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
<rss version="2.0"
	xmlns:content="http://purl.org/rss/1.0/modules/content/"
	xmlns:wfw="http://wellformedweb.org/CommentAPI/"
	xmlns:dc="http://purl.org/dc/elements/1.1/"
	xmlns:atom="http://www.w3.org/2005/Atom"
	xmlns:sy="http://purl.org/rss/1.0/modules/syndication/"
	xmlns:slash="http://purl.org/rss/1.0/modules/slash/"
	>

<channel>
	<title>사회주의 강령을 토론하자!</title>
	<atom:link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feed=rss2" rel="self" type="application/rss+xml" />
	<link>http://programto.net/wordpress</link>
	<description>강령 논의의 활성화로 사회주의 정당 건설의 사상적 토대를 형성하자</description>
	<lastBuildDate>Mon, 02 Aug 2010 04:25:28 +0000</lastBuildDate>
	<language>en</language>
	<sy:updatePeriod>hourly</sy:updatePeriod>
	<sy:updateFrequency>1</sy:updateFrequency>
	<generator>http://wordpress.org/?v=3.0.1</generator>
		<item>
		<title>사회주의 여성주의 비판</title>
		<link>http://programto.net/wordpress/?p=966</link>
		<comments>http://programto.net/wordpress/?p=966#comments</comments>
		<pubDate>Mon, 02 Aug 2010 04:11:51 +0000</pubDate>
		<dc:creator>강령토론</dc:creator>
				<category><![CDATA[여성문제]]></category>
		<category><![CDATA[제 5호]]></category>
		<category><![CDATA[강령토론 5호]]></category>
		<category><![CDATA[사회주의 여성주의]]></category>
		<category><![CDATA[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5호]]></category>
		<category><![CDATA[여성해방]]></category>

		<guid isPermaLink="false">http://programto.net/wordpress/?p=966</guid>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황 정 규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편집위원회 편집부장)</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960년대 이후 여성해방운동이 대중적으로 성장하면서, 사회주의, 맑스주의와 여성주의를 서로 결합시키려는 시도 역시 등장하게 되었다. 소위 “사회주의 여성주의”로 규정되는 이러한 시도들은 대개가 두 가지 방식에 의해서였다. 우선 맑스주의가 여성억압이라는 특수한 억압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한계를 지니기 때문에, 맑스주의는 생산양식의 발전, 특히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에만 제한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두 번째로 맑스주의는 여성억압을 설명하기 위해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여성억압을 설명해줄 수 있는 여성주의가 맑스주의와 결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span></p>
<p><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p=966" class="more-link">Read more on 사회주의 여성주의 비판&#8230;</a></p>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황 정 규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편집위원회 편집부장)</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960년대 이후 여성해방운동이 대중적으로 성장하면서, 사회주의, 맑스주의와 여성주의를 서로 결합시키려는 시도 역시 등장하게 되었다. 소위 “사회주의 여성주의”로 규정되는 이러한 시도들은 대개가 두 가지 방식에 의해서였다. 우선 맑스주의가 여성억압이라는 특수한 억압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한계를 지니기 때문에, 맑스주의는 생산양식의 발전, 특히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에만 제한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두 번째로 맑스주의는 여성억압을 설명하기 위해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여성억압을 설명해줄 수 있는 여성주의가 맑스주의와 결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맑스주의는 여성억압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여성주의의 견해를 받아들여 서로 결합시켜야 한다는 견해는 하이디 하트만에 의해 전형적으로 드러났다. 하트만의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다. “맑스주의적 분석은 역사발전의 법칙들, 특히 자본의 법칙에 대해 본질적인 통찰을 제공하지만, 맑스주의의 범주들은 성맹목(sex-blind)적이다. 오직 여성주의 특유의 분석만이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들의 체계적 성격을 드러낸다. 그러나 여성주의의 분석 그 자체로는 불충분하다. 그것은 역사에 맹목하고 충분히 유물론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 부족한 맑스주의와 여성주의가 서로를 보완하며 결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1) 그녀는 맑스주의가 성맹목이라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여성억압을 설명할 수 없다고 보았고, 따라서 여성억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론, 새로운 범주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새로운 범주는 바로 “가부장제”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한편 맑스주의가 여성억압을 설명하는 데 한계를 있으며, 이러한 한계는 맑스주의 자체를 수정, 변형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재생산”이라는 범주를 이용하였다. 이들은 생산과 대비되는 범주로서 재생산을 상정하고는, 생산은 기존의 맑스주의로 설명될 수 있는 영역이며, 재생산은 여성억압이 발생하는 맑스주의가 설명하지 못한 영역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설명은 심지어 엥겔스가 쓴 「가족, 사적소유, 국가의 기원」의 서문에 의해 정당화 되는 것처럼 주장되었다.2)</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시도는 모두 이원론이라는 특징을 지니는 것으로, 이에 따르면 현실은 계급문제와 관련된 생산양식 / 생산의 영역과 여성억압과 관련된 가부장제 / 재생산영역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맑스주의는 계급문제, 여성주의는 여성문제를 따로따로 설명하는 것으로, 계급문제와 여성문제를 모두 설명하기 위해서는 맑스주의, 여성주의의 결합이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여성억압의 독자성을 입증하려는 의식의 과잉만을 보여준 채, 여성억압의 원인뿐 아니라 여성억압과 계급억압 사이의 관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맑스주의는 계급사회 분석, 특히 자본주의 계급분석에만 유용한 협소한 것으로 재단하였다. 그 결과 계급문제와 여성문제 모두 제대로 설명하는 데 실패하였던 것이다. <span id="more-966"></span></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미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4호에 실린 이상진의 “여성문제, 계급문제에 대한 이원론적 접근 비판”이라는 글은 여성문제에 대해서 이원론적으로 접근하는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지니는 문제점을 비판한 바 있다. 이 글의 핵심은 사회주의 여성주의 식의 접근이 여성문제를 계급문제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을 하면서 실제로는 여성문제와 계급문제를 분리시킨 후 병렬적으로 결합시키는 이원론적 구조에 빠지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급진여성주의로 귀결되는 경향을 보이며, 또한 여성운동에 대한 자율성, 독자성에 대한 강조가 범계급적 여성운동을 계급투쟁의 우위에 두는 결과를 낳는다고 비판하였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한편 이러한 사회주의 여성주의적 사고방식은 한국에서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이는 사노준의 여성강령과 사노준의 입장을 대변하는 유현경의 글에서 분명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들의 주장은 과거 30년 전 서구에서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의 주장과 대동소이 하다. 이미 사회주의와 여성주의를 기계적으로, 병렬적으로 결합하려는 시도가 성공하지 못하였는데도, 이것이 한국에서 다시금 무비판적으로 재현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셈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제 4호의 글에 이어, 이 글에서는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이원론의 근거가 되는 “가부장제”와 “재생산”, 두 범주가 지니는 오류와 한계를 자세하게 검토함으로써,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지닌 문제점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한국에서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주장을 반복하는 이들의 문제점 역시 분명해지리라 생각한다.</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2pt;"><strong>1. “가부장제”는 추상적이고 몰역사적인 개념으로, 여성억압의 원인이나 계급억압과 여성억압 사이의 관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였다.</strong></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가부장제”라는 용어는 여성주의자들이 여성억압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었지만, 이 용어 자체는 그전부터 오랫동안 사용되어 오던 것이었다. 가령 막스 베버는 “아버지가 확대된 친족 연결망의 여타 성원들을 지배하고 가구의 경제생산을 통제하는, 가구조직의 특별한 형태”3)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맑스 역시 가부장제를 가족을 이끄는 남성이 생산을 지휘 통제하는 특정한 생산방식으로 보았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자신의 필요를 위해 곡물, 가축, 실, 아마포, 의복 등을 생산하는 농민가족의 가부장적 생산”에 대해서 설명한 바가 있다. 이때에 가부장제의 기본적인 용법은 다음과 같다. “남성혈통을 따르는 확대된 친족구조에 대한 서술적 용어로서, 하나의 생산단위(때로는 노예노동을 포함한)로서 기능하며, 공동으로 노동하고 소유하고, 사회관계(특히 결혼)와 노동의 배분 문제에 있어서 가부장의 권위를 따른다.”4)</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반면 여성주의자들은 가부장제를 여성억압 자체를 설명하기 위한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용어로 사용하였다. 이들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 여성의 억압을 가부장제라는 말로 표현하고자 하였으며, “다양한 사회 영역과 형태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현상들을 포괄하는 총체로서, 성에 기반한 억압관계의 체계”5)로 이해하였다. 즉 가부장제는 여성억압과 사실 상 동의어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부장제 용어를 통해, 여성억압이 모든 역사에서 생산양식과는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존재하여온 것임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가부장제 용어를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이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대표적 인물인 하트만이 사용하는 가부장제 규정을 통해 알 수 있다. 하이디 하트만은 “위계적이지만 남성이 여성을 지배할 수 있도록 남성 사이의 상호의존과 연대를 형성, 창출할 수 있는 남성간의 사회적 관계의 일체”로 정의하였다. 그녀에 따르면, “가부장제는 위계적이고 서로 다른 계급과 인종, 민족 집단의 남자들이 가부장제에서 서로 다른 위치를 점하지만, 그들은 또한 자신들의 여성에 대한 지배관계에 대한 공유로 단결되어 있다.” 이 가부장제의 물적 토대는 “여성의 노동력에 대한 남성의 통제”로 “몇몇 필수적 생산자원에 대한 접근에 여성을 배제하고 여성의 성성을 제한함으로써 이러한 통제를 유지한다.” 그녀는 이러한 통제가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은 채, 이러한 통제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해버렸다. 게다가 하트만은 가부장제에 의해 자본가 남성과 노동자 남성사이에는 동반자 관계가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예를 들어 가족임금은 가부장제에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는 자본가 남성과 노동자 남성의 묵인과 공모의 결과라고 보았다.6)</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가부장제가 보편적인 여성억압의 체계로 이해되는 데에는 급진여성주의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급진여성주의는 여성억압의 고유성과 독자성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고, 여성억압이 모든 다른 억압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여성억압을 설명하는 고유한 사회적 범주를 만들어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급진여성주의가 주장하는 가부장제 개념을 적극 수용하여, 여성억압을 생산양식, 특히 자본주의와 결합시키려고 시도하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나 가부장제를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부장제가 여성억압의 체계라는 것 외에는 어떠한 개념적 동의도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예를 들어 가부장제의 원인과 토대로서 밀렛은 남녀 간의 권력관계를, 파이어스톤은 생물학적 성별분업을 들었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가부장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일치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령 미첼은 이데올로기적, 상징적 남성(아버지)의 지배를, 하트만은 여성노동력에 대한 남성의 통제를 가부장제의 토대로 주장하였다.7) 이는 가부장제가 단지 여성억압의 사회적 체계가 독자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이를 통해 여성운동의 독자성을 주장하기 위해 끌어 와서 자의적으로 사용한 개념이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따라서 여성억압의 보편성과 독자성을 설명하기 위해 들고 나온,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가부장제 용어는 되려 여성문제를 이해하는 데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0/08/feminism.jpg"><img class="alignleft size-medium wp-image-969" title="feminism" src="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0/08/feminism-300x209.jpg" alt="" width="300" height="209" /></a></span></span></span>우선 가부장제가 계급억압과는 구분되는 별도의 여성억압의 사회체계를 상정하기 위해 등장하였지만, 사실 상 여성억압의 원인과 역사적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였다. 가부장제 용어를 사용하는 이들 대부분이 가부장제를 인간역사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초역사적인 현상으로 보았는데, 이는 오히려 여성억압을 구체적으로 보는 것을 저해하였고, 추상론, 보편론으로 빠져버렸다. 인간 역사는 모두 남성지배, 여성종속의 역사였다고 말하는 것이 속은 후련하고 정치적으로 독자세력화하는 데에는 유용할지는 몰라도, 여성억압이 존재하며 이것이 오래된 역사를 지닌다는 현상기술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더욱이 가부장제가 인간 사회에 보편적으로 존재하였다는 것은 역사적 현실과도 부합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성의 억압은 역사적, 사회적 현상으로, 모든 인간사회에서 여성을 억압하고 여성의 지위가 남성에 비해 낮았던 것은 아니었다. 원시 공산주의 사회는 계급이 없었던 사회이면서 동시에, 남녀의 지위가 평등하였던 사회이기도 하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두 번째로 가부장제를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결합시켜 설명하려는 시도 역시 문제를 야기하였다. 이 시도는 전형적으로 이원론적 구조를 보여주는데, 가령 계급체계와 별도로 성별체계가 존재한다고 상정하거나 생산과 재생산, 산업과 가족 등으로 사회를 인위적으로 분리시켜 전자는 자본주의, 맑스주의의 영역, 후자는 여성주의, 가부장제의 영역이라고 규정하는 모습을 띠었다. 이는 맑스주의에 대한 왜곡, 협소화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왜곡, 협소화를 낳았다. 그리고 이러한 인위적 분리를 만든 후, 양자를 기능적, 병렬적으로 결합시키려고 했을 뿐이다. 이러한 결합을 설명하는 방식은 ‘서로가 상대적으로 독자적이며, 서로가 서로에 의존하고,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며, 서로 해결되려면 서로가 극복되어야 한다’는 식의 판에 박히고 상투적인 말장난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였다.8)</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세 번째, 가부장제를 받아들여 여성문제와 계급문제를 결합시키려고 했던 시도들은 불가피하게 급진여성주의로 귀결되는 경향을 낳았다. 이는 제 4호의 글, “여성문제, 계급문제에 대한 이원론적 접근 비판”에서 이미 설명하였던 것으로,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급진여성주의로부터 “가부장제” 용어를 수용하였으며, 따라서 여성억압을 다른 사회관계와 분리시켜 독립적으로 보는 급진여성주의의 문제의식 역시 공유하고 있었다. 또한 바로 위에서 지적하였듯이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여성문제와 계급문제를 사회주의 운동의 총체적 전망 속에서 설명하지 못하고 서로 독립적 영역으로 상정하고 병렬적, 기계적으로 결합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둘 사이의 결합은 불안정하였다. 또한 여성억압의 독자성, 자율성을 강조하고 여성억압을 계급투쟁에 대비하여 바라보는 가부장제 개념의 특성상,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시간이 흐를수록 계급투쟁과 여성해방운동을 분리해서 사고하고 결국에는 독자적 범계급적 여성운동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경향이 불가피하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결국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이 급진여성주의로부터 끌고 들어온 가부장제 용어는 내용적으로 “사회에 여성억압이 오랫동안 존재한다”고 말하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여성문제를 구체적 현실로부터 설명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의미를 지니던 가부장제 개념을 자기 구미에 맞게 변형시키고 나서 현실을 이 개념에 끼워 맞추려고 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2pt;"><strong>2.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여성억압의 고유한 영역으로 “재생산”을 거론하였지만, 사회에 대한 인위적 구분에 불과하였으며, 재생산 범주로 여성억압과 계급억압을 결합하려던 시도 역시 가부장제와 마찬가지로 이원론적 문제점을 반복하였다.</strong></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가부장제”라는 용어와 함께, 여성억압의 고유성, 독자성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것이 “재생산”이라는 범주이다. 심지어 “가부장제” 개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재생산”이라는 범주가 적극적으로 이용되었다고 할 정도로 “재생산” 범주는 여성억압을 설명하는 데 있어 중요하게 부상하였다. 또한 “재생산”은 맑스주의에서도 빈번하게 사용되는 용어였기 때문에,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재생산이라는 범주를 통해 맑스주의와 여성주의를 성공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나 재생산은 가부장제와 동일하게, 사회를 생산의 영역과 재생산의 영역 두 가지로 인위적으로 이분하여 여성문제와 계급문제를 병렬적으로 나열한 후, 이를 기계적으로 결합시키는 이원론적인 구조를 반복하였다. 즉 이제 “가부장제”가 “재생산”이라는 용어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재생산 개념의 자의적인 변형은, 오히려 맑스주의를 왜곡, 협소화 시켰으며, 여성문제를 설명하는 데 있어 문제만을 야기하였다.</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재생산 개념을 통해 여성억압을 설명하려던 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가부장제 용어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이 여성억압의 고유성, 독자성을 입증하려는 의도에서 재생산 개념을 자의적으로 변형시켰다는 데 있다. 이들은 재생산 개념을 자의적으로 규정한 후, 이를 생산에 대립시킴으로써 허구적인 구분을 만들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생산은 맑스주의의 영역이고 재생산은 여성주의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주장을 하였다.9)</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자의적 왜곡과 아전인수는 엥겔스에 대한 왜곡으로 뒷받침되었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엥겔스가 쓴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의 서문을 들어, 엥겔스를 생산과 재생산을 인위적으로 구분한 이원론의 시조로 만들었다. 엥겔스의 서문을 일단 확인해보자.</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유물론적 파악에 따르면, 다음의 요인들이 역사를 종국적으로 규정한다: 직접적 생활의 생산과 재생산. 그런데 이것 자체는 다시 두 측면으로 나누어진다. 한편으로는 그것은 생활수단의 생산, 즉 의식주의 대상들과 그것에 필요한 도구들의 생산이다 ;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인간 자체의 생산, 즉 종의 번식이다. 특정한 역사 시기와 특정한 지역의 인간들이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회적 제도는 두 종류의 생산에 의해 규정된다.”10)</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위의 서문에서 직접적 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을 거론하고 있는 것이 엥겔스가 생산과 재생산을 인위적으로 구분하는 것으로 읽히게 되었다. 즉 “엥겔스의 언급은 사회주의 여성주의운동의 이론적 이원론, 여성의 자율적 조직에 대한 전략적 공언뿐만 아니라 이들이 초점을 맞추는 가족, 노동의 성별분업, 부불 가사노동에 대해 맑스주의가 권위 있는 후원을 제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11)</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나 생산과 재생산을 인위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맑스주의 이론에 대한 왜곡이자 현실에 대한 왜곡이다. 현실에서는 생산과 재생산이 분리된 영역으로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맑스주의는 생산과 재생산을 구분되는 영역으로 사고하지 않았다. 생산을 소위 재화와 용역을 만드는 제한된 산업영역으로 보고, 재생산을 사회의 재생산이나 가족 내에서의 노동력의 재생산, 혹은 출산이라는 생물학적 재생산과 관련된 영역으로 보는 식의 이분법은 맑스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우선 맑스주의는 생산과 재생산을 분리되는 영역으로 보지 않았다. 맑스는 단순재생산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이를 분명히 하였다. 맑스는 생산과 재생산은 어떤 사회적 형태에서든지 존재하는 것이자, 그 각각의 사회적 형태에 따라 구체적 형태가 결정되는 것으로 보았다. 모든 사회적 형태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생산과 재생산의 특징에 대해서 맑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생산과정의 사회적 형태가 어떻던, 생산과정은 연속적이어야 하며 주기적으로 동일한 국면들을 끊임없이 통과해야 한다. … 그러므로 어떤 사회적 생산과정도, 그것을 연속된 전체로서, 끊임없는 갱신의 흐름으로서 고찰할 때에는, 동시에 재생산과정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생산의 조건은 동시에 재생산의 조건이다. 어떤 사회도 그 생산물의 일정한 부분을 끊임없이 생산수단, 즉 새로운 생산물의 요소로 재전환하지 않고서는 생산을 계속할 수 없다. 즉 재생산이 불가능하다.”12)</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 주장의 의미는 명백하다. 생산은 곧 재생산이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는 당연한 상식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느 사회, 혹은 어느 개인도 일회적인 생산만으로 유지될 수는 없다. 생산의 목적은 그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의 생활영위이기 때문에, 인간이 생존하고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생산은 중단되지 않고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생산의 조건이 지속, 유지된다는 것은 생산을 위한 두 가지 조건인 생산의 객체적 조건(생산수단, 즉 노동도구, 원부재료 등)과 실제 생산을 수행하는 생산자인 인간이 끊임없이 갱신되어 생산에 다시 투입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가령 생산의 작은 단위로서 옷을 생산하는 공장의 경우를 보자. 옷 공장은 옷을 생산하기 위한 옷감과 실, 그리고 재봉틀 등의 생산요소들이 옷을 생산하는 데 계속 투입되고, 옷을 만드는 생산자들이 원기를 회복하여 매일매일 생산에 종사할 수 있어야 생산이 유지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조건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공장은 가동이 중단될 것이다. 사회적 범위에서도 사정은 이와 동일하다. 따라서 생산은 동시에 재생산, 즉 생산의 조건들의 끊임없는 갱신이자 중단 없는 생산이라고 할 수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두 번째로, 맑스주의는 생산을 인간이 즉각적으로 소비하는 재화와 용역의 생산으로 협소하게 보지 않았다. 맑스주의에서 생산은 인간의 존재조건을 유물론적으로 파악한 데에서 나온 포괄적 개념이었다. 맑스주의는, 자연 속에서 존재하는 인간은 생존을 위해 노동을 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영위, 지속하기 위한 생활수단들을 만들어가야 함을, 인간 자신의 생활(생존)조건을 계속적으로 생산해야 함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 이는 생산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유지하고 지속시키는 것이 목적임을 말한다. 인간은 인간 개개인 뿐 아니라 사회를 유지하고 인간 종 자체를 유지, 지속해야 하기 때문에, 인간 개개인의 즉각적인 생존을 위한 생산물을 생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엥겔스가 말한 대로 “인간 자체의 생산” 역시 이루어져야만 한다. 따라서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에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의지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일정한 필연적 관계들, 즉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력들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들에 들어선다(강조는 인용자)”라고 말하였던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맑스주의에서 생산의 의미는 맑스와 엥겔스가 공동으로 작성한 「독일이데올로기」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나온다. 여기서 맑스와 엥겔스는 모든 역사의 제 1전제를 “인간은 ‘역사를 만들’ 수 있기 위해서 먼저 생활할 수 있어야 한다”로 규정하였다. 이 제 1전제의 내용은 첫 번째 “물질적 생활 자체의 생산”이다. 두 번째는 “충족된 최초의 욕구 자체 및 그 충족행위와 이미 획득한 충족수단이 새로운 욕구를 낳는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처음부터 역사적 발전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자기 자신의 삶을 나날이 새롭게 만드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만들어 내 번식시키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조건을 이야기 한 후, 이 “사회활동의 세 가지 측면은 세 개의 다른 단계가 아니라, 역사의 여명과 최초의 인류 이래로 동시적으로 존재해 왔고 또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역사에서 관철되고 있는 세 가지 측면”이라고 정리하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독일이데올로기」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맑스주의에서 생산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물질적 재화의 생산 자체 뿐 아니라, 이러한 생산 속에서 새로운 욕구의 발전과 이 욕구의 발전에 의한 생산의 발전, 그리고 인간과 사회가 영속적으로 유지되기 위한 인간들의 번식을 포함하는 폭넓은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이 전제들은 서로 분리된 영역이나 “단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생산 속에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측면”들로 보았다. 따라서 인간이란 종 자체의 유지, 번식과 관련된 영역을 생산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생산과 대비되는 별도의 영역으로 보는 것은, 그 자체로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생산의 내용을 인위적으로 재단하여 협소화하는 것이고, 이와 동시에 맑스주의를 왜곡시키는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요컨대, 생산과 재생산은 서로 구분되지 않는 것으로 생산은 결국 생산조건의 끊임없는 지속과 갱신, 부단한 생산조건의 생산을 의미한다. 맑스주의의 역사유물론에서 생산의 개념은 단순히 우리가 먹고, 쓰는 재화의 생산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인간 그 자체의 유지와 발전으로서의 생산이라는 보다 포괄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13) 따라서 생산과 재생산을 인위적으로 구분하여, 재생산을 여성의 영역으로 한정시키는 것은 현실과도 부합하지 않고, 맑스주의에도 부합하지 않는 관념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따라서 여성억압의 문제 역시 생산의 발전, 즉 생산력의 발전과 이에 따른 생산관계의 발전 속에서 계급문제와 함께 총체적으로 인식하여야 한다.14) 엥겔스의 선구적 연구나, 최근 축적된 인류학 지식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생산의 발전은 원시공산주의를 해체하고 생산에서 여성의 중요성을 하락시키고 남성의 노동력을 더욱 중요하게 만들면서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을 낳았다. 또한 생산의 발전은 잉여생산물의 생산을 낳으면서 계급이 등장하는 토대가 되었다. 생산에서 남성의 노동력이 중시되면서, 계급사회는 남성 노동력을 중심으로 조직되고 형성되었다. 즉 여성억압과 계급억압은 생산의 발전의 결과로 비슷한 시기 발생하였으며, 양자가 서로 관련 맺으며 서로의 관계를 강화시켰다. 이러한 측면에서 자본주의 하에서 여성억압이 계급억압과 연관성이 존재하고 사회주의 혁명과정에서도 여성의 해방과 계급철폐가 연관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계급의 등장뿐만 아니라 여성억압 역시 생산의 발전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나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생산/재생산이라는 인위적 구분을 가지고 여성억압과 계급억압을 결합시키려고 하였다. 여성억압은 재생산과 관련된 것이고 계급억압은 생산과 관련된 것으로 보면서 이 둘을 기능적으로 결합시키는 생각은, 여성억압을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이 스스로 만든 협소한 재생산 영역으로 제한시켜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성억압이 생산의 발전과 관련되어 있고 여성억압과 계급억압은 생산 속에서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의식을 만들기 보다는, 양자가 서로 다른 영역에 존재하는 분리된 문제라는 의식을 조장하였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재생산 개념으로 여성억압과 계급억압, 여성주의와 맑스주의를 결합시키려는 시도는 가부장제 개념과 마찬가지로 이원론적 접근을 다른 식으로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였으며, 이원론적 접근이 지닌 문제점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즉 여성억압과 계급억압을 기계적이고 기능적으로 결합시켰으며, 계급억압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여성억압이라는 인식을 강화하여 계급투쟁과 여성해방운동을 분리시키고 여성해방운동을 우위에 놓는 경향을 낳게 된다.</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2pt;"><strong>3. 여성억압의 원인을 설명하지 못한 채, “불행한 결혼”을 답습하는 이원론을 극복해야 한다. </strong></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렇게 “가부장제”와 “재생산” 개념을 통해서 여성억압을 설명하려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여성문제의 위치를 폄훼하고자 하는 것도, 여성문제보다 계급문제가 우선이라는 판에 박혀있는 오류를 재현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여성의 억압과 남성에 대한 종속이라는 여성문제는 사회주의 운동이 해결해야할 중대한 과제이며, 이는 해방연대(준)의 강령초안에서도 중요하게 강조하였던 것이다. 강령초안의 해설은 보편적 인간해방운동인 사회주의 운동의 고유한 본성을 다시금 복원하는 것이 중요함을 누차 강조하였으며, 사회주의 운동은 “계급적 억압, 민족적 억압, 성적 억압 등 일체의 모든 억압에 반대하는 인간해방운동”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의 복원을 위해 현실에서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의식을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는 사회주의 운동의 진전을 위해서 여성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하며, 여성문제를 사회주의적 총체성 속에서 맑스주의적 방법론에 입각하여 해명해야 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문제는 여성문제를 계급문제와 인위적으로 분리시키고 이를 기계적으로 병렬적으로 결합시키는 이원론적 접근방식이 여성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960년대, 70년대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현실에서 분출하는 여성운동 속에서 계급문제와는 다른 여성문제의 고유한 특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현실을 인위적으로 이분하는 도식적이고 기계적인 사고방식으로 드러났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생산양식 대 가부장제, 생산양식 대 재생산양식, 계급체제 대 성별체제, 산업 생산양식 대 가족 생산양식 등 무수한 이원론 체계를 쏟아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인위적인 이분법은 모두, 현실에서 계급억압과는 별도로 여성억압의 체계가 존재하고, 이론과 운동에서는 맑스주의와는 별도로 여성억압을 다루는 자율적인 이론과 운동이 존재함을 입증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여성억압의 원인과, 여성억압이 여타 사회관계, 특히 계급억압과 갖는 관계를 적절하게 설명하는 데 실패하였다. 단지 여성억압의 영역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여 여성운동의 자율성과 독자성을 드러내려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주관적 목표를 입증하기 위해 이론이 개발되는 상황에서 여성문제를 제대로 설명한다는 것은 애당초 어려운 일이었다. 앞서 “가부장제”와 “재생산” 개념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보았듯이, 현실을 인위적으로 이분하려는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시도는 현실을 심각하게 왜곡하거나 관념적인 추상론, 보편론으로 빠지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은 맑스주의의 한계를 극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맑스주의 이론을 자의적으로 왜곡하고 협소화시켰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리고 제 4호의 “여성문제, 계급문제에 대한 이원론적 접근”에서 올바르게 비판하였던 것처럼,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여성운동의 독자성, 자율성을 강조하고 계급억압에 대비하여 여성억압의 독자적인 존재를 강조하면서 결국에는 급진 여성주의로 귀결되었다. 또한 계급투쟁과 여성해방운동을 긴밀하게 결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범계급적 여성운동을 계급운동의 우위에 두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따라서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계급억압과 여성억압을 인간해방운동으로서 사회주의운동이라는 틀 속에서 유기적으로 결합시키기 보다는, “불행한 결혼”을 낳았다.15)</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와 같이 여성문제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이원론을 계속 답습하는 것은, 여성문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 즉 여성억압의 원인과 발전, 그 해결책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제시하지 못한 채, 계급문제와 여성문제의 대립을 반복해서 야기하게 된다.16)</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2pt;"><strong>4. 사노준의 여성강령과 이를 대변하는 유현경의 글은 사회주의 여성주의적 접근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strong></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서두에서 언급하였듯이, 한국에서 사노준의 여성강령과 이를 대변하는 유현경의 글은 길게 언급한 사회주의 여성주의적 접근방식을 판박이처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유현경의 글, “사회주의노동자정당의 여성해방투쟁을 위하여”의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간추린 내용은 글의 순서와 일치하지는 않는다)17)</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계급억압과 여성억압의 관계</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모든 억압의 근저에는 계급적 억압이 깔려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여타의 억압이 계급적 억압으로 단순 환원되지는 않는다는 점이 인정되어야 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 억압의 기제는 여타의 억압의 기제를 규정하면서 결합되어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사회주의 없이 여성해방 없고 여성해방 없이 사회주의 없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앞서 언급하였듯이 역사적으로 계급의 등장과 여성억압의 등장은 시기적으로 일치하였을 뿐 하나의 억압에서 다른 억압이 나온 것은 아니다. 따라서 계급억압이 여성억압의 원인인 것처럼 환원시키는 것은 문제이다. 또한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계급의 등장과 여성억압의 등장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은 이 둘의 관계를 해명하고 여성억압을 극복할 방향을 찾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나 유현경의 설명은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의 그것처럼 ‘서로가 상대적으로 독자적이며, 서로가 서로에 의존하고,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며, 서로 해결되려면 서로가 극복되어야 한다’ 식의 상투적 설명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여성억압과 계급억압의 관계에 대해 현상을 기술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유현경의 주장을 보면 여성억압과 계급억압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매우 혼란스럽기까지 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유현경에 따르면, 모든 억압의 근저는 “계급적 억압”이라고 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여성억압의 해결은 궁극적으로 계급억압의 폐지에 있다는 주장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반면, 여타의 억압이 “계급적 억압으로 단순 환원되지 않는다”고 하거나 “사회주의 없이 여성해방 없고 여성해방 없이 사회주의 없다”고 하면서 전형적인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을 재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는 한편으로는 유현경이 계급억압과 여성억압 사이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게 한다. 그러나 유현경의 다른 전반적인 주장을 살펴보았을 때, 모든 억압의 근저에는 계급억압이 깔려 있다는 주장(사실 이 주장 자체가 잘못된 주장이다)은 단지 립서비스에 불과함을 확인할 수 있다. 유현경의 가부장제 규정을 확인해보자.</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가부장제의 규정</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가부장제를 통한 여성억압은 자본주의 이전 체제에서부터 공고히 유지돼 왔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자본주의는 가부장제를 통해 여성억압을 더더욱 심화시켜 차별기제로 활용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가부장제와 자본의 직접적 착취 구조는 서로에게 단순 환원 귀결되지는 않지만 서로에 대한 출발점 또는 전제가 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여기서 유현경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와 분리된 별도의 사회체제로서, 가부장제 용어를 당연히 전제하고 쓰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서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가부장제 용어를 여성억압의 보편적 체계로서 사용하고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유현경 식으로 가부장제 용어를 사용하였을 때 발생하는 문제는 사회를 이원론의 입장에서 보기 때문에 혁명론 역시 “두개의 혁명”론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유현경이 말한 바대로 가부장제를 별도의 “체제”로서 “자본주의 이전 체제에서부터 공고히 유지”되어 온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에서 보면, 자본주의가 가부장제와 연관이 있다고는 하지만, 자본주의를 철폐한다고 가부장제가 철폐되는 것이 아니며 가부장제는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 즉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혁명과는 별도로 가부장제를 철폐하는 혁명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유현경은 두 체제가 서로에 대한 “출발점 또는 전제”이기 때문에 혁명이 동시적일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유현경의 주장대로 가부장제가 “자본주의 이전 체제에서부터 공고히 유지”되던 사회체제고 자본주의는 단지 이를 “심화”시킬 뿐이라면, 가부장제가 자본주의의 철폐와 함께 사라질 것이라고 보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따라서 실질적으로는 내용과 주체가 다른 두 개의 혁명(반자본주의, 사회주의 혁명과 반가부장제 혁명)이 각각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되며, 실천적으로 여성억압과 계급억압에 대응하는 투쟁 역시 결합되지 못한 채 분리될 수밖에 없다.</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재생산 범주의 사용</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정치와 투쟁의 영역은 확대되어야 한다. 공/사분리, 생산/재생산 영역의 대한 구분을 허물고 위계를 허물어야 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우리는 정치의 영역을 공적인 것으로 한정해 왔다. 이제 정치 영역의 확장을 위해 사적 영역에서의 정치투쟁의 의미를 강조하는 막대 구부리기가 필요하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여성억압에 있어 자본주의와 결탁한 가부장제는 자본주의의 노동력 재생산 과정과 연관되어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유현경 역시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처럼 사회를 인위적으로 구분하는데 익숙한 모습을 보인다. 위에서처럼 공과 사, 생산과 재생산의 영역의 구분은 사실 상 현실적인 구분이 아니라, 유현경 등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의 관념 속에서의 구분이다. 우선 앞서 누누이 강조하였듯이 생산과 재생산영역의 분리는 순전히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의 관념의 산물이다. 공과 사의 구분의 경우에는 자본주의에서 상대적인 분리가 존재하여, 예를 들어 가족이 과거의 생산양식에서처럼 생산의 단위로서 주로 기능하지 못하고 사회적 생산과 분리된 소비의 단위로 전락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사적 영역이 여성억압의 영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억압이 사적 영역에서만 발생하는 것도 아니며 사적 영역에는 무수한 다른 사회적 내용 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노동력 재생산으로 결합시키는 것 역시 기능적으로 양자를 결합시키는 것이다. 생산은 지속되기 위해 생산수단 뿐만 아니라 생산자인 인간의 끊임없는 생산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생산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노동력의 재생산과정과 결합되어 있다. 이런 당연한 소리를 재생산을 통해 여성억압이 계급억압과 연관되어 있다는 주장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생산은 계급착취의 영역이고 재생산은 여성억압의 고유한 장소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원시공산주의 사회가 계급사회로 이행하면서 동시에 여성억압이 등장하였던 것은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생산에서 여성이 점하는 지위가 하락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억압의 등장은 생산의 발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반면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현실에 대한 인위적인 선긋기에 열중하면서 여성억압의 문제를 자신들의 발명한 재생산 영역에 밀어 넣으려고 할 뿐이다. 이는 여성억압을 설명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자신들만의 영역구축에 몰두하는 태도에 불과하다. </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렇게 간추린 내용에서 확인되듯이, 유현경의 글이 취하는 이론적 입장이 사회주의 여성주의와 동일함을, 그들의 사고와 용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사실 유현경의 글에는 가장 기본적으로 여성문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성억압의 원인은 무엇인지, 여성해방운동이 어떻게 사회주의운동과 연관되어 있는지 구체적인 규정은 하나도 없다. 더욱이 가장 기본적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사용하고 있는 가부장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설명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최소한 30년 전의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지녔던 한계에 대한 진지한 검토와 성찰조차 찾아보기 힘들다고 할 수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결국 유현경의 글과 유현경이 대변하는 사노준의 여성문제에 대한 입장은,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입장으로 그들이 범했던 문제를 그대로 안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는 앞서 강조하였듯이, 유현경과 사노준의 입장이, 여성문제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채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재현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2pt;"><strong>마치며</strong></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미 강조하였듯이, 사회주의 여성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여성문제의 중요성을 폄훼하고자 해서가 아니다. 여전히 여성문제에 제대로 대처하는 것은 사회주의자의 과제이며, 여성억압의 원인 및 해결책, 여성억압과 다른 사회적 억압과의 관계는 명확히 규정되어야 한다. 사회주의자는 인간해방운동으로서 사회주의 운동의 총체성 속에서 여성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여성의 억압의 원인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주의 여성주의는 “가부장제”, “재생산” 등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개념을 통해 여성억압을 설명하면서, 여성억압과 계급억압, 여성주의와 맑스주의 사이에 이원론적, 병렬적 결합을 시도하였다. “가부장제”는 여성억압이 자본주의에만 그치지 않고 모든 긴 역사를 지닌 억압문제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가부장제 개념은 추상적이고 몰역사적인 성격 때문에 여성억압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였다. “재생산”으로 여성의 억압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사회를 생산과 재생산이라는 허구적인 두 영역으로 분리시켰으며, 이러한 분리 하에 여성의 존재를 재생산 영역으로 국한시켜 버렸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여성문제에 대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였다는 만족감은 남겼을지는 몰라도, 정작 여성문제를 설명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이는 장 담그려다 장독을 깨버린 격이다. 이 과정에서 맑스주의 역시 부당하게 왜곡되고 협소화되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실상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한계는 처음 등장한 30년 전 이미 충분히 드러난 바 있다. 누누이 강조하듯이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맑스주의와 여성주의, 계급문제와 여성문제 사이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킨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로 양자의 대립을 재현하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여성문제에 대한 설명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러한 과거 역사로부터 어떠한 교훈도 얻지 못하고 사노준의 경우처럼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범한 길을 다시 걷는다면,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보인 오류를 우리의 운동에서 그대로 답습하는 길이 될 것이다.</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1pt;"><strong>[미 주]</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 하트만, “맑스주의와 여성주의의 불행한 결혼: 보다 진전된 결합을 향하여”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2) 미셀 바렛, “맑스주의 페미니스트 분석의 몇 가지 개념적 문제”, 「페미니즘과 계급정치학」(여성사)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3) 미셀 바렛, “맑스주의 페미니스트 분석의 몇 가지 개념적 문제”, 「페미니즘과 계급정치학」(여성사)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4) 린다 번햄, 미리암 루이, “불가능한 결혼”, 「여성해방이론의 쟁점」(태암), 162쪽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5) 린다 번햄, 미리암 루이, “불가능한 결혼”, 151쪽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6) 하트만, “맑스주의와 여성주의의 불행한 결혼: 보다 진전된 결합을 향하여”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7) 가부장제라는 개념이 어떻게 다양하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정리는 베로니카 비치, “가부장제에 대하여”를 참조할 것.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8) 따라서 사회주의 여성주의 내부에서조차 가부장제라는 용어의 사용에 비판적인 의견이 발생하였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역사적 논의과정을 정리한 바 있는 리즈 보글은 “가부장제 개념은 자주 본질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심리학적 체계라는 급진여성주의의 기원에 깊이 박혀 있다. 이 개념이 보다 유물론적 의미에서 이용되는 곳에서는, 생산관계에 관한 맑스주의적 평가 속으로 충분히 통합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미셀 바렛의 경우에는 “자본주의에서 남녀관계의 독특한 측면을 다루기 위해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언급한다면 어떤 맥락에서는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하나의 명사로서 ‘가부장제’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여성의 억압을 자본주의 생산관계와 관련해 분석할 때 극복하기 힘든 문제점들을 낳게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가부장제 개념의 한계 때문에 게일리 루빈은 “가부장제는 남성지배의 특수한 형태로 이 용어의 이용은 이 용어가 나온 구약의 목축유목민들 혹은 그와 비슷한 집단으로 제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리즈 보글, 「맑스주의와 여성억압, 통일적 이론을 위해」의 2장, 미셀 바렛, “맑스주의 페미니스트 분석의 몇 가지 개념적 문제”, 게일리 루빈, “교류 속의 여성”, 「여성의 인류학을 향해」를 참고함.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9) 리즈 보글은 이러한 실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재생산 개념이 여성억압과 생산과 계급투쟁에 관한 맑스주의적 분석을 이론적으로 연결시켜주는 수단이 되길 기원하였다. 사회주의-여성주의 이론가들은 재생산 과정을 주어진 사회의 특징적인 생산과 비견될 수 있는 그러나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것으로 분석하였다. 종종, 그들은 생산양식과 비교되는 것으로 재생산 양식이라는 용어를 말하였다. 가부장제 개념과 마찬가지로, 재생산 용어의 실질적 의미에 대해서는 동의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리즈 보글, 「맑스주의와 여성억압, 통일적 이론을 위해」의 2장. 에드홀름 등은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재생산 개념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1. 사회의 재생산(전체 생산조건의 재생산), 2. 노동력의 재생산, 3. 생물학적 재생산. 베로니카 비치, “가부장제에 대하여” 참조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0) 엥겔스,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 선집 6권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1) 리즈 보글, 「맑스주의와 여성억압, 통일적 이론을 위해」의 2장. 리즈 보글은 사회의 재생산이라는 범주로 여성억압과 맑스주의를 결합시키려는 시도를 하는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로, 기본적으로 이러한 엥겔스에 대한 해석에 동의하는 태도를 취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2) 맑스, 「자본론」 1권, 23장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3) 엥겔스의 서문 역시, 생산과 재생산을 인위적으로 구분한 것이 아니라, 생산이자 재생산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올바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4) 제 4호의 “여성문제, 계급문제에 대한 이원론적 접근 비판” 역시, 맑스주의의 “역사유물론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사회적 삶의 생산을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려는 “인간의 삶을 유지시키는 모든 측면들을 설명하는 이론”이라고 정리하였으며,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개념을 통해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사회를 설명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5) 이러한 이원론적 설명은 현실 자체에 대한 인위적 왜곡과 구분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성억압과 계급억압의 관계 뿐 아니라 사회의 모든 다른 억압과의 관계에서도 기계론적이고 도식적인 접근을 답습하게 되었다. 이는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이 계급억압을 벗어난 다른 억압에 직면하였을 때 심각하게 드러났다. 즉 계급 뿐 아니라 인종과 민족 문제 등과 같은 다른 억압의 문제에 직면하였을 때, 이들의 이원론적 구조로는 통합된 설명을 하기 어려웠다. 이런 경우, 해결책은 이원론은 삼원론, 사원론, 오원론 등등으로 기능적 결합을 확장시키든지, 아니면 이원론 구조의 문제를 인정하든지 하는 수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제국주의 국가에 의한 약소민족의 억압이라는 문제의 경우, 맑스주의는 단일한 이론틀 내에서 설명한다. 반면,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이원론적 이론구조에서 보면, 이러한 민족문제는 또 다른 고유의 억압이며, 이제 “민족억압, 계급억압, 여성억압이 고유하면서 서로 의존하고 있으며, 서로 해결되기 위해서는 어느 하나만 해결되어서는 안 된다”는 식의 상투적 접근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문제가 등장할 때마다, 이러한 상투적 표현에 단어 하나를 덧붙이는 것이 되어 버린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6) 리즈 보글은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범했던 이원론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들은 시종일관된 비기계적 방식으로 체계들을 관련시키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이원체계 이론들은 사회발전의 분리된 설명들의 신비스러운 공존을 나타낸다. 이 이원성은 대체로 사회주의 여성주의 이론이 극복하고자 시도하였던 여성주의와 맑스주의 사이의 대립을 재현하였을 뿐이다.” 리즈 보글, 「맑스주의와 여성억압, 통일적 이론을 위해」의 2장.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7) 유현경, “사회주의노동자정당의 여성해방투쟁을 위하여”. 여성의 독자적, 자율적 세력화 등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전략은 이 글이 다루는 주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유현경이 주장하는 구체적 전략 역시,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한편 사노준의 강령초안 중 여성강령부분은 전반적으로 사회주의 여성주의적 입장으로 유현경의 입장과 대동소이하다. </span></p>
