 9세기경까지 번성했던 마야문명이 그 예인데, 화전농법과 건축물에 사용되는 회반죽을 위한 산림벌채로 지력이 약화되었던 것이 마야문명의 몰락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0) 맑스는 이러한 자본의 속성을 재치 있게 표현하였다.<br />
  <br />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자본은, 인류는 장차 퇴화할 것이라든가 인류는 결국 사멸해버릴 것이라는 예상에 의해서는 그 실천적 활동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데, 그것은 마치 지구가 태양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예상에 의해서는 자본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 뒷일은 될 대로 되라지! 이것이 모든 자본가와 모든 자본주의국의 표어이다.”(「자본론」, 1권, 10장)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1) 자세한 내용은 민치 리, “기후변화 ,성장의 한계, 사회주의”를 참고할 것.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2) 존 벨라미 포스터, 「생태계의 파괴자, 자본주의」(책갈피)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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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5호를 발간하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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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6 Jul 2010 07:00:46 +0000</pubDate>
		<dc:creator>강령토론</dc:creator>
				<category><![CDATA[알림]]></category>
		<category><![CDATA[제 5호]]></category>
		<category><![CDATA[발간하며]]></category>
		<category><![CDATA[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5호]]></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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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해방연대(준)은 2009년 1월에 「(가칭)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 강령초안」과 「강령초안 해설」을 제출하면서 강령초안 논의의 의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표현한 바 있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강령초안논의는 「사회주의정당건설계획」에서 밝혔듯이 당건설의 사상적 토대를 형성하는 데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특히 오랫동안 사회주의노동운동이 후퇴하면서 강화된 조합주의, 경험주의를 극복하는 데에서 강령초안논의는 강력한 자극제가 되어야 한다. 강령초안논의는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사실상 해체된 사회주의운동공동체를 새로운 내용으로 재구축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span> </p>
<p><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p=937" class="more-link">Read more on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5호를 발간하며&#8230;</a></p>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해방연대(준)은 2009년 1월에 「(가칭)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 강령초안」과 「강령초안 해설」을 제출하면서 강령초안 논의의 의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표현한 바 있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강령초안논의는 「사회주의정당건설계획」에서 밝혔듯이 당건설의 사상적 토대를 형성하는 데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특히 오랫동안 사회주의노동운동이 후퇴하면서 강화된 조합주의, 경험주의를 극복하는 데에서 강령초안논의는 강력한 자극제가 되어야 한다. 강령초안논의는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사실상 해체된 사회주의운동공동체를 새로운 내용으로 재구축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0/07/5ho.jpg"><img class="alignleft size-medium wp-image-938" title="5ho" src="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0/07/5ho-231x300.jpg" alt="" width="231" height="300" /></a></span>당시에 강조한 이러한 강령초안 논의의 의의는 1년 6개월 정도의 시간이 지난 현시점에서도 변함이 없다. 현시점에서 요구되는 것은 그 의의를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당건설사업의 구체적 경험에 비추어, 그 의의를 보다 명확하게 하고 이를 실천에 반영하는 것이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우리는 최근년의 경험을 통해, ‘현실사회주의’의 붕괴가 야기한 사회주의노동운동의 후퇴, 조합주의, 경험주의의 강화가 당초에 판단한 것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또한 조합주의적, 경험주의적 활동과 단절하지 않은 채, 많은 활동가들이 과거의 활동을 관성적으로 반복하면서, 단지 ‘사회주의자’연 하고 있을 뿐이며, 당건설의 조직적 토대의 형성에서뿐만 아니라 사상적 토대의 형성에서도 최근년간 이렇다 할 진전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음도 확인하였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상태에서 당건설사업전반과 강령초안논의가 본격화될 수 없었다. 일각에서 진행된 ‘사노위’ 건설 논의는 당건설의 사상적, 조직적 토대 형성과는 무관한, 사노준과 사노련 사이의 지루하고, 상호 신경전으로 점철된 조직통합논의에 불과하였고, 결국 실패하였다.</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평가하면서, 당건설의 토대를 형성하는 실제적인 사업만이 당건설을 가능하게 하고, 사회주의운동공동체의 재구축을 가능하게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확인하였다. 당연히 당건설의 사상적 토대 형성 사업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우리는, 실제로 당건설 사업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많은 활동가들이 당건설을 말하기 전에 우선 기본적인 사회주의적 사상으로 무장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실제로는 조합주의자인데 당건설을 말하면서 새롭게 ‘사회주의’ 옷을 걸친다고 갑자기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강령초안논의도 활동가들이 우선 사회주의자로서의 기본적인 소양을 자기 것으로 체득해야 활성화 될 수 있을 것이다. </span> <span id="more-937"></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점에서, 활동가들의 사회주의 학습활동을 본격화하고, 이것과 강령초안논의, 실천을 결합하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당건설에 실제로 기여하게 될 것으로 우리는 판단한다. 우리가 노동자정치학교의 개설을 통해 사회주의학습을 강화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판단에 기초한 실천의 일환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우리는 교육적 효과의 극대화를 더욱더 강조하여 강령초안논의에 임할 생각이다. 그리고 동일한 문제의식에서 강령초안논의 과정에서 사회주의를 왜곡하는 잘못된 경향과의 사상투쟁을 강화하여 강령초안에 담겨야 할 것들을 보다 분명하게 할 계획이다. </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제5호에는 네 개의 글이 실려 있다.