]]></content:encoded>
			<wfw:commentRss>http://programto.net/wordpress/?feed=rss2&amp;p=966</wfw:commentRss>
		<slash:comments>0</slash:comments>
		</item>
		<item>
		<title>생태위기의 주범인 자본주의</title>
		<link>http://programto.net/wordpress/?p=960</link>
		<comments>http://programto.net/wordpress/?p=960#comments</comments>
		<pubDate>Mon, 02 Aug 2010 03:50:12 +0000</pubDate>
		<dc:creator>강령토론</dc:creator>
				<category><![CDATA[생태문제]]></category>
		<category><![CDATA[제 5호]]></category>
		<category><![CDATA[강령토론 5호]]></category>
		<category><![CDATA[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5호]]></category>

		<guid isPermaLink="false">http://programto.net/wordpress/?p=960</guid>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0/08/oil_spill_latest2.jpg"></a>황 정 규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편집위원회 편집부장)</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3호에서는 생태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이는 생태문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는 상황에 비해 이 생태문제를 사회주의자들이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토론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span></p>
<p><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p=960" class="more-link">Read more on 생태위기의 주범인 자본주의&#8230;</a></p>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0/08/oil_spill_latest2.jpg"></a>황 정 규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편집위원회 편집부장)</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3호에서는 생태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이는 생태문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는 상황에 비해 이 생태문제를 사회주의자들이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토론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제 3호의 글에서는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이 발전해오는 방식으로 글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이 발전해오는 과정을 평가하면서, 소위 생태사회주의, 생태주의적 맑스주의 등이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생태문제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하였으며, 더구나 이들은 맑스주의가 생태문제를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사회주의를 포기하는 결과를 낳았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사회주의자가 생태문제에 대해서 올바른 관점을 취하기 위해서는 계급문제, 생태문제 등을 별개로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총체성 속에서 생태문제를 설명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 글은 현재의 생태문제는 인간과 자연간의 물질대사 관계에 균열이 발생하여 일어난 것으로, 이 물질대사 관계는 역사적으로 인간사회가 취해왔던 생산관계에 따라 특유의 형태가 존재하는데,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공존을 파괴하는 물질대사 관계를 낳았음을 강조하였다. 제 3호의 글은 이 물질대사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자본주의는 그 본질적 속성 상 이윤(잉여가치)의 추구를 목적으로 하며, 이 목적을 추구하는 과정은 생산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이윤 획득 과정은 그 한계가 없는 무제한적 과정이다. 또한 자본주의는 이윤의 획득을 위해, 생산규모를 항구적으로 확대 시키려는 경향을 지닌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과의 물질대사 관계도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 이윤을 위해 자연에 대한 약탈을 가속화하는 과정으로 갈 수밖에 없다.”(황정규,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3호)</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간단히 말해 현재 인류가 직면한 생태위기는 인간활동 자체의 결과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제 3호의 글은 맑스주의적 생태론을 전체적으로 제시하려고 하는 목적 때문에, 자본주의가 어떻게 생태문제를 야기하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못하였다. 이 글은 바로 제 3호의 글의 주제 중 하나였던, 자본주의가 생태문제를 낳는 주범임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span id="more-960"></span></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2pt;"><strong>1. 생태문제의 원인에 정면 대응해야 한다.</strong></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어떠한 문제든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가 야기된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문제의 근본원인을 파악하고 여기에서 해결책을 찾지 않을 경우, 결국 겉으로만 드러난 현상만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게 되고, 이는 “대증요법”에 그칠 수밖에 없다. 가령 암이라는 병이 걸렸다면, 암이라는 병으로 인해 신체에서는 다양한 증상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증상들을 완화하는 치료를 해보았자 병 자체를 고칠 수는 없다. 결국 병을 야기한 원인을 진단하고 종양을 제거해야 암은 치료가 될 수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도 이러한 접근방식은 아주 당연한 것이다. 즉 생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태문제가 왜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생태문제의 해결방안이 도출되어야 한다. 그러나 생태문제의 경우에는 이러한 접근방식이 명확하게 적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많은 경우 환경운동은 생태문제의 원인에 대해서는 충분히 규정하지 않은 채, 생태문제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에 포섭된 경우도 적지 않다.1)</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프레디 맥도프와 존 벨라미 포스터는 환경운동의 이러한 한계에 대해서 먼슬리리뷰 2010년 3월호에서 적절하게 비판하고 있기에 잠시 인용해보고자 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일부 환경론자들은, 더 나은 에너지 효율을 도입하고 화석연료를 “녹색” 에너지원으로 대체하거나, 혹은 문제점을 개선하는 기술(발전소에서 나오는 탄소를 포집하여 땅 속 깊이 주입하는 따위)을 찾아내는 식으로 우리의 경제체제를 땜질하는 것으로 우리 문제의 대부분을 해결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녹색” 실천을 마켓팅 도구로 이용하거나, 그런 실천을 활용하고 있다고 공언하는 여타 기업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운동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 운동 안에는, 현재의 생산체제 안에서의 단순한 기술적 조정만으로는 우리가 직면한 극적이고 잠재적으로 재앙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임이 명백하다고 보는 사람도 일부 존재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커티스 화이트는 「오리온(Orion)」에 실린 “야만적 심장: 자본주의와 자연의 위기”라는 2009년 기사를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환경론자들이 질문하는 데 매우 익숙하지 않은 근본문제가 있다. 즉 ‘왜, 이 자연세계의 파괴가 발생하고 있는가?’” 우리가 이 단순해 보이는 질문에 만족스럽게 답할 때까지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해결책들을 찾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2)</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맥도프와 포스터의 말대로 생태문제를 다루는 현재의 환경운동 상당수는 “왜” 생태문제가 발생하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답하지 않거나, 명확한 답을 회피한다. 여기서 나오는 대안은 생태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대증요법에 그칠 수밖에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생태문제를 야기한 원인인 자본주의적 방식에 기대는 처방을 제시하기까지 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가령 이윤을 위해 생산규모를 무제한적으로 팽창시키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과 이를 지탱시켜주는 시장원리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방식은 그대로 둔 채 소비자가 ‘윤리적 소비’를 하거나 소비문화를 바꾸는 것에서 대안을 찾는 모습을 빈번하게 확인할 수 있다. 아니면 탄소포집(발전 등 화석연료 사용 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를 모아 지하 등에 저장하여 대기로 방출되지 않게 처리하는 기술), 에너지효율 향상 등 기술혁신만으로 생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제시한다. 탄소배출권을 거래하는 투기적 탄소시장 창출을 기후변화의 대안으로 포장하는 것은 또 하나의 예이다. 이러한 처방은 되려 생태문제의 해결을 저해하거나 악화시키게 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요컨대 생태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할 수 없는 생태운동은 생태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2pt;"><strong>2. 생태위기를 야기한 것은 자본주의 체제이다.</strong></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1pt;"><strong>1) 생태문제는 인간이 야기한 문제로, 인간이 자연에 가한 영향이 인간 자신의 존립을 위협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대개 많은 환경운동은 자연을,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을 인간과 생물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온화한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 묘사한다. 가령 2009년 코펜하겐 기후변화회의 시 시위과정에서 많이 나왔던 슬로건은 “어머니 지구(mother planet)”를 구하자는 것이었다. 저명한 기후학자이자 “가이아 이론”으로 유명한 제임스 러브룩의 경우에는 지구를 “가이아”라는 대지의 여신으로 비유하면서, “지구가 스스로 기후와 그 구성 성분들을 조절함으로써 살아 있는 모든 생물들에게 적합한 환경 조건을 유지시키는 존재라는 생각, 즉 일종의 살아 있는 생명체로 간주될 수 있다는 생각”3)을 강조한 바 있다. 이러한 견해는 인간과 다른 생물, 그리고 지구 사이의 상호 교류하는 관계를 표현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일정 정도의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유물론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자연을 관념적으로, 목적론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며, 생태문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일면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우선 자연 속에서 물질의 운동은 어떠한 의도와 목적을 지니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법칙이 전개되는 과정일 뿐이다. 예를 들어 지구가 속해있는 태양계의 형성은 170억년 이상 지속되어온 항성의 생성과 소멸 과정의 산물이며, 지구는 태양이라는 항성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이다. 지구에서 생명은 38억 년 전 최초 등장하였다고 보는데, 이 생명의 등장 역시 지구가 태양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적절한 크기와 질량을 지니게 되어서 발생하게 된 산물이다. 그렇다고 지구가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서 그러한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또 다른 예로 지구가 자기를 띄어 밴앨런대(지구 밖 약 3,000km 상공 밖에서부터 형성되어 있다)라는 대기 밖 자기대를 형성하지 않았다면, 태양에서 나오는 유해한 방사선이 지상에 그대로 투과되어 지구의 생물체는 수중에서만 존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밴앨런대가 생명을 지상에 진출시키고 유해한 태양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즉 지구가 인간과 생물 전체가 살아가기 위해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자기 조절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지구는 생명이 등장한 이후로 수많은 격변을 거치면서, 그 결과로서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앞으로 지구가 지금의 상태를 지속하지도 않을 것이다. 인간과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지구의 여러 조건들은 어머니처럼 우리를 감싸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생명을 전멸의 위기로까지 내몰기도 하였다. 가령 생물은 최소한 5번의 거대한 대량멸종을 겪었는데, 그 중 고생대와 중생대를 가르는 기준이 된, 페름기/트라이아스기(P/T) 멸종은 다양한 원인이 결합되어 있지만, 결정적으로는 현재의 시베리아 지역에서 나온 거대한 화산폭발이 원인이 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 시기 생물종 중 95%가 사라졌다고 한다. 화산폭발 등 지질활동은 대륙의 형성 등 생명에 필요한 조건을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생명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기도 하는 것이다. 더욱이 지구는 소위 우주 속에서 항해하는 “우주선(spaceship)”이라는 폐쇄된 자연체계가 아니라 지구 밖의 우주와도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열린 자연체계이다. 중생대와 신생대를 가르는, 백악기와 신생대 3기 사이(K/T)의 멸종은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지름 10km의 운석이 떨어지면서 발생한 것으로, 생물종 2/3를 멸종시켰다. 생물은 이처럼 끊임없는 격변과 위기를 해치고 나와, 이러한 환경에 적응하면서 진화해왔다. 그리고 지금의 지구의 환경은 무수한 격변의 결과이며, 이러한 환경은 금방이라도 변화할 수 있는 역동적인 것이다.4)</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요컨대 지구는 생성과 발전, 소멸을 겪는 물질의 하나로, 단지 변화하지 않은 현재의 환경을 자기조절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변화 발전해왔던 행성이다. 생명은 그 안에서 발생하여 진화해왔으며, 그 안에서 무수한 멸종의 위기를 헤치고 지금에 이른 것이다. 더 나아가 지금의 지구환경은 계속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서 새로운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이 변화는 지금 지구를 살아가는 생물들에게 우호적일 수도, 비우호적일 수도 있다. 이 과정은 예컨대 지구가 “살아있는 모든 생물들에게 적합하게 환경조건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의도적인 과정이 아니라 생성과 발전, 소멸을 반복하는 물질의 운동이 전개되어가는 과정일 뿐이다. </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렇게 관념적이고 목적론적 관점을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현재의 생태위기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보다 분명히 알기 위해서이다. 앞서 간략히 언급하였듯이 인간과 생물은 지금보다 더한 생존의 위기를 겪은 바 있으며, 향후 새로운 자연의 격변이 심각한 생존의 위기를 낳을 수도 있다. 어찌 보면 그 위기 앞에서는 지금의 생태위기는 사소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위기는 모두 인간이나 생물에게는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직면한 생태위기는, 지구가 겪어온 과거의 다른 자연의 격변과는 그 성격에서 완전히 다른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우선 현재의 생태위기는 바로 인간이 낳은 결과물이라는 점에 과거의 다른 자연재앙과는 다른 차이점을 갖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원래 생물이라는 유기체는 지구의 무기적 환경에 대해서 막대한 영향을 가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30억 년 전 등장한 시아노박테리아(남조류)는 광합성을 통해 지금의 수준까지 산소를 만들어내었다. 그렇지만 유기체 중에서도, 인간은 자신에게 필요한 생산물을 얻기 위해 노동을 하는 과정에서 자연에 막대한 변형을 가져다 줄 수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 노동이라는 인간 고유의 활동은 인간과 자연 사이를 매개하는 과정으로,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스스로의 삶에 필요한 사용가치를 지닌 생산물을 만들어낸다. 이 노동은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자기 자신의 자연(즉 인간본성: 역자)을 변화시킨다.”(「자본론」 1권, 7장)5) 그런데 인간은 다른 유기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킨다. 이와 관련하여 엥겔스는 다른 유기체와 인간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동물은 외적 자연을 그저 이용할 뿐이며, 단순히 자신이 현존하고 있다는 것에 의해서만 자연에 변화들이 생기게 한다; 인간은 자신의 변화들을 통해 자연을 자신에게 복무하도록 만들며, 자연을 지배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 밖의 동물들과 인간의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차이이며, 이러한 차이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또 다시 노동이다.”6)</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인간이 노동을 통해 가하는 자연에 대한 변형의 정도는 심대한 것이어서, 현재는 지구 대부분의 지역에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까지 나아갔다. 따라서 맑스와 엥겔스는 포이에르바하를 비판하면서 “끊임없는 감성적 노동과 창조, 이 생산이야말로 현존하는 감성적 세계 전체의 기초이기 때문에, 그것이 단 일 년만이라도 중단된다면, 포이에르바하는 자연계에서 엄청난 변화를 발견하게 될 것이며, 또한 전체 인간세계와 그의 고유한 직관능력, 더구나 그 자신의 존재마저도 당장 사라지고 말 것”7)이라고 말한 바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인간의 노동과 이에 기반을 둔 인간 사회의 발전은 자연을 변형하고 가공하는 과정에서 순영향만을 낳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악영향을 낳기도 한다. 이미 엥겔스는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소아시아, 알프스 등의 산림남벌을 예로 들면서 “자연에 대한 우리 인간의 승리에 너무 우쭐해 하지는 말자. 그러한 승리 각각에 대해 자연은 우리에게 복수한다. 이러한 승리는 어느 것이나 일차적으로는 우리가 가늠한 결과들을 낳지만, 이차적으로나 삼차적으로는 아주 흔히 그 첫 번째 결과를 폐기시킬 뿐인 예상치 못한 완전히 다른 작용들을 낳는다”고 경고한 바 있다. 현재의 생태위기는 자연을 이용하고 변화시키는 인간의 활동이 낳은 이러한 부정적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두 번째로 생태문제가 중대한 문제인 것은 인간이 자연에 대해 가한 작용과 변형에서 나온 결과물이 인간의 삶을 위협한다는 데에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연의 측면에서 보면 자연은 인간에게 우호적이지도, 비우호적이지도 않다. 자연은 자기의 법칙대로 운동할 뿐이며, 이 법칙 속에서 인간이 가한 작용에 대해서 새로운 평형을 위해 반작용을 할 뿐이다. 우리가 생태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보게 하는 것은, 단지 인간의 활동으로 자연이 파괴되고 수탈되고 있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작용이 인간에게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북극곰의 멸종위기를 우려하는 것은 사라져가는 북극곰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북극곰의 멸종위기가 북극 빙상의 소실 등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기후변화의 악영향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활동이 낳은 자연의 반작용이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우리는 생태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연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하고 변형시킬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발휘되는 과정에서 나온 자연의 반작용이 우리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데에 여타의 자연재앙과는 다른 현재의 생태위기가 지닌 특수성이 존재한다. 따라서 현재의 생태문제는 인간이 야기한 것이기 때문에, 그 해결 역시 인간의 활동방식에서 찾아야 한다.</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1pt;"><strong>2) 생태문제는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노동의 일반적 결과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관계를 맺는 특정한 노동형태, 생산관계의 결과물이다.</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렇다면, 생태문제가 인간 활동,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실제로 IPCC(기후변화에 대한 정부 간 패널)의 2007년 보고서는 “1750년 이래 인간 활동의 순효과(net effects)가 지구온난화의 주범 중 하나였다는 것은 극히 확실하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자칫하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생태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이라는 극단적인 답으로도 흐를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생태문제의 원인을 특정한 방식의 인간활동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활동 자체에서 비롯되었다고 봄으로써 생태문제의 본질을 분명히 하는 것을 저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유기체와는 다르게 자연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변형하며, 자연에 대한 지식을 이용하여 자연력을 지배하게 된다고 해서, 인간의 활동 자체가 생태문제를 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인간이 자신에게 필요한 사용가치를 만들기 위해서는, 노동이라는 매개를 통해 인간이라는 생산자와 자연이라는 객체적 조건이 결합되어야 하며 이는 모든 인간사회에서 공통된 특징이다. 그렇지만, 이 노동이 취하는 형태는 그 사회마다 모두 다양하다. 이는 역사유물론의 가장 기본적 원리로, 맑스는 “노동과정이 인간과 자연 사이의 단순한 과정인 한, 그것의 단순한 요소들은 노동과정의 모든 사회적 발전형태들에 공통된 것이다. 그러나 노동과정의 특수한 역사적 형태들은 각각 이 과정의 물질적 토대와 사회적 형태를 더욱 발전시킨다”(「자본론」, 3권, 51장)고 정리하였다. 요약하자면, 각각의 사회마다 고유한 노동의 형태가 존재하며, 우리는 이 노동의 형태로 각 사회를 구분할 수 있다. 이 노동형태를 일반적으로 “생산관계”라고 표현할 수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각 사회마다 고유한 노동의 형태(다시 말해 생산관계)가 존재한다면, 이는 각 사회마다 고유한 인간과 자연사이의 관계가 존재한다고 파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노동이 인간과 자연사이의 관계를 매개한다면, 그 노동이 취하는 각각의 형태는 인간과 자연사이의 각각의 구체적 관계를 규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생산관계를 가진 수많은 사회가 존재하였는데, 그 사회는 그 사회 고유의 특정한 인간과 자연사이의 관계가 존재하였다.8)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과거의 사회를 살펴보면, 우리는 인간의 노동, 자연의 이용이 필연적으로 생태문제를 야기하였던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역사적 사실은 생태문제가 인간활동 자체의 결과가 아니라, 특정한 인간활동, 특정한 노동형태, 생산관계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준다.9) 또한 과거 생태문제가 발생하였던 사회의 경우에도, 그 규모는 지구 전체를 파괴하고 지구의 자정능력을 초과하는 정도는 아니었으며, 지구 전체적으로 보면 여전히 미약하고, 국지적인 것이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본주의가 등장 한 이후, 생태문제는 역사 상 전례 없는 규모가 되었다. 자본주의생산의 특성 상, 자본주의는 생산의 확대를 위해 끊임없이 자연을 수탈할 수밖에 없었고, 생산에서 나온 결과물들이 지구생태계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제 지구 전체는 자본주의의 발전의 결과물들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전에는 인류가 겪어보지 못했던 지구적 규모의 생태위기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수천 년간 인간 문명이 유지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준 지구의 환경을 악화시켜, 결과적으로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렇다면 자본주의의 어떠한 성격이 과거 어느 때와 비교할 수도 없는 질적으로 다른 생태위기를 야기하게 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2pt;"><strong>3. 잉여가치(이윤)의 획득이 생산의 목적이고 이로 인해 무제한적 축적, 생산을 위한 생산이 필연적인, 자본주의의 본성이 생태위기를 야기하는 근본원인이다.</strong></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본주의 생산관계가 형성된 이후 지구적인 생태문제들이 무수히 발생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자체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수준까지 균열시킨다. 자본주의는 임금으로 생활하는 노동자계급의 노동을 착취하는 계급사회일 뿐 아니라, 자연에 대한 수탈과 파괴를 자행함으로써 인간이 생존해가는 자연조건 자체를 파괴하는 체제이다. 맑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의 원천인 토지와 노동자를 동시에 파괴함으로써만 사회적 생산과정의 기술과 결합도를 발전시킨다”(「자본론」, 1권, 15장)고 비판하였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본주의가 이렇게 심각한 생태위기를 낳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잉여가치(이윤)의 획득이 생산의 목적인 자본주의의 본성이, 무제한적 축적과 생산을 위한 생산을 추구하게 만들고 이것이 자연에 대한 수탈과 파괴를 막대한 규모로 야기하기 때문이다. </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우선 자본주의의 생산의 목적인 잉여가치의 획득을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모든 사회에서 생산의 우선적인 목적은 사회 구성원들의 욕구, 즉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생활수단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나 상품생산사회에서, 생산의 목표는 생산자 자신의 필요 충족이 아니라, 생산물의 직접적 생산자가 아닌 타인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생산물의 생산이다. 상품의 생산자에게 생산의 일차적인 목표는 자신의 생산한 생산물을 판매함으로써 얻게 되는 교환가치(화폐)이다. 상품의 생산자는 이렇게 획득한 교환가치를 가지고 다른 생산자가 생산한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사회 구성원들의 욕구는 이렇게 생산된 상품이 생산자들 상호간의 교환과정 속에서 충족되게 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과거처럼 사회구성원의 직접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사회의 생산 목표였던 사회에서는 생산이 그 사회의 필요충족 여부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반면 상품생산이 사회에서 발전하기만 해도, 생산은 사회의 필요충족이라는 생산의 질적 내용에 의해서 제약받지 않고, 오직 양으로만 표현되는 교환가치가 우선이 된다. 교환가치는 말 그대로 양으로만 표현되기 때문에 획득될 수 있는 교환가치의 규모에는 애당초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교환가치 획득을 목표로 하는 상품생산에 이미 생산이 무제한적으로 확대될 수 있는 특성이 존재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런데 상품생산이 더욱 발전하여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서면, 생산의 목적은 단순히 판매에서 얻는 교환가치가 아니라, 최초 자신이 투여한 가치보다 더 큰 잉여가치(이윤)를 획득하는 것이 된다. 잉여가치 획득이 목표인 자본주의에서는, 생산물이 상품으로 생산되어 생산물 안에 있는 질적인 내용은 부차화 되고 화폐의 양으로만 표현되는 교환가치, 잉여가치가 생산의 목적이 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본가는 상품이 구체적으로 유용해서가 아니라 상품의 판매를 통해 얻는 잉여가치 때문에 상품을 생산한다. 자본가에게 10억의 이윤은 100억의 이윤보다는 작은 것이며, 이 100억의 이윤은 1,000억의 이윤을 생각하면 성이 차지 않는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는 애당초 추구할 수 있는 잉여가치의 한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자본주의에서는 상품생산이 일반화되면서, 이전에는 거래될 수 있는 상품으로 간주되지 않았던 사용가치가 상품으로 전환되고 사회적으로 비합리적이고 낭비적인 부분까지 거대한 산업이 되는 등, 사회의 모든 부분이 상품으로 전환되면서 잉여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영역을 계속 확대시킨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자본주의 생산의 특성 상, 자본은 오로지 잉여가치만을 지고선으로 추구한다. 잉여가치의 획득이 생산의 목표가 된다는 것은 모든 생산이 화폐량으로만 표현되는 잉여가치의 규모의 증대만을 탐욕스럽게 추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은 노동자계급과 자연에 가해지는 부정적 영향들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며 선의와 윤리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는다.10) 만약 자본이 환경의 파괴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자신의 이윤획득과 관련이 있는 경우일 뿐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한편, 자본주의는 잉여가치의 획득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잉여가치에 대한 무제한적 욕망을 추구하는 체제의 특징 상, 피지배계급으로부터 착취한 잉여생산물을 대부분 소비해버렸던 과거의 생산양식과는 다르게, 더 큰 잉여가치를 위해 획득된 잉여가치조차도 다시 자본으로 전환시켜 생산에 투자하는 특징, 즉 축적을 추구하는 특징을 지닌다. 맑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풍자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이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하는 식의 옛 이야기와 같다. 10,000원의 최초 자본은 2,000원의 잉여가치를 가져오는데, 이것이 자본화한다. 2,000원의 새로운 자본은 400원의 잉여가치를 가져오고, 이 잉여가치가 또 자본화해 제2의 추가자본으로 전환하며, 이것이 또다시 80원의 새로운 잉여가치를 가져온다. 이 과정은 이와 같이 계속된다.”(「자본론」, 1권, 24장)</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축적하라 축적하라! 이것이 모세(Moses)며 예언자(prophets)이다. “근면은 재료를 제공하고 절약은 그것을 축적한다.” 그러므로 절약하라 절약하라! 즉, 잉여가치 또는 잉여생산물 중 가능한 한 많은 부분을 자본으로 재전환하라! 축적을 위한 축적, 생산을 위한 생산, 이 공식으로 고전파 경제학은 부르주아 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표현했다.”(「자본론」, 1권, 24장)</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본주의에서는 이렇듯 잉여가치의 획득, 그리고 이를 위한 잉여가치의 자본으로의 전환이 생산의 목적이기 때문에 자본은 끊임없이 축적되어 그 크기가 계속 커진다. 이와 함께 생산규모 역시 끊임없는 확대가 이루어진다. 심지어 자본주의에서는 이러한 축적이 조금이라도 주춤한다면, 경제에 심각한 위기가 발생한 것으로 간주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또한 가능한 한 많은 잉여가치의 생산을 목표로 하는 체제는 결과적으로 생산이 사회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잉여가치의 획득을 위한 수단이 되어 끊임없는 축적을 진행하기 때문에, 생산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생산을 위한 생산의 체제에서는 생산 규모는 주어진 필요에 따라 결정되지 않고 오히려 그 역이 되며, 생산물들의 총수는 항구적으로 증가하는 생산 규모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잉여가치의 획득을 위한 생산이 필연적으로 낳게 되는 생산을 위한 생산이 생태위기를 낳게 된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자본주의의 특성에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생태위기가 발생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고자 한다.</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초국적 농업기업이자, GMO(유전자조작식물) 산업의 거물인 “몬산토”는 화학제품의 생산에서 시작한 기업이었다. 이 기업은 윤활액과 냉각액으로 많이 이용되었으나 인간과 자연에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판명되어 사용이 금지된 PCB(폴리염화비페닐)의 최다 생산업체이자, 베트남전에서 대량으로 살포되었던 고엽제, 에이전트 오렌지의 최다 생산업체였다. PCB와 고엽제에 포함되어 있는 독성 다이옥신은 인체와 자연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는 독성 화학물질이다. 특히 다이옥신의 경우 심각한 독성을 지닌 물질로 다이옥신 1g만으로 2만명의 인명을 살상할 수 있다. 몬산토는 이 물질들을 20세기 초반부터 생산하였는데, 생산 초부터 이 물질들이 인체와 자연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친다는 증거들이 존재하였고, 몬산토 역시 이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몬산토는 이윤을 위해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였고 심지어 이러한 물질들의 무해성을 입증하고자 실험결과를 조작하기도 하였다. 한편 몬산토가 생산하는 “라운드업”이라는 제초제 역시 자연에서 금방 분해되어 친환경적이고 무해하다고 선전해왔지만, 실제로는 제초제의 독성이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몬산토는 여전히 “라운드업” 제품을 계속 판매하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0/08/oil_spill_latest2.jpg"><img class="alignright" title="oil_spill_latest2" src="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0/08/oil_spill_latest2-300x197.jpg" alt="" width="300" height="197" /></a>• 최근 자본주의가 야기한 최악의 환경재앙이 될지 모르는 심각한 석유유출 사건이 멕시코만에서 발생하였다. 지난 4월 20일, 메이저 석유회사인 BP 소속의 시추선, 딥워터 호라이즌호가 폭발과 함께 침몰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정과 가까운 파이프에 구멍이 뚫려 막대한 양의 원유가 대서양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BP는 사건 규모를 축소하며 하루 1천 배럴 씩 유출되고 있다고 발표하였으나, 실제로는 하루 1만 2천-1만 6천 배럴의 원유가 유출되고 있다. 두 달 동안 354만 배럴이 유출되었는데, 태안 유조선 충돌 사고시 배출된 석유의 양이 7만9천 배럴이었다는 것과 비교해보면, 이것이 얼마나 막대한 양인지 알 수 있다. BP의 CEO인 헤이워드는 6월 18일 미의회 청문회에서 사고의 원인은 여전히 확실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발뺌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원유유출 사고의 원인은 BP가 경비절감을 위해 위험성이 높은 유정봉합 방식을 선택한 데에 있다. 또한 언론의 보도를 통해, BP가 경비절감을 위해 온갖 편법으로 안전규정을 무시하였으며, 사건 발생 시에도 작업이 예정보다 5주가 늦어졌고 하루 지연비용이 75만 달러에 달해 노동자들이 심한 압박 속에서 노동하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윤을 위해 무리한 시추작업을 한 것이 멕시코만 원유 유출사고의 핵심 원인인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자본주의에서는, 이전에는 산업화되지 않았던 영역이 이윤추구의 영역으로 전환되는데, 이러한 자본주의 생산영역의 확대는 심한 생태문제를 야기하곤 한다. 대표적 사례는 애완동물 시장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는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마저 엄청난 이윤을 내는 산업으로 바꾸어 버렸다. 애완동물 먹이 시장만 전 세계적으로 420억 달러 규모에 이르며, 애완동물을 위해 들어가는 먹이, 동물병원, 애완동물 용품 등은 막대한 생태 자원을 소비하고 있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통조림의 상당수가 고양이 먹이로 소비되고 있으며, 셰퍼드 종 두 마리가 방글라데시 사람 한명이 소비하는 것보다 더 많은 자원을 사용하고 있다. 애완동물 산업의 성장의 결과, 4월 22일, ‘지구의 날’에 라이브사이언스지가 발표한 “우리가 잘 몰랐던 지구를 위협하는 오염원 7가지” 중에는 애완동물이 포함되기까지 하였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바이오 연료 산업의 성장 역시, 잉여가치 획득만이 지고선이 되는 자본주의가 생태문제를 야기함을 잘 보여준다. 바이오 연료 산업은 자본주의에서는 돈만 된다면 스스로가 야기한 생태문제까지도 장사거리로 만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바이오 연료는 화석연료의 고갈에 대한 대체에너지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바이오 연료 역시 탄소를 배출하는 에너지원이다. 또한 에탄올, 바이오 디젤 등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콩, 옥수수 등 바이오 연료의 원료를 기르기 위한 막대한 경작지가 필요한데, 이는 기존의 산림파괴, 단작화 등으로 새로운 생태문제를 야기한다. 이 원료로부터 바이오 연료를 만드는 과정에서 투여되는 에너지는 정작 바이오 연료를 통해 이용할 수 있는 에너지보다 크다는 연구가 있을 정도로, 효율적인 에너지원도 되지 못하고 탄소배출의 감소에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더욱이 식량생산을 하는 경작지가 바이오 연료 생산을 위한 경작지로 전환되면서 전세계적으로 식량위기의 한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바이오 연료 시장이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자본주의 이후 대규모 공장식 어업의 등장과 이로 인해 야기되는 해양 어종의 고갈은 자본주의의 특징인 생산을 위한 생산이 어떠한 결과를 낳는지 잘 보여준다. 자본주의적 어업은 이윤을 위해 생산의 규모를 무제한적으로 키운 대표적 사례이다. 어업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한 중요한 생산영역이지만, 자본주의가 등장한 이후 어업은 큰 변화를 겪었다. 우선 이윤을 위해 선진적 기술이 어업에 도입되었다. 1900년대 초, 기선이 증기선으로 대체되고 이윽고 냉동시설이 어선에 도입되었다. 냉동시설은 수산물의 판로와 관련하여 지리적 한계를 제거하였다. 이후 어획에서 가공까지 일괄적으로 처리되는 공장식 저인망선이 등장하면서 자본주의적 어업은 팽창을 가속하였다. 남획에 의한 근해 어류의 고갈은 원양어업의 심화를 낳았다. 그렇지만 이윽고 공장식 어업과 원양어업은 원해의 어종 고갈까지 야기하였다. 이미 1930년대부터 공장식 어업은 해양 생태계가 유지되지 못할 수준의 어획을 하고 있었다. 또한 이윤을 위한 무분별한 어획은 판매목적의 어종뿐 아니라 어획과정에서 잡힌 소위 “잡어”들까지 무분별하게 잡아들이며 전체 해양생태계를 유린하였다. 요컨대 남획에 의해 해양 어족이 멸종에 이르고, 이를 통해 해양생태계가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이윤을 위해 남획해온 공장식 어업에 의해 “지난 50년 동안 생선과 조개류, 해양식물 등 29%의 식용 생물이 이미 준멸종(collapse) 상태이며, 2050년이면 더 이상의 자연해산물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이번 세기 안에 우리 밥상에서 해산물은 사라질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자본주의 하에서는 인간의 필요와 이를 지탱해주는 자연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은 채 생산의 팽창이 이루어지면서, 인간문명을 지탱하온 주요 천연자원이 고갈되고 있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철, 구리, 아연, 알루미늄 같은 광물자원이나 핵심 에너지자원인 석유 등이 모두 지금의 자본주의 경제 하에서는 수십 년 내에 고갈될 것으로 예측된다. 이러한 자원은 현재를 살아가는 인류뿐 아니라 후손들의 삶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고, 따라서 인간사회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런 자원들이 합리적이고 계획적으로 이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내일은 없는 것처럼 자원을 무제한적으로 사용하였다. 3억년에 걸쳐 형성된 석유가 200여년 만에 모두 고갈될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는 사실은 생산 자체가 목적이 되어 무제한적인 생산을 추동한 자본주의의 반생태적 성격을 잘 대변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위에서는 몇 가지 사례만 나열하였지만, 자본주의가 생태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는 인간의 필요 충족이라는 측면과는 관계없이 잉여가치의 획득과 축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든지 생산하고, 이를 위해 생산의 규모를 무한도로 팽창시켜나가려는 속성을 지니는데, 이 속성 자체가 바로 지금 인류가 직면한 생태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이라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게 때문이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파괴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자본주의가 지구 생태계를 수탈하고 파괴한 결과, 인간의 삶은 현재 심대한 위협에 처해 있다.</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2pt;"><strong>4. 생태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가 극복되어야 한다. </strong></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위에서 알아본 것처럼, 현재의 생태문제를 야기한 것은 바로 자본주의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원리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 자본주의 하에서도 생태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 생각은 커다란 한계를 지닌다. 가령 기후변화의 예를 들어보자, 기후변화를 실질적으로 막기 위해서는 탄소배출의 대대적 감소가 필요하다. 이러한 탄소배출 감소는 성장을 추구하는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와는 양립할 수 없다. 즉 기후변화만 놓고 보더라도 자본주의를 유지하고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11)</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0/08/316_cartoon_ecology_small_over1.jpg"><img class="alignleft size-medium wp-image-963" title="316_cartoon_ecology_small_over" src="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0/08/316_cartoon_ecology_small_over1-300x215.jpg" alt="" width="300" height="215" /></a>그러나 자본주의를 극복하지 않고도 생태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널리 퍼져있는 생각이라는 점에서 가볍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는 기술혁신으로 생태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보는 견해를 중심으로, 자본주의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 생태문제의 해결책이 지니는 문제점을 알아보겠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예를 들어 자본주의는 무제한적 축적을 추구하기 때문에 에너지를 절약해주는 기술의 도입은 전체적으로 에너지 절약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에너지 총량을 증가시킨다. 환경경제학자들은 이를 “제본스의 역설”이라고 칭한다. 제본스는 「석탄문제」라는 책에서 “석탄 같은 자연 자원을 사용할 때 효율성이 증가하면 수요가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 규모가 커지기 때문에 오히려 증가한다고 주장했다.”12) 이러한 역설적 상황이 발생하는 원인은 생산을 위한 생산, 무제한적 축적을 지향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 자체에 있다. 모든 노동절약적, 에너지 절약적 기술은 결국 다른 자본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그리고 이 경쟁에서 승리하고, 이윤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생산의 규모는 지속적으로 확대시켜야 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하에서는 에너지 절약이 더 큰 에너지의 사용을 낳게 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본주의에서 불가피하게 야기되는 “제본스의 역설”은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원리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 자본주의 하에서의 기술혁신으로 기후변화 등 생태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한계를 지니는지 보여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매우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 가령 탄소배출을 과감하게 축소시키는 기술의 도입이 논의되고 있다. 전기자동차의 도입, 열효율이 높은 건축기술의 발전, 에너지 효율이 높은 가전제품의 등장 등등은 또 다른 예가 될 것이다. 일부에서는 지구온난화를 유발시키는 탄소배출은 그냥 놔둔 채 지표면에 도달하는 태양광의 양을 줄이는 것으로 기후변화를 상쇄시키려는 의도에서, 대기에 황산염(태양빛을 산란하는 역할을 한다)을 배출하는 아이디어나, 지구 밖 우주에 거대한 거울을 설치하여 태양광을 반사시키는 아이디어가 스스럼없이 제출되기도 하였다. 또한 미국태양에너지협회와 시에라클럽은, 보고서를 통해 2050년까지 대기 중 탄소농도를 450-500 ppm로 감축시키는데, 기술혁신과 재생에너지만으로도 감축목표의 60-80%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기술의존적 사고는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생산의 규모를 지속적으로 확대시키고 이를 위해 막대한 소비를 조장하는 자본주의체제 자체는 건드리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체제의 특성상 결국 생산과 소비를 거리낌 없이 더욱 확대시키는 상황을 부추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기술의존적 처방 외에도, 시장이나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존재를 당연시하고 더 나아가 이에 의존하는 처방들이나, 자본주의적 생산을 문제삼지 않고 소비자의 소비윤리의 변화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처방들이 생태문제와 관련하여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방식은 모두 기술의존적 처방처럼 생태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생태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자체를 철폐해야만 한다.</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2pt;"><strong>마치며</strong></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본주의는 체제의 본성상 노동자계급을 착취하고 예속시키며 노동자와 민중의 인간다운 발전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부의 또 다른 원천이자 인간이 살아가는 터전인 자연 역시 심각한 수준으로 수탈하고 있다. 잉여가치의 획득과 축적을 위해 무제한적으로 생산규모를 확대해가는 자본주의 생산은, 지구 생태계 전체가 유례없이 훼손될 때까지 수탈하고 인간과 자연 사의의 공존관계를 파괴하였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기후변화는 자본주의 성립 이후 생산활동의 결과로 대기 중 탄소농도는 산업화 이전 280 ppm에서 2007년 383 ppm으로 상승하였다. 그리고 해마다 2 ppm씩 증가하고 있다. 대기 중 탄소농도를 2050년까지 450 ppm 이내로 막지 않는다면, 극지, 고산지대 빙상의 소멸, 해수면 상승, 기상이변, 6℃ 이상으로 기온의 급격한 상승, 사막화의 진척, 해양의 산성화 등으로 인류는 생존의 위협에 직면할 것으로 예측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종 소멸 역시 심각한 상황으로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의 자료에 따르면 17,000종의 생물이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 특히 해양 어족 자원의 고갈은 심각한 상황으로 주요 어장의 75%가 완전히 착취되거나 고갈되었으며, 대형 포식성 물고기는 90% 이상이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자본주의적 어업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종의 소멸은 당장 인간의 식량자원을 축소시킬 뿐 아니라, 인간과 다른 생물들이 더불어 공진화해온 지구의 생태계에 심각한 파괴를 야기하는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외에도 해양 산성화, 사막화, 토양 영양분 순환의 파괴, 수자원의 고갈 등 셀 수 없는 생태문제가 자본주의적 생산의 결과로 등장하고 있다. 새만금 사업, 4대강 사업 등은 우리가 현재 당장 직면한 문제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생태문제는 자본주의적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땜질식 처방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한 놈을 때리면 다른 놈들이 연달아 튀어나오는 두더지게임처럼 생태문제 하나하나에 대처하는 것으로는 절대 해결을 볼 수가 없다. 맑스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분석하면서 이미 분명히 인식하였던 것처럼 자본주의는 자연과 인간관계에 회복하기 어려운 균열을 만들어내면서 부의 두 가지 원천인 자연과 인간을 파괴하는 사회체제이다. 결국 생태문제를 야기하는 근본원인인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완전히 극복하고,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면서 발전된 생산력을 인류 전체의 필요와 다방면의 발전을 위해 활용하는 생산체제를 만들어 갈 때에만 생태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span></p>
<p>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1pt;"><strong>[미 주]</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 환경운동이 생태문제의 원인을 설명하는 데 있어 철저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심지어 자본과 결탁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4호에 실린 박남일, “‘에코자본주의’의 허상과 생태적 대안 제시의 필요성”에서 비판한 바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2) 프레드 맥도프, 존 벨라미 포스터, “모든 환경론자들이 자본주의에 대해 알아야 할 것”, 먼슬리리뷰, 2010년 3월호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3) 제임스 러브룩, 「가이아: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갈라파고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4) 칼 짐머, 「진화」(세종서적)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5) 이후 맑스의 「자본론」에서 인용한 경우에는 별도의 각주 없이 인용한 곳에 출처를 직접 밝히도록 하겠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6) 엥겔스, “원숭이의 인간화에서 노동이 한 역할”,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5권」(박종철출판사)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7) 맑스,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두레)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8) 인간과 자연사이의 물질대사적 관계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3호에 실린 황정규,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을 참고하기 바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9) 자본주의가 아닌 생산양식 상당수에서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순환적 관계 속에서 유지되었다. 예를 들어 과거 조선시대를 보자. 조선시대에서는 도시와 농촌의 분리가 어느 정도 진척되었지만, 도시에서 발생하는 똥오줌을 다시 농촌의 거름으로 순환시키는 생산형태를 보여주었다. 고대 이집트의 경우에는 나일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제방을 쌓거나 하지 않고 범람을 그대로 이용하여 농경을 하였다. 이 역시 자연의 조건을 십분 이용하여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생산관계를 이룩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반면 과거의 사회 중에서도 지금과 같은 정도는 아니지만, 인간과 자연 사이의 균열을 야기하는 사회도 존재하였다. 예컨대 생산형태 중 하나인 화전의 경우에는 자연에 대해 매우 약탈적인 것이었다. 앞선 인용에서처럼, 엥겔스는 과거 사회에서 산림남벌이 심각한 악영향을 낳기도 하였음을 지적한 바 있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자연과의 관계에서 균열이 생기면서 문명의 쇠퇴가 발생하기까지 한 경우도 있다. 중앙아메리카를 중심으로 9세기경까지 번성했던 마야문명이 그 예인데, 화전농법과 건축물에 사용되는 회반죽을 위한 산림벌채로 지력이 약화되었던 것이 마야문명의 몰락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0) 맑스는 이러한 자본의 속성을 재치 있게 표현하였다.<br />
  <br />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자본은, 인류는 장차 퇴화할 것이라든가 인류는 결국 사멸해버릴 것이라는 예상에 의해서는 그 실천적 활동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데, 그것은 마치 지구가 태양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예상에 의해서는 자본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 뒷일은 될 대로 되라지! 이것이 모든 자본가와 모든 자본주의국의 표어이다.”(「자본론」, 1권, 10장)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1) 자세한 내용은 민치 리, “기후변화 ,성장의 한계, 사회주의”를 참고할 것.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2) 존 벨라미 포스터, 「생태계의 파괴자, 자본주의」(책갈피) </span></p>
]]></content:encoded>
			<wfw:commentRss>http://programto.net/wordpress/?feed=rss2&amp;p=960</wfw:commentRss>
		<slash:comments>0</slash:comments>
		</item>
		<item>
		<title>「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5호를 발간하며</title>
		<link>http://programto.net/wordpress/?p=937</link>
		<comments>http://programto.net/wordpress/?p=937#comments</comments>
		<pubDate>Fri, 16 Jul 2010 07:00:46 +0000</pubDate>
		<dc:creator>강령토론</dc:creator>
				<category><![CDATA[알림]]></category>
		<category><![CDATA[제 5호]]></category>
		<category><![CDATA[발간하며]]></category>
		<category><![CDATA[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5호]]></category>

		<guid isPermaLink="false">http://programto.net/wordpress/?p=937</guid>
		<description><![CDATA[<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해방연대(준)은 2009년 1월에 「(가칭)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 강령초안」과 「강령초안 해설」을 제출하면서 강령초안 논의의 의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표현한 바 있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강령초안논의는 「사회주의정당건설계획」에서 밝혔듯이 당건설의 사상적 토대를 형성하는 데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특히 오랫동안 사회주의노동운동이 후퇴하면서 강화된 조합주의, 경험주의를 극복하는 데에서 강령초안논의는 강력한 자극제가 되어야 한다. 강령초안논의는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사실상 해체된 사회주의운동공동체를 새로운 내용으로 재구축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span> </p>
<p><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p=937" class="more-link">Read more on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5호를 발간하며&#8230;</a></p>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해방연대(준)은 2009년 1월에 「(가칭)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 강령초안」과 「강령초안 해설」을 제출하면서 강령초안 논의의 의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표현한 바 있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강령초안논의는 「사회주의정당건설계획」에서 밝혔듯이 당건설의 사상적 토대를 형성하는 데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특히 오랫동안 사회주의노동운동이 후퇴하면서 강화된 조합주의, 경험주의를 극복하는 데에서 강령초안논의는 강력한 자극제가 되어야 한다. 강령초안논의는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사실상 해체된 사회주의운동공동체를 새로운 내용으로 재구축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0/07/5ho.jpg"><img class="alignleft size-medium wp-image-938" title="5ho" src="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0/07/5ho-231x300.jpg" alt="" width="231" height="300" /></a></span>당시에 강조한 이러한 강령초안 논의의 의의는 1년 6개월 정도의 시간이 지난 현시점에서도 변함이 없다. 현시점에서 요구되는 것은 그 의의를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당건설사업의 구체적 경험에 비추어, 그 의의를 보다 명확하게 하고 이를 실천에 반영하는 것이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우리는 최근년의 경험을 통해, ‘현실사회주의’의 붕괴가 야기한 사회주의노동운동의 후퇴, 조합주의, 경험주의의 강화가 당초에 판단한 것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또한 조합주의적, 경험주의적 활동과 단절하지 않은 채, 많은 활동가들이 과거의 활동을 관성적으로 반복하면서, 단지 ‘사회주의자’연 하고 있을 뿐이며, 당건설의 조직적 토대의 형성에서뿐만 아니라 사상적 토대의 형성에서도 최근년간 이렇다 할 진전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음도 확인하였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상태에서 당건설사업전반과 강령초안논의가 본격화될 수 없었다. 일각에서 진행된 ‘사노위’ 건설 논의는 당건설의 사상적, 조직적 토대 형성과는 무관한, 사노준과 사노련 사이의 지루하고, 상호 신경전으로 점철된 조직통합논의에 불과하였고, 결국 실패하였다.</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평가하면서, 당건설의 토대를 형성하는 실제적인 사업만이 당건설을 가능하게 하고, 사회주의운동공동체의 재구축을 가능하게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확인하였다. 당연히 당건설의 사상적 토대 형성 사업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우리는, 실제로 당건설 사업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많은 활동가들이 당건설을 말하기 전에 우선 기본적인 사회주의적 사상으로 무장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실제로는 조합주의자인데 당건설을 말하면서 새롭게 ‘사회주의’ 옷을 걸친다고 갑자기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강령초안논의도 활동가들이 우선 사회주의자로서의 기본적인 소양을 자기 것으로 체득해야 활성화 될 수 있을 것이다. </span> <span id="more-937"></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점에서, 활동가들의 사회주의 학습활동을 본격화하고, 이것과 강령초안논의, 실천을 결합하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당건설에 실제로 기여하게 될 것으로 우리는 판단한다. 우리가 노동자정치학교의 개설을 통해 사회주의학습을 강화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판단에 기초한 실천의 일환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우리는 교육적 효과의 극대화를 더욱더 강조하여 강령초안논의에 임할 생각이다. 그리고 동일한 문제의식에서 강령초안논의 과정에서 사회주의를 왜곡하는 잘못된 경향과의 사상투쟁을 강화하여 강령초안에 담겨야 할 것들을 보다 분명하게 할 계획이다. </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제5호에는 네 개의 글이 실려 있다.</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첫 번째의 글인 이상진의 「여성억압의 근원과 여성해방에 대한 사회주의적 관점」은 이미 지난 호에서 약속한 바 있는 글이다. 이 글은 성별분업의 사회적 성격이 생산의 발전과 함께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파악함으로써, 여성억압의 근원을 밝히고 있다. 수렵채집 사회와 초기 농경사회에서는 생물학적 차이로 인한 성별분업이 여성에게 억압적이지 않았지만, 생산의 발전으로 &#8216;쟁기와 가축을 이용한&#8217; 중농업이 등장하면서, 생산에서 상대적으로 육체적 힘을 많이 필요로 하는 남성노동이 사회적으로 중요해졌기 때문에, 성별분업이 여성에게 억압적으로 변했다는 점을 보이고, 이것을 여성억압의 근원으로 파악한다. 다른 한편 생산의 발전은 계급의 출현으로 이어졌는데, 계급의 출현은 가부장적 가족구조 등 여성억압을 더욱 강화하는 역할을 했음을 지적한다. 이를 바탕으로 이 글은 여성해방을 위해, 여성억압을 강화하는 계급억압을 폐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과 함께, 성별분업의 억압적 성격을 제거하는 것이 핵심적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이 글은 자본주의는 여성해방을 위한 물질적 조건 또한 창출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전통적으로 사회주의가 강조해왔던 가사노동의 사회화와 여성의 사회적 생산에의 참여, 사회적 차별의 철폐를 이야기 한다. 덧붙여 출산 또는 육체적으로 힘든 노동과 같은 생물학적 차이로 인한 성별분업에 대해, 사회주의는 이것이 사회적으로 여성억압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두 번째 글인 성두현의 글, 「사노준이 제출한 강령초안 비판」은 지난 4월에 공개된, 사노준의 강령초안을 비판하고 있다. 이 글은 크게 강령의 체계와 형식적 적절성, 내용으로 나누어 사노준의 강령초안을 비판하고 있는데, 먼저 강령의 체계와 형식에서 사노준의 강령체계가 맑스주의적 강령체계를 벗어나고 있으며,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폭로로부터 시작하지 않아 반신자유주의 수준의 강령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내용에서는 사회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원리적 내용 전부를 누락시키고 있고,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피상적이고 절충적이며, 맑스주의에 대한 평가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또한 강령초안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 중 하나인 노동자국가의 수립필요성을 누락시키고, 사노준의 사회주의경제론은 애매함으로 가득 차 있으며 여성주의, 생태주의와 타협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 글은 사노준이 이번에 제출한 강령초안의 문제점과, 사노준의 조직적 상태를 밀접하게 연관시키고 있다. 강령초안을 제출하였음에도, 강령초안이 사노준 내에서조차 어색한 옷으로 남아 있는 것은 사노준이 조합주의와 경험주의로부터 온전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사회주의강령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노동자국가가 누락된 것과 맑스주의적 강령체계가 폐기된 것은 사노준이 지난 20여 년간 운동에 만연된 청산주의와 단호히 단절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아울러 강령초안이 사회주의를 주장하고 있지만 전혀 긴장감을 느낄 수 없고 지루한 것은 사노준이 관료주의적 변질과 단호히 단절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피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판단한다. 이 글은,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사노준의 강령초안은 노동자계급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교육적 역할을 전혀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반대로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오히려 방해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때문에 사노준의 강령초안은 수정보완되는 것이 아니라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세 번째의 글은 황정규의 「생태위기의 주범인 자본주의」이다. 황정규는 제 3호의 글에서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이 맑스주의가 생태문제를 올바로 설명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제 3호의 글에서는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을 정립하려는 목적이 중심이 되면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생태문제를 야기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부족하였다. 이 글은 생태문제가 인간활동 자체에서 발생한 문제가 아니라 특정한 인간활동의 산물, 즉 자본주의적 생산이 생태위기를 낳는 원인이 된다는 점을 자세히 설명한다. 잉여가치의 획득이 생산의 목적인 자본주의는 사회적 필요의 제약에서 벗어나서 오직 화폐의 양으로만 측정되는 잉여가치 획득을 추구한다. 또한 잉여가치의 획득은 무제한적 축적과 생산을 위한 생산을 필연적으로 낳는데, 이러한 축적을 위한 축적과 생산을 위한 생산은 자연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까지 생산의 규모를 확대하게 된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속성이 현재 우리가 직면한 생태문제의 원인인 것이다. 아울러 이 글은 따라서 생태문제의 해결과 관련하여 자본주의를 문제 삼지 않는 방식은 생태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마지막 글인, 황정규의 「사회주의 여성주의에 대한 비판」은 여성문제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취하는 이원론을 비판하고 있다. 이미 제 4호의 글에서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이원론이 지니는 문제점을 비판한 바 있는데, 이 글은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이러한 이원론을 설명하기 위해 끌어들인 &#8220;가부장제&#8221;와 &#8220;재생산&#8221;이라는 용어가 지니는 한계와 문제점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여성주의에 대한 비판을 한층 심화시키고 있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에 대한 비판을 이번 호에서 재차하게 된 것은,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입장이 단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사노준의 여성강령과 사노준의 입장을 대변하는 유현경의 글을 통해 한국에서도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 여러분들이 이점을 유의하면서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파악했으면 한다.</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강령토론」편집위원회는 앞으로 강령초안논의의 교육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사회주의’를 주장하며 사회주의와는 이질적인 요소를 도입하는 잘못된 경향과의 사상투쟁을 강화할 계획이다. 아울러, 이미 제4호에서 표방하였듯이 소주제별 토론회 등을 통해, 강령토론의 다양한 소주제별 토론(소련사회성격, 여성문제, 생태문제 등)의 활성화를 꾀할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한다.</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2010. 7. 16</span> </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편집위원회</span></p>
]]></content:encoded>
			<wfw:commentRss>http://programto.net/wordpress/?feed=rss2&amp;p=937</wfw:commentRss>
		<slash:comments>0</slash:comments>
		</item>
		<item>
		<title>여성억압의 근원과 여성해방에 대한 사회주의적 관점</title>
		<link>http://programto.net/wordpress/?p=931</link>
		<comments>http://programto.net/wordpress/?p=931#comments</comments>
		<pubDate>Fri, 16 Jul 2010 06:51:58 +0000</pubDate>
		<dc:creator>강령토론</dc:creator>
				<category><![CDATA[소주제토론]]></category>
		<category><![CDATA[여성문제]]></category>
		<category><![CDATA[제 5호]]></category>
		<category><![CDATA[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5호]]></category>
		<category><![CDATA[성별분업]]></category>
		<category><![CDATA[성별분업의 변화]]></category>
		<category><![CDATA[여성억압의 원인]]></category>
		<category><![CDATA[여성운동]]></category>
		<category><![CDATA[여성해방]]></category>
		<category><![CDATA[여성해방과 사회주의]]></category>

		<guid isPermaLink="false">http://programto.net/wordpress/?p=931</guid>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 상 진 (노동해방실천연대(준) 회원)</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지난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4호, “여성문제, 계급문제에 대한 이원론적 접근 비판”에서는 사회주의 여성주의에 대한 비판과 함께, 여성억압의 근원과 여성문제를 이해하는 사회주의 운동의 관점에 대한 명확한 정식화가 필요함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글의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이 정식화의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다. </span> </p>
<p><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p=931" class="more-link">Read more on 여성억압의 근원과 여성해방에 대한 사회주의적 관점&#8230;</a></p>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 상 진 (노동해방실천연대(준) 회원)</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지난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4호, “여성문제, 계급문제에 대한 이원론적 접근 비판”에서는 사회주의 여성주의에 대한 비판과 함께, 여성억압의 근원과 여성문제를 이해하는 사회주의 운동의 관점에 대한 명확한 정식화가 필요함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글의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이 정식화의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다. </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최근 성별분업과 계급의 등장이 여성억압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연구성과들이 제시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여성문제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이 제시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맑스주의 방법론인 역사유물론은 인간사회의 총체적 구조 속에서 여성억압에 대해 설명하는 적절한 이론틀을 제공해 줄 것이다.”</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 글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실마리를 바탕으로, 여성억압의 근원을 밝히고 여성해방에 대해 사회주의 운동이 어떠한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여성해방에 대한 사회주의의 전망을 제시할 것이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에 앞서 먼저 왜 역사유물론이 여성억압의 근원을 과학적으로 밝혀 줄 이론인지 간단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이는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역사유물론을 왜곡하면서, 여성억압의 근원을 밝히는데 있어 역사유물론을 정확히 적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span> </p>
<p class="바탕글"><span id="more-931"></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2pt;"><strong>1. 여성억압의 근원을 밝히는 도구: 역사유물론 </strong></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1pt;"><strong>(1)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역사유물론을 왜곡하였다. </strong></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주의 여성주의는 역사유물론이 경제적 분석에 한정되어 있다고 왜곡하고, 역사유물론이 계급모순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여성억압을 설명하지는 못한다고 이야기하였다. 더 나아가 맑스주의가 성맹적(sex-blind)이라고까지 이야기하며, 역사유물론으로 여성억압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까지 하였다. 그리고 여성억압을 설명하기 위해 “가부장제”, “재생산관계”라는 자의적인 개념과 범주를 만들어 내는 ‘독창성’까지 발휘하였다. 이것은 결국에는 계급억압과 여성억압의 관계를 병렬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사회주의운동과 여성해방운동 또한 서로 병렬적인 운동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여성해방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결합시키려 해도 결합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또한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여성억압의 물적 기초가 성별분업에 있다고 하면서도, 정작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유물론적으로 바라볼 때 기본이 되어야 할 것, 즉 왜 성별분업이 여성억압을 만들어내었는지를 밝히지 못했다. 오히려 성별분업 자체가 계급의 등장보다 앞서기 때문에 모든 역사시대에서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하면서, 성별분업으로 인한 여성억압이 모든 사회 분석의 핵심이라고만 주장하였다.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역사유물론을 제대로 적용하는데 실패하면서, 생산의 발전이 왜 성별분업으로 인한 여성억압을 만들어내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여성억압적인 모든 사회에 보편적인 남성지배체제로서 가부장제가 존재해왔다는 관념론적 결론을 만들어 내었다. </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1pt;"><strong>(2) 역사유물론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strong></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역사유물론은 역사발전과정을 유물론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맑스주의는 잉여가치론과 함께 역사유물론을 통해 사회주의를 과학적 토대위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그것은 역사의 발전이 인간의 사상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물질적인 생산을 바탕으로 한 객관적 법칙을 가지고 이루어짐을 강조한다. 역사유물론은 “일정한 방식으로 생산 활동을 하는 개인들은 일정한 사회, 정치적 관계들을 형성한다”1)는 점을 명확히 한다. 역사유물론은,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생산의 발전으로 여성억압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뿐만 아니라 역사유물론은 현대 과학의 발전으로 새롭게 발견되는 고고학적, 인류학적 사실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서로 어떤 관계가 있는지 밝혀주는 데 있어 소중한 출발점이 될 것이며, 이것은 여성억압의 근원도 보다 명확하게 해 줄 것이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제 역사유물론을 토대로 생산의 발전과 성별분업, 여성억압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 것인지 살펴보기로 하자.</span>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2pt;"><strong>2. 성별분업과 여성억압 </strong></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유물론의 관점에 따르면, “역사에서 결정적 계기는 궁극적으로 직접적 생활의 생산 및 재생산이다. 그러나 이것 자체가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생활수단, 즉 의식주의 대상과 이에 필요한 도구의 생산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 그 자체의 생산, 즉 종족의 번식이다.”2)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선사시대의 인류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자연에서 의식주의 대상을 직접 생산하고 그것을 위해 간단한 도구들을 생산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류최초의 분업이 나타나게 된다. 주로 남성은 수렵을 담당하고, 여성은 채집을 담당하는 성별분업이 그것이다. 이러한 성별분업은 주로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인 차이에서 자연스럽게 비롯되었다. 출산과 육아의 부담이 없는 남성이 주로 수렵활동을 하게 되었고, 반면 여성은 주로 채집활동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span>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1pt;"><strong>(1) 생물학적 차이로 인한 성별분업 그 자체는 여성억압의 요인이 아니었다. </strong></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가.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차이는 자연적인 조건이다. </strong></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선사시대의 성별분업이 그 사회에서 어떠한 성격을 가졌는지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차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간단하게 살펴보자.</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선사시대에 일어났던 성별분업은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차이에 의해 발생한 것이었다. 출산, 수유, 초기육아의 역할 자체는 오직 여성들에 의해 가능한 ‘생산활동’이었고, 상대적으로 육체적 힘을 필요로 하는 역할은 남성에 맡겨졌다. 이것은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생물학적 차이 는 여성과 남성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조건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3) 미국의 여성운동가인 린다 번햄은 이러한 의미로, “불가능한 결혼”이라는 글에서 “인류 역사 최초의 단계에서의 성별분업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남녀 모든 인간에 대한 자연의 지배를 반영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나. 인류 최초의 분업형태인, 성별분업은 원래 억압적인 것이 아니었다. </strong></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수렵채집사회에서 주된 식량을 생산하는 노동은 여성들의 채집활동이었다. 반면 남성들은 수렵활동을 주로 하였는데, 이것은 부수적인 식량공급원이었다. 초기 농경사회4)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주된 식량은 호미나 막대기로 경작하는 여성의 농업노동에서 나왔고, 남성은 여전히 사냥 등 수렵활동에 주력하는 성별분업이 있었다. 생산력이 낮은 단계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성별분업은 생존을 위한 자연스런 것이었고, 주된 식량을 생산하는 여성이 가족단위의 운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 성별분업에서는, 후세와 같은 여성억압이 나타나지 않았다</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인류학자인 엘리너 리콕(Eleanor Leacock)이 쓴 “남성지배의 신화”라는 글에 따르면,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발견된, 유목 수렵채집을 하는 유럽 거주자들 사이에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는 없었다”고 한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남성과 여성 모두 하루 일정에 관해 개별적인 결정이 가능하다. … 남성과 여성은 똑같이 매일을 어떻게 지낼지에 대한 결정―사냥을 하러 갈 것인지 채집을 하러 갈 것인지, 그리고 누구와 함께 할 것인지 등―을 자유롭게 했”으며, “캠프를 새로운 지역으로 옮길지 말지에 대한 결정이 있을 때, 남성과 여성이 모두 참여했다”고 한다. 그리고 “여성은 여전히 그들 자신의 권리에 있어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오스트레일리안 원주민들 사이에서도 ‘연장자 여성이 부부간의 진로, 그리고 자녀들의 진로 전반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한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엥겔스 또한 「가족, 사적소유, 국가의 기원」에서 몇몇 씨족사회에 대한 분석에서 남성과 여성이 평등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를 들고 있다. 예를 들어 이로쿼이족의 경우 “1. 자기의 사쳄(Sachem, 평상시의 우두머리_과 군사수령(전시 지휘관)을 선출한다. … 선거에는 남녀 ‘모두가’ 참가했다. … 2. 씨족은 임의로 사령과 군사수령을 파면한다. 이것도 역시 남녀가 공동으로 결정한다”는 식의 관습이 있었다. 사회의 ‘우두머리’를 남녀가 공동으로 선출한다는 사례 하나만 보더라도, 오늘날 20세기 전후에 비로소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되었다는 사실과 비교할 때, 이는 분명 놀라운 것이다. 뿐만 아니라 “씨족 내에서의 사쳄의 권력은 부성적인 것으로 순전히 도덕적인 것이었다. 그는 강제수단을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이 씨족사회에 어떤 억압적인 요소를 발견한다는 것은 힘든 일일 것이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또한 수렵채집사회나 초기 농경사회에서는 흔히 쓰는 여성의 지위라는 관념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모계사회든 부계사회든 남성과 여성의 결혼은 그들이 속한 씨족 공동체들간의 관계를 더욱 결속시켜주는 역할을 하였으며, 여성은 결혼을 통해 씨족사회나 가족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었고,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span>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1pt;"><strong>(2) 생산의 발전은 성별분업의 성격을 억압적으로 만들었다. </strong></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가. 생산의 발전으로 초기 농경사회는 중농업(heavy agriculture society)로 전환되었다. </strong></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낮은 생산력 수준에서는 주로 혈연적 관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혈연적 유대로 묶여진 씨족사회는 초기 농경사회에서 정착생활을 시작했으며, 재배에 적당한 작물과 적당한 농경방식을 발견하고, 땅을 경작하고 수확하고 곡식을 저장하고 그것을 음식으로 만드는 도구를 생산하면서, 점차 노동생산성이 증대되고, 생산력이 발전해 갔다. 결국 호미와 막대기를 이용한 초기 농경은 ‘쟁기와 가축을 이용하는’ 중농업으로 전환되었다. 농업방식도 땅을 돌려가면서 경작하는 방식 또는 개간하는 방식에서 농토를 지속적으로 이용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수렵은 목축으로 대체되면서 엄청난 생산의 발전을 이루었다. </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나. 중농업 사회에서 남성의 노동은 여성의 노동보다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 </strong></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정착생활이 낳은 인구의 증가는 그 자체로 생산력이 높은 중농업을 필요로 했으며, 이 노동은 전적으로 남성들의 몫이 되었다. 왜냐하면, 가축을 몰고 쟁기질을 하는 것은 엄청나게 고된 노동이었으며, 생물학적 차이로 인해 여성의 노동은 이러한 일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농업 사회가 본격적으로 출현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관개농업, 원거리 교역, 부족간의 전쟁에서 또한 남성의 노동이 중요하게 되었는데, 이 또한 마찬가지 이유로 비롯된 것이다. 목축을 하는 사회에서도 이미 목축은 남성들의 몫이었고, 수공업에 있어서도 철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생산 또한 남성의 몫이 되었다. 이처럼 사회적 생산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노동은 남성의 몫이 되었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적 생산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남성노동이 등장하고, 이러한 노동에 여성은 생물학적인 차이로 배제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바로 성별분업의 사회적 성격이 여성에게 억압적으로 바뀌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남성의 노동이 사회적 생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순간, 성별분업은 여성에게 억압적인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남성은 여성보다 신체적으로 고된 노동을 할 수 있었으며, 출산, 육아를 담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 생산에 지속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여성이 주로 출산과 육아의 역할을 담당하였고, 이로 인해 여성의 노동은 가정 내에서의 역할로 축소되었으며 남성의 사회적 노동에 종속적인 것이 되었다. 초기 농경사회까지만 해도 제한된 생산력으로 인해 성별분업에 억압적인 성격이 없었던데 반해, 생산의 발전으로 중농업사회로 접어들게 되자 성별분업의 성격은 여성에게 억압적인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것이 여성억압의 근원이다. </span>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2pt;"><strong>3. 계급의 출현과 여성억압 </strong></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렇다면 계급의 출현과 여성억압은 어떠한 관련이 있는 것인가?</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1pt;"><strong>(1) 계급의 출현과 여성억압의 발생이 시기적으로 일치한다는 사실은, 둘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strong></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엥겔스는 「가족, 사적소유, 국가의 기원」에서 “역사에 등장하는 첫번째 계급적대는 일부일처제에서 남성과 여성의 적대가 발전된 것과 일치하며, 첫번째 계급억압은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과 일치한다”고 하여, 계급의 출현과 여성억압의 발생이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표현했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엥겔스의 이 표현은 마치 계급의 발생이 여성억압의 근원으로 이해될 소지가 있는데, 실제 여성억압과 계급출현의 관계를 이렇게 판단하고 계급모순의 폐지가 여성해방과 동등한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존재하고 있다. 이 경우 여성문제의 해결이 계급폐지라는 과제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결론적으로 여성억압의 근원, 여성문제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가로막는 것이며, 계급모순의 폐지가 자동적으로 여성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엥겔스는 여성억압과 계급의 발생시기가 시기적으로 동시라는 것을 지적하고, 그 둘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 계급의 등장 자체가 여성억압을 발생시키는 것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계급의 발생으로 여성억압이 발생했다면, 굳이 이런 식의 표현을 쓸 필요는 없는 것이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계급의 출현과 여성억압의 발생이 시기적으로 일치한다는 엥겔스의 말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생산의 발전은 생산관계에 여러가지 변화를 일으킨다. 2절에서 서술했듯이 남성 노동이 중요해지고 상대적으로 여성의 노동은 종속적인 것이 되는데, 이러한 성별분업 자체가 여성에게는 억압적인 것이 되었고, 이로 인해 이전에 존재하던 남성과 여성의 평등한 관계는 변화하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 생산의 발전은, 잉여와 사적소유를 출현시켰고,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그리고 국가를 출현시켰다. 이처럼 계급의 출현과 여성억압의 발생은 생산 발전의 결과라는 공통요인이 있으며, 이로 인해 서로는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서로 연관이 있다는 것은 상호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을 또한 의미한다. 계급 모순이 생산의 발전으로 나타난 여성억압을 더욱 강화하는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구체적으로 계급의 출현이 어떻게 여성억압에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자, </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1pt;"><strong>(2) 계급의 출현은 여성억압을 더욱 강화시켰다. </strong></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계급의 출현은 잉여의 생산과 사적소유의 발생을 전제로 한다. 지배계급은 잉여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잉여의 대부분을 생산하는 남성노동을 중요시하게 되었고, 그 결과 가족 내에서나 사회적으로 여성에 비해 남성의 지위를 강화시켰다. 기존의 씨족사회와 같은 공동체의 역할은 축소되었고, 잉여의 착취에 적합한 가부장적 가족구조가 확대되었다. 가부장적 구조에서, 가부장인 ‘연장자 남성’은 아내와 자녀 등 가족 내 성원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남성지배, 여성억압의 강화에 대한 의식의 반영으로 남성우위 이데올로기가 발생하였고, 이것은 여성억압을 지속 강화시키는 작용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성억압의 강화는 사회에서 가정폭력과 성폭력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목될 수 있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또한 잉여의 생산과 사적소유의 발생은 부계제 사회로의 이행을 촉진시켰다. 왜냐하면 잉여를 생산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남성이 담당했기 때문이다. 계급이 출현하기 이전 사회들 중, 주로 여성이 가족의 운영에 책임을 지는 모계제 사회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5) 주요 식량의 대부분을 남성의 노동이 생산하고, 생산물의 통제권이 남성에게 주어진 상황에서는 모계제보다 부계제가 훨씬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또한 잉여 상속의 필요성은 아버지를 정확히 할 수 있는 일부일처제로의 이행을 낳았다. 또한 여성은 잉여에 대한 통제 권리를 박탈당했으며, 남성에 의한 여성지배는 더욱 강화되었다. </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1pt;"><strong>(3) 자본주의와 여성억압 </strong></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처럼 계급의 출현은 여성억압을 강화하였는데, 특히 역사적 생산양식의 하나인 자본주의는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여성억압을 강화시켰다. </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가. 자본주의에서 이중의 억압을 당하는 여성 </strong></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본주의는 계급사회에서는 처음으로 여성을 사회적 생산에 참여시켰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생산의 발전 때문이었다. 대공업의 발전으로 잉여의 생산에서 상대적으로 힘든 노동의 비중이 감소했고, 이는 남성노동이 중요했던 상황을 바꾸어 놓았다. 이러한 결과 자본주의는 여성의 노동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오로지 여성의 노동력까지 착취하여 더 많은 잉여가치를 획득하려고 한 자본주의 속성 때문이었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본주의에서 고유한 여성억압의 방식이란 바로 자본주의가 ‘가정주부’로서 뿐만 아니라 ‘노동자’로서 여성을 이중으로 억압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이전까지만 해도 주로 여성들은 남성들의 잉여생산을 뒷받침하는 가사노동과 출산, 육아의 부담과 같은 성별분업으로 억압을 받아왔다면, 자본주의에서 여성은 사회적 생산에 대거 참여하게 됨에 따라 이에 더해 노동자로서 착취의 대상이 됨으로써 억압을 받는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본주의 역시도 생산을 위해 반드시 노동력의 재생산을 필요로 하는데, 자본주의는 이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가사노동 및 출산, 초기 육아, 양육 등의 역할을 전적으로 여성에게 부담함으로써 여성을 억압한다. 전적으로 ‘가정주부’로서의 역할을 하는 여성들의 경우 사회적 생산에서 배제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억압으로 다가가며, 사회적 생산에 참여하는 여성들의 경우는 이중의 부담으로 억압받을 뿐 아니라 가정에서의 역할로 인해 사회적 생산에서도 차별을 받게 된다. 