</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첫 번째의 글인 이상진의 「여성억압의 근원과 여성해방에 대한 사회주의적 관점」은 이미 지난 호에서 약속한 바 있는 글이다. 이 글은 성별분업의 사회적 성격이 생산의 발전과 함께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파악함으로써, 여성억압의 근원을 밝히고 있다. 수렵채집 사회와 초기 농경사회에서는 생물학적 차이로 인한 성별분업이 여성에게 억압적이지 않았지만, 생산의 발전으로 &#8216;쟁기와 가축을 이용한&#8217; 중농업이 등장하면서, 생산에서 상대적으로 육체적 힘을 많이 필요로 하는 남성노동이 사회적으로 중요해졌기 때문에, 성별분업이 여성에게 억압적으로 변했다는 점을 보이고, 이것을 여성억압의 근원으로 파악한다. 다른 한편 생산의 발전은 계급의 출현으로 이어졌는데, 계급의 출현은 가부장적 가족구조 등 여성억압을 더욱 강화하는 역할을 했음을 지적한다. 이를 바탕으로 이 글은 여성해방을 위해, 여성억압을 강화하는 계급억압을 폐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과 함께, 성별분업의 억압적 성격을 제거하는 것이 핵심적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이 글은 자본주의는 여성해방을 위한 물질적 조건 또한 창출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전통적으로 사회주의가 강조해왔던 가사노동의 사회화와 여성의 사회적 생산에의 참여, 사회적 차별의 철폐를 이야기 한다. 덧붙여 출산 또는 육체적으로 힘든 노동과 같은 생물학적 차이로 인한 성별분업에 대해, 사회주의는 이것이 사회적으로 여성억압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두 번째 글인 성두현의 글, 「사노준이 제출한 강령초안 비판」은 지난 4월에 공개된, 사노준의 강령초안을 비판하고 있다. 이 글은 크게 강령의 체계와 형식적 적절성, 내용으로 나누어 사노준의 강령초안을 비판하고 있는데, 먼저 강령의 체계와 형식에서 사노준의 강령체계가 맑스주의적 강령체계를 벗어나고 있으며,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폭로로부터 시작하지 않아 반신자유주의 수준의 강령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내용에서는 사회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원리적 내용 전부를 누락시키고 있고,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피상적이고 절충적이며, 맑스주의에 대한 평가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또한 강령초안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 중 하나인 노동자국가의 수립필요성을 누락시키고, 사노준의 사회주의경제론은 애매함으로 가득 차 있으며 여성주의, 생태주의와 타협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 글은 사노준이 이번에 제출한 강령초안의 문제점과, 사노준의 조직적 상태를 밀접하게 연관시키고 있다. 강령초안을 제출하였음에도, 강령초안이 사노준 내에서조차 어색한 옷으로 남아 있는 것은 사노준이 조합주의와 경험주의로부터 온전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사회주의강령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노동자국가가 누락된 것과 맑스주의적 강령체계가 폐기된 것은 사노준이 지난 20여 년간 운동에 만연된 청산주의와 단호히 단절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아울러 강령초안이 사회주의를 주장하고 있지만 전혀 긴장감을 느낄 수 없고 지루한 것은 사노준이 관료주의적 변질과 단호히 단절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피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판단한다. 이 글은,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사노준의 강령초안은 노동자계급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교육적 역할을 전혀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반대로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오히려 방해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때문에 사노준의 강령초안은 수정보완되는 것이 아니라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세 번째의 글은 황정규의 「생태위기의 주범인 자본주의」이다. 황정규는 제 3호의 글에서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이 맑스주의가 생태문제를 올바로 설명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제 3호의 글에서는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을 정립하려는 목적이 중심이 되면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생태문제를 야기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부족하였다. 이 글은 생태문제가 인간활동 자체에서 발생한 문제가 아니라 특정한 인간활동의 산물, 즉 자본주의적 생산이 생태위기를 낳는 원인이 된다는 점을 자세히 설명한다. 잉여가치의 획득이 생산의 목적인 자본주의는 사회적 필요의 제약에서 벗어나서 오직 화폐의 양으로만 측정되는 잉여가치 획득을 추구한다. 또한 잉여가치의 획득은 무제한적 축적과 생산을 위한 생산을 필연적으로 낳는데, 이러한 축적을 위한 축적과 생산을 위한 생산은 자연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까지 생산의 규모를 확대하게 된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속성이 현재 우리가 직면한 생태문제의 원인인 것이다. 아울러 이 글은 따라서 생태문제의 해결과 관련하여 자본주의를 문제 삼지 않는 방식은 생태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마지막 글인, 황정규의 「사회주의 여성주의에 대한 비판」은 여성문제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취하는 이원론을 비판하고 있다. 이미 제 4호의 글에서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이원론이 지니는 문제점을 비판한 바 있는데, 이 글은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이러한 이원론을 설명하기 위해 끌어들인 &#8220;가부장제&#8221;와 &#8220;재생산&#8221;이라는 용어가 지니는 한계와 문제점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여성주의에 대한 비판을 한층 심화시키고 있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에 대한 비판을 이번 호에서 재차하게 된 것은,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입장이 단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사노준의 여성강령과 사노준의 입장을 대변하는 유현경의 글을 통해 한국에서도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 여러분들이 이점을 유의하면서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파악했으면 한다.</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강령토론」편집위원회는 앞으로 강령초안논의의 교육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사회주의’를 주장하며 사회주의와는 이질적인 요소를 도입하는 잘못된 경향과의 사상투쟁을 강화할 계획이다. 아울러, 이미 제4호에서 표방하였듯이 소주제별 토론회 등을 통해, 강령토론의 다양한 소주제별 토론(소련사회성격, 여성문제, 생태문제 등)의 활성화를 꾀할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한다.</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2010. 7. 16</span> </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편집위원회</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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