특히 저임금 여성노동은 가사노동에 대한 부담이 더욱 커진다. 이처럼, 자본주의 하에서 여성은 자본가에게 착취를 당하고, 가정에서 또한 억압을 당하고 있다. </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나. 사회적 생산에서 남성에 비해 차별받는 여성</strong></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적 생산영역에서도 여성은 남성에 대한 각종 차별로 억압받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남성우월/여성종속적 이데올로기, 불평등한 성별분업 등을 통해 여성을 사회적 생산에서 남성에 비해 더욱 열악한 처지로 내몬다. 다수의 여성들이 참여하는 사회적 생산의 영역(예를 들어, 오늘날 사무, 청소, 유통, 서비스 등)대부분이 남성에 비해 저임금이며, 비정규직 또한 더 일반화되어 있다. 같은 영역 안에서도 남성의 역할과 여성의 역할이 분리되어 있는 경우가 많으며, 이러한 경우 주로 여성은 남성보다 지위가 낮고, 노동조건도 열악하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또한 자본주의의 주기적인 공황은 여성을 더욱 열악한 처지로 내몬다. 한편으로 상대적으로 여성노동자를 우선해고 대상으로 하기도 하여, 여성을 또 다시 가정에 묶어 두어 남편에 의존하는 경향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또 한편으로는 공황은 여성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남성 노동자 또한 실직자로 만드는데, 이는 가족의 생계유지를 위해 여성을 저임금 노동으로 내몰고, 이와 더불어 여성의 이중의 억압은 더욱 증대되기도 한다. </span>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2pt;"><strong>4. 여성해방에 대한 사회주의 운동의 올바른 관점 </strong></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1pt;"><strong>(1) 여성억압의 근원 및 계급과의 관계에 대한 요약 </strong></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2, 3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여성억압의 근원은 생산의 발전으로 인해 성별분업의 성격이 억압적으로 변화했다는 데 있으며, 계급의 출현은 이러한 여성억압을 더욱 강화시켰다. 즉, 수렵채집 사회와 초기 농경사회까지만 해도 생물학적 차이로 인한 성별분업―남성은 수렵, 여성은 채집 또는 농사와 출산, 육아―이 여성에게 억압적이지 않았지만, 생산의 발전으로 ‘쟁기와 가축을 이용한’ 중농업이 등장하면서, 생산에서 상대적으로 육체적 힘을 많이 필요로 하는 남성노동이 사회적으로 중요해졌기 때문에, 성별분업이 여성억압적으로 변하였다. 또한 생산의 발전은 잉여의 발생과 계급의 출현으로 이어졌는데, 잉여의 착취를 중요시하는 계급사회는 잉여의 생산에 더 적합한 남성노동을 우위에 두게 되었고, 이는 가부장적 가족구조, 남성우위 이데올로기 형성 등으로 여성억압을 더욱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번에는 이러한 여성억압의 근원에 대한 정식화를 바탕으로, 여성해방에 대한 사회주의 운동의 올바른 관점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살펴보자.</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1pt;"><strong>(2) 여성해방에 대한 사회주의 운동의 올바른 관점 </strong></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여성해방에 대한 사회주의 운동의 관점을 올바르게 세우는 것은, 결국 계급문제와 여성억압의 관계를 올바르게 설정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성억압의 근원을 유물론의 관점에서 정확히 파악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지금까지 사회주의 운동 진영은 여성억압의 근원을 유물론적 관점에서 정확한 정식화를 못하였기 때문에, 계급문제와 여성억압의 관계에 대한 양 편향을 드러내었다. 이것은 단순히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여성해방을 향한 투쟁을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하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실제로 한편에서는 계급문제와 여성억압의 관계에 대해, 계급의 출현이 여성억압을 가져왔다고 보면서, 여성문제를 계급폐지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실천적으로는 사회주의를 향한 노동자계급의 투쟁에서 여성문제를 협소화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여성을 사회주의 운동에 결합시키는데 있어서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여성해방운동에 있어 사회주의 세력의 무능력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또 다른 한 편향으로는 계급문제와 여성억압을 단순히 기계적으로 결합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경향이다. 주로 사회주의 여성주의 경향이 그러한데, 이것은 실천적으로 여성해방운동을 사회주의 운동과 병렬적인 위치에 놓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결국 사회주의 운동과는 독자적인 범계급적 여성해방운동으로 귀결되는 경향으로, 사회주의 운동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렇다면 계급문제와 여성억압의 관계를 어떻게 올바로 설정해야 하는 것인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여성억압의 근원이 계급문제에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별개의 것도 아님에 주목해야 한다. 여성억압과 계급억압은 서로 다른 종류의 억압이지만, 생산의 발전과정에서 출현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러한 공통점으로 인해 계급문제와 여성억압은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데, 잉여의 생산을 우위에 두는 계급사회의 출현이 여성억압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운동이 계급문제와 여성억압의 관계를 올바로 설정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관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span>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2pt;"><strong>5. 사회주의와 여성해방의 전망 </strong></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위의 내용들로부터 여성해방에 대한 사회주의 운동의 관점을 제시할 수 있다. 첫째, 계급의 출현이 여성억압을 강화시켰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목표로 하는 계급철폐는 여성해방의 가능성을 획기적으로 높여 줄 것이다. 둘째, 여성억압이, 생산의 발전으로 인해 성별분업의 성격이 억압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라는 점에서, 사회주의 운동은 성별분업의 여성억압적인 사회적 성격을 제거하는 것을 과제로 삼아야 한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제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여성해방의 전망을 밝혀보자, </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1pt;"><strong>(1) 자본주의는 여성을 억압하는 체제이지만, 동시에 여성해방의 물적 토대를 만들어낸다. </strong></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자본주의는 계급사회의 하나로서 지배계급이 자신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피지배계급을 착취하는 사회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성격을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비약적인 생산력의 발전을 추동하여 인류 전체가 해방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을 마련하였으며, 이와 아울러 이러한 생산력을 이용하여 계급을 폐지하고 인류를 해방시킬 수 있는 주체인 노동자계급을 만들어 냈다. 즉 자본주의는 발전된 생산력을 토대로 인류가 착취와 억압에서 해방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여성의 억압이 생산의 발전 속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이러한 인간해방의 물적 토대의 형성은 여성해방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하겠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더 자세히 살펴보자. 자본주의 이전시대의 생산수준에서는 여성해방을 위한 물적 토대가 갖추어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노예제 시대나 봉건제 시대 등 과거 사회만 보더라도 사회적 생산에 있어서 남성노동이 중요시되는 조건을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이전시대에 있어 생물학적 차이에 의한 성별분업은 여전히 여성에게 억압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급속도로 이루어진 생산의 발전은 남성노동이 사회적 생산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상황 자체를 바꾸어 가고 있다. 생산의 발전은 노동을 더욱 단순화시키고 있고, 이로 인해 많은 여성이 사회적 생산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전통적으로 남성의 노동으로 인식되었던 것이, 이제는 힘에 의한 노동이 아니라 기계장치와 같은 생산도구에 의한 노동으로 대체하고 있고, 여성들조차 그러한 도구를 이용해서 충분히 노동을 할 수 있는 구조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본주의는 오로지 더 많은 잉여가치를 착취하기 위해 여성을 사회적 생산에 참여시키지만, 이것은 또 한편으로 성별분업의 억압적 성격을 폐지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1pt;"><strong>(2) 사회주의와 여성해방의 전망 </strong></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첫째, 여성이 사회적 생산에 참여하는 것이 적극 보장되어야 한다. 여성의 노동이 사회적 생산에서 소외되어 생산의 지위가 하락한 것이 여성억압의 원인이기 때문에, 사회적 생산에 참여가 여성해방을 위해 서는 중요하다. 특히 여성은 가사노동, 남성은 사회적 생산이라는 뿌리 깊은 여성억압적 성별분업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여성이 사회적 노동에 적극 참여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둘째,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통해 여성이 사회적 생산에 참여하는 것을 보장하여, 여성이 이중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게 해야 한다. 가사노동의 사회화란 가정에서 여성이 수행하는 요리, 세탁, 청소, 자녀 보육, 병자 간호 등의 가사노동을 사회적 기능에 맡기는 것을 뜻한다. 가정용 전자제품과 기성복, 가공식품 등의 생산은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촉진시키고 있다. 이처럼 자본주의 하에서 생산력의 발전으로 이미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상당히 진척되었지만, 여성이 가사노동의 굴레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지금보다 더욱 진정시켜 나가야 한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셋째, 출산, 초기육아 등의 생물학적 차이로 인한 역할로 인해 여성이 사회적으로 차별받지 않도록, 사회가 이러한 부분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출산휴가, 육아휴직 등의 실질적인 보장 등을 통해 여성이 사회적 노동으로부터 배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넷째 남성우위, 여성종속 이데올로기 등의 영향으로 관습화되어 굳어져온 성별분업은 폐지되어야 한다. 이러한 성별분업은 여성노동의 사회적 지위를 낮추는 결과로 이어져, 여성노동을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 등으로 전락시키고, 사회적 생산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폐지되어야 한다. 육체적 힘의 차이와 같은 생물학적 차이로 인해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성별분업의 경우처럼, 생산의 발전으로 상당히 줄어들겠지만 곧바로 극복되지 않는 부분들이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차별적 측면이 제거될 수 있도록 의식적 노력을 해야 한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한편 위에서 주장한 것들은 여성해방을 위해서 사회주의자들이 일관되게 주장해야 하는 것들이면서 동시에 사회주의의 건설 과정에서도 일관되게 견지해야 할 것들이다. 여성억압의 기원이 계급사회의 등장만큼이나 오래되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불평등하고 억압적인 성별분업의 물적 토대가 제거되어 여성억압의 조건이 사라진다고 해도, 수천 년간 지속된 편견과 관습, 이데올로기 등이 일순간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성별분업이 여성에게 억압적인 것으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의식적인 실천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혁명은 자본주의를 철폐하여 생산력을 인간 전체의 해방을 위해 발전시킴으로써 여성억압의 물적 토대를 제거하고, 여성억압을 강화시켜 온 계급사회 자체를 폐지한다는 점에서 여성해방을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span>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2pt;"><strong>마치며 </strong></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역사이전시대 사회에서는 여성과 남성이 평등했는데, 계급의 출현과 동시에 여성억압이 등장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 여성억압을 만들어냈는가에 대한 의문을 자연스럽게 불러일으킨다. 이 글에서는 여성억압의 근원을 성별분업의 사회적 성격변화로부터 파악했다. 생산의 발전이 성별분업의 사회적 성격을 여성억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한 생산의 발전이 한편에서는 여성억압을 만들어 내었고, 또 한편으로는 계급문제를 낳았는데, 이것은 공통의 원인으로부터 나온 서로 다른 종류의 억압임을 명확히 하였다. 특히 계급문제와 여성문제의 관계에서, 계급의 출현이 여성억압을 강화시켰음을 밝혔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따라서 사회주의 운동은 여성해방을 위해 성별분업의 억압적 성격을 제거해 나가야함을 제시하였다. 또한 사회주의 혁명을 통한 계급의 폐지가 여성해방을 획기적으로 앞당길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특히 자본주의는 성별분업의 억압적 성격을 제거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내고 있는데, 사회적 규모의 노동에 여성들을 참여시키는 것, 과학의 발전으로 성별분업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 등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사회적 생산에 여성이 참여하는 것은, 여성의 가사노동과 남성의 사회적 노동이라는 성별분업이 가져오는 억압적 성격을 폐지해 간다는 의미가 있다. 이를 위해 사회주의는 가사노동의 사회화, 사회적 노동에서의 여성의 차별을 철폐하는 과제를 중요하게 설정해야 한다. 또한 출산, 육체적 힘의 차이에 의한 성별분업이 억압적 성격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식적으로 제거해야 한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또한 이 글은 이러한 관점을 정확히 가지지 못하면, 실천적인 오류를 범하게 됨을 지적하고 있다. 계급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여성해방을 보장한다고 보는 경우나, 계급문제와 여성억압을 병렬적으로 보는 경우 모두가 실천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주의 운동은 인간에 대한 모든 억압을 철폐하는 인간해방 운동이다. 사회주의 운동은 계급억압을 철폐하는 운동이자 여성억압을 철폐하는 운동인 것이다. 이 둘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 총체적인 관점을 가지고 투쟁을 진행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바로 인간해방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 운동일 것이다.</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lt;미 주&gt;</span> </p>
<p class="바탕글">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 맑스,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2) 엥겔스,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3) 그런데 자연적으로 주어진 생물학적 차이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두 가지 문제가 나타난다. 급진 여성주의의 경우 여성억압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생물학적 차이 자체를 그것의 근원으로 바라보고, 이것을 극복하는 것을 여성해방의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자연적으로 주어진 조건 자체를 문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실제 급진 여성주의자 중 일부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출산, 수유 등 여성 고유의 역할을 대신할 때 여성해방이 가능할 것이라고까지 하는, 억지스런 대안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 다른 한편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자연적으로 주어진 생물학적 차이를 무시해버렸다. 급진여성주의 비판으로부터 등장했던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아예 급진주의 여성주의가 주장했던 생물학적 차이 자체를 무시해 버렸다. 이러한 생물학적 차이가 생산의 발전 과정에서 어떻게 여성의 지위를 변화시켰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남성과 여성의 관계로부터 사회적으로 여성억압이 재생산된다는 점만을 강조하는 편향을 드러내었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4) 수렵채집사회와 이후 초기 농경사회는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의 시대라는 뜻에서 선사시대였으며, 계급이 발생하기 이전 사회라는 뜻에서 원시공산주의 사회라고 볼 수 있다. </span>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5) 엥겔스는 선사시대의 사회를 모계제 사회로 인식을 하였지만, 현대 인류학이 새롭게 발견한 사실들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이 문장은 선사시대 사회가 모계제였다는 것이 아니라, 모계제 사회가 있었더라도 부계제로 이행했을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span></p>
]]></content:encoded>
			<wfw:commentRss>http://programto.net/wordpress/?feed=rss2&amp;p=931</wfw:commentRss>
		<slash:comments>1</slash:comments>
		</item>
		<item>
		<title>사노준이 제출한 강령초안 비판</title>
		<link>http://programto.net/wordpress/?p=918</link>
		<comments>http://programto.net/wordpress/?p=918#comments</comments>
		<pubDate>Fri, 16 Jul 2010 06:14:06 +0000</pubDate>
		<dc:creator>강령토론</dc:creator>
				<category><![CDATA[전체토론]]></category>
		<category><![CDATA[제 5호]]></category>
		<category><![CDATA[노동자국가부정]]></category>
		<category><![CDATA[반신자유주의강령]]></category>
		<category><![CDATA[사노준강령초안]]></category>
		<category><![CDATA[사노준비판]]></category>
		<category><![CDATA[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5호]]></category>

		<guid isPermaLink="false">http://programto.net/wordpress/?p=918</guid>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성 두 현 (노동해방실천연대(준) 지도위원)</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2008년 10월에 출범한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 준비모임(이하 사노준)은 지난 4월 26일 강령초안을 공개적으로 제출하였다. 이로써 사노준은, 앞으로 건설할 사회주의 노동자당이 어떤 강령을 채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현하고 토론에 부치게 되었다. </span></p>
<p><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p=918" class="more-link">Read more on 사노준이 제출한 강령초안 비판&#8230;</a></p>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성 두 현 (노동해방실천연대(준) 지도위원)</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2008년 10월에 출범한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 준비모임(이하 사노준)은 지난 4월 26일 강령초안을 공개적으로 제출하였다. 이로써 사노준은, 앞으로 건설할 사회주의 노동자당이 어떤 강령을 채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현하고 토론에 부치게 되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노준이 출범 당시에 조직의 명칭을 단순히 ‘노동자계급정당 건설 준비모임’이 아니라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준비모임’으로 정한 것은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보다 분명하게 한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지점이다. 사노준이 이러한 태도를 취하게 된 데에는, 한편에서는 세계대공황의 발발 등, 자본주의적 모순의 심화라는 객관적 요인과 다른 한편에서는 더 이상, 좌파, 현장파, 노동자계급정치라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확보할 수 없는 주체적 요인이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나 이러한 긍정적 평가와 동시에 의문 역시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존재해왔다. 그것은, 출범하기까지의 역사와 출범 이후의 행보로 보아, 과연 사노준이 실제로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보해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었다. 즉, 사노준의 ‘사회주의’가, 실제와는 부합되지 않는 겉포장으로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존재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노준이 공개적으로 제출하는 강령초안은 사노준의 실상을 가늠하는 중요한 판단기준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4월 26일, 당초 예상보다는 조금 늦게 사노준의 강령초안이 공개되었다. 그런데 마침내 공개된 사노준의 강령초안은 사회주의강령초안과는 거리가 먼 내용으로, 그래서 사회주의강령초안으로 보기 어려운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우선, 강령초안은, 당연히 들어가야 할 내용인 노동자국가를 누락시키고 있고, 맑스주의적 강령체계조차 폐기하고 있다. 더욱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사노준이 이러한 심각한 오류를, 오류가 아니라 오히려 장점인 것으로 ‘이론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노준은, 퇴보를 오히려 전진인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또한 강령초안은 읽는 이로 하여금, 생각을 보다 분명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혼란스럽게 하고, 전반적으로 긴장감이 없고 지루하다. <span id="more-918"></span></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필자는 사노준이 제출한 이번 강령초안의 문제점이, 사회주의노동운동의 실상, 특히 사노준의 조직적 상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판단한다. 필자가 속한 해방연대(준)은 주지하다시피, 사노준이 조합주의, 경험주의로부터 온전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으며 관료주의적 변질과도 단호히 단절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해왔다. 이러한 문제점과 제출된 강령초안의 문제점은 서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강령초안을 제출하였음에도 사노준이 강령토론을 활성화하지 못하고, 강령초안이 사노준 내에서조차 어색한 옷으로 남아 있는 것은 사노준이 조합주의와 경험주의로부터 온전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강령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노동자국가가 누락된 것은 사노준이 지난 20여 년간 운동에 만연된 청산주의와 단호히 단절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맑스주의적 강령체계의 폐기 역시 그러하다. 강령초안이 사회주의를 주장하고 있지만 전혀 긴장감을 느낄 수 없고 지루한 것은 사노준이 관료주의적 변질과 단호히 단절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지금 사회주의노동운동은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야기된 오랜 역사적 후퇴시기를 뒤로 하고 새롭게 다시 전진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사회주의자는 과거의 잘못된 관성, 그리고 현재의 결함과 단호히 단절하여야 한다. 만약 사회주의를 주장하면서도 과거의 잘못된 관성, 현재의 결함과 단절하지 않고 이를, 새롭게 전진하는 사회주의노동운동 내에 끌어들인다면 이는 운동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필자는 이런 관점에서 사노준의 강령초안의 문제점을 가감 없이 비판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회주의노동자정당의 강령초안에 무엇이 들어가야 하는지를 보다 분명하게 할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 글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강령초안을 검토한다. 하나는 강령의 체계와 형식적 적절성이고 다른 하나는 내용인데 먼저 체계와 형식적 적절성부터 검토한 후 내용을 검토하도록 하겠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2pt;"><strong>1. 체계와 형식적 적절성 여부</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노준이 제출한 강령초안은 전반적으로 장황하고 혼란스러우며 정세문건인지 강령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강령의 기본 틀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는 강령초안이 사회주의정당의 강령초안으로서 갖추어야 할 체계와 형식의 기본 요건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1pt;"><strong>1) 체계</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 기본체계-원리적 부분, 실천적 부분-를 갖추지 못한 강령초안</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노준이 제출한 강령초안은 사회주의정당의 강령초안이 갖추어야 할 기본체계-원리적 부분, 실천적 부분조차 갖추고 있지 않다. 그 결과 원리적 부분, 실천적 부분 모두가 뒤섞여, 매우 협소하고 부실하게 되어있다. 2.의 내용에서 자세하게 언급할 것이지만 온전히 최대강령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원리적 부분에서 다루어야 할 기본적인 내용들-자본주의의 본질, 사회주의혁명의 필연성,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임무, 사회주의자와 사회주의정당의 임무 등-도 강령초안에 들어가 있지 않고, 실천적 부분은 거의 전부가 &#8216;대안적인 사회주의&#8217;로만 채워져 있다. 실천적 부분에서 당면과제가 거의 전부라고 할 정도로 누락되어 있다. 이는 그 안에 무엇이 들어가야 하는지조차도 모를 정도로, 사노준이 강령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런데 이러한 이해 결여는, 최대강령, 최소강령, 이행기 강령에 대한 기본 이해조차 사노준에게 결여된 데에서 기인한다. 이는 「‘21c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강령(토론용 자료) 2009.04.18」(이하 「토론용 자료」)를 보면 곧바로 확인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② “더 이상 ‘최대강령-최소강령’이니, ‘이행기 강령’이니, ‘과도적 강령’이니, ‘대중행동강령’이니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노준은 2009년 4월 18일자 문건(이하 「토론용자료」)에서 “더 이상 ‘최대강령-최소강령’이니, ‘이행기 강령’이니, ‘과도적 강령’이니, ‘대중행동강령’이니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 주장은 강령초안이 왜 사회주의 정당의 강령초안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체계조차 갖추지 못하게 되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근본적인 이유인데, 매우 중대한 오류이기 때문에 그 오류를 철저히 비판할 필요가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토론용자료」는 이 주장의 근거를 대기 위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토론용자료」는 이렇게 말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사회주의에서 달성해야 할 일련의 요구로 구성”되는 ‘최대강령’과 “자본주의의 붕괴 이전까지 노동자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달성 가능한 요구”를 담은 ‘최소강령’의 구분은 이미 낡은 구분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19c 독일사회민주당의 에어푸르트 강령에서 유래된 이러한 구분법은 그 후 사회주의 정당, 특히 사회민주주의당의 역사에서 ‘최대강령’과 ‘최소강령’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아 현실에서는 최소강령에, 즉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안주하게 만들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과연 그러한가? 최대강령, 최소강령의 구분법이 ‘자본주의체제 자체에 안주하게 만들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주장은 전혀 관련되지 않는 것을 관련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왜곡이다. 러시아의 볼세비키 역시, 이러한 구분법을 사용한 강령을 갖고 철저히 혁명적인 실천을 훌륭하게 수행했음은 역사에서 논란의 여지없이 입증된 사실이다.</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9e0808;">1)</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다른 여러 나라의 당 들 역시 그러하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실제의 역사는 사노준의 주장과는 완전히 다르다. 레닌이 1917년에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개정강령초안(1917년 4-5월)을 제출했을 때</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9e0808;">2)</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과거의 최대강령-최소강령 체계 대신, 최대강령-과도적 강령, 최소강령의 체계를 도입한 것은 전자가 ‘자본주의체제 자체에 안주하게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역사적 시기가 전개되고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넘어가야 할 단계가 되자, 전자가 낡은 형식이 되어 역사의 발전을 반영하는 후자로 대체할 필요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9e0808;">3)</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최대강령-최소강령 체계에 대한 왜곡된 역사적 평가에 이어 「토론용자료」는 이를 대체한 최대강령-과도적 강령, 최소강령의 체계도 틀렸다고 주장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그러나 21c 오늘, 우리는 이러한 ‘이행기 강령’을 그대로 답습할 필요는 없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하나는 내용적인 것으로, 누구나 다 동의하겠지만 &lt;이행기 강령&gt;에서 제출했던 ‘이행 요구’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고,</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다른 하나는 ‘최대강령-최소강령’을 ‘최대강령-이행기 강령’으로 대체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런 구분 자체를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대중이 사회주의 혁명의 길로 가는 것은 ‘노동자들의 일상적 요구 -&gt;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 -&gt; 사회주의적인 제반 조치 시행’이라는, 단계적 과정을 밟아 체계적으로 진행되고 인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이 세 가지는 세 가지 수준의 단계를 밟아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최대강령-이행기 강령’이란 설정은 여전히 ‘선정치혁명 후 사회혁명’이라는 도식의 잔재일 뿐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더 이상 ‘최대강령-최소강령’이니, ‘이행기 강령’이니, ‘과도기 강령’이니, ‘대중행동 강령’이니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우리가 지금 해명할 수 있고 상상할 수 있는 수준에서 사회주의의 상으로부터, 대체권력(노동자민중권력)의 문제, 그리고 그것이 지금 바로 이 현실에서 어떻게 구체화시켜 나가야 할 것인가까지 밝히는 하나의 ‘강령’이면 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결국 「토론용자료」가 제안하는 것은 최대강령-과도적 강령, 최소강령의 맑스주의적 체계를 폐기하고 최대강령, 과도적 강령, 최소강령을 뒤섞어 놓자는 것인데, 이것은 궁극적 목표를 위한 투쟁과 당면과제를 위한 투쟁을 변증법적으로 결합하여 모두를 최대한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를 절충적으로 뒤섞어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릴 뿐이다. 즉, 강령에서 최대강령, 과도적 강령, 최소강령 모두를 분명하게 제출하지 못하게 할 뿐이다.</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9e0808;">4)</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것이 중대한 오류임은 사노준이 제출한 강령초안의 협소함과 부실함으로 곧바로 입증된다. 강령초안은 최대강령, 과도적 강령, 최소강령 모두를 불분명하게 만들고, 강령초안에서 원리적 부분, 실천적 부분의 구분조차 사라지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 강령초안이 기본적인 원리조차 충분히 정식화하지 못하게 만들고, 실천적 내용을 다루는 부분 역시 ‘대안적 사회주의’에 대한 지루한 해설문으로 만들어 버렸다. 즉, 어느 것도 다 불충분하고 부실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요약하면 사노준의 강령초안의 체계는, 맑스주의적 강령체계와는 거리가 먼 강령체계로서, 맑스주의적 운동의 지금까지의 성과를 폐기, 청산하는 비실천적인 강령체계라는 근본적인 결함을 노출시키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③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폭로로부터 시작하지 않은 사노준의 강령초안</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주의 정당의 강령은 자신의 목표를 전면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8216;현대&#8217;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폭로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 폭로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강령은 </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weight: bold;">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산물임을 분명하게 하고, 사회주의의 필연성을 분명하게 할 수 있다.</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9e0808;">5)</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weight: bold;"> 그리고 이렇게 해야만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임무도 분명하게 드러내고, 사회주의자와 사회주의정당의 임무도 분명하게 정식화할 수 있다. &#8216;현대&#8217;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자본주의의 특정단계나 시기에 대한 비판일 뿐이며, 자본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비판을 전제할 때에만 그 의미가 뚜렷해진다. 이 점은 해방연대(준)이 강령초안과 강령초안해설을 제출하면서 이미 다음과 같이 특별히 강조한 바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span><span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강령초안은 자본주의로부터 출발하여 자본주의의 제국주의단계, 현대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로 상승하며 비판, 폭로하고 있다. 즉, 자본주의의 기본적 본질을 비판, 폭로하고,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모순의 심화를 다룬 후, 여기에서 곧바로 사회주의혁명의 필연성을 도출하고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임무, 사회주의자, 사회주의정당의 임무와 사회주의운동의 국제적 성격을 순차적으로 다루었다. 이런 연후에 강령초안은 제국주의, 현대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비판, 폭로하고 있다.</span></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이렇게 출발한 이유는, 사회주의운동과 사회주의혁명이, 바로 자본주의의 모순의 산물임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를 토대로 하여서만 사회주의적, 사회주의 혁명적 성격을 갖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만약 역의 방향으로 강령을 작성하면 그 강령은 사회주의운동과 사회주의혁명이 자본주의와 갖는 기본적인 관계를 분명하게 드러낼 수 없게 되고 반제국주의와 반신자유주의로 반자본주의, 사회주의를 해소시킬 위험성이 높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자본주의일반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시점이 현재와 더 가깝고, 그래서 이를 먼저 다루는 것이 더 실천적일 것 같은 인상을 만들어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를 먼저 다룰 경우 사회주의운동의 내용을 오히려 더 협소하게 제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스탈린주의화된 공산당 대부분의 강령이 독점자본주의, 제국주의로부터 출발하여 반독점, 반제를 강조하고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실현이라는 궁극적 과제의 실현을 강령 말미에 구색맞추기식으로 기계적으로 결합하여 배치하는 것은 기회주의화와 무관하지 않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강령초안의 체계는 독점자본주의, 제국주의, 신자유주의로부터 출발하는, 현재 유행하는 강령체계가 아니라, 1917년에 레닌이 제안한, 자본주의로부터 출발하여 독점자본주의, 제국주의로 상승하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강령개정초안의 체계를 따르고 있다(덧붙이면, 당시 강령개정과 관련하여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강령 중 자본주의부분 전반을 삭제하고 곧바로 제국주의로부터 출발하자는 제안에 대해서 레닌이 반대한 이유*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강령초안은 자본주의로부터 출발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일반과 제국주의단계의 자본주의를 뒤섞어서 다루지 않도록 주의하였다. 이 방식이 두개 다 모두를 풍부하게 폭로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고 오히려 혼란스럽게 하기 때문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제국주의는 죽어가는 자본주의, 죽어가고 있지만 죽지는 않은 자본주의이다. 제국주의의 본질적 특징은 대체로 순수한 독점이 아니라 교환, 시장, 경쟁, 공황과 함께하는 독점이다. 그러므로 교환, 상품생산, 공황 등 전반의 분석을 삭제하고 그것을 전체로서 제국주의 분석으로 “대체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틀렸다. 경쟁으로부터 독점으로의 이행이 있고 그러므로 강령은, 그것이 교환, 상품생산, 공황 등을 포함하고 거기에 성장하는 독점의 특징화를 부가하면 훨씬 더 정확하고 훨씬 더 실제에 충실할 것이다. 사실, 제국주의의 본질인 것은 바로, 적대적인 원칙들, 즉, 경쟁과 독점의 이 결합이고 최종적인 붕괴, 즉 사회주의혁명으로 향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레닌, 「당 강령개정과 관련된 자료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가칭)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 강령초안해설」,「강령토론」창간준비호, 41∼44쪽).</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런데 사노준의 강령초안은 이와 정반대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폭로가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폭로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이것은 곧바로 강령초안에 중대한 결함을 가져왔다. 사노준의 강령초안은 사회주의운동의 내용을 협소하게 설정하게 만들었으며, 당연히 강령초안에 들어가야 할 핵심적 내용-자본주의의 본질, 사회주의혁명의 필연성,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임무, 사회주의 정당의 역할과 임무 등-의 누락</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9e0808;">6)</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을 야기하였다. 그 결과 뒤에서 곧바로 언급하겠지만 강령을 </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weight: bold;">사회주의강령이 아니라 반신자유주의강령으로 만들어 버렸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1pt;"><strong>2) 형식</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강령은 단순한 전술문건도 선전문건도 선동문건도 아니다. 강령은 맑스주의적 명제와 이론에 기초해서, 자본주의의 본질을 정확히 폭로하고, 사회주의운동의 목표를 뚜렷하게 제시하여, 수십만 선동의 토대로 사용될 수 있도록 간결하고 정확하게 작성되어야 한다. 때문에 하나하나의 절들이 왜 그것이 거기에 있어야 하는지가 분명하게 작성되어야 하고 당연히 압축적으로 작성되어야 한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나 사노준의 강령초안은 가장 핵심적인 내용들이 누락된 것과는 정반대로, 왜 이 절이 거기에 들어갔는지가 불분명한 절들로 가득 차있다. 그래서 강령초안에는 “하나하나의 절에는 수십만 선동가의 연설이나 기사가 요약되어 있는(레닌)” 것이 아니라 내용이 불분명한 절들이 장황하게, 또 반복되어 나열되어 있다. 그 결과 강령초안 전체를 수차례 읽어보아도 핵심적인 내용들이 압축적으로 요약되지 않는다.</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9e0808;">7)</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또한 강령초안은 이것이 강령초안인지 그 해설인지도 불분명하다. 그래서 전자로서도 실패했고, 후자로 보기에도 그 내용이 매우 빈약하다. 이러한 결함은 앞에서 지적한 체계의 결함과 밀접히 연결되는 것인데 무엇을 해당부분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야 하는지가 명확하지 않은 데에서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언가 말은 하고 있는데 자신 없이 웅얼거리고 있다는 인상을 곳곳에서 만들어내고 있고 그 만큼 무기력한 인상을 만들어내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2pt;"><strong>2. 내용</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1pt;"><strong>1) 핵심적인 원리적 내용들의 누락</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노준의 강령초안은 사회주의정당의 강령이라면 들어가야 할 원리적 내용들, 그것도 핵심적인 내용들을 대거 누락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부 들어간 내용의 경우에도 그것이 갖는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누락된 핵심적인 원리적 내용들을 대표적인 것만 들어 보아도, 자본주의사회의 본질적 특징(상품생산사회, 모든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의 근원으로서의 임금노동제), 자본주의사회의 발전경향(대규모 생산에 의한 소생산자의 축출, 자본주의적 집적과 집중), 공황,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 사회주의혁명의 필연성, 사회주의혁명의 내용과 의의,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임무, 노동자국가, 사회주의자와 사회주의정당의 임무, 제국주의 등으로 사회주의정당의 강령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핵심적인 원리적 내용들 전부에 해당한다. </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weight: bold;">한마디로 사노준의 강령초안에는 원리적 내용의 알맹이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또한 강령초안에 임노동제라는 용어는 들어가 있지만 이 임노동제가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의 근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비판할 때에도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아 이것들이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정확히 규정하지 못하고 이것들이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가장 반동적인 특성이라는 점도 분명하게 폭로하지 못하고 있다. </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weight: bold;">때문에 사노준의 강령초안은 스스로를,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주의강령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상 반신자유주의 강령을 벗어나지 못한다.</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실제로 반신자유주의 강령인데 사회주의강령으로 보이기 위해 억지로 연관이 분명하지 않은 내용들을 삽입하고 있을 뿐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처럼 핵심적인 내용들조차도 누락시키고 일부 들어간 내용의 경우에도 그것이 갖는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하여, 핵심적인 내용들을 올바로 정식화하지 못하는 강령은 사회주의강령임을 주장하고 있음에도, 실제로는 사회주의강령이 아니다. 이러한 강령으로 당원들과 노동자계급을 사회주의적으로 교육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사노준의 강령 초안은 노동자계급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의식이 부르주아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는 것을 오히려 방해하고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1pt;"><strong>2)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피상적이고 절충적이다.</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노준의 강령초안은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매우 피상적이고 절충적이다. 평가를 하는 듯하지만 정작 평가를 회피하고 말장난을 하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① ‘현실사회주의’는 이행기의 관료적 국가사회주의였다? </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노준의 강령초안은 ‘현실사회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 각각의 비판 항목들은 따로 떼어 놓을 경우 그 자체로서는 대체로 맞는 내용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을 집중적으로 비판하느냐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대안적인 사회주의와 곧바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노준의 비판은 집중점이 없고 산만하다. 그 결과 사노준은 ‘현실사회주의’를 사회주의의 여러 형태 중의 하나인 ‘관료적 국가’사회주의로 규정하고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나 이러한 규정은 사노준이 ‘현실사회주의’를 뚜렷한 입장 없이 절충적으로 평가하고 있음을 노출시킬 뿐이다. 만약 사노준이, 제1인터내셔널 규약에 나오는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자신의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진지하게 사회주의를 고민하고 ‘현실사회주의’를 천착, 평가했다면 관료적이라는 형용구와 사회주의를 결합시켜 마치 관료적 사회주의도 하나의 사회주의형태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절충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사노준의 태도는, 사회주의변혁이 노동자계급 자신에 의한 해방과정이라는 사노준의 다음과 같은 입장과도 모순되는 것으로 그래서 사노준의 주장을 빈말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④ ‘21세기 사회주의’는 노동자 국제주의에 바탕한 ‘반제반자본 사회주의’이자, 아래로부터의 ‘대체권력(노동자민중권력, 코뮌, 소비에트)’의 창출과 유지 그 자체이다. 노동자민중 자신의 자치권력인 ‘대체권력(노동자민중권력, 코뮌, 소비에트)’의 창출을 통해 생산수단을 사회화하고, 대체권력의 민주적 통제에 바탕하여 생산과 유통을 계획하며, 임노동에 바탕한 계급관계의 철폐만이 아니라 가부장제 및 환경파괴적 생산제일주의도 극복하는 ‘복합적인’ 사회주의/코뮤니즘이다. 이러한 사회만이 현대자본주의가 이룩한 생산력 발전에 조응할 수 있고, </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font-weight: bold;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 mso-ascii-font-family: 나눔명조;">동시에 그 변혁의 과정이 노동자계급 자신에 의한 해방 과정이 될 것이다.</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토론용자료」9쪽, 강조는 인용자)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② 20c 사회주의를 극복한 21c 사회주의?</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강령토론」 4호에 실린 「건설할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지도이념은 맑스주의이다」에서 필자가 언급하였듯이 사노준처럼 20c사회주의를 상정하고 이를 극복하는 것으로서 21c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제출하는 것은 지극히 피상적이고, 절충적이며, 비과학적인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사노준은 자신이 추구하는 사회주의를 ‘21c 사회주의’라고 선언함으로써 출발에서부터, 자신의 피상성, 애매함, 절충성, 비과학성을 드러내고 있다. 문건의 제목부터가 “‘21c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강령(토론용 자료)”일 뿐만 아니라 문건 전체가 ‘21c 사회주의’로 도배되어 있다시피 한다. 아마 가장 무지한 자만이 20c 사회주의의 존재를 전제한 후 이와 대비하여 21c 사회주의를 자신의 사회주의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20c 사회주의라는 것 자체가 존재한 적이 없다. 20c에 실제로 있었던 ‘사회주의’를 20c 사회주의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일한 것으로 존재한 적이 없고 무수한 ‘사회주의’가 존재하였다. 레닌의 혁명적 사회주의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사회주의로 치장한 수정주의, 카우츠키주의, 스탈린주의, 김일성주의 등등이 존재하였다. 사노준은 이것을 모두 묶어서 20c 사회주의로 만들어 놓고는 이를 극복한다는 ‘불가능한’ 시도를 하고 있다. 그리고 졸지에 레닌은 여타 사회주의배신자들과 함께 20c 사회주의자들 중 하나가 되는 수모를 당한다. 이런 식으로 하면 맑스는 아마 19c 사회주의자가 될 것인데, 위대한 사노준의 분류에 의해, 졸지에 맑스주의는 19c 사회주의, 레닌주의는 20c 사회주의로 분류된다. 가장 천박한 자만이 이런 식으로 사회주의를 분류하고, 맑스주의와 레닌주의를 19c, 20c의 사회주의로 치부하며, 그리하여 이들과 다른 새로운 21c 사회주의를 창조해낼 수 있을 것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주의 노동운동이, 그 내부의 기회주의에 의한 사회주의 왜곡을 극복하고 계속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은 혁명성과 과학성을 치열하게 옹호하는 전통이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이 전통이 무너진 자들과 세력은 예외 없이 기회주의에 빠져들었다.</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9e0808;">8)</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사노준은 피상적이고 비과학적인 용어 사용으로 사회주의노동운동의 전통을 파괴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곧바로 150여년 이상 사회주의노동운동의 중심을 관통한 맑스주의에 대한 평가 회피와 맑스주의적 핵심 명제에 대한 수정으로 이어지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③ 맑스주의에 대한 평가를 의도적으로 회피한 사노준의 강령초안</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토론용자료」와 사노준의 강령초안을 꼼꼼히 살펴보면 사노준이 맑스주의에 대한 평가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150여년의 사회주의노동운동의 역사와 ‘현실사회주의’를 평가할 때 맑스주의에 대한 명확한 평가를 누락시키는 것은 정작 핵심을 누락시킨 평가로서 아무런 평가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노준이 사회주의노동운동의 역사에서 맑스주의가 한 역할을 모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사노준이 맑스주의에 대한 평가를 누락시킨 것은 의도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사노준은 이렇게 함으로써 암묵적으로 맑스주의를 지도이념으로 하는 것을 부정하고 있으며, 이것은 「토론용자료」와 강령초안에서 맑스주의적 핵심 명제를 근본적으로 수정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아래에서 자세히 검토하는 것으로 하겠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1pt;"><strong>3) 강령초안에서 노동자국가 문제는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가? &#8211; 노동자계급에게 노동자국가 수립의 필요성을 주장하지 않는 강령초안</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① 강령에서 노동자국가를 누락시키는 것은 이 강령이 맑스주의에서 완전히 이탈한 것으로, 기회주의적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주의정당의 강령에서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임무와 밀접히 관련지어 노동자국가의 수립을 강조하는 것은 기본 중에서도 기본이다. 때문에 강령에서 노동자국가를 누락시키는 것은 이 강령이 맑스주의에서 완전히 이탈한 것으로, 기회주의적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러함에도 사노준의 강령초안에는 노동자국가가 누락되어 있으며 국가와 관련해서 강령초안은 고집스럽게 ‘노동자 민중의 권력’을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사노준은, 자본가계급에 대립하고 있는 계급들 중에서 오직 노동자계급만이 참으로 혁명적인 계급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다른 계급들은 노동자계급의 관점에 설 경우에만 혁명적일 수 있다는 점, </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weight: bold;">사회적 혁명의 필수적인 정치적 조건은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착취자로부터의 모든 저항을 진압할 수 있게 할 정치권력, 계급의 폐지와 함께 그 필요성이 다해 스스로 소멸해갈 정치권력을 노동자계급이 획득하는 것, 노동자계급이 노동자국가를 수립하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국가의 수립이 아닌 노동자 민중 권력의 수립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노동자계급내로 전파하려고 하고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즉, 사노준은 노동자계급외의 민중은 노동자계급의 관점에 설 경우에만 자본주의에 대해 혁명적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사회적 혁명의 필수적인 정치적 조건은 노동자 민중권력의 수립이 아니라 노동자국가의 수립이라는 점, 노동자국가의 민중적 기반의 확대는 이를 노동자 민중권력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그 노동자계급적 성격을 관철하는 것에 의해 성취된다는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기회주의적 속물주의에 빠져 있다. 뿐만 아니라 이에 이어 노동자국가의 수립이 아닌 노동자 민중 권력의 수립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노동자계급내로 전파하려고 하고 있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strong>② 선정치혁명 후 사회혁명이 틀렸다는 사노준의 수정주의적, 기회주의적 주장</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노준이 맑스주의적 훈련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은 선정치혁명 후 사회혁명이 틀렸다는 사노준의 심오한 주장에서도 나타나는데 사노준은 이 심오한 주장을 노동자 민중권력 수립주장과도 연결시키고 있다.</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9e0808;">9)</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덧붙이면 사노준은 이를 자신이 맑스주의적 강령체계를 폐기하는 것과도 연결시키고 있다.</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9e0808;">10)</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때문에 우리는 사노준의 이 ‘심오한’ 주장이 얼마나 오류로 가득찬 어리석은 주장인지를 명확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맑스주의는 그것이 철저히 혁명적일 뿐만 아니라 과학적이라는 점에서 강한 생명력을 가져 왔다. 이와 달리 맑스주의와 경쟁한 여타 소부르주아 사회주의는 현실적 적합성이 없었기 때문에 도태되었다.</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9e0808;">11)</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맑스주의는 그 사회주의혁명론에서도 강점을 갖고 있다. 맑스주의는 객관적 현실의 분석과 이에 따른 올바른 투쟁방침을 주관적 소망과 자의적 계획으로 대체하는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와 달리 철저히 과학적으로 현실을 분석하고 여기에 기초하여 매우 과학적인 투쟁방침을 내놓는다. 맑스주의는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노동자계급이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올바로 결합해야 한다는 점을 밝혔고, 임노동제를 철폐하기 위해서는 경제투쟁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정치투쟁을 전개해야 하며, 정치, 경제투쟁 속에서 역량을 강화하고 반드시 노동자국가를 수립해야 함을 밝혔다. 또한 공산주의적 생산관계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노동자국가를 수립하고 생산수단의 사회화조치를 취함으로써 비로소 발생한다는 것도 분명하게 밝혔다.</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9e0808;">12)</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이와 달리 프루동 등 소부르주아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국가 수립 없이도 사회주의가 협동조합을 통해 실현될 것처럼 주장하였고, 베른슈타인 등 개량주의자들 역시 노동자국가 수립 없이도 자본주의가 저절로 사회주의로 발전할 것처럼 주장하였는데 이들의 주장이 오류라는 것은 이미 역사가 충분히 증명한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때문에 사노준의 주장과 달리 노동자국가를 수립하는 정치혁명이 먼저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회혁명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만약 정치 투쟁, 경제투쟁 중에 이루어지는 주체적인 역량의 강화, 투쟁 진지의 강화를 사회혁명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소부르주아적, 개량주의적인 말장난에 불과하다. 정치혁명은 주체적인 역량 강화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하지만, 주체적인 역량 강화를 사회혁명으로 치장하는 것은 소부르주아사회주의자나 개량주의자가 현실을 호도하기 위해 오랫동안 사용해온 수법이다. 실제로 사회혁명이 시작되는 것은 노동자국가가 수립되고 나서부터이다. 이것이 선정치혁명론인데 이것은 그 타당성이 충분히 입증된 가장 기본적인 맑스주의적 주장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노준은 이것을 부정함으로써, 기회주의적 내용으로 노동자계급의 의식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정치혁명, 경제혁명, 사회혁명은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선정치혁명론은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회주의혁명에서 정치혁명이 하는 역할을 왜곡하고, 노동자국가수립의 필요성을 희미하게 만드는 기회주의적인 주장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렇듯, 사노준은 노동자국가수립의 필요성을 노동자계급이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을 방해하고, 맑스주의적 강령체계의 폐기를 주장함으로써 궁극적 과제를 위한 투쟁과 당면과제를 위한 투쟁의 맑스주의적 결합조차 방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정치혁명론을 부정함으로써 마치 선정치혁명 없이 공산주의적 생산관계가 형성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노동자계급 내에 전파하고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1pt;"><strong>4) 애매함으로 가득찬 사노준의 사회주의경제론</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노준의 강령초안 전반이 읽는 이로 하여금 머리를 맑게 하기는커녕 골치 아프게 하지만 사회주의경제론이 특히 그렇다. 무엇을 정확히 말하려고 한다기보다는 가능한 한 애매하게 한다고 할 정도로 주장이 불명확하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국유화가 사회적 소유가 된다는 것은 국가권력의 성격이 사회적 권력, 즉 노동자민중(여기서도 또 노동자민중이다!-인용자) 자신의 권력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라는 당연한 구절을 국유화를 언급하는 데에서 굳이 반복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은 이미 바로 앞의 〔1〕에서 다룬 내용 아닌가?(정확히 말하면 〔1〕은 노동자국가를 다루는 부분이 아니어서 이미 한계를 안고 있지만), 무언가 국유화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남기고 싶은 것인가?</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또한 강령초안은 “노동자 민중을 위로부터 동원하고 수동화하는 관료적 중앙집중적 계획경제를 극복해 갈 것이다”라고 했는데 ‘관료적인’ 것을 극복하겠다는 것인가? 중앙집중적인 것 자체를 극복하겠다는 것인가?</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9e0808;">13)</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강령초안의 10쪽에는 “중앙집중적 계획경제와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관료적 지배체제만을 강화했다.”라는 구절이 당당하게 들어가 있는데 이 정도면 강령초안이 중앙집중적 계획경제와 생산수단의 국유화에 대해 부정적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9e0808;">14)</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이쯤 되면 강령초안이 주장하는 사회주의경제가 사민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경제와 무슨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집단의 활동이든 개인의 활동이든, 자치적인 활동의 영역을 최대한 확장하면서 사회적으로 필요한 영역을 사회화하는 것이다.”라는 구절은 무엇을 주장하기 위해 삽입한 구절인가? 사회적으로 필요한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여기서도 사회화에 대한 강령초안의 자신감부족을 읽을 수 있을 뿐이다. 강령초안에서 굳이 중소자본부문은 별도로 강조하여 “점진적으로 사회화해 나갈” 것을 밝힌 이유는 또 무엇인가? 「토론용자료」에서 시장을 명확히 비판하지 않고 “계획이냐 시장이냐라는 이분법적 구도”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한 이유는 무엇인가?</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하나같이 사회주의의 핵심적 범주에 대한 자신감 있는 주장이 아니라 변명과 유보조건 달기에 중점이 가있다. 도대체 이러한 강령초안으로부터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 경제의 본질에 대해 무엇을 배우겠는가?</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1pt;"><strong>5) 사회주의 여성주의를 수용한 강령초안</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강령초안의 여성문제에 대한 입장은 전형적인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입장이다. 이는 강령초안이 여성문제를 다루는 부분의 제목, “[4] 여성 해방을 위해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투쟁과 가부장제를 극복하는 투쟁을 결합한다”에서 곧바로 확인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주의 여성주의는 현사회의 주된 문제를 자본주의의 문제인 계급문제와 가부장제의 문제인 여성문제로 보고 이를 이원론적으로 결합시킨다. 그리고 결국은 이 중에서도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급진주의적 여성주의와 똑같이 가부장제의 문제인 여성문제로 설정하다. 그래서 사회주의여성주의는 그 말에서 나타내듯이 사회주의와 여성주의를 결합시켜내는 것이 아니라 궁극에서는 여성주의로 귀착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때문에 사회주의여성주의는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사회주의, 맑스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이렇게 된 것은 여성주의자체가 사회주의, 맑스주의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맑스주의 역시 여성해방을 위해 투쟁하고 있지만 여성해방과 여성주의는 같은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 맑스주의와 여성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은 단순한 가능성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역사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것이다. 사노준은 이점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여 사회주의와 여성주의의 결합이라는 잘못된 주장을 하고 있고 강령초안의 여성문제에 대한 부분을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입장에서 작성하였다. 이러한 입장에 서다 보니 사노준은 여성문제가 단순히 계급문제의 해결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일면적으로 강조하면서 두 문제의 해결을 정확히 어떻게 결합시켜야 하는 것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기계적으로, 이원론적으로 결합시키는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오류에 똑같이 빠져있다.15)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1pt;"><strong>6) 생태주의와의 타협</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노준은 사회주의와 여성주의의 결합을 주장하는 것과 똑같이 사회주의와 생태주의의 결합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 역시 여성문제에서와 똑같이 생태문제의 해결과 생태주의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오해에 기초하는 것으로 같은 이유로 이원론적 입장에 빠져 있다.</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9e0808;">16)</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1pt;"><strong>7) 실천적 부분의 전반적 누락</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미 1의 1) 체계에서 지적하였듯이 강령초안은 원리적 부분과 실천적 부분이라는 기본체계가 결여되어 원리적 부분에서 핵심적 내용 대부분이 누락되거나 다루어진 내용도 매우 불충분하게 다루어진 것과 똑같이 실천적 부분도 핵심적 부분들이 대부분 누락되거나 불충분하게 다루어졌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① 우선 강령초안은 한국사회의 특징이나 한국자본주의의 발전 경향, 당면 혁명의 성격 등에 대한 내용이 전부 누락되어 있다. 때문에 매우 비실천적인 강령초안이 되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② 또한 강령초안은 실천적 부분에서 거의 전부라고 할 정도로 최대강령에 준하는 ‘대안적 사회주의’만을 다룰 뿐 과도적 강령, 최소 강령을 거의 다루고 있지 않다. 강령이 우리의 대안적 사회주의는 이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만으로 그 실천적 임무를 다할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강령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것이다. 이는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사노준이 맑스주의적 강령체계를 폐기했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다. 이것 역시 강령초안을 매우 비실천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또한 정작 ‘대안적 사회주의’ 역시 온전히 최대강령에 해당하는 내용이 아니라 부당하게 그 수준을 낮춘 것들이다(가령 노동자국가의 수립이 아니라 노동자 민중 권력의 수립 등).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③ 보통 실천적 부분은 요구의 형식으로 압축적으로 작성되어 선명하게 제시되는데, 사노준의 강령초안의 이 부분은, 이론적인 문건인지, 강령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장황하게 작성되어 있다. 이것 역시 실천적 부분을 매우 비실천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2pt;"><strong>3. 기타 검토</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어떤 조직이 강령초안을 제출하면, 최소한 그것이 강령토론용으로 사용될 수 있을 정도의 완성도는 구비하여야 한다. 이번에 제출된 강령초안은 사노준이 무슨 근거로 이것이 토론용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는지 의아할 정도로 완성도가 떨어진다. 필자로서는 강령초안을 최종적으로 문건화한 작성자가 이 문건을 보지 않은 채, 다시 강령초안을 작성한다면 과연 그가 동일한 강령초안을 작성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 든다.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강령의 절들 전반이 그것들이 왜 거기에 들어가야 하는지가 불분명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강령초안은 이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매우 짜증나게 하는 글이다. 이러한 강령초안이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의 본질과 사회주의혁명의 필연성, 노동자국가의 의의, 당면과제 등을 명확히 인식하게 만들지 못할 것임은 명확하다. 오히려 헷갈리게 할 것이다. 이러한 강령초안에 대해서 해설서가 가능할지도 의문이다. 내용의 해설 이전에 각각의 절들이 왜 들어갔는지조차 해설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진실을 말하면, 사노준이 제출한 이번 강령초안은 이것을 문건으로 완성한 작성자가 자신의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한번 정돈해 본 수준의 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선전, 선동의 토대로서 역할을 할 문건으로 역할하기에는 글 작성자의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이해 자체가 기본적으로 부족하다. 필자로서는, 작성자가 결함투성이의 강령초안을 수정 보완하여 다시 작성하기 보다는 차라리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부터 다시 확보하는 것이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12pt;"><strong>맺으며</strong></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상에서 필자는 사노준이 제출한 강령초안이 사회주의강령체계를 이탈했다는 점, 이로 인해 원리, 실천적 부분 모두에서 부실한 강령이 되었다는 점을 비판했다. 또한 사회주의노동운동에 대한 평가를 회피하고 노동자국가를 강령초안에서 누락시키는 기회주의적 태도를 표출하였으며,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맑스주의에 대한 노골적인 수정을 이론화하고 있다는 점 등을 비판하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강령초안이 이러한 수많은 문제점을 안게 된 것은 사노준의 조직 상태의 반영이다. 강령초안이 제출되었음에도 사노준 내에서조차 강령초안이 어색한 옷으로 남아 있는 것은 사노준이 조합주의와 경험주의로부터 온전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적, 맑스주의적 강령체계의 폐기, 선정치혁명론 부정 등은 사노준이 사회주의이론을 그 안에 전혀 축적하지 못하고 있으며, 수정주의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이론이 내부에 만연하여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만약 사회주의이론을 그 안에 축적하고 있다면, 강령초안이 이러한 수준으로 작성되어 공개되기 전에 조직 내에서 충분히 걸러졌을 것이다. 사회주의적, 맑스주의적 강령체계의 폐기를 무슨 장점으로 생각하는 착각은 사노준이 사회주의에 대해서 기본적인 이해조차 내부에 축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아울러, 조직이 관료주의적 변질과 단호히 단절하지 못하고 있는데 강령초안이 긴장감과 생동감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사노준의 강령초안은 사회주의 강령임을 표방하고 있지만, 전혀 사회주의적인 강령이 아니다. 체계, 형식 ,내용 모두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이유로 사노준의 강령초안은 노동자계급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교육적 역할을 전혀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반대로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오히려 방해하고 있다. 사노준의 강령초안이 안고 있는 문제점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고, 이것이, 사노준의 강령초안이 수정 보완되는 것이 아니라 폐기되어야 하는 이유이다.</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9e0808; font-size: 12pt; font-weight: bold;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lt;미 주&gt;</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 </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1903년 강령 전체가 「강령토론」웹사이트 강령토론자료실에 게재되어 있는데 참고하기 바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2) 이 역시 「강령토론」웹사이트 강령토론자료실에 게재되어 있는데 참고하기 바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3) 「토론용자료」는 과도적 강령을 1930년대에 트로츠키가 처음으로 도입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데 레닌은 이미 오래전, 1917년에 이를 도입하였다. 이 점은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주제와 직접적 관련이 없기 때문에 이 점만을 언급하는 것으로 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4) 필자는 「강령토론」제 2호에 게재한 「이장규 동지의 의견에 대한 답변」에서 사회주의혁명단계로 들어선 나라에서 강령이 취해야 할 체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독자들이 참고하도록 해당 부분 전체를 인용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6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④ 강령의 요구수준에 대해서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마지막으로 이장규 동지는 요구사항과 관련해서 “[Ⅱ]장에 서술되어 있는 요구사항의 경우, 최대강령적인 요구와 이행기강령적인 요구와 당면최소강령적인 요구들이 혼재되어 있는바 이것을 하나의 강령에 함께 담는 것이 타당한 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고 보인다. 또한 부분적 요구 중에서는 노동강령 부분만을 별도로 서술했는데 이것이 타당한지 아니면 노동강령 부분도 전체 요구사항 내에서 같이 다루는 것이 타당한 지도 논의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는 의견을 밝히고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6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전통적으로 1917년 이전까지 사회주의정당들은 최대강령 대 최소강령의 형식의 강령을 채택하고 활동해왔다. 당면 혁명의 단계가 부르주아적 단계에 있는 나라들에서 강령은 최대강령과 최소강령을 결합하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는데 1903년에 채택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첫 번째 강령은 이의 대표적인 예이다. 1903년 강령은 원리적 부분은 최대강령, 실천적 부분은 최소강령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예이다. 그러나 당면 혁명의 단계가 사회주의혁명의 단계가 된 나라에서 그리고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역사적 시기가 전개되면서 최대강령 대 최소강령의 형식은 낡은 형식이 되었다. 이 경우 최대강령 대 과도적 강령, 여기에 최소강령을 보충하는 형식이 보다 적절한 형식이 되었고 이러한 형식은 1917년 레닌이 제출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개정강령 초안(1917. 4-5)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새로운 형식에서 전체체계가 최대강령 대 과도적 강령, 여기에 최소강령을 보충하는 형식이 보다 적절한 형식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부르주아적 혁명단계를 지나 사회주의혁명단계로 들어선 나라에서는 실천부분조차도 최대강령적 요구를 기본으로, 과도강령적 요구, 최소강령적 요구를 결합, 포괄하는 형식이 되었다. 강령초안은 이러한 새로운 형식을 따르고 있고 그래서 요구들의 수준이 최대강령적 요구, 혹은 과도강령적 요구, 최소강령적 요구로 단일화되지 않고, 최대강령적 요구를 기본으로 하면서 과도적 강령수준의 요구, 최소강령수준의 요구가 결합되게 된 것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노동강령부분을 전체 일반적 요구와 구분하여 제시하였는데 사회주의노동자당으로서 여전히 이 부분을 특별히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그렇게 하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5) 이것은 과학적 사회주의의 기본 중에서도 기본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6) 누락된 핵심적 내용들은 2.에서 곧바로 다루도록 하겠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7) 가령 강령초안의 2, 3쪽 “‘위기’의 시대에 다시 ‘사회주의’의 깃발을 들며”는 각 절들의 핵심내용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장황하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6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4~9쪽 “현대자본주의와 노동자”는 제목을 “현대자본주의와 … ”로 해놓고는 곧바로 소항목 1은 “1. 문제는 ‘자본주의’이다”라고 한다. 그리고는 다시 “2. 자본의 독재를 폐기한 새로운 대안 세계로”는 장황하게 ‘현대’자본주의를 언급하고 있다. 완전한 갈팡질팡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8) 수정주의, 이를 계승한 사회민주주의, 그리고 스탈린주의가 그러하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강령토론」 4호에 실린 「건설할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지도이념은 맑스주의이다」를 참조하기 바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9) “‘21c 사회주의’는 더 이상 ‘국가권력 장악을 통한 정치혁명 이후 사회혁명’이라는 도식을 고집하지 않는다. ‘21c 사회주의’는 단지 국가권력의 장악이라는 단선적이고 직선적인 변혁이 아니라 ‘자유로운 생산자 연합’이라는 새로운 사회구성을 위한 권력의 형성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변혁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先국가권력 장악 後사회혁명’, ‘국유화 이후 사회화’처럼 단계적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사회혁명을 내포한 정치혁명의 과정 속에서 준비해야 하며, 그 현 실태가 ‘대체권력(노동자민중권력)’이다.”(「토론용자료」8쪽) </span></p>
<p style="margin-bottom: 6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0) “다른 하나는 ‘최대강령-최소강령’을 ‘최대강령-이행기 강령’으로 대체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런 구분 자체를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대중이 사회주의 혁명의 길로 가는 것은 ‘노동자들의 일상적 요구 -&gt;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 -&gt; 사회주의적인 제반 조치 시행’이라는, 단계적 과정을 밟아 체계적으로 진행되고 인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 세 가지는 세 가지 수준의 단계를 밟아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최대강령-이행기 강령’이란 설정은 여전히 ‘선정치혁명 후 사회혁명’이라는 도식의 잔재일 뿐이다.”(「토론용자료」21쪽)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1)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강령토론」 4호에 실린 「건설할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지도이념은 맑스주의이다」를 참조하기 바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2)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강령토론」창간호에 실린 필자의 「부르주아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의 차이」를 참조하기 바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6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3) 똑같은 문제가 「강령토론」창간호에 실린 이장규의 글, 「“강령초안”에 대한 몇 가지 의견」에서도 발견되어 필자가 2호의 「이장규 동지의 의견에 대한 답변」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 바 있다. 참고로 이장규 동지는 작년에 있었던 9.11 사회주의 강령토론회에서 자신이 중앙집중적 계획자체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 아님을 밝힌 바 있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6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② 공산주의적 생산관계는 중앙집중적 계획경제체제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6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장규 동지는 소련에서 관료주의적 변질이 발생하기 시작하는 단초가 토대에 있었던 것으로 잘못인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의견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정작 관료지배체제의 물적 토대는 중앙집중적 계획경제체제라고 함으로써 중앙집중적 계획경체체제와 관료지배체제를 곧바로 연관 짓고 이를 피할 수 있는 토대가 분산적인 계획경제체제인 것처럼 상정하고 있다(“필자가 생각하기에, 관료지배체제의 물적 토대는 중앙집중적 계획경제 체제이다.”, “강령초안도 이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동자자주관리와 민주적인 계획을 새로운 사회주의의 핵심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간략한 선언적 언급에 그치고 있는 바, 필자의 판단으로는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심화발전으로서의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민주적 사회주의의 핵심적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관료중심적인 중앙집권적 계획경제가 아니라, 노동자와 인민의 자주적인 결정권이 존중되는 분산적이고 민주적인 계획경제체제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가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이 집중적으로 고민하고 논의해야 할 지점이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6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이장규 동지의 글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장규 동지가 ‘관료주의적인’ 중앙집중적 계획경제체제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중앙집중적 계획경제체제일반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민주적 계획경제는 결코 분산적인 경제체제가 아니다. 계획경제체제는 본질적으로 중앙집중적 경제체제이다. 민주적 계획경제체제와 관료적 계획경제체제는 중앙집중적 성격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전자가 의사결정과정이 민주적이고 참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달리 후자가 관료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다. 그 결과 후자의 경우에 중앙집중성은 초중앙집중성으로 나타나고 지시적, 명령적 경제체제가 출현하게 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6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강령초안에서 “노동자자주관리체들이 시장을 통해서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인 계획을 통해 결합하게 될 것이다”라고 할 때 이는 민주적 계획이 분산적인 형태를 취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민주적 계획이 중앙집중성을 상실하면 계획은 극심한 불균형과 혼란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경제가 고도로 사회화된 조건에서 각 경제주체의 결정이 중앙집중적으로 조절되지 못하면 경제는 무정부상태에 빠지게 된다. 민주적 계획은 중앙집중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계획에 최대한 각 경제주체가 참여하게 하고 이해의 상충이 있을 때 이를 민주적으로 조절하고 결정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시적, 명령적 경제체제가 주요한 결정뿐만 아니라 과도하게 의사결정을 집중한 것, 그래서 관료들의 독단적인 결정을 야기하고, 매우 많은 자원의 낭비를 초래한 것과 대비하여 민주적 계획이 많은 결정을 분산화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이것이 의사결정의 전면적 분산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필자가 보기에 이장규 동지가 분산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이를 중앙집중적이라는 것에 대비하여 사용하는지 초중앙집중주의적이라는 것에 대비하여 사용하는지가 100% 분명하지는 않다. 실제로 전자로 읽힐 수 있는 구절들이 많은데 만약 전자라면 그 계획은 작동하기 어렵다. 공산주의적 생산관계가, 자본주의사회에서 고도로 사회화된 생산과 사적 전유사이의 기본 모순을 해결하여 생산의 사회화를 전면화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민주적 계획은 중앙집중성을 필수적인 것으로 요구한다. 만약 후자라면 이장규 동지가 분산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하고 이러한 전제에서 계획의 민주성과 참여성을 최대한 높일 수 있는 실천적 방법을 찾는 것으로 방향설정을 하고 함께 고민 토론해갔으면 한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4) 아마 사노준은 강령초안의 내용을 필자가 오해했다고 할지 모르겠다. 문제는 강령초안이 이런 오해를 야기할 수 있을 만큼 애매하게 작성되었다는 점이다. 강령초안에 중앙집중적 계획을 실천할 것을 오해할 여지없이 규정하는 것이 강령초안이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이 아닌가?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5) 이와 관련된 보다 자세한 내용은 「강령토론」 4호의 「여성문제, 계급문제에 대한 이원론적 접근 비판」을 참고하기 바란다. </span></p>
<p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16) 이원론적 접근에 대한 맑스주의적 비판은 「강령토론」3호의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을 참고하기 바란다. </span></p>
]]></content:encoded>
			<wfw:commentRss>http://programto.net/wordpress/?feed=rss2&amp;p=918</wfw:commentRss>
		<slash:comments>0</slash:comments>
		</item>
		<item>
		<title>여성문제, 계급문제에 대한 이원론적 접근 비판</title>
		<link>http://programto.net/wordpress/?p=878</link>
		<comments>http://programto.net/wordpress/?p=878#comments</comments>
		<pubDate>Mon, 15 Mar 2010 05:41:10 +0000</pubDate>
		<dc:creator>강령토론</dc:creator>
				<category><![CDATA[여성문제]]></category>
		<category><![CDATA[제 4호]]></category>
		<category><![CDATA[강령토론]]></category>
		<category><![CDATA[강령토론 4호]]></category>
		<category><![CDATA[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4호]]></category>
		<category><![CDATA[여성해방]]></category>

		<guid isPermaLink="false">http://programto.net/wordpress/?p=878</guid>
		<description><![CDATA[<p><!--StartFragment--></p>
<p class="본문"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이 상 진 (노동해방실천연대(준) 회원) </span></p>
<h3>들어가며</h3>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img class="alignleft size-full wp-image-829" title="imagescafgxnt4" src="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0/03/imagescafgxnt4.jpg" alt="imagescafgxnt4" width="139" height="184" /></span></span>2008년부터 일어난 전세계적인 경제대공황은, 전 세계 민중들에게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실현해야 한다는 대중적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관심 밖으로 내몰렸던 자본론이 다시 인기를 얻고, 경제공황의 타격을 직접적으로 받았던 유럽에서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여론조사가 진행되기도 한다. 한국사회에서도 삶과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주장이 대중적으로 제기되고 있는데, 이는 이러한 상황의 반영인 것이다.</span></p>
<p><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p=878" class="more-link">Read more on 여성문제, 계급문제에 대한 이원론적 접근 비판&#8230;</a></p>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tartFragment--></p>
<p class="본문"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이 상 진 (노동해방실천연대(준) 회원) </span></p>
<h3>들어가며</h3>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img class="alignleft size-full wp-image-829" title="imagescafgxnt4" src="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0/03/imagescafgxnt4.jpg" alt="imagescafgxnt4" width="139" height="184" /></span></span>2008년부터 일어난 전세계적인 경제대공황은, 전 세계 민중들에게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실현해야 한다는 대중적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관심 밖으로 내몰렸던 자본론이 다시 인기를 얻고, 경제공황의 타격을 직접적으로 받았던 유럽에서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여론조사가 진행되기도 한다. 한국사회에서도 삶과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주장이 대중적으로 제기되고 있는데, 이는 이러한 상황의 반영인 것이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그런데 자본주의의 위기는 경제시스템 자체의 문제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역사적 생산양식의 하나인 자본주의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인간과 인간들간의 관계들조차 자본주의 방식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인간의 삶 전반을 철저히 파괴하고 위기에 처하게 만들고 있다. 생태문제만 보더라도 자본주의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서는 궁극적 해결전망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자본주의에 대한 극복은 단순히 경제제도의 문제를 넘어 어떠한 사회를 인류가 추구해 나가야 하는지 의문을 던지는 것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실현하려는 대중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운동 자체도 자신을 반드시 혁신, 현대화해야 하는데, ‘(가칭)한국사회주의 노동자당 강령 초안’(이하 강령초안)은 이를 위한 핵심 중의 하나로 현대사회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는 여성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능동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여성문제가 현대사회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은, 현대에 들어 여성문제가 새롭게 나타났다는 뜻은 아니다. 엥겔스의 주장을 보더라도 여성억압은 계급의 등장과 더불어 출현한 것으로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여성억압에 맞선 투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본주의 출현 이후에 본격화되었고, 20세기를 관통하면서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는 뜻에서 그렇다. 현재 한국 사회만 보더라도 여성문제는 다양하게 등장하여 제도적으로 일부 진전이 되기도 하고, 이제 막 문제의식이 싹트거나 벌써 논란거리가 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남성 중심의 호주제는 철폐가 되었고, 여성의 정치참여를 높이기 위한 할당제가 도입되기도 하였다. 낙태 허용, 간통죄 폐지 문제는 현재 논란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성들은 노동자로서 착취를 당하는 것과 함께, 같은 남성에 비해서도 차별을 받고 있고, 가정에서는 가사,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이중착취에 고통받고 있다. 여성들은 통계에도 잘 잡히지 않는 가정폭력에 고통받기도 하고, 직장 내에서는 성희롱과 성폭력으로 억압받고 있다. 대부분의 성소수자는 여전히 사회의 따가운 시선과 제도의 장벽으로 인해 억압받고 있다.<span id="more-878"></span></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수많은 여성억압의 문제들의 등장은 사회주의자들로 하여금 여성문제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해야 하는가하는 물음을 던져주었다.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지난 세기동안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고, 구체적인 실천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여성문제, 즉 여성억압의 근원과 해결방안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사회주의 진영은 이러한 이론적 논의조차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강령초안이 발표된 지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성해방을 위한 이론적 틀에 대한 논의가 특별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그 이유는 현재 한국 운동진영 내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자체가 매우 취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노동운동 내에서조차 비정규여성노동자조직화가 강조되고, 양성평등 교육도 진행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반성폭력, 양성평등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주의 진영은 여성억압에 대한 근원을 밝히고, 여성억압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을 세워서 여성억압의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실천을 준비해야 하는 과제를 부여받고 있다. </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 글에서는 일단 현재 사회주의 운동 속에서 나오고 있는 여성문제에 대한 일부 주장, “여성문제는 계급문제로 환원되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을 통해 여성문제에 대한 올바른 사회주의적 관점에 대해 검토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주장을 대표하고 있는 이론으로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있는데, 우선 이 이론에 대해 먼저 알아보고, 이 이론이 가지는 문제점을 검토하고 비판하는 것으로 하겠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
<h3>1. &#8216;급진 여성주의&#8217;에 대한 비판과 &#8216;사회주의 여성주의&#8217;</h3>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1960년대 말에 등장한 ‘급진 여성주의’는 낙태권, 성희롱 등 모든 여성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회문제들에 대한 행동적인 대응과 여성이 자신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급진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억압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을 공유하도록 하고, 이를 바탕으로 생활 속에서 남성의 성차별주의에 저항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려 하였다. ‘급진 여성주의’는 이러한 방식으로 사회의 성차별에 맞선 투쟁에 승리할 수 있을 것이고 정치적으로도 통일될 것으로 기대하였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급진 여성주의’는 이론적으로 여성억압의 근원을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생리적 특성으로 인해 여성이 남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이유로 남성지배체제가 확립되었다고 보았다. 이로 인해 파이어스톤과 같은 사람들은 과학기술의 진보에 의해 출산에 대한 인간의 통제를 획득하면 성억압에서 해방될 것으로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한편 ‘급진 여성주의’의 남성지배체제에 대한 분석은 가부장제1)라는 이론으로 발전되었는데,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구조의 핵심을 남성에 의한 여성지배구조로 보았다. 따라서 ‘급진 여성주의’는 정치적으로 모든 남성을 적으로 간주하고, 실천적으로도 분리주의, 즉 여성이 정치 사회적으로 남성과 분리되어야 한다는 식으로까지 나아가게 되었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사회주의 여성주의’는 이러한 ‘급진 여성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등장하였다.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여성억압의 문제를 자본주의의 문제, 계급문제와 분리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취하였으며, 여성해방을 위해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필수적임도 강조하였다. 그리고 부르주아 여성들과 노동계급의 여성들의 억압을 똑같이 볼 수도 없는 것이며, 제국주의 국가의 여성과 식민지 국가의 여성들의 억압도 똑같은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여성문제가 맑스주의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주장하였고, 이러한 지점을 점점 강조하고 발전시켜 나갔다. 예를 들어 “생산 또는 &#8216;정치&#8217;와 표면상 아무 관계가 없어 보이는 여성주의 쟁점들, 가족과 &#8216;사적&#8217; 생활에 관련된 쟁점들을 위한 공간을 우리의 맑스주의 구조 안에서 확보해야 한다”, “(가정내 남성폭력처럼) 상당한 확대해석과 왜곡 없인 사회주의 사상으로는 거의 간파할 수 없는 성억압의 주요한 측면들이 있다.”(유현경, 「변혁운동과 여성주의」)는 식이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
<h3>2. &#8216;사회주의 여성주의&#8217;는 이원론적 이론구조를 취하였다.</h3>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문제의식은 현재 우리 사회주의운동 진영에서도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여성문제는 계급문제로 환원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가 계급문제가 해결되면 자동적으로 여성문제도 해결되는 것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면 문제가 없다. 이는 맑스주의에서도 기본적으로 취해 왔던 입장이었다. </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엥겔스는 그의 저서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여성억압은 계급의 출현과 역사적으로 일치한다”한다고 했는데, 이는 종종 여성억압이 계급의 출현으로 발생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엥겔스는 여성억압이 계급의 발생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지, 계급의 발생 자체가 여성억압의 근원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은 아니었다. 엥겔스는 사적소유의 발생을 계급과 여성억압의 주요한 원인으로 지적하면서, 계급문제와 여성문제의 연관을 강조했지만, 결코 계급의 발생이 여성억압을 낳았다고 보지 않았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그런데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여성문제가 계급문제로 환원되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통해, 맑스주의가 남성중심적 관점이었으며, 여성문제에는 맑스주의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더 나아가 맑스주의에 대한 왜곡으로까지 나아간다는 데 있다. </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사회주의 여성주의’의 이러한 특징은 다음의 인용문에서도 잘 드러난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 mso-fareast-font-family: 나눔명조;" lang="EN-US">“(맑스주의가) 몰성적 관점, 남성중심적 관점이었음을 인정하고, 반성적 성찰로부터 다시 이론의 재구성과 실천의 형태를 결합” </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 mso-fareast-font-family: 나눔명조;" lang="EN-US">“맑스주의 사상은 ‘여성문제’가 중심적이지 않음”</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 mso-fareast-font-family: 나눔명조;" lang="EN-US">&#8220;노동과 생산에 대한 협소한 개념 자체가 새롭게 정의되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생산/재생산에 대한 무리한 위계를 없애야 한다.&#8221; (유현경, 「변혁운동과 여성주의」)</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다시 말해 여성문제를 계급문제로 환원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 실제로는 기존 맑스주의에는 여성문제를 분석할 수 있는 개념이 협소하며, 이러한 개념을 “맑스주의 내에 새로 구성해야 한다”고 하는 주장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각 역사발전단계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경제적 관계’가 결정적이라는 유물론적 이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이는 ‘근본모순 증후군’에 빠진 시대착오적이고 환원론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며, 경제적 관계는 역사발전단계를 결정하는 다양한 요소 중 하나일 뿐이라는 태도를 가진다. 결국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이 생산력이나 생산관계의 문제로 ‘환원’되어져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사회주의 여성주의’는 맑스주의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자신이 비판했던 ‘급진 여성주의’로부터 ‘가부장제’라는 비맑스주의적 개념을 도입하게 된다.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가부장제가 지배적인 생산양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독자적인 논리와 역사를 가지는 것으로 보고, 봉건제 생산양식,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아니라, 봉건적 가부장제,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와 같이 역사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한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를 통해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경제적 모순으로서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남성에 의한 여성의 지배체제로서 ‘가부장제’라는 이원적인 논리를 가지게 된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
<h3>3. 이원론적 여성해방운동론은 실천에 있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뿐만 아니라, &#8216;급진 여성주의&#8217;로 귀결되는 경향이 있다.</h3>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사회주의 여성주의’와 유사한 경우가 ‘생태주의적 맑스주의’에도 나타난다. ‘생태주의적 맑스주의’에서도 맑스주의 이론이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핵심으로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기 때문에, 생태문제를 해석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예가 제임스 오코너의 ‘이차모순론’이다. 제임스 오코너는 생태문제에 대한 이론화를 하는 과정에서, 맑스주의가 생산조건(자연)을 부차적으로 보고 있다며, 생산조건이 생산력/생산관계와 모순관계가 있다는 새로운 이론, ‘이차모순론’을 만들어 내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기존의 모순 외에 생산력/생산관계와 생산조건 사이의 별도의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원론은 결국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극복하는 투쟁과 생산조건과 생산력/생산관계의 모순을 극복하는 투쟁을 병렬적으로 위치시켰다. 결국 오코너의 ‘이차모순론’은 스스로가 비판하였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의 실천처럼 사회주의 운동과 생태운동을 기계적으로 분리시켰고, 결과적으로는 사회주의 운동을 생태운동에 종속적인 위치로 전락시키는 오류를 야기하였다.2)</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여성문제에 있어 이원론적 입장은, 생태문제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맑스주의를 협소하게 인식하고, 역사유물론을 왜곡하는 것이다. 맑스주의의 유물론은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개념을 통해 사회의 경제적 관계만을 파악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역사유물론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사회적 삶의 생산을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역사유물론은 경제활동에 대한 협소한 설명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유지시키는 모든 측면들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여성억압을 역사유물론이라는 틀 속에서 파악을 하지 않고, 역사의 발전을 결정짓는 요소로서 생산양식과는 독립적인 기원과 상대적인 자율성을 갖는 가부장제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사회주의 여성주의’가 보이고 있는 이원론적 태도는 여성문제와 계급문제를 기계적으로 분리하는 것으로 관념론적 방법론일 뿐 아니라, 결국 잘못된 실천 상으로 귀결된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여성억압의 근원을 총체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계급운동으로서 사회주의 혁명운동과는 독자적인 여성운동을 상정하게 되며, 이는 점차적으로 여성운동을 계급운동보다 우위에 두는 실천으로 나타나게 된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또한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이원론적 이론틀은 사회주의 혁명과 여성해방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밝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불안정하다. 그 결과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사회주의 혁명이 여성해방을 담보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가부장제가 타파되어야만 자본주의가 폐지될 수 있다는 상반된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또한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급진 여성주의’로부터 가부장제라는 개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이론적 근거를 확보하려고 했기 때문에, ‘급진 여성주의’로 돌아가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
<h3>4. &#8216;사회주의 여성주의&#8217;가 주장하는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운동은, 계급투쟁과 여성해방운동을 결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범계급적인 여성운동을 계급투쟁의 우위에 두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다.</h3>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또한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전략으로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운동을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 mso-fareast-font-family: 나눔명조;" lang="EN-US">“1. 여성조직의 정치적 조직적 자율성을 인정해야 한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ascii-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여성의 특수한 이해를 대변하는 독자적인 여성조직이 있어야만 여성의 이해가 제대로 대변되고 여성문제가 심각히 고려될 수 있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 mso-fareast-font-family: 나눔명조;" lang="EN-US">2. 이 조직은 독자적으로 조직되어야 하고 이에 조직적으로 권위가 부여되어야 하며, 여성들이 제기하는 이슈들에서 동수로 대표되어야만 하고, 독자적인 표현과 결정, 관리 통제권이 부여되어야 한다. 여성집단 내적 구조가 여성주의적 자율주의의 수평적 원리를 따를지라도 그것은 존중되고 허용되어야 하며 조직내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받아야 한다.” (유현경, 「변혁운동과 여성주의」)</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여성을 사회주의 운동의 주체로 세우기 위해 특수한 임무를 가진 당의 조직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사회주의 정당 내 조직으로서 자율주의를 주장하면서 당내 독자적인 당원구조를 가진 조직을 허용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정당 원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왜 여성조직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강조하는가?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입장에 서 있는 이론가들의 태도로 판단해 볼 때, 이는 정당 또한 남성 중심의 정당이라고 보기 때문이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는 단순히 사회주의 정당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 구조 자체를 가부장제, 남성중심의 구조로 바라보는 것으로 연결되어 있다. 남성들이 여성을 종속시키는 데 공모하고 있다고 보는 ‘사회주의 여성주의’의 경향은 필연적으로 모든 사회계층의 여성들이 여성으로서 억압을 겪고 있으며 공동으로 투쟁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결국 여성운동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노동자 계급운동과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범계급적인(부르주아 여성을 포함하는) 여성운동을 강조하는 경향을 낳는다. 이는 여성해방운동을 계급투쟁의 우위에 두는 경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여성운동과 병렬적인 위치로 사회주의 혁명운동을 배치하는 것이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그렇다면 사회주의 운동은 여성해방운동에 대해 어떤 조직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가?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정당 내 독자적 여성조직(예를 들어 여성위원회)은 필요하다. 그 이유는 아래 인용문처럼 레닌의 발언에서도 충분히 나와 있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 margin-left: 40pt; margin-right: 4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 mso-fareast-font-family: 나눔명조;" lang="EN-US">“우리가 공산주의 여성들의 분리된 조직을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성당원도 남성당원과 똑같이 당의 일원이고 양자는 같은 권리와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한 이견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여성노동자 대중을 각성시키고 이들을 당에 결합시키며 당의 영향 아래 튼튼히 묶어 세우는 특별한 임무를 수행할 활동그룹, 위원회, 특별위원회, 전문부 등의 기관이 필수불가결합니다. 이것은 여성 사이에서 체계적인 사업을 벌이기 위한 것이지요. 우리는 각성되고 조직된 여성들을 훈련시켜서 공산당의 지도 아래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나서도록 해야 합니다. 나는 단지 공장과 가정에서 일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 여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농촌 여성, 소부르주아여성 또한 자본주의의 희생자이며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이들 여성은 정치와 사회에 대해서 무지하며 사고도 후진적입니다. 그들은 타인으로부터 고립된 영역 내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생활방식도 매듭이 모호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이 현실을 무시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짓입니다. 우리는 여성 속에서 활동을 추진하기 위하여 적당한 기관, ‘특별한 선동방법, 특별한 조직형태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페미니즘(여권확장주의)이 아니며 실천적인 혁명적 방책입니다.” (‘여성문제에 대한 레닌과의 대화’ 클라라 제트킨)</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한국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사회주의 정당 내 남성과 여성은 같은 권리와 의무를 가지게 될 것임은 자명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여성들이 남성과 같은 수준으로 당활동에 참여하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실제로 한국의 모든 정당, 진보정당을 포함하여서도 보면 여성당원은 남성당원보다도 훨씬 적다. 유교적 전통이 아직도 남아 있고,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여성들은 가정에 묶여있기 일쑤다. 이렇기 때문에 여성들을 당활동의 주체로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별도의 활동기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
<h3>5. 결론</h3>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사회주의 여성주의’는 이론에 있어서, 맑스주의의 역사유물론과는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가부장제를 주장하면서 이원론적 구조로 나아갔다. 이는 계급문제와 여성문제를 총체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사회주의 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내지 못하였다.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맑스주의에서 좋은 것, 급진 여성주의에서 좋은 것을 취합하여 “행복한 결혼”이 되리라 생각하였지만, 사실은 물과 기름처럼 하나로 합쳐질 수 없는 것이었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여성문제에 있어 이러한 이원론적 입장은, 결국에는 여성운동을 하나의 부문운동으로서, 사회주의 변혁운동과 병렬적으로 위치시키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러한 병렬적 운동이 지속되다보면 결국에, ‘급진 여성주의’의 입장으로 귀결되는 경향이 강하다. 그 이유는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나름대로 완결적인 이론 틀을 가지고 여성억압의 체계를 설명하고 있는 ‘급진 여성주의’로부터 가부장제라는 개념을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조직적, 실천적으로도 여성운동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노동자계급적 여성해방운동보다는 범계급적 여성운동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이유로 사회주의자들은 여성문제를 이해하는데 있어 ‘사회주의 여성주의’로 빠지는 것을 명확히 비판해야 한다. 이 글에서 근래 제기되고 있는 ‘여성문제는 계급문제로 환원되어서는 안된다’라는 주장이 ‘사회주의 여성주의’로 귀결되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번 글은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주로 ‘사회주의 여성주의’에 대해 비판을 하였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자들은 여성억압의 원인을 어떻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며, 어떻게 투쟁을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다. 서두에서 밝힌 바대로 여성억압의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강령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사회주의 운동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여성억압의 근원과 해결방안에 대해 명확하게 정식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여성문제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이론적 작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성억압의 기원에 대한 엥겔스의 설명은 인류학적 지식의 발전으로 일부 부정확한 사실관계가 드러났지만, 여성억압의 근원을 이해하는 이론으로는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최근 성별분업과 계급의 등장이 여성억압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연구성과들이 제시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여성문제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이 제시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맑스주의의 방법론인 역사유물론은 인간사회의 총체적 구조 속에서 여성억압에 대해 설명하는 적절한 이론틀을 제공해줄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 속에서 향후 여성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정식화하는 내용들이 강령토론을 통해 더욱 풍부해지기를 기대한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미주)</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1) 가부장제는 원래 남성혈통을 따르는 친족구조를 지칭하는 데, ‘급진 여성주의’는 이를 완전히 다른 의미로 사용하였다. ‘급진 여성주의’에서 사용하는 가부장제 개념은 남성지배와 여성억압을 핵심으로 사회의 총체적인 구조를 뜻하고 있다. 또한 가부장제는 모든 사회, 즉 봉건제 사회, 자본주의 사회 등에서 공통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가부장제 속에서 남성은 여성에 대한 지배력을 재생산한다고 보았다. </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bottom: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2) 이에 대해서는 황정규,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을 참조바람. </span></p>
]]></content:encoded>
			<wfw:commentRss>http://programto.net/wordpress/?feed=rss2&amp;p=878</wfw:commentRss>
		<slash:comments>0</slash:comments>
		</item>
		<item>
		<title>건설할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지도이념은 맑스주의이다</title>
		<link>http://programto.net/wordpress/?p=871</link>
		<comments>http://programto.net/wordpress/?p=871#comments</comments>
		<pubDate>Mon, 15 Mar 2010 05:37:50 +0000</pubDate>
		<dc:creator>강령토론</dc:creator>
				<category><![CDATA[전체토론]]></category>
		<category><![CDATA[제 4호]]></category>
		<category><![CDATA[강령토론]]></category>
		<category><![CDATA[강령토론 4호]]></category>
		<category><![CDATA[당의지도이념]]></category>
		<category><![CDATA[맑스주의]]></category>
		<category><![CDATA[사회주의강령]]></category>
		<category><![CDATA[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4호]]></category>

		<guid isPermaLink="false">http://programto.net/wordpress/?p=871</guid>
		<description><![CDATA[<p><!--StartFragment--></p>
<p class="본문"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성 두 현 (노동해방실천연대(준) 지도위원)</span></p>
<p class="바탕글"> </p>
<h2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들어가며</span></h2>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은 현재 사회주의노동자당 건설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건설할 당을 사회주의정당으로 설정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공유되고 있음으로, 건설할 당의 지도이념이 사회주의라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당의 지도이념을 사회주의로 규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역사상 사회주의를 자처하는 많은 조류가 있었지만 대부분 실제로 사회주의가 아니었고, 현재에도 사회주의를 자처하는 많은 조류가 있지만 대부분 실제로 사회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노동운동의 한 세기 반이 넘는 역사에서 맑스주의를 제외한 여타의 조류는 대부분 현실적 적합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나고 그 결과 도태하였다. 현재에도 실내용은 전혀 사회주의가 아니면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조류들이 다수 존재한다. 때문에, 진지하게 사회주의를 실현하려는 당을 건설하려 할 때, 사회주의자들은 당의 지도이념을 사회주의로 규정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당의 지도이념을 맑스주의로 규정하여야 한다.</span></p>
<p><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p=871" class="more-link">Read more on 건설할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지도이념은 맑스주의이다&#8230;</a></p>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tartFragment--></p>
<p class="본문"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성 두 현 (노동해방실천연대(준) 지도위원)</span></p>
<p class="바탕글"> </p>
<h2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들어가며</span></h2>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은 현재 사회주의노동자당 건설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건설할 당을 사회주의정당으로 설정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공유되고 있음으로, 건설할 당의 지도이념이 사회주의라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당의 지도이념을 사회주의로 규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역사상 사회주의를 자처하는 많은 조류가 있었지만 대부분 실제로 사회주의가 아니었고, 현재에도 사회주의를 자처하는 많은 조류가 있지만 대부분 실제로 사회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노동운동의 한 세기 반이 넘는 역사에서 맑스주의를 제외한 여타의 조류는 대부분 현실적 적합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나고 그 결과 도태하였다. 현재에도 실내용은 전혀 사회주의가 아니면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조류들이 다수 존재한다. 때문에, 진지하게 사회주의를 실현하려는 당을 건설하려 할 때, 사회주의자들은 당의 지도이념을 사회주의로 규정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당의 지도이념을 맑스주의로 규정하여야 한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img class="alignright size-thumbnail wp-image-882" title="engels-marx" src="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0/03/engels-marx-150x150.jpg" alt="engels-marx" width="150" height="150" />그런데 당의 지도이념을 맑스주의로 규정한다고 할 때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것은 여타 사회주의조류가 실제로 사회주의가 아닌 것이 역사적으로 검증되었다고 해도,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맑스주의적 사회주의 역시 타당성을 잃은 것이 아닌가라는 것이다. 이 의문에 올바로 답변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당의 지도이념을 맑스주의로 규정하는 것이 갖는 정확한 의미를 분명히 하여야 한다. 우리가 당의 지도이념을 맑스주의로 규정할 때 세 가지 점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첫째, 맑스주의가 그 핵심적 내용에서 여전히 현실적합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맑스주의의 역사 과정자체가 맑스주의의 기회주의적 왜곡과의 투쟁의 역사였다는 점, 따라서 역사상 출현한 맑스주의의 왜곡을 폭로하고 이 왜곡된 맑스주의를 복원해야 한다는 점이다. 셋째는, 맑스주의는 스스로가 변증법을 그 핵심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정된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발전하는 이념으로서 맑스주의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이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 글은 먼저 이 두 가지 지점을 다룬 후, 세 번째 항목에서, 당의 지도이념을 맑스주의로 규정하지 않으면서, 절충적이며, 기회주의적인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현실의 움직임을 비판한다. 사회주의는 이미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사회주의는 지난 역사 없이 지금부터 출발하는 그러한 이념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 역사에서 맑스주의는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따라서 맑스주의를 떠나 사회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 글은 맑스주의를 우회하는 사회주의 주장이 허구적이며 절충적이고 기회주의적임을 밝히고, 이것이 어떻게 사회주의를 왜곡하고, 노동자계급을 기만하는지를 비판할 것이다. </span></p>
<p class="바탕글"> <span id="more-871"></span></p>
<h2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1. 당의 지도이념을 사회주의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당의 지도이념을 맑스주의로 규정해야 한다.</span></h2>
<p class="바탕글"> </p>
<div class="mceTemp"><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주의노동운동은 이미 한 세기 반을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를 사회주의로 주장하는 많은 조류가 등장하였다. 그런데 제 1인터내셔널의 시기를 거치면서 경쟁하던 다양한 조류 중 결국 우세하게 된 조류는 맑스주의였다. 맑스주의가 이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맑스주의가 자본주의의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밝히고, 이에 따라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가장 정확한 실천방침을 내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되어감에 따라, 초기에는 잘 드러나지 않던 경쟁하던 조류의 한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서 이들이 주장하는 사회주의가 실제로 사회주의가 아님이 입증되고, 제 2인터내셔널이 창립되는 시기가 되면 맑스주의는 대중적 사회주의노동운동이 발전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회주의당들의 지도적인 사상이 되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들로 구성된 국제조직인 제 2인터내셔널에서도 맑스주의는 지도적 사상으로서 자리매김되었다.</span></div>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제 2인터내셔널의 시기는 사회주의노동운동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시기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맑스주의는 수정주의의 등장과 기회주의의 만연으로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제 2인터내셔널의 후기로 갈수록 맑스주의는 수정주의자와 기회주의자들, 그리고 중앙파들에 의해 왜곡되고, 제 2인터내셔널의 지도부 대다수는 노동자계급을 배신하는 길로 들어섰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제 2인터내셔널의 지도부를 장악하고 있던 사회국수주의자들과 중앙파들이 ‘조국방위’를 내걸고, 전쟁에서 자국 부르주아지를 지지함으로써 제 2인터내셔널은 붕괴되었다. 이로써 이들은 말로는 사회주의를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사회주의를 배신하는 길로 들어섰다. 이후 이들은 자신들을 계속하여 사회주의로 치장하였지만 이들이 주장하는 사회주의는 실제로 세계사회주의혁명을 저지하고 자본주의를 구출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을 기만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제 2인터내셔널의 붕괴 시기에 맑스주의의 혁명적 전통을 계승하고 맑스주의를 기회주의적 왜곡으로부터 구출하여 복원한 것은 레닌, 룩셈부르크, 칼 리프크네히트 등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었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제 3인터내셔널은 이론적, 실천적으로 맑스주의적 전통을 계승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창립한 인터내셔널이었다. 제 3인터내셔널은 러시아 10월 혁명으로 시작된 세계사회주의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인터내셔널이었으며, 전세계사회주의운동과 식민지, 반식민지 나라들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의 일대 고양을 가져왔다. 그러나 10월 사회주의혁명이 변질되면서 소련사회와 제 3인터내셔널은 변질되고 이 변질 과정에서 스탈린과 스탈린 분파가 한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스탈린은 제 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와의 철저한 투쟁을 통해 복원된 혁명적 맑스주의를 새로운 형태로 왜곡하였으며, 스탈린주의는 맑스주의의 외양을 취했지만 맑스주의를 철저히 왜곡한 사상체계에 불과하였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주의노동운동사를 검토해보면, 사회주의노동운동 초기에 스스로를 사회주의로 주장한 다양한 조류가 있었으나 이들 중 대다수가 사회주의가 아님이 입증되고 도태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 2인터내셔널, 제 3인터내셔널의 시기에 스스로를 사회주의로 주장한 조류들 다수가 사실상 사회주의가 아니고, 사회주의의 왜곡이었음이 확인된다. 이 점에서 당의 지도이념을 사회주의만으로 규정하는 것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 경험을 충실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다른 한편, 현실에서는 여전히 사회주의가 아님에도 사회주의로 치장하는 조류들이 존재한다. 제 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 사회국수주의, 중앙주의를 계승한 현대의 사민주의는 여전히 자신을 사회주의로 포장하며 노동자계급을 기만하고 있다. 잔존한 스탈린주의 역시 자신을 사회주의로 치장하고 있다. 이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이비사회주의, 소부르주아적 사회주의가 자신을 사회주의로 포장하고 있다. 이 점에서도 당의 지도이념을 사회주의로만 규정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이러한 조류를 폭로하고 실제의 사회주의를 목표로 하기 위해서도 당의 지도이념을 맑스주의로 명확히 규정하여야 한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하에서 이 점들을 상세히 검토해보도록 하겠다.</span></p>
<p class="바탕글"> </p>
<h3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1) 역사상 스스로를 사회주의로 주장한 다양한 조류가 있었으나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이들 중 대다수가 사회주의가 아님이 입증되었다.</span></h3>
<p class="바탕글"> </p>
<h4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① 과학적 사회주의의 출현</span></h4>
<p><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부르주아혁명, 특히 프랑스 혁명은 이성의 지배라는 기치 하에 민중의 광범위한 참여 하에 부르주아지가 주도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혁명의 승리와 함께 혁명의 승리는 인민 일반의 승리가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승리였다는 것이 점차 드러나게 되었다. 이성의 지배라는 것도 결국은 부르주아적 이성의 지배 이상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부르주아혁명이 자본주의의 발달에 박차를 가함에 따라 곳곳에서 자본의 착취와 수탈아래 신음하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은 점점 더 악화되어갔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사상이 출현하였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그런데, 최초의 사회주의사상은 공상적 형태를 취하였다. 근대사회에서 최초로 출현한 사회주의인 공상적 사회주의는, 올바른 것이었지만 부르주아적으로 왜곡된 ‘이성과 정의’의 기치를 다시 되살리는 방식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오웬, 푸리에, 생시몽 등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공통적으로, 산업사회가 야기한 기존 사회악을 극복할 방법을 이성적으로 찾아내면 이것이 바람직한 것이기 때문에 점차 자본가들도 포함하여 다수의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내게 되어 결국은 실현가능하게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비이성적인 현실과 대비되어 고안된 이상적 대안은 이성적인 것으로서 기존질서에 대해 우월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다수의 동의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필요한 것은 도덕적으로 우월하고 지적으로 우수한 사람들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사회조직을 고안해내어 이를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알려 다수가 알게 하는 것이었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생각을 갖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게 사회주의를 실현할 주체가 특별히 노동자계급이어야 할 이유는 없었고 주체는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이성적으로 계몽된 사람들이었다. 노동자계급은 단지 구원되어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이들이 평생에 걸쳐서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자신의 고안물을 현실에서 계속해서 실험해보고 점점 더 이를 정교화하고 세부화하는 일에 몰두하고, 그래서 더욱더 환상에 빠져들게 된 것은 이들의 이러한 사상적 한계 때문이었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그런데 공상적 사회주의의 이러한 한계는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 사상이 출현할 당시의 시대적 조건이 이들의 한계를 규정했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LEFT: 58pt; MARGIN-RIGHT: 58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 mso-fareast-font-family: 나눔명조" lang="EN-US">“그러나 당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나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대립은 아직 발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대공업은 영국에서 겨우 생겨났을 뿐이며 프랑스에서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오직 대공업만이, 한편으로는 생산양식의 변혁, 즉 생산 양식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없애라고 절박하게 요구하는 충돌―대공업에 의해 형성된 계급들 사이의 충돌뿐만 아니라 대공업에 의해 나타난 생산력과 교환형태사이의 충돌―을 발전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이 거대한 생산력의 발전 속에서 그와 같은 충돌을 해결할 수단도 제공한다. 따라서 1800년에는 새 사회제도에서 발생하는 충돌들이 아직 겨우 일어나기 시작했던 만큼, 이러한 충돌을 해결할 수단의 발전 또한 아주 미미했다. 비록 공포정치시대에 파리의 무산대중이 한때 권력을 빼앗아 부르주아지 전체를 반대하는 부르주아혁명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무산 대중은 당시의 정세에서 자기들이 오랫동안 지배할 수는 도저히 없다는 것을 증명했을 뿐이다. 계급의 맹아로서 이제 겨우 일반 무산대중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아직은 독자적인 정치행동을 전혀 할 수 없었던 프롤레타리아트는 억압과 고통을 받는 계층에 지나지 않았다. 이 계층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기껏해야 외부나 위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LEFT: 58pt; MARGIN-RIGHT: 58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 mso-fareast-font-family: 나눔명조" lang="EN-US">이러한 역사적 정세가 사회주의 창시자들의 관점을 규정했다. 미숙한 자본주의적 생산상태, 미숙한 계급관계에 상응하여 미숙한 이론이 나왔다. 발달하지 못한 경제관계 속에 아직 가려져 있던 사회적 과제의 해결책을 머리 속에서 꾸며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회제도는 오직 결함만을 나타냈을 뿐이다. 이러한 결함을 없애는 것이 사유하는 이성의 과제였다. 더 완전한 사회기구의 새로운 체계를 발명하고, 선전을 통해서 할 수 있다면 모범적인 실천사례를 보여줌으로써 이를 외부로부터 현존사회에 강요해야 했다. 따라서 이러한 새 사회제도는 처음부터 공상에 그칠 운명을 지니고 있었으며, 세밀하게 작성되면 될수록 더욱더 순수환 환상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엥겔스,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주의를 위대한 사상가들의 고안물, 그래서 인간사회의 발전과 무관하게 우연히 발견되어 점차 그 도입이 확대되어 가는 것으로 상정한 공상적 사회주의에 정면으로 비판을 가하고 사회주의를 과학적 토대 위에 세운 사람이 맑스와 엥겔스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과 잉여가치론을 통해 사회주의가 어떤 사상가들의 고안물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발전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자본가들의 이윤이 노동자계급의 착취에 기인함을 밝혀내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사적 유물론을 통해, 변혁에서 결정적인 것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생각과 달리 이데올로기의 변혁이 아니라 경제적 생산조건의 변혁이라는 것,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역시 이전의 생산관계와 같이 적대적 형태이고, 또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생산관계일 뿐이며 그 안에 이 적대를 해결하기 위한 물적 제 조건을 창출한다는 것을 밝혔다. 이로써 사회주의가 관념적 구상의 산물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발전의 필연적 산물임을 분명하게 하였다. 또한, 잉여가치론을 통해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노동력의 대가로 임금을 지불하고도 잉여가치를 차지할 수 있게 되는 구조를 명확하게 밝힘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역시 노예제적 생산관계, 봉건적 생산관계와 똑같이 착취적인 생산관계임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착취자인 자본가와 피착취자인 노동자 사이에는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 관계가 존재함도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아울러 맑스와 엥겔스는 사회주의사회를 실현할 주체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무계급적인 선각자들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임을 분명히 하였다. 동시에 이들은 노동자계급이 왜 하나의 계급이면서도 계급자체를 폐지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인류해방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인지도 밝혀내었다. 이들은 노동자계급이 자본에 의해 가장 착취받는 계급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대공업의 산물이고 대공업의 발전과 함께 쇠퇴하고 몰락해가는 계급이 아니라 더욱더 성장해가는 계급이기 때문에, 또한 노동자계급이 투쟁하는 것은 부르주아혁명에서 부르주아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들이 새로운 착취와 억압 계급으로 등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억압과 착취를 철폐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명확하게 밝혀내었다. </span></p>
<p class="바탕글"> </p>
<h4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② 제 1인터내셔널 시기에 맑스주의와 경쟁한 다양한 조류가 도태하고, 맑스주의가 최종적으로 승리한 원인</span></h4>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공상적 사회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사회주의를 과학적 토대 위에 세워 놓은 맑스주의는 이후 실천과정에서 경쟁하는 여타 조류(프루동주의, 블랑키주의, 라살레주의, 바쿠닌주의)들과 상호투쟁하고 상호침투하면서 발전하였다. 초기에 맑스주의는 여타 조류와 비교하여 우세한 위치에 서 있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주의노동운동이 발전하면서, 제 1인터내셔널의 후기로 갈수록 여타 조류들은 점차 도태되었는데 이렇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맑스주의가 자본주의의 분석과 투쟁지침에서 가장 현실에 적합한 내용을 갖고 있었던 것에 반해 다양한 여타 조류들은 그렇지 못한 한계를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이 점을 맑스주의와 여타 조류를 대비하는 방식으로 압축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span></p>
<p class="바탕글"> </p>
<h5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자본주의에 대한 과학적 분석 </span></h5>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과학적인 성격의 맑스주의는 자본주의의 분석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맑스주의는 자본주의의 운동법칙을 과학적으로 해명하여 자본주의의 생성, 발전, 소멸의 과정을 명쾌하게 밝혔다. 맑스는 이윤의 원천인 잉여가치가 생산수단의 자본주의적 사적소유 때문에 발생하는 것을 폭로하고, 사적 소유에 대해 철저한 공격을 가하였다. 이 점은 사적 소유에 대한 불철저한 태도를 보이고 소규모 생산단위, 신용협동조합 및 사회보장단체 등으로 구성되는 분권화된 사회를 이상화한 프루동주의와 대조된다. 프루동은 사회적 불평등의 근본원인인 사적 소유와 상품생산은 그대로 둔 채 이것들을 바람직한 형태로 만들면 사회적 불평등을 제거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있었다. 프루동주의가 소부르주아적 사상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그가 이처럼 자기노동에 기초하는 소생산자들의 이해와 정서를 대변하였기 때문이고, 이것이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소생산자들의 사회적 비중이 줄어들면서 프루동주의가 도태되게 된 주요한 이유이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주의의 과학적 분석은 임금철칙설을 주장한 라살레주의와도 대조된다. 맑스는 자본주의의 분석을 통해 임금이 노동력의 가치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해명하고, 임금인상투쟁의 의의와 한계를 동시에 인정하였다. 이와 달리, 라살레는 비과학적인 임금철칙설을 주장하며, 임금인상투쟁, 경제투쟁, 나아가 노동조합의 의의를 부정하였다. </span></p>
<p class="바탕글"> </p>
<h5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정치투쟁과 국가, 정당에 대한 과학적 태도</span></h5>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맑스주의는 경제적 변혁이 변혁에서 결정적인 것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것이 맑스주의가 정치투쟁의 역할을 부정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설정하는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맑스주의는 경제적 해방을 위해 정치적 해방이 필요함을 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부르주아국가권력을 파괴하고 노동자국가,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수립할 것을 주장하였고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당 건설을 강조하였다. 이 점이 맑스주의와 무정부주의를 가르는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제 1인터내셔널 시기 대표적인 무정부주의는 프루동주의와 바쿠닌주의였다. 이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공통적인 것은 정치투쟁과 정당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특히 모든 국가의 즉각적인 폐지를 관념적으로 주장하며 노동자국가수립에 대해서 부정적인 점이다.(맑스주의 역시, 부르주아국가의 파괴를 주장하지만 곧바로 모든 국가가 폐지될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맑스주의는 수립된 노동자국가가 계급의 폐지와 함께 그 필요성이 다해 점차 소멸해갈 것으로 주장한다. 이와 달리 무정부주의는 부르주아국가의 파괴와 함께 모든 국가의 폐지를 주장하고 노동자국가의 수립에 반대한다) 이는 자본가계급에 대항하는 주요한 투쟁무기인 정치투쟁, 노동자국가의 수립을 포기, 반대하는, 그래서 자본주의에 반대하고 사회주의를 실현하려는 투쟁을 협소화, 무력화하는 입장이었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프루동주의와 바쿠닌주의와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국가문제에서 맑스주의와 대립한 것이 라살레주의이다. 라살레는 국가에 대한 태도에서 헤겔과 같이 국가를 권리와 정의의 기구로 보았다. 그는 오직 국가를 통해서만 승리가 획득될 수 있으며 국가를 “개인들의 힘을 수백만 배로 증대시키는 개인들의 동맹”이라고 설명했고 “국가의 목표는 인류 사이에서 자유의 교육과 발전”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국가가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의를 경청할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혁명은 불필요하다고 믿었다. 이런 국가론은 전형적인 헤겔식, 관념적인 국가론이었다. 이 점에서 라살레의 국가론은 프루동의 국가론과 정반대의 위치에 서서 맑스주의 국가론과 대립하였다. 라살레는 이러한 국가론과 환상적인 협동조합론을 결합하여, 국가의 보조를 받는 협동조합망을 형성해갈 경우 이것이 점차적으로 자본주의를 대체해 갈 것으로 주장하였으며, 이런 생각의 연장선에서 보통선거를 요구하였다.(라살레식 보통선거요구는 보통선거가 실시되면 의회의 다수를 노동자가 차지할 것이라는 잘못된 판단에 기초하였다) 그래서 라살레는 ‘민주화된’ 국가(노동자국가가 아닌)가 사회주의의 실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바라봄으로써 ‘국가’사회주의라는 국가주의에 매몰되게 되었고, 이런 오류에서 급기야는 비스마르크와 거래하는 배신적 행위조차 저지르며 스스로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었다.</span></p>
<p class="바탕글"> </p>
<h5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경제투쟁, 노동조합에 대한 과학적 태도</span></h5>
<div class="mceTemp"> </div>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맑스주의는 경제투쟁, 노동조합의 한계를 잘 인식하면서도 경제투쟁, 노동조합의 적극적인 역할 역시 옹호하였으며,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결합을 주장하였다. 이와 달리 프루동주의는 정치투쟁, 정당운동에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에도 반대하였다. 라살레주의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임금철칙설을 주장하며 노동조합에 반대하였다.</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d30a0a;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1)</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바쿠닌주의는 프루동주의와는 달리 노동조합의 역할을 인정하였지만 노동조합도 결국에는 폭동을 주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일상적인 투쟁을 경멸하였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자본주의가 발전하고, 노동조합운동이 발전함에 따라 경제투쟁과 노동조합에 대한 태도에서 맑스주의가 올바르고, 프루동주의, 라살레주의, 바쿠닌주의가 틀린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후자의 조류들은 도태의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상에서 우리는 제 1인터내셔널 시기에 맑스주의와 경쟁한 다양한 조류가 도태하고 맑스주의가 최종적으로 승리한 원인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맑스주의가 가장 과학적이었고, 그 때문에 맑스주의가 현실적합성을 가졌던 반면 여타 조류는 그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사회주의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스스로를 사회주의로 규정하는 다양한 조류가 출현하였으나 맑스주의 외에 다수의 여타 조류는 실제로 사회주의가 아님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span></p>
<p class="바탕글"> </p>
<h4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③ 제 2인터내셔널 시기에 등장한 수정주의, 이를 이은 기회주의, 현대의 사민주의는 사회주의를 배신하였다.</span></h4>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1889년 제 2인터내셔널이 창립된다. 제 2인터내셔널은 제 1인터내셔널과 비교하여 주요나라들에서 대중적으로 성장한 사회주의정당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점이 특징이다. 제 2인터내셔널 시기에 사회주의노동운동은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제 2인터내셔널이 창립되었을 때 맑스주의는 이미 다른 조류에 대해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제 1인터내셔널 시기에 맑스주의와 경쟁한 다른 조류들은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자체로서는 매우 미미한 영향력만을 확보하게 되었을 뿐이며 맑스주의는 제 2인터내셔널에서 주도적인 사상이 되었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그런데 맑스주의가 주도적인 사상이 되었다고 해서, 맑스주의에 적대적인 경향들이 맑스주의에 대해 투쟁을 멈춘 것은 아니었다. 이제 맑스주의가 주도적인 사상이 되자 이 적대적인 경향들은 투쟁의 방식을 바꾸어, 맑스주의 내부에서 맑스주의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는데, 수정주의의 등장이 그것이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한때, &#8216;정통파 맑스주의자&#8217;를 자처하던, 베른스타인은 1896년부터 신시대지에 ｢사회주의의 문제들｣이라는 연재 논문을 게재하고, 1899년에는 ｢사회주의의 전제들｣이라는 책을 통해 19세기말의 자본주의의 현실은 맑스의 자본론, 축적론의 전개와 일치하지 않으며,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궁핍화에 기초한 자본주의붕괴론은 틀렸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그는 노동가치설과 변증법적 방법론도 비판하고 당이 민주사회주의적인 개량정당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사회주의는 노동자국가의 수립없이도 자본주의가 그대로 발달하여 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솔직히 말해 … &lt;사회주의&gt;의 목표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운동이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선언하였다. 베른스타인은 이로써 사실상 맑스주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베른스타인은 자신의 수정주의가 여전히 사회주의인 것으로 주장하였지만 실내용에서 전혀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베른스타인의 수정주의가 등장하자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강력한 비판이 가해졌다. 베른스타인의 수정주의적 주장은 1898년 독일사민당 슈투트가르트 대회의 주요 의제로 상정되어 3일간의 치열한 토의 끝에 거부되었다. 그의 주장은 1899년 하노버대회에서도 패배하였고 1903년 드레스덴 대회에서도 패배하였다. 당시만 해도 아직 맑스주의를 포기하지 않았던 카우츠키는 베른스타인의 수정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의 기본적인 원칙과 개념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그리고 베른스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은 독일사민 당내로만 제한되지 않았다. 국제적인 비판이 수년간 진행되었는데(이 중 대표적인 것이 로자 룩셈부르크의 비판이다. 그녀는 베른스타인의 이론이 의미하는 것은 “사회민주주의의 최종 목표인 사회변혁을 방기하고, 반대로 계급투쟁의 수단인 사회개량을 그 목표로 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1904년 제 2인터내셔널 암스테르담대회에서는 프랑스의 게드파가 드레스덴결의지지안을 제출하여 이 안이 통과되었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일련의 독일사민당 결의와 제 2인터내셔널 암스테르담대회의 결의로 수정주의와, 이전부터 발생한 밀레랑주의(부르주아정권 입각주의)는 일단 형식적으로는 배격되었다. 이로써 맑스주의가 수정주의를 격퇴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수정주의와 기회주의적 경향이 정리된 것이 아니었다. 암스테르담대회에서 수정주의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제출된 절충안, 아들러-방델벨드 결의안이 21대 21대로 가결 직전까지 간 것에서 보이듯, 기회주의적 경향은 이미 과반수에 육박할 정도로 강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 독일사민당과 제 2인터내셔널의 수정주의 비판이 얼마나 형식적인 것이었는가는 수정주의자들을 조직에서 축출하지 않은 것에서도 나타난다. 수정주의비판은 혁명적 맑스주의의 재정립이 아니라 다분히 형식적인, 맑스주의의 정통교리로서의 위치재확인으로 끝났고 수정주의적 경향은 일시적 잠복상태로 들어갔을 뿐이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기회주의적 경향은 이후 10년간 오히려 더욱더 강화되어갔다. 독일사민당과 제 2인터내셔널의 우익기회주의자들, 특히 노동조합내의 우익기회주의자들에게 있어(가령 레긴) 노동자의 상태는 자본주의하에서 근본적으로 개선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보였으며 ‘자본주의를 폐지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궁극목표’는 이미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으로 되었다. 이들은 말로는 사회주의를 주장하였지만 혁명은 생각지도 않았고 사실상 자본주의의 옹호자들이었다. 카우츠키와 같은 중앙파들은 여전히 맑스주의를 주장하고 있었지만 이들 우익기회주의자들이 당을 위기로 몰고 가고 있다고 전혀 경고하지 않았다. 중앙파들이 경고한 것은 “미치광이 같은 봉기를 일으키거나 … 목적없이 지배계급을 도발하여 정치가들이 사회주의자에게 광포한 분노를 터뜨릴 기회를 주는 일”을 결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앙파들은 우익기회주의자들을 공격하지 않고 황당하게도 좌파를 공격하며 사실상 우익기회주의자들을 변호하였다.</span></p>
<div class="mceTemp"> <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독일 사민당과 제 2인터내셔널의 우익 기회주의적 경향은, 점점 더 실제의 문제로 다가오고 있던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태도에서 더욱더 심각해져갔다. 우익기회주의자들과 중앙파들은 말로는 제국주의적 전쟁에 반대하여 혁명적 태도를 취할 것을 중요 대회 때마다 반복하여 선언하였지만 실제의 행동은 점점 더 제국주의전쟁에 찬성하는 방향으로 향하였다. 그리하여 정말로 제국주의 세계전쟁이 1914년에 발발했을 때 우익기회주의자들은 전쟁에 찬성하는 사회국수주의자들이 되어 버렸고 중앙파들은 평화 운운하며 이들 사회국수주의자들의 행동을 용인하였다. 소수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만이 전쟁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취했을 뿐이다. 이것은 결국 제 2인터내셔널의 완전한 붕괴로 이어졌다.</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d30a0a;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2)</span></div>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수정주의와 이를 이은 기회주의는 사회주의를 배신하였다. 현대의 사민주의는 이들의 후손들로서 역시 사회주의를 배신하였다. 제 2인터내셔널 시기에 사회주의자들과 사회주의정당들은 자신들을 사민주의자, 사민주의정당으로 불렀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이 사민주의라는 말은 현대에서 사용되는 의미의 사민주의와는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다. 당시의 사민주의는, 제 2인터내셔널이 완전히 기회주의화되기 전인 최소한 제 2인터내셔널 초기와 중기까지는 맑스주의적 의미에서의 사민주의(생산수단의 사적 소유폐지, 생산수단의 국유화, 노동자국가=프롤레타리트독재의 수립을 주장하는 사회주의)를 의미하였다. 즉, 현대에서 사용되는 개량주의로서의 사민주의와는 다른 의미였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사민주의가 이런 의미를 갖게 된 것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기회주의자들과 중앙파들과 확실히 구분하기 위하여 자신들을 공산주의자로 부르고 사민주의=기회주의, 사민주의자=맑스주의의 배교자, 노동자계급의 배신자로 규정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런 의미에서 현대의 사민주의는 원래의 사민주의가 아니라 제 2인터내셔널 시기(제 1차 세계대전 이전시기) 기회주의의 연장선에 서있다. 원래의 사민주의를 계승한 것은 찜머발트좌파와 제 3인터내셔널이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기회주의적인 사민주의는 제 1차 세계대전시기를 거치면서 또한 러시아 10월 사회주의혁명이 승리한 이후에 더욱더 타락하여 자본가편에서 혁명을 공격, 방해하고 자본주의를 노골적으로 보호하는 세력으로 전락했다.(독일의 에베르트, 샤이데만, 노스케, 레긴 등) 이들은 혁명을 막기 위해 반동적인 장교들과 공모하여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와 같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을 살해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들은 세계사회주의혁명에 대한 자본의 방파제 역할을 하며 이를 방해함으로써 결국은 반혁명적인 파시즘 세력이 등장할 수 있는 길을 닦아 놓았다. 이런 의미에서 제 2차 세계대전조차 이들의 배신행위가 초래한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독일에서 혁명을 좌절시킴으로써 세계 사회주의혁명세력이 선진적인 생산력을 자신의 것으로 하지 못하게 하여 러시아 10월 혁명이 고난의 길로 들어서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기회주의, 사민주의의 해악은 이들이 노동자계급과 사회주의를 배신하였다는 것, 이들이 노동운동 내 부르주아지의 하수인으로서 움직였다는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들은 노골적인 배신행위로 제 2인터내셔널이 붕괴되었음에도, 이를 유지하며 여전히 사회주의라고 자처하고, 맑스주의의 혁명적 전통을 계승한 볼세비키 등 국제적인 혁명적 사회주의를 공격함으로써 사회주의로 향한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착란시켰다. 즉, 사회주의를 노골적으로 배신하고서도 ‘사회주의’로 치장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의식과 투쟁의 고양을 자본가들의 편에서 방해하였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당의 이념을 단순히 사회주의로 규정하는 것이 어떠한 문제를 안고 있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우리는 역사적 경험을 교훈으로 하여 말뿐만이 아니라 행동에서도 입증된 사회주의, 혁명적 전통이 살아있는 맑스주의를 지도이념으로 규정함으로써 사이비 사회주의가 아닌, 실내용이 사회주의인 그런 사회주의를 우리가 목표로 함을 분명하게 하여야 한다. </span></p>
<p class="바탕글"> </p>
<h4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④ 제 3인터내셔널 시기에 맑스주의를 왜곡한 스탈린주의</span></h4>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제 2인터내셔널의 다수파를 형성하고 있던 사회국수주의자들과 중앙파가 전쟁찬성의 입장에 서서 노동자계급과 사회주의를 배신했을 때 이들과 달리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제국주의적 전쟁에 대해 원칙적이고 혁명적인 노동자계급적 입장을 지키고 투쟁하였다. 세르비아 사회주의자들은 7월 31일 국회에서 임시군사예산에 반대투표를 하였다. 8월 8일 러시아의 볼세비키 의원들은 제 4차 두마에서 임시군사예산에 반대하여 투표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 적극적으로 혁명적 선전을 행하였다. 12월 2일 독일 제국의회에서 리프크네히트가 제국의회에서 유일하게 제국주의전쟁에 대하여 반대함을 선언하였다. 당시 국제적으로 이들은 소수였지만 어려운 조건을 구실로 타협하지 않고 매우 용감하고 단호하게 행동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적, 혁명적 흐름이 여전히 힘 있게 살아있음을 대중들에게 보여주었으며 이후 이들은 찜머발트좌파를 구성하고 투쟁하였다. 제 2인터내셔널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의 혁명적 전통이 계승되고 맑스주의가 기회주의적 왜곡으로부터 구출되어 복원될 수 있었던 것은 레닌, 룩셈부르크, 칼 리프크네히트 등과 같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찜머발트좌파는 10월 사회주의혁명으로 세계사회주의혁명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되자 1919년 제 3인터내셔널을 창립한다. 이로써 붕괴된, 기회주의적이고 사회국수주의적인 제 2인터내셔널을 대신하여 진정으로 혁명적인 인터내셔널이 창립되었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제 3인터내셔널은 매우 어려운 조건에서도 원칙을 지키면서 투쟁했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창립되었기 때문에 출발시기부터 제 2인터내셔널과 달리 기회주의와 명확한 분리선을 칠 수 있었다. 또한 창립대회에서 채택된 정강에는 러시아 10월 혁명의 경험을 반영한 혁명적인 강령들이 명확하게 담겨져 있었다. 제 3인터내셔널은 말로서는 맑스주의를 찬양하지만 행동에서는 전혀 맑스주의적이지 않았던 제 2인터내셔널과는 달리 혁명적 맑스주의를 말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철저히 실천하는 인터내셔널로서 출발하였다. 이것이 제 2인터내셔널과 대비된 제 3인터내셔널의 첫 번째 특징이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제 3인터내셔널의 제 2인터내셔널과 다른 두 번째 특징은 ｢21개조｣ 가입조건(주요 내용은 당이 기관지를 완전히 장악하고 정력적으로 선전을 수행할 것, 당내의 중요한 지위에서 수정주의자를 축출할 것, 어떠한 사태가 있더라도 당기구를 유지할 것, 농민 사이에서 공산주의활동을 실행할 것, 보수적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속에서 활동할 것, 의회내 프랙션을 당이 엄격히 통제할 것, 민주집중제, 당원의 정기적 점검, 코민테른의 모든 결의와 결정을 승인하고 실행하는 공산당 강령을 만들고, 당의 이름을 공산당으로 개칭할 것, 코민테른의 자료를 당기관지에 발표할 것 등)을 설정하여 가입조직들 사이에서 혁명적인 사상적 통일성을 확보하고 기회주의의 침투를 봉쇄한 점과, 민주집중제를 확고히 확립한 점이다. 이는 제 2인터내셔널이 기회주의에 대해 무방비상태였다는 것, 소속 당들의 느슨한 연합체에 불과하였다는 것, 이것이 민족주의적 타락의 한 주요한 요인이었다는 것과 크게 대비되는 것이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제 3인터내셔널의 세 번째 두드러진 특징은 민족해방운동이 세계사회주의혁명의 불가결한 구성요소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발전한 자본주의나라 노동자계급의 자본주의타도투쟁과 피억압민족의 민족해방투쟁을 결합시킨 점이다. 이는 사회제국주의적 입장에 빠져 친제국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식민지, 반식민지 민중의 민족해방투쟁에 대해 방관적 내지 적대적 태도를 보인 제 2인터내셔널과 완전히 다른 점이었다. 이로써 제 3인터내셔널은 민족적 억압에 대한 반대와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적극적 지지라는 맑스주의적 원칙을 복원시키고 이를 제국주의시대에 맞추어 발전시켰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국제적인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10월 사회주의혁명에서 승리하고 제 3인터내셔널을 창립함으로써 힘차게 세계 사회주의혁명 실천의 길로 나아갔다. 그러나 10월 사회주의혁명은 20년대 초반 이후 변질되기 시작하여 20년대 후반이 되면 완전히 변질된다. 이와 동시에 코민테른 역시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러시아에서 최초로 혁명이 일어난 것은 러시아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약한 고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혁명이 일어나기 쉬었던 러시아의 조건이, 혁명이 국제적으로 고립되자 거꾸로 혁명의 전진에 심각한 제약을 가하는 조건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혁명을 둘러싼 객관적 조건은 매우 불리하였다. 러시아는 제 1차 제국주의세계전쟁에 참가한 제국주의 나라 중에서 가장 후진국이었다. 그 때문에 러시아는 혁명발발 당시 농민이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라였고 생산력 수준도 낮았다. 또한 전쟁으로 이미 피폐해진 경제는 장기간의 내전과 제국주의세력의 국제적 간섭으로 더욱더 피폐해졌고 유럽에서의 혁명이 지체되면서 기대되던 선진국, 특히 독일로부터의 정치적, 물질적 지원은 현실화되지 못하였다(러시아혁명과 독일혁명의 분리). 이로 인해 내전에서는 승리하였지만 1921년에 내전이 종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소비에트권력은 붕괴 위기로 내몰리게 되었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불리한 객관적 조건에 더하여 주체적 요건도 매우 불리하였다. 우선 러시아의 후진성 때문에 노동자계급이 인구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았고, 10월혁명을 가능하게 할 만큼 러시아노동자계급이 매우 선진적이고 혁명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수가 혁명 후 발발한 내전에서 희생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시에서의 공업생산의 붕괴와 기근을 피한 농촌이주로 노동자계급은 ‘농민화’되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노동자계급은 계급으로서 ‘해체’되고 있었다. 문제의 보다 심각한 측면은 노동자국가를 수립하고, 생산수단의 국유화조치를 취했지만 국가의 운영과 노동자관리를 실행하는 데서 노동자계급의 주체적 자치 역량이 극히 취약한 상태에 있음이 드러났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 노동자계급의 문화적 역량이 매우 낮았기 때문인데 이것은 관료주의의 대두를 가져왔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불리한 주객관적 조건은 러시아 10월 혁명의 변질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변질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러하다면 러시아 10월 혁명은 변질이 불가피한 것이었고 따라서 여기서 어떠한 교훈도 끌어내는 것이 불가능하고 불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이런 식이라면 유일하게 끌어낼 수 있는 교훈은 애당초 러시아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어야 한다는 것이 될 것이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불리한 조건이 가장 먼저 초래한 것은 급속하게 공산당의 &#8216;대리주의적 실천&#8217;이 강화된 것이었다. 내전기간 중 소비에트는 점차 형해화되고 계급을 대신하여 당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사태를 더욱더 악화시킨 것은 NEP(신경제정책)를 취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소비에트 권력이 붕괴 위기에 처하게 되자 공산당 외에는 모든 정치세력을 불법화하고, 유일한 합법정당이 된 공산당 내에서 위기상황에서 당의 분열을 막아야 한다는 이유로 당내분파형성권의 일시적 정지라는 중대한 당내민주주의 제한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이 중 특히 당내분파형성권의 일시적 정지는 치명적인 오류였는데 그 이유는 공산당이 유일하게 합법정당이 된 조건에서 공산당 내 당내민주주의는 그 중요성이 더욱더 높아졌음에도 이 조치로 오히려 약화되고 이 조치가 이후 영구적 조치로 고착화되어 당내 다수분파가 소수분파를 연속적으로 배제, 억압하여 당내민주주의를 빠른 속도로 파괴해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조치를 수단으로 1923년 스탈린,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등으로 구성된 다수분파는 레닌의 경고</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d30a0a;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3)</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트로츠키소수분파를 배제하고 이후 스탈린, 부하린 다수분파는 지노비에프, 카메네프소수분파를 배제한다. 다음에는 스탈린 다수분파가 부하린 분파를 배제하여 스탈린분파는 모든 분파를 배제하고 1920년대 후반 당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1920년대 배제된 분파들과 지도적 인물들은 레닌과 똑같이 이 조치가 도입될 당시 이 조치가 갖는 위험성을 철저히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당내민주주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였다. 이는 배제된 분파들이 당내민주주의의 파괴가 야기할 위험성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여 이 문제를 뒷전으로 밀어놓은 채 상호간의 노선투쟁(공업화, 부농에 대한 태도 등)에 몰두하다가 자신들이 철저히 무력화된 뒤에서나 뒤늦게 자신들이 당내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단결해야 했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던 데에서 잘 나타난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결국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혁명 발발 당시 가장 민주적인 노동자국가형태를 보인 소비에트</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d30a0a;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4)</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는 형해화되고 1920년대 후반 노동자민주주의는 완전히 변질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스탈린과 스탈린 분파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로 스탈린이 당내분파형성권의 일시적 정지라는 조치를 활용, 당내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데에 가장 앞장섰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앞에서 언급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계통적으로 당내경쟁분파들을 당으로부터 배제하면서 자신과 자기분파에 당의 권력을 집중해갔다. 스탈린은 뚜렷한 자기입장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실천한 것이 아니라 당내논쟁을 주로 자신과 자기분파의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당내민주주의를 철저히 파괴하였다.</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d30a0a;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5)</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 둘째 이유는 스탈린이 당의 관료주의화를 가장 잘 대표하는 자로서 관료들의 이해를 대표하여 이에 박차를 가하였기 때문이다. 이 점 때문에 스탈린은 10월혁명의 변질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자로 규정되어야 한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1920년대 후반 스탈린과 그 분파가 10월 사회주의혁명을 완전히 변질시킨 후에도 이들의 범죄적 행위는 멈춘 것이 아니다. 스탈린은 스탈린분파 내에서조차 배제를 진행하여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지 않는 스탈린주의자들을 배제함으로써 스탈린분파에 의한 당권력의 장악을 넘어서 스탈린 개인에 의한 당권력 장악으로 나아갔으며 강제적이고 유혈적인 농업집산화를 자행하고 숙청을 통해 껄끄러운 고참 볼세비키 대부분을 살해하고 역사조차 체계적으로 날조하였다. 또한 일국사회주의론을 통해 노동자국제주의를 왜곡하였으며 코민테른을 소련외교의 하부기관으로 전락시켰다. 스탈린은 러시아공산당에서 당내민주주의를 파괴하였을 뿐만 아니라 코민테른 내에서 민주집중제를 파괴하여 국제적인 사회주의운동을 자신의 자의적인 의지를 실현하는 운동으로 타락시켰다.</span></p>
<div class="mceTemp"> </div>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스탈린은 제 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와의 철저한 투쟁을 통해 복원된 혁명적 맑스주의를 새로운 형태로 왜곡하였으며 러시아혁명과 제 3인터내셔널을 변질시키는 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스탈린주의는 맑스주의의 외양을 취했지만 맑스주의를 철저히 왜곡한 사상체계에 불과하다. 스탈린주의는 어떤 일관된 체계를 갖추고 있지 못하며 철저히 말과 행동이 괴리된 위선된 체계이다. 이 산만한 체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을 부정하는, 수령중심의 권력체계와 이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의 합리화이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스탈린과 스탈린주의자들은 러시아 10월 혁명을 체계적으로 철저히 변질시켜 관료가 지배하는 공동생산체제에 불과한 유사사회주의체제를 형성함으로써 ‘사회주의’의 이름 아래 반사회주의적인 새로운 지배 억압체제를 만들어내었으며 이를 통해 전세계적으로 대중사이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위신을 추락시켰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결국 스탈린주의적인 유사사회주의체제는 이 체제가 양성해낸, 자본주의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스탈린주의적 관료들의 자본주의적 전변에 의해 노동대중의 아무런 저항없이 자본주의체제로 전환되었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스탈린주의는 스스로가 맑스주의, 레닌주의를 계승한 것으로 자처하고, 10월 혁명을 변질시킨 ‘현실사회주의’를 맑스주의를 실현한 사회주의체제로 선전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주의는 맑스주의와 레닌주의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왜곡하였으며, ‘현실사회주의’는 사회주의로 치장되었을 뿐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제 2인터내셔널 시기의 수정주의와 기회주의가 사회주의를 배신했으면서도 자신을 사회주의로 치장하였다면, 제 3인터내셔널 시기의 스탈린주의는 최초의 사회주의혁명인 10월 사회주의혁명을 내부에서 파괴, 변질시켰으면서도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사회주의의 승리를 가져온 것으로 치장하였다. 그러나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로 스탈린주의가 맑스주의, 사회주의가 아니고 반맑스주의적이고 반사회주의적인 반동적 사상체계라는 것은 최종적으로 입증되었다. </span></p>
<p class="바탕글"> </p>
<h3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2) 현재도, 스스로를 사회주의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의 내용에서 사회주의가 아닌 다양한 조류가 존재하고 있다.</span></h3>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상에서 우리는 역사상 사회주의를 자처한 많은 조류가 있었지만 대부분 실제로 사회주의가 아니었다는 점을 비교적 상세하게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과거에만 발생한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되풀이되고 있다. 현재에도 실내용은 전혀 사회주의가 아니면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조류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사민주의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한 축이라는 본색이 이미 다 드러났음에도 여전히 사회주의를 자처하고 있다.</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d30a0a;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6)</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 스탈린주의는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으나 일부 잔존하면서 여전히 사회주의를 자처하고 있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현실사회주의’의 붕괴를 전후하여 그 대안인 것처럼 제시된 시장사회주의는 지난 30년간 사회주의를 자처하지만, 실제의 내용에서는 사회주의가 아닌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시장사회주의는 시장과 사회주의를 결합시킨 것이 자본주의를 대체할 것으로 주장하고 있지만, 시장이 필연적으로 다시 자본주의를 가져온다는 과학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또한 사회주의와 상품생산사회의 조절 양식인 시장은 상호배제적이어서 시장사회주의가 작동하기 어렵고, 시장사회주의를 계속 추구되면 시장과 사회주의의 장점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사회주의를 누르고 승리하게 된다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초보적 인식조차 결여되어 있다. 중국의 이른바 사회주의시장경제는 이를 생생하게 입증해주었다. 시장사회주의는 현실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기초하여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조합하여 대안으로 제시하는(시장사회주의론자들은 사회적 소유형태와 시장적 조절형태라는 이질적 요소의 결합이 평등과 효율성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즉 자신의 주관적 희망을 대안으로 착각하는 소부르주아적 사회주의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시장사회주의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의 핵심적 내용―사회주의사회 실현의 주체로서의 노동자계급의 역할, 노동자국가의 수립, 중앙집중적 계획 등―을 그 안에 분명하게 포함하지 않거나 부정하면서도 사회주의를 자처하는 다양한 조류가 현재에도 존재한다. 이들 조류들은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사회주의의 정수가 결여된 사이비 사회주의로서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적 의식을 고양시키는 것이 아니라 혼란스럽게 하는 역할을 할 뿐이며, 우리는 이들 조류와 적극적으로 투쟁하여야 한다. </span></p>
<p class="바탕글"> </p>
<h3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3) 때문에 당의 이념이 사회주의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당의 이념을 맑스주의로 규정하여야 한다. </span></h3>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주의노동운동의 역사의 검토를 통해 우리는 역사상 스스로를 사회주의로 주장한 다양한 조류가 있었으나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대다수가 사회주의가 아님이 입증되었으며, 현재도, 스스로를 사회주의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의 내용에서 사회주의가 아닌 다양한 조류가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사회주의혁명이 최종적으로 승리할 때까지 이것은 앞으로도 되풀이하여 계속 발생할 것이다. 계급투쟁에서 정치투쟁, 경제투쟁과 함께 사상투쟁이 한 축을 이루는 것도 이 때문이고, 우리가, 진지하게 사회주의를 실현하려는 당을 건설하려 할 때, 사회주의자들이 당의 지도이념을 사회주의로 규정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당의 지도이념을 맑스주의로 규정하여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span></p>
<p class="바탕글"> </p>
<h2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2. 당의 지도이념을 맑스주의로 규정하는 것의 정확한 의미</span></h2>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당의 지도이념을 맑스주의로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이에 대해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것은 여타 사회주의조류나 스탈린주의가 실제로 사회주의가 아닌 것이 역사적으로 검증되었다고 해도,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맑스주의적 사회주의 역시 타당성을 잃은 것이 아닌가라는 것이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 의문에 올바로 답변하기 위해서 우리는 당의 지도이념을 맑스주의로 규정하는 것이 정확히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를 분명히 하여야 한다. 당의 지도이념을 맑스주의로 규정할 때 우리는 세 가지 점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첫째, 그 핵심적 내용에서 여전히 현실적합성을 맑스주의가 갖고 있기 때문에 맑스주의를 지도이념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맑스주의의 역사 과정자체가 맑스주의를 기회주의적으로 왜곡하는 것과의 투쟁의 역사였고, 따라서 우리는 역사상 출현한 맑스주의의 왜곡을 폭로하고 이 왜곡된 맑스주의를 복원해야 한다는 점이다. 셋째는, 맑스주의적 변증법에 따라 맑스주의 자체도 고정된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발전하는 이념으로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이다.</span></p>
<p class="바탕글"> </p>
<h3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1) 당의 지도이념으로 맑스주의를 규정하는 것은 맑스주의가 이미 논란의 여지없이 진리로 확증되어서 당연히 그래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맑스주의가 그 핵심적 내용에서 여전히 현실적합성을 갖고 행동의 지침으로 타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span></h3>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맑스주의는 맑스와 엥겔스의 사상으로부터 출발하여 수많은 맑스주의자들에 의해 발전해왔다. 맑스주의는 매우 포괄적인 사상체계인데 철학적 유물론, 변증법, 사적유물론,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역할, 잉여가치론, 계급투쟁, 계급적 국가론과 프롤레타이트독재, 제국주의론, 민족문제, 전쟁에 대한 과학적, 혁명적 태도 등을 그 핵심내용으로 한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맑스주의를 당의 지도이념으로 설정하는 것은 이러한 핵심내용이 여전히 현실적합성을 갖고 행동의 지침으로 타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이 맑스주의의 다양한 측면에서의 현실적합성을 확인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는 글이 아니기 때문에 일일이 모든 측면을 다루지 않고 몇 가지 측면만을 다루어보면, 자본가들의 이윤이 자기가치 이상의 가치를 창조해내는 노동력의 특별한 성격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은 현대자본주의에서도 변함이 없다. 최근의 세계대공황은 자본주의적 축적의 내적 모순과 공황에 대한 맑스주의적 규명의 현실적합성을 더욱더 확증해주고 있다. 자본주의사회의 국가가 ‘이성의 실현체’로서 중립적인 기구가 아니라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을 억압, 착취, 지배하기 위한 기구, 자본가계급의 국가라는 것은 현재 존재하는 국가들의 매일 매일의 행태가 입증해주고 있다. 미제국주의의 아프카니스탄 침공과 이라크 침공은 제국주의론의 타당성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수정주의자들과 청산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맑스주의는 여전히 현실적합성을 갖고 있으며, 현실에 의해 반박되는 것은 오히려 이들의 주장이다. 청맹과니가 아니라면, 현실이 온통 계급투쟁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며, 현실의 국가가 계급으로부터 독립되어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는 기구가 아니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span></p>
<p class="바탕글"> </p>
<h3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2) 이론과 실천이 통일되고 언행이 일치하는 맑스주의, 기회주의적, 스탈린주의적 왜곡으로부터 복원된 맑스주의가 우리가 지향하는 맑스주의이다.</span></h3>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 글의 첫 번째 항목에서 우리는 제 2인터내셔널 시기에 기회주의자들이 어떻게 말로서는 맑스주의를 찬양하지만 행동에서는 맑스주의를 배신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들 기회주의자들은 맑스주의에서 혁명적 정수를 제거하고, 맑스주의를 왜곡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들 기회주의자들은 맑스주의가 살아 숨 쉬게 하며, 발전하게 하는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파괴하고 맑스주의를 자신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로 만들어 버렸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기회주의자들의 맑스주의적 왜곡을 폭로하고 본래의 맑스주의를 복원하고 발전시킨 것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이들에 의해 맑스주의의 혁명적 전통은 복원되고, 이론과 실천의 통일 역시 복원되었다. 맑스주의의 역사에서 레닌 등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역할이 강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스탈린주의는 이를 다시 파괴하고, 맑스주의를 관료들의 지배를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왜곡해버렸다. 스탈린주의가 철저히 말과 행동이 괴리된 위선된 체계인 것은 이 이데올로기가 노동자계급을 배신한 관료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우리가 지향하는 맑스주의는 기회주의적, 스탈린주의적 왜곡으로부터 복원된 맑스주의, 이론과 실천이 통일되고 언행이 일치하는 그러한 맑스주의이다. </span></p>
<p class="바탕글"> </p>
<h3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3) 교조주의가 아니라 발전하는 맑스주의</span></h3>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맑스주의는 맑스와 엥겔스의 사상에 기초했지만 맑스와 엥겔스의 사상으로 그 발전이 끝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발전해왔고 앞으로도 발전해갈 그런 사회주의사상체계이다. 맑스와 엥겔스의 사후 많은 맑스주의자들이 맑스주의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러시아의 레닌이었다. 레닌은 혁명적 실천 과정에서 맑스주의를 발전시켰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맑스주의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발전해가야 한다. 발전하지 못하는 맑스주의는 이미 맑스주의가 아니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 발전해간다는 것이 맑스주의적 변증법이 요체이다. 당연히 변화, 발전의 의식적 표현인 맑스주의 역시 발전해가야 한다. 스탈린주의적 왜곡으로 오랜 기간 맑스주의는 정체를 강요당해왔다. 스탈린주의적 왜곡으로 발전이 지체된 맑스주의를 실천 속에서 발전시키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회주의자들의 당면한 임무이다.</span></p>
<p class="바탕글"> </p>
<h2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3. 지도이념으로서 맑스주의를 분명히 하지 않는 경향들</span></h2>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에서 자신을 사회주의로 표현하는 조직과 개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일단은 긍정적이다. 자본주의가 세계와 한국 모두에서 그 모순을 더욱더 심화시키고 있고, 자본주의에 의한 삶의 고통이 늘어나면서 이것이 과거에 진보, 좌파 정도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던 조직과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사회주의로 표현하도록 압박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긍정적인 측면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 중 일부는 사회주의를 자처하고 있지만 전혀 사회주의라고 보기 어려운 내용을 주장하거나, 기회주의적이고 절충적인 애매한 내용의 사회주의를 주장함으로써 노동자계급에게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그대로 방치할 경우, 새롭게 고양되어 가는 사회주의노동운동 내에 사회주의와는 다른 이질적인 요소를 전파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인데, 사회주의자들은 이들의 문제점을 폭로하는 사상투쟁을 적극화하여 새롭게 고양되어 가는 사회주의노동운동이 이들에 의해 왜곡되는 것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준비모임(이하 사노준)은 최근 내부 강령토론을 진행 중이다. 사노준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조직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관료주의적 변질과 단호히 단절하지 못하고, 조합주의적 활동을 실제로 벗어나지 못하여 사회주의조직으로 보기에는 조직적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러한 조직적 문제점은 사노준이 제출하고 있는 강령적 성격의 문건에서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사노준은 아직도 「강령토론안」을 공식적으로 공개하지 않고 있어 필자가 이를 이 글의 검토의 대상으로 할 수 없었다. 인용을 하지 말 것을 전제로 ‘강령(초안)-토론용 자료’를 전달받았기 때문에 이 역시 이 글의 검토대상으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오래된 문건, 「‘21c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강령(토론용 자료)-집행위원회 제출용, 2009.04.18.-」을 이 글의 검토대상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 글에서 다루려고 하는 것이 사노준이 제출하는 강령의 전반이 아니라 맑스주의에 대한 사노준의 태도이기 때문에 크게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사노준은 자신이 추구하는 사회주의를 ‘21c 사회주의’라고 선언함으로써 출발에서부터, 자신의 피상성, 애매함, 절충성, 비과학성을 드러내고 있다. 문건의 제목부터가 “‘21c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강령(토론용 자료)”일 뿐만 아니라 문건 전체가 ‘21c 사회주의’로 도배되어 있다시피 한다. 아마 가장 무지한 자만이 20c 사회주의의 존재를 전제한 후 이와 대비하여 21c 사회주의를 자신의 사회주의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20c 사회주의라는 것 자체가 존재한 적이 없다. 20c에 실제로 있었던 ‘사회주의’를 20c 사회주의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일한 것으로 존재한 적이 없고 무수한 ‘사회주의’가 존재하였다. 레닌의 혁명적 사회주의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사회주의로 치장한 수정주의, 카우츠키주의, 스탈린주의, 김일성주의 등등이 존재하였다. 사노준은 이것을 모두 묶어서 20c 사회주의로 만들어 놓고는 이를 극복한다는 ‘불가능한’ 시도를 하고 있다. 그리고 졸지에 레닌은 여타 사회주의배신자들과 함께 20c 사회주의자들 중 하나가 되는 수모를 당한다. 이런 식으로 하면 맑스는 아마 19c 사회주의자가 될 것인데, 위대한 사노준의 분류에 의해, 졸지에 맑스주의는 19c 사회주의, 레닌주의는 20c 사회주의로 분류된다. 가장 천박한 자만이 이런 식으로 사회주의를 분류하고, 맑스주의와 레닌주의를 19c, 20c의 사회주의로 치부하며, 그리하여 이들과 다른 새로운 21c 사회주의를 창조해낼 수 있을 것이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처럼 사노준은 출발에서부터 자신이 갖고 있는 사고의 천박성을 드러낸 후, 사회주의의 역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온 맑스주의에 대해 애매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그런데 보다 적극적인 우리의 방식으로 사노준의 태도를 평가하면, 맑스주의에 대한 사노준의 이러한 애매한 태도는 사노준이 자신이 맑스주의를 지도이념으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준거틀로도 삼지 않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사노준이, 지난 사회주의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통해 21c 사회주의를 제출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역사적 평가라는 것도 피상적이고, 겉핥기 수준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맑스주의는 지난 150여년의 사회주의노동운동의 중심을 관통하는 것이고, 사회주의노동운동의 평가는 맑스주의에 대한 평가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진지한 사회주의자라면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사노준은 사회주의노동운동을 맑스주의와 밀접히 결합하여 평가하지 않고 있으며, 이 때문에 ‘21c 사회주의’를 제출하면서 이 ‘21c 사회주의’라는 것이 맑스주의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사노준의 이러한 태도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곧바로 이들이 사회주의라고 내놓는 것이 사회주의를 왜곡하는 것이 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이것을 확인해 보도록 하겠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사노준은 사회주의강령에서 당연히 들어가야 할 노동자국가 대신에 매우 고집스럽게 ‘노동자민중의 권력’을 강령에 넣을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가장 기본적인 맑스주의, 사회주의의 내용을 부정하는 것인데 사노준은 이를 통해 노동자국가 수립의 필요성을 노동자계급이 인식하게 하는 것을 돕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방해하고 있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사노준은 ‘현실사회주의’를 평가하면서 이를 ‘관료적 국가사회주의’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사노준이 ‘현실사회주의’를 뚜렷한 입장 없이 절충적으로 평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만약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자신의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진지하게 사회주의를 고민하고 ‘현실사회주의’를 천착, 평가했다면 관료적이라는 형용구와 사회주의를 결합시켜 마치 관료적 사회주의도 하나의 사회주의형태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만용을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사노준의 태도는, 사회주의변혁이 노동자계급 자신에 의한 해방 과정이라고 주장하는 사노준의 입장과도 모순되고 그래서 후자의 주장을 진정성 없는 빈말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또한 사노준은 실제의 역사에서 여성주의와 생태주의가 맑스주의, 사회주의에 적대적이었다는 사실, 이들의 주장이 일관되게 추구되면 사회주의운동의 청산에 이르게 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이들과 사회주의의 결합을 주장하는 오류도 범하고 있다. 이것은 사노준이 맑스주의적인 과학적 태도에 충실하지 못하고, 그래서 사회주의에 적대적인 경향의 객관적 성격을 분명하게 인식할 능력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처럼 맑스주의를 지도이념, 준거틀로 설정하지 않으면서 사노준은 사회주의를 왜곡하고, 노동자계급의 의식의 발전에 장애를 조성하고 있다. 사노준은 왜곡된 사회주의를 사회주의로 주장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를 올바로 인식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이 점을 분명히 의식하고 사회주의가 진정으로 혁명적이고 과학적인 것이 되도록, 또한 건설할 당이 진정으로 혁명적인 당이 되도록 맑스주의를 당의 지도이념으로 확립하기 위해 투쟁하여야 한다.</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d30a0a;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7)</span></p>
<p class="바탕글"> </p>
<h2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맺으며</span></h2>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현실사회주의’의 붕괴로 초래된 역사적 후퇴를 뒤로 하고 현재 사회주의노동운동은 새롭게 전진하고 있으며,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노동자당을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이를 위해 당의 사상적, 조직적 토대를 형성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필자는 비교적 긴 이 글에서, 사회주의자들이 건설할 당의 지도이념을 맑스주의로 규정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그 이유는, 요약하면, 역사상 맑스주의 이외의 사회주의는 대부분 실제로 사회주의가 아니었고, 현재에도 사회주의를 자처하는 많은 조류가 있지만 맑스주의 이외에 대부분이 실제로 사회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교훈으로 삼아 건설할 당의 지도이념을 맑스주의로 규정하여 왜곡된 사회주의가 노동운동 내에 침투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맑스주의는, 사회주의노동운동과 똑같이,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로 역사적으로 소멸한 것이 아니다. 맑스주의는 자신의 과학성, 혁명성 때문에 여전히 자본주의의 현실을 노동자계급이 가장 잘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사상적 무기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사상적 무기이기도 하다. 청산주의자들과 기회주의자들은 맑스주의의 이러한 강점을 부정하거나 적극적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면서, 전혀 새롭지도 않고, 오히려 더 퇴보한 것들을 새로운 사회주의로 치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결과하는 것은 결국은, 사회주의를 왜곡하고 후퇴시키는 것뿐이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주의노동운동은 지난 역사에 대한 치열하고 정확한 평가 속에서만 다시 전진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맑스주의에 대한 평가 역시 진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맑스주의는 우회될 수 없다. 우회가 아니라 치열한 평가 속에서 우리는 맑스주의의 핵심적 내용을 계승하고 이를 발전시켜 가야 한다. 그리고 이것의 출발점은 건설할 당의 지도이념을 맑스주의로 규정하는 것이다.</span></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 </p>
<h3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미주)</span></h3>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d30a0a;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1)</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 프루동주의와 라살레주의는 서로 커다란 차이를 갖고 있지만 과도하게 협동조합을 강조하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들은 협동조합이 확대되어 자본주의체제를 대체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협동조합에 대한 환상적 사고 역시 이들이 사회주의노동운동의 발전과 함께 도태된 또 하나의 원인이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d30a0a;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2)</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 제국주의전쟁은 노동운동내의 위기를 명백하게 드러내어, 비교적 평화적인 자본주의발전의 시대에 오래전부터 곪기 시작한 종기를 터뜨려 버렸다. 20세기 초반에 자본주의는 이미 독점자본주의, 제국주의단계에 이르러 부르주아지는 제국주의적 초과이윤의 일부로 노동자계급과 그 지도자들 일부를 매수, 포섭하여 노동귀족을 형성시켰다. 이들 노동귀족은 그 생활양식, 임금, 세계관 전체에 걸쳐 소부르주아지화하여 노동자계급 내에서 부르주아지의 대리인이 되었으며 이들이 제 2인터내셔널 내에서 기회주의가 창궐하는 토대가 되었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들은 전쟁발발 이전에 이미 부르주아지의 동맹자가 되어 부르주아지와 협조하고 있었다. 카우츠키 등 중앙파는 통일을 주장함으로써 노골적인 기회주의자들의 기회주의를 방조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 기회주의자들과 중앙파들은 실제로는 혁명과 국제주의를 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좌파의 혁명적 주장을 형식적으로 받아들여 자신들의 기회주의적 성격을 대중들에게 은폐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것이 제국주의전쟁이 실제 발발하기 전까지 제 2인터내셔널 내에서 전쟁반대와 혁명적 투쟁 구호가 넘쳐나다가 전쟁의 발발과 함께 기회주의자들에 의해 쓰레기통에 처박혀지고 제 2인터내셔널이 폭풍 속의 낙엽처럼 붕괴한 근본 이유이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d30a0a;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3)</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 레닌, 「레닌의 유언장」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d30a0a;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4)</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 소비에트는 출현 당시 파리콤뮨을 거의 판박이 하였다고 할 정도로 파리콤뮨과 똑같이 모든 공직의 선출과 소환, 입법적 기능과 행정기능의 통일, 인민의 무장 등을 실천하였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d30a0a;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5)</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 스탈린은 공업화를 강조한 트로츠키, 지노비에프, 카메네프에 대해서 부하린과 동맹하여 반대하였다. 그러나 뒤에 스탈린은 트로츠키 등이 주장한 공업화보다 더한 초공업화를 주장하며 부하린을 비판하였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d30a0a;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6)</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 사회민주주의는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자본가들과 연합하여 세계혁명에 반대하며 자본주의체제를 옹호하는 데 몰두하였다. 이렇게 배신적 행동을 더욱더 노골화하면서도 전간기에 자신이 맑스주의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고 언술 상으로나마 주장하였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이마저도 부정하였다. 1959년 독일 사민당은 고데스베르그강령을 채택하여 명시적으로 계급투쟁과 맑스주의를 부정하였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사민주의는 사실상 자본주의정치세력 중의 하나로 전화하였으며, 현대의 사민주의는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한 축일 뿐이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d30a0a;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7) </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해방연대(준)은 강령초안과 강령초안 해설을 제출하면서, 강령초안의 이념적 기초와 준거틀로서 맑스주의를 설정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강령초안과 강령초안에서 건설할 당의 지도이념을 명시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있지만, 실제로 이러한 전제가 강령초안과 강령초안해설에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를 구체적으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WEIGHT: bold;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강령초안</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LEFT: 58pt; MARGIN-RIGHT: 58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 mso-fareast-font-family: 나눔명조" lang="EN-US">“4-2.새롭게 고양되고 있는 사회주의운동이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실현하려는 대중적 열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을 혁신, 현대화하여야 한다. 여기서 혁신과 현대화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현실사회주의의 실패에서 교훈을 끌어내고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생태, 여성, 소수자 문제 등 현대사회에서 새롭게 제기된, 새로운 삶의 양식에 대한 문제의식을 능동적으로 수용하는 것, 스탈린주의에 의해 왜곡된 맑스주의를 복원하는 것이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WEIGHT: bold;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강령초안 해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LEFT: 58pt; MARGIN-RIGHT: 58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 mso-fareast-font-family: 나눔명조" lang="EN-US">“4) 사회주의의 현대화를 최대한 강령초안에 반영하려고 하였다. </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LEFT: 58pt; MARGIN-RIGHT: 58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 mso-fareast-font-family: 나눔명조" lang="EN-US">-사회주의운동이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실현하려는 대중적 열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을 혁신, 현대화하여야 한다. 강령초안은, 현실사회주의의 실패에서 교훈을 끌어내고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생태, 여성, 소수자 문제 등 현대사회에서 새롭게 제기된, 새로운 삶의 양식에 대한 문제의식을 능동적으로 수용하는 것, 스탈린주의에 의해 왜곡된 맑스주의를 복원하는 것을 혁신과 현대화의 핵심으로 설정하고 이를 최대한 반영하려고 노력하였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LEFT: 58pt; MARGIN-RIGHT: 58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 mso-fareast-font-family: 나눔명조" lang="EN-US">“1)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자신의 행위가 되어야 한다.’ </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LEFT: 58pt; MARGIN-RIGHT: 58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ascii-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강령초안의 이 짧은 문장은 대리주의에 대한 반대를 함축하고 있다. 이 명제는 맑스주의의 기본원리 중에서도 기본원리이다.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그것이 어떠한 선의의 세력에 의해서든 대신될 수 없다. … 강령초안은 ‘현실사회주의’의 실패의 경험 속에서 더욱더 자명해진 이 맑스주의의 기본원리를 철저히 되살리기 위해 이 구절을 삽입하고 있다.” </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LEFT: 58pt; MARGIN-RIGHT: 58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 mso-fareast-font-family: 나눔명조" lang="EN-US">“③ 스탈린과 스탈린주의 비판 </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LEFT: 58pt; MARGIN-RIGHT: 58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ascii-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스탈린은 제 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와의 철저한 투쟁을 통해 복원된 혁명적 맑스주의를 새로운 형태로 왜곡하였으며 러시아혁명과 제 3인터내셔널을 변질시키는 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스탈린주의는 맑스주의의 외양을 취했지만 맑스주의를 철저히 왜곡한 사상체계에 불과하다. 스탈린주의는 어떤 일관된 체계를 갖추고 있지 못하며 철저히 말과 행동이 괴리된 위선된 체계이다. 이 산만한 체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을 부정하는, 수령중심의 권력체계와 이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의 합리화이다.” </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LEFT: 58pt; MARGIN-RIGHT: 58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 mso-fareast-font-family: 나눔명조" lang="EN-US">“-자본주의는 강령초안 1.에서 명확히 했듯이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노동력의 상품화를 필수 조건으로 한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기본성격을 부정하는 것은 맑스주의의 기본전제를 부정하는 것이다. 국가자본주의론은 소련사회에서 출현한 새로운 지배피지배관계, 억압관계를 구체적, 역사적으로 분석하는 대신에 혁명의 변질=자본주의라는 도식주의에 빠져 여기에 현실을 억지로 뜯어 맞추려고 하였다. 그 결과 맑스주의의 자본주의적 범주들(가치법칙, 공황, 축적)을 그대로 소련사회에 적용하였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LEFT: 58pt; MARGIN-RIGHT: 58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 mso-fareast-font-family: 나눔명조" lang="EN-US">“1)강령초안은 사회주의의 혁신, 현대화방향의 핵심을 현실사회주의의 실패에서 교훈을 끌어내고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생태, 여성, 소수자 문제 등 현대사회에서 새롭게 제기된, 새로운 삶의 양식에 대한 문제의식을 능동적으로 수용하는 것, 스탈린주의에 의해 왜곡된 맑스주의를 복원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span></p>
<p class="바탕글"> </p>
]]></content:encoded>
			<wfw:commentRss>http://programto.net/wordpress/?feed=rss2&amp;p=871</wfw:commentRss>
		<slash:comments>29</slash:comments>
		</item>
		<item>
		<title>국가자본주의론의 고질적인 ‘추상적 도식주의’</title>
		<link>http://programto.net/wordpress/?p=859</link>
		<comments>http://programto.net/wordpress/?p=859#comments</comments>
		<pubDate>Mon, 15 Mar 2010 05:03:41 +0000</pubDate>
		<dc:creator>강령토론</dc:creator>
				<category><![CDATA[소련사회성격]]></category>
		<category><![CDATA[제 4호]]></category>
		<category><![CDATA[강령토론]]></category>
		<category><![CDATA[강령토론 4호]]></category>
		<category><![CDATA[국가자본주의]]></category>
		<category><![CDATA[국가자본주의론]]></category>
		<category><![CDATA[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4호]]></category>
		<category><![CDATA[소련]]></category>
		<category><![CDATA[소련사회]]></category>
		<category><![CDATA[추상적도식주의]]></category>

		<guid isPermaLink="false">http://programto.net/wordpress/?p=859</guid>
		<description><![CDATA[<p><!--StartFragment--></p>
<p class="본문"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황 정 규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편집위원회 편집부장)</span></p>
<p class="바탕글">
<h2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들어가며</span></h2>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2호에 게재된 「맑스주의에서 벗어난 국가자본주의론의 오류」는 토니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을 주된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제 2호의 글에서 토니 클리프의 이론이 지니는 한계는 다음과 같이 지적되었다. </span></p>
<p><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p=859" class="more-link">Read more on 국가자본주의론의 고질적인 ‘추상적 도식주의’&#8230;</a></p>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tartFragment--></p>
<p class="본문"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황 정 규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편집위원회 편집부장)</span></p>
<p class="바탕글">
<h2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들어가며</span></h2>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2호에 게재된 「맑스주의에서 벗어난 국가자본주의론의 오류」는 토니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을 주된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제 2호의 글에서 토니 클리프의 이론이 지니는 한계는 다음과 같이 지적되었다. </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LEFT: 52pt; MARGIN-RIGHT: 52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ascii-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우선 토니 클리프는 타락한 노동자국가론에 대해 비판하고 소련사회에 대한 자신의 입론을 세우는 과정에서, 소련사회의 “변질”이라는 새로운 현상을 구체적으로 역사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가 아니니까 자본주의’라는 추상적 도식으로 대체하였다. 이는 현실을 구체적이고 역사적으로 접근할 것을 요구하는 맑스주의의 방법론에서 이탈한 것이다. </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LEFT: 52pt; MARGIN-RIGHT: 52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ascii-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두 번째로 토니 클리프는 ‘사회주의가 아니니까 자본주의’라는, 소련의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 추상적 도식을 소련사회에 집요하게 적용하려고 하다 보니, 소련이 자본주의체제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맑스주의에서 벗어난 자본주의관을 가공해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시도는 소련 현실에 대한 왜곡뿐 아니라 맑스주의 이론에 대한 심각한 왜곡을 야기하였다. </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LEFT: 52pt; MARGIN-RIGHT: 52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ascii-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마지막으로 토니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은 실제 중요한 정치적 사안들에서 실천 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였다. 추상적 도식은 현실의 올바른 인식을 가로막기 때문에 현실의 실천 과정에서 다양한 오류와 절충을 피할 수 없었다.” (황정규, 「맑스주의에서 벗어난 국가자본주의론의 오류」)</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요컨대 토니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의 오류와 한계는 현실을 구체적이고 역사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집요하다고할 정도까지 자신의 머리 속에서 만든 추상적 도식으로 현실을 재단하려고 한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태도는 흡사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연상케 한다. 신화 속에서 프로크루스테스는 자신의 영지를 지나가는 나그네를 잡아와 자기 집에 있는 쇠로 만든 침대에 묶었다. 나그네의 키가 침대보다 작으면 몸을 늘려 죽였고, 키가 침대보다 크면 침대보다 긴 몸을 잘라 죽였다. 토니 클리프 역시 국가자본주의라는 “침대”에 소련사회라는 몸을 밀어 넣고 이 침대에 맞게 현실을 늘리고 잘라내었을 뿐이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제 2호에서 토니 클리프의 이론을 중심으로 국가자본주의론의 문제점을 비판하였던 것은 토니 클리프의 이론이 국가자본주의론이 지니는 문제점을 전형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 2호의 토니 클리프의 이론을 집중적으로 비판하였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주장도 가능할 것이다. 즉 “우리는 소련이 국가자본주의라고 보지만, 토니 클리프 식의 국가자본주의론은 아니다”라고 말이다. 그러나 토니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해서, 다른 국가자본주의론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d30a0a;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1)</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 다른 국가자본주의론들 역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추상적, 도식적 방식으로 소련사회를 분석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본주의가 아니니까 사회주의’라는 추상적 도식주의로 소련사회를 설명하려는 국가자본주의론은 불가피하게 많은 오류와 한계를 낳을 수밖에 없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러한 추상적 도식주의에서 오는 오류와 한계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경우가 바로 레스닉과 울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이다. 이 글에서는 이들의 국가자본주의론을 검토해봄으로써, 추상적 도식으로 소련사회를 재단하려는 것이 국가자본주의론에서 나타나는 고질적 문제이고, 이러한 추상적 도식주의가 불가피하게 많은 오류와 한계를 야기한다는 것을 보다 명확하게 알아보도록 하겠다.</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d30a0a;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2)</span></p>
<p class="바탕글"> </p>
<p><span id="more-859"></span></p>
<h2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1. 추상적 도식주의가 지닌 문제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레스닉과 울프의 국가자본주의론</span></h2>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앞서 말한 바처럼 레스닉과 울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을 검토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우선 이들의 이론이 추상적 도식주의를 극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의도에 현실을 뜯어 맞추기 위해 자신만의 도식을 양산해낸다. 때로는 이들은 현실의 사실로 자신의 도식이 올바르다고 입증하려고 하지도 않고, 새로운 도식으로 자신의 도식의 올바름을 입증하려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두 번째로 이러한 추상적 도식주의가 맑스주의와는 대치되는 방법론임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대개 국가자본주의론의 추상적 도식주의는 자기 주장을 할수록 맑스주의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레스닉과 울프의 자본주의론은 이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의 경우 스스로는 맑스의 이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지속해서 강변하지만, 실제 그 내용은 완전히 반맑스주의적인 것으로 변모하였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마지막으로 이들의 이론은 국가자본주의론이 지니는 실천적 오류와 한계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난 2호에서 토니 클리프가 속해 있던 “국제 사회주의자 그룹”의 실천적 오류와 절충을 설명한 바 있었다. 여기에서 국가자본주의론은 제 2차 세계대전 시 소련에 대한 태도,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시의 태도, 전후 동구권 국가의 성격과 식민지, 반식민지 나라에서 출현한 혁명정권의 성격에 대한 태도 등의 문제에서 실천적인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실천적 오류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보지 못하는 추상적 도식주의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현실을 추상적으로 보는 국가자본주의론은 정도에 따라서는 “국제 사회주의자 그룹”이 범하였던 오류보다도 더한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레스닉과 울프는 이러한 실천적 오류의 최대치를 보여준다. 이들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극단적인 청산주의로 나아갔다.</span></p>
<p class="바탕글"> </p>
<h2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2. 레스닉과 울프의 잉여개념에 기초한 계급분석론 요약</span></h2>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레스닉과 울프의 주장을 알기 위해 일단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는 잉여에 기반을 둔 계급 개념에 대해서 간략하게 요약한 후 본격적인 검토를 시작하겠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레스닉과 울프는 자신의 입장을 자세하게 개진한『소련의 역사와 계급이론』이라는 책에서, 공산주의에 대해 규정을 하고 있다. 우선 레스닉과 울프는 기존의 모든 사회주의 이론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는데, 그들에 따르면, 기존의 사회주의 이론들은 공산주의를 “재산”과 “권력”이라는 관점에서 규정하는 한계를 보였다. 기존의 이론들은 소유형태나 권력관계를 공산주의를 규정하는 데 핵심적인 것으로 보면서 “잉여”에 입각한 계급구조로 공산주의를 규정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그들은 잉여를 생산, 전유, 분배하는 과정을 중심에 둔 계급개념을 제시한다. 우선 그들에게 계급은 “사회가 노동자로서 재생산을 위해 필요하다고 간주하는 것 이상(‘잉여’)으로 개인이 노동을 수행하는 사회 내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이 과정은 다음과 같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LEFT: 52pt; MARGIN-RIGHT: 52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ascii-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한 집단이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을 수행하고 자신들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노동의 열매를 돌려받는다. 이 노동자들이 자신의 잉여노동의 열매―‘잉여’―를 다른 집단에게 넘겨주며, 이들은 다시 이를 또 다른 집단에게 분배한다. 이런 의미에서 계급 분석은 사회 내 개인들을 잉여에 대한 관계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다.”(레스닉, 울프, 『소련의 역사와 계급 이론』, 32쪽, 이하 이 책의 인용은 별도 표시 없이 쪽수만 표시함)</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잉여를 생산, 전유, 분배하는 사회 제도를 그들은 사회의 “계급구조”라고 칭하고 있다. 이 계급구조는 “잉여의 생산과 전유”로 이루어진 독특한 “기본계급과정”과 “전유된 잉여의 분배”로 이루어진 “부수 계급과정”의 결합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잉여의 생산과 전유라는 기본 계급과정에서 차이가 각 사회의 차이를 구분한다고 본다. 가령 봉건제, 노예제, 자본주의는 생산자가 자신이 생산한 잉여를 전유하지 못하는 착취사회이다. 반면 공산주의는 잉여의 생산자와 전유자가 일치하는 사회로 규정된다. 그리고 이들은 이러한 잉여에 입각한 계급분석은 맑스에 의해 발전된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말한다.</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d30a0a;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3)</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 </span></p>
<p class="바탕글"> </p>
<h2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3. 레스닉과 울프는 소련사회가 공산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만든 공산주의 규정은 매우 도식적이고 반맑스주의적인 것이었다.</span></h2>
<p class="바탕글">
<h3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1) 레스닉과 울프는 소련사회가 공산주의가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잉여의 생산자가 전유자와 동일하기만 하면 공산주의라는 기계적이고 도식적인 공산주의 규정을 만들었다.</span></h3>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공산주의의 한 특징이 사회적 생산에서 나온 잉여생산물이 사회의 구성원에 의해 전유된다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으로 공산주의가 전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맑스주의는 공산주의(사회주의) 운동의 목표를 언제나 인간해방으로서, 즉 한 인간에 대한 다른 인간의 억압과 착취 일체를 폐지하는 것으로서 정의해왔으며, 공산주의 사회는 이러한 착취와 억압이 폐지된 무계급사회로, 인간이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전면적인 발전을 하게 되는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체로 규정하였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한편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나 노동자 국가, 민주적 계획 모두는 이러한 인간해방을 위한 수단이며, 그 자체가 목표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든 소유형태, 국가형태, 경제운영방식 등이 공산주의와 결합할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각 생산양식은 각각의 고유한 범주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이러한 범주들은 그 생산양식과 기계적으로 분리시켜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맑스주의는 시장, 상품생산, 가치, 화폐 등의 자본주의 범주는 공산주의와 양립할 수 없으며 공산주의는 이러한 범주를 극복해가야 한다고 보았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나 레스닉과 울프의 공산주의관은 이러한 맑스주의적 공산주의의 규정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단지 잉여의 생산자와 전유자가 일치하기만 하면 되는 사회로 매우 협소하고 도식적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공산주의는 이러한 조건만 충족시키면, 어떠한 다른 사회적 범주와도 결합할 수 있는 사회로 만들어 놓았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요컨대 잉여에 입각한 계급분석이라는 방식을 통해 소유형태나 경제운영방식, 국가형태 등이 어떤 모습을 취하든 무관하게 잉여의 생산자와 전유자가 동일할 때에는 모두 공산주의라는 도식적 규정을 만들어 낸 것이다.</span></p>
<p class="바탕글"> </p>
<h3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2) 레스닉과 울프의 공산주의 규정은 반맑스주의적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다.</span></h3>
<p class="바탕글">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레스닉과 울프의 공산주의에 대한 도식적인 규정의 문제점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이것이 맑스주의와 철저히 배치되는 반맑스주의적 규정으로 나아갔다는 점이다. 공산주의를 규정하는 것은 잉여의 생산자와 전유자의 동일성뿐이라는 그들의 협소한 도식은, 이러한 도식만 충족시키면 공산주의는 어떠한 소유형태, 경제운영방식, 국가형태 등과도 결합할 수 있다는 주장에 이른다. 요컨대 이들은 공산주의 사회에서 사적 소유가 주된 소유 형태일 수도 있으며, 시장이 작동하고 가치와 잉여가치, 이윤율 등이 존재할 수 있으며, 심지어 일인 독재와도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span></p>
<p class="바탕글"> </p>
<h4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① 공산주의를 계급이 철폐된 무계급사회가 아니라 또 다른 계급사회로 바라보았다.</span></h4>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우선 레스닉과 울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공산주의 사회를 무계급사회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서 요약한 레스닉과 울프의 계급분석론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은 “공산주의 계급구조”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는데, 이는 공산주의 역시 계급이 존재한다고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LEFT: 52pt; MARGIN-RIGHT: 52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ascii-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공산주의의 기본·부수 계급과정은 착취는 없지만 계급과 그에 따른 계급 갈등이 존재하는 공산주의를 정의한다. 이런 공산주의에서 사람들은 공산주의적 잉여의 규모와 분배를 놓고 투쟁한다. 어떤 사람들은 잉여의 집단적인 생산자와 전유자가 됨으로써 생계를 유지하고, 반면 다른 사람들은 잉여의 분배로 받아서 살아간다. 이 두 집단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공산주의 계급 위치를 점유한다.”(44쪽)</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들은 공산주의를 계급사회로 보는 관점의 기초를 맑스가 제공했다고 주장하고 있다.(44쪽) 그러나 맑스는 언제나 일관되게 공산주의는 무계급사회로 파악하였으며, 그 구체적인 모습을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체”라고 하였다. 공산주의 역시 계급사회라는 레스닉과 울프의 주장은 맑스주의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이다.</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d30a0a;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4)</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 </span></p>
<p class="바탕글"> </p>
<h4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② 이들은 공산주의 사회에서 국가와 관료집단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일인독재나 과두제적인 정치형태와도 공산주의는 공존할 수 있다고 보았다.</span></h4>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레스닉과 울프의 반맑스주의는 공산주의를 계급사회로 바라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청개구리라고 할 정도로 맑스주의적 공산주의관과는 절대 반대가 되는 방향으로만 자신의 견해를 발전시킨다. 가령 이 둘에 의하면 공산주의는 국가가 필수적인 역할을 하며, 관료집단은 잉여노동의 분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들은 정치 과정을 “사회 내 개인의 행동을 규제하는 규칙, 법률, 절차에 대한 논쟁을 설정, 적용, 판결하는 것”(61쪽)으로 매우 협소하고 부르주아적 형식주의적 방식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이들이 보았을 때 정치 과정은 계급구조와는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공산주의에서는 국가가 소멸한다는 견해를 비판하면서 맑스주의 국가론을 “본질론적”이라고 파악한다. 국가는 계급지배와 관련이 없기 때문에 공산주의의 도래와 함께 소멸되는 것이 아니며 공산주의사회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레스닉과 울프에 따르면, “국가는 많은 과정들의 장이다. 사람들과 집단들이 모든 종류의 요구를 국가 기관, 정책, 그리고 재원에 요청한다.”(87쪽) 따라서 레스닉과 울프는 국가는 공산주의 계급구조의 유지를 위해 쉽게 활용될 수 있으며,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지될 것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국가관은 국가를 계급과 무관한 중립적인 기구로 바라보는 것으로 맑스주의적 국가론과는 배치되는 것이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또한 잉여의 분배와 관련된 부수계급으로서 정치적/문화적 관료제가 부수 계급과정을 점유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관료제가 공산주의적 잉여의 분배 분을 더 많이 요구하고 획득함에 따라 공산주의적 계급구조가 붕괴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갈등이 “기본, 부수 계급 사이의 새롭게 합의된 관계 속에서 해결되어 공산주의 계급구조는 유지될 수도 있다”(70쪽)</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공산주의에서도 국가가 존재할 수 있고, 관료제가 부수계급으로서 잉여의 분배를 위해 불가피하게 존재한다는 주장은 국가의 지양,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지양, 노동 분업의 지양을 목표로 하는 맑스주의적 공산주의관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레스닉과 울프의 반맑스주의적 주장은 공산주의적 계급구조는 어떠한 정치형태와도 결합할 수 있으며 반드시 민주적인 형태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데까지 나간다. 그들에 따르면 “잉여노동을 생산, 전유, 분배하는 계급과정과, 개인의 행동에 대한 권력 혹은 통제를 분배하고 행사하는 정치 과정은 구분될 수”(120쪽) 있기 때문에 권력은 계급과는 다른 별개의 것이다. 따라서 관료나 부수계급의 과두제뿐 아니라 “독재 형태의 공산주의의 예로서 한 개인―공산주의 생산자/전유자가 아닌―이 다른 사회적 장뿐 아니라 방대한 공산주의 기업망에 대해서도 전권을 행사”(125쪽)하는 경우 역시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span></p>
<p class="바탕글"> </p>
<h4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③ 레스닉과 울프는 시장과 사적 소유, 가치, 잉여가치, 이윤율 등의 범주들이 공산주의 사회와 공존할 수 있다는 주장도 하였다.</span></h4>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더 나아가 레스닉과 울프는 공산주의가 시장 하에서도, 사적소유의 존재 하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잉여의 생산자와 전유자가 일치하기만 하면 소유형태나 재화의 교환, 분배형태는 어떠한 것이 되어도 공산주의 사회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소유형태와 공산주의 계급구조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이 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LEFT: 52pt; MARGIN-RIGHT: 52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ascii-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우리는 사유 재산이 공산주의 계급구조에 부합하고 이를 지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규칙과 법률, 관습과 문화, 부의 생산과 분배는 모두 사람이 자신의 잉여를 집단적으로 생산, 전유, 분배하도록 할 수 있다.”(98쪽)</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예를 들어 이들은 주식회사의 형태의 사적 소유 역시 공산주의적 계급구조와 결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에 따르면 개개의 사람들은 개인의 필요노동의 보상으로서 임금, 공산주의 집단이 기업 잉여의 일부를 주주에게 배당하는 경우에는 배당금의 수취, 공산주의적 생산노동자가 주식을 판매할 경우에는 자본 이득 혹은 손실 등, 세 가지 종류의 소득을 수취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배당금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잉여를 극대화하려는 동기를 만들 것이라는 주장도 한다. 즉 “특정한 사유 재산 제도는 사회의 공산주의적 계급구조를 적절히 유지하고 강화”(103쪽)할 수 있다는 것이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시장과 공산주의 계급구조의 공존에 대해서도 소유형태의 경우와 비슷한 주장을 한다. 이들은 상품이 전자본주의와 자본주의에서 모두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공산주의사회에서도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이와 비슷하게,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가치, 잉여가치, 가격, 이윤 등 모두가 공산주의 계급구조 속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 특히 시장의 경우에는 일반 상품시장뿐 아니라 노동력 시장도 공산주의계급구조와 공존할 수 있다고 보았다.</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d30a0a;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5)</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LEFT: 52pt; MARGIN-RIGHT: 52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ascii-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관리된 시장밖에 없는 구체적 공산주의에서 가치는, 국가 계획기구의 맑스주의적 이론과 계산, 구매자와 판매자의 변화하는 욕망의 정치적 경향과 정보에 대한 해석, 공산주의적 전유자의 기술적 생산조건, 발전 전략, 지역적·민족적·성적 목적과 제약, 예측 불허의 기후에 대한 적응 등을 반영한다.”(75쪽)</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LEFT: 52pt; MARGIN-RIGHT: 52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ascii-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총산출의 관리된 가치 그리고 소비된 재료 및 노동자의 임금 가체 사이의 차이가, 그 잉여를 전유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노동자 집단이 수취하는 관리된 잉여가치이다. 임금과 소비된 재료에 대한 이 잉여가치의 비율이 각 공산주의 기업의 관리된 이윤율(또한 경제 전체의 평균이윤율)이다. 공산주의 부수계급은 이런 이윤율에 따라 투입과 산출을 배당할 수 있다.”(78쪽)</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LEFT: 52pt; MARGIN-RIGHT: 52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ascii-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관리된 이윤율이 기업들의 성과 기준들 가운데 하나이라면, 기업들 사이의 수익성 경쟁이 존재할 것이다.”(78쪽)</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LEFT: 52pt; MARGIN-RIGHT: 52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ascii-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이런 기업(공산주의 노동자 집단이 노동력 상품의 구매자임과 동시에 생산물 상품의 판매자인 기업:인용자) 내 공산주의 계급구조와 상품―노동력을 포함한―시장의 공존은 시장공산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공산주의의 한 형태를 정의한다.”(110쪽)</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더욱이 이들은 공산주의가 시장과의 공존이 가능하기 때문에 “어떤 공산주의 기업이 생산 비용을 회수하고 잉여가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가격으로 팔아야 할 생산품에 대해 불충분한 수요에 직면”(114쪽)하는 경우, 즉 자본주의에서와 같은 공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span></p>
<p class="바탕글"> </p>
<h3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3) 레스닉과 울프의 반맑스주의적 공산주의관은 그들의 비결정론, 과잉결정이라는 방법론으로 정당화되는데, 이러한 방법론 역시 맑스주의와는 무관한 것이다.</span></h3>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맑스주의와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는 레스닉과 울프의 반맑스주의적 공산주의관은 그들이 취하고 있는 방법론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레스닉과 울프는 책 전반에서 말 그대로 과잉이라고 할 정도로 “과잉결정”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방법론을 “과잉결정에 대한 … 이론적 전념”이라고 표현할 정도이다. 레스닉과 울프는 이 “과잉결정”이라는 용어를 “맑스주의”의 용어라고 칭하고 있지만, 실상 이는 맑스주의의 용어가 아니다. 맑스와 엥겔스는 자신의 글에서 “과잉결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바가 없다. 이 용어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서 이용되던 용어를 알튀세가 차용해온 것에 불과하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알튀세는 이 용어를 경제환원론, 생산력주의에 대해서 문제제기하고자 끌어왔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오류를 다른 오류로 대체한 것에 불과하였다. 알튀세의 방법론은 인간이 “자신들의 생활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것이 인간사회의 가장 결정적 요인이라는 사적 유물론의 기본적인 내용을 부정하고, 다양한 사회적 요소들이 서로 비슷한 중요성을 지니면서 사회적 관계를 결정한다는 식의 내용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어느 특권적 결정요인은 존재할 수 없다는 식의 상대주의, 사회는 인간의 생활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생산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유기적 총체가 아니라, 단순히 여러 요인들의 결합이라는 병렬적이고 기계적 인식을 야기하였다.</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d30a0a;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6)</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 레스닉과 울프 역시 알튀세의 방법론이 지닌 동일한 오류를 보여주고 있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레스닉과 울프는 “사회나 역사를 하나 혹은 일군의 구성요소들의 결정적인 효과로 환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33쪽)거나 “공산주의 계급구조 단독으로 다른 비계급적 측면들을 규정할 수 없으며 규정하지도 않는다”(35쪽)는 식의 주장을 하면서,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어떠한 결정요소도 없는 상대주의적인 관계로 환원시키고 있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들은 또한 계급이나 다른 여러 사회적 요소들에 대해 매우 협소한 병렬적이고 기계적인 인식을 보여준다. 이들에 의하면 계급구조</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d30a0a;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7)</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는 잉여의 생산, 전유, 분배와만 관련이 있으며, 이것 역시 매우 협소하게 인식되어, 잉여를 생산하고 전유하는 과정은 비정치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반면 분배의 영역과 여러 사회문화적 과정은 계급적 성격이 없는 비계급적 요소로 그려진다. 정치는 앞서서 인용하였듯이 개인행동에 대한 권력, 혹은 통제를 분배하고 행사하는 과정이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이들의 정의에 의하면 정치는 계급과정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렇게 협소한 병렬적, 기계적 인식에 입각하면, 공산주의는 어떤 옷이든지 갈아입힐 수 있는 바비인형처럼 된다. 사회의 모든 요소는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에 시장을 입히고, 사적 소유를 입히고, 독재를 입혀도 공산주의는 존재할 수 있다. 레스닉과 울프에겐 시장, 사적 소유, 가치 등의 범주들이 특정한 역사적 생산관계 속에서 유기적으로 발전해온 것들이라는 인식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요컨대 레스닉과 울프의 방법론 역시 맑스주의의 방법론과는 유사한 점이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맑스주의에 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span></p>
<p class="바탕글"> </p>
<h2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4. 레스닉과 울프는 소련사회가 착취적 계급구조라고 당연시 한 후, 자본주의에 대한 명백한 규정도 없이 노예제나 봉건제는 아니기 때문에 자본주의라고 규정하였다. </span></h2>
<p class="바탕글">
<h3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1) 레스닉과 울프는 자본주의가 어떠한 소유구조, 정치형태, 경제운영방식과도 결합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이를 통해 소련사회에서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 소련사회성격 규정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부정할 수 있었다.</span></h3>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레스닉과 울프의 자본주의관은 그의 공산주의관과 동일한 구조라고 볼 수 있다. 공산주의가 잉여의 생산자와 전유자가 동일하기만 하면 어떠한 소유구조, 정치형태, 경제운영방식과도 결합할 수 있듯이, 자본주의 역시, 잉여의 생산자와 전유자가 일치하지 않은 착취적 계급구조만 유지된다면, 어떠한 소유구조, 정치형태, 경제운영방식과도 결합할 수 있는 것이었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따라서 자본주의 역시 집단적 소유, 국가의 중앙집중적 계획 등과도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에 입각하면, 자본주의가 상품생산의 일반화이자,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노동력의 상품화라는 존재조건을 필요로 한다는 맑스주의의</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d30a0a;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8)</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 자본주의 규정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된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그들에 따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본주의라고 생각하는 시장, 사적 소유가 존재하는 자본주의는 민간형태의 자본주의일 뿐이며,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이 국유화되어 있고, 국가의 계획에 의해서 운영되는 경제체제와도 공존할 수 있다. 후자의 자본주의를 국가형태의 자본주의, 즉 국가자본주의라고 칭하였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자신들의 공산주의관에서 파생된 기계적이고 도식적인 자본주의 규정을 통해 레스닉과 울프는 사적 소유, 시장(노동력시장을 포함), 화폐 등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도 자본주의라고 규정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를 통해 소련사회가 지니고 있던 새로운 현상들이 소련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있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으로 치부할 수 있었다.</span></p>
<p class="바탕글"> </p>
<h3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2) 레스닉과 울프는 정작 자본주의적 “계급구조”가 어떠한 것인지는 전혀 정의하지 않은 채, 도식적인 역사단계론을 끌고 와서 공산주의도, 노예제도, 봉건제도 아니기 때문에 소련은 자본주의라는 식의 주장하였을 뿐이다.</span></h3>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한 사회가 자본주의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자본주의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규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자본주의의 착취적 계급구조만 존재한다면 다양한 형태(민간자본주의, 국가자본주의 등)의 자본주의가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을 지루하게 되풀이하였을 뿐, 정작 자본주의의 착취적 계급구조가 무엇인지, 즉 자본주의에서는 잉여의 생산자와 전유자가 어떻게 분리되어 있고, 어떠한 방식으로 착취가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즉 이들은 이러저러한 특성이 자본주의의 본질, 혹은 존재조건인데, 소련에서는 그러한 자본주의적 특성이 존재하였다는 식의 방식으로 성격규정을 하지 않는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들이 소련이 자본주의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우선 이들은 아무 설명도 없이 소련에서 잉여의 생산자와 전유자가 다르다는 것이 당연한 것인 양 전제해 놓고 소련의 계급구조가 착취적 계급구조이라고 규정한다. 그 다음단계는 “왜 소련이 다른 종류의 착취적 계급구조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 계급구조를 나타내는지”(151쪽)를 입증한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들은 맑스와 맑스주의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 착취적 계급구조, 즉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를 인정했고 하면서, 이를 근거로 착취적 계급구조가 이 세 가지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단정해버린다. 이렇게 세 가지 착취적 계급구조만을 놓고 보았을 때, 노예제는 “다른 사람에 의해, 즉 노예주에 의해 즉각 전유되는 잉여를 생산”(152쪽)하는데, 소련은 이런 노예제가 아니었다. 두 번째로 봉건제는 “한 측이 다른 측을 위해 잉여를 생산하는 대인관계상의 속복(‘유기적’, ‘자연적’, 그리고 ‘종교적’)이라는 공식적 관계”(153쪽)를 수반하는데, 소련에서는 “노동자 대중은 최소한 명목상 자유로웠”기 때문에 소련은 봉건제도 아니다. 따라서 소련은 노예제도 봉건제도 아니기 때문에 하나 남은 자본주의가 낙점된다는 것이다.</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d30a0a;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9)</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나 계급사회를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 세 가지로만 보는 것 자체가 매우 도식적인 것이었다. 맑스는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순차적인 시기”로 아시아적, 고대적, 봉건적, 현대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을 언급한 바가 있지만 이를 모든 사회가 밟아온 유일한 역사발전의 단계로 보지 않았다. 맑스와 엥겔스는 이후 당대의 가능한 지식을 이용하여 다양한 생산양식들에 대한 지식을 발전시켰으며, 이후 인류학과 고고학의 발전은 다양한 사회에서 다양한 생산관계를 지닌 계급사회가 존재하여왔음을 보여준다. 가령 유럽의 경우에는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 순의 방식으로 발전해왔지만, 상대적으로 분리되어 다른 방식으로 문명을 발전시켜온 문명권은 유럽과는 다른 다양한 계급사회를 발전시켜왔다. 또한 고고학의 연구는 역사상 최초의 계급사회는 노예제 사회가 아니었다는 것을 규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간사회에 대한 지식의 축적은 맑스의 이론을 도식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맑스의 방법론에 입각하여 각 사회의 발전을 구체적으로 보고 이를 통해 인간사회에 대한 이해를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d30a0a;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10)</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 그러나 레스닉과 울프는 도식적인 역사단계를 자의적으로 설정하고 이 도식 중 다른 나머지 것들은 아니니까 자본주의라는 식으로 소련사회를 규정하였다.</span></p>
<p class="바탕글"> </p>
<h2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5. 레스닉과 울프가 도식적인 공산주의관을 만들고, 도식적인 역사발전관으로 소련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려고 하였던 것은 그가 궁극적으로 소련사회는 자본주의라는 도식을 끼워 맞추려고 했기 때문이다. </span></h2>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소련사회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자기 생각에 맞춰 만들어 놓은 특정한 도식에 현실을 끼워 넣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에서 나타난 현상들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레스닉과 울프는 인간 사회의 발전을 구체적으로 보지 못한 채, 추상적 도식주의로 일관하였다. 그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도식적인 규정을 만들어 소련은 공산주의가 아니기 때문에 착취적 계급구조를 지닌 사회라고 단정 지었다. 그 다음에는 역사발전 5단계론이라는 도식을 적용하여 착취적 계급구조인 소련은 노예제로 볼 수도 없고, 봉건제로도 볼 수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라고 규정하였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레스닉과 울프의 견해를 논리적으로 따라가 보면, 소련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착취적 계급구조라고 규정하였다 하더라도, 이들은 소련이 여타의 생산양식과는 다른 새로운 착취사회가 되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새로운 역사발전 도식을 끌고 와서까지 소련을 자본주의라고 규정하려고 했던 것은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소련이 자본주의라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입증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레스닉과 울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이 여타의 국가자본주의론자들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른 국가자본주의론자들처럼 “사회주의가 아니니까 자본주의”라는 추상적 도식주의 속에 갇혀 있음을 보여준다. </span></p>
<p class="바탕글"> </p>
<h2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6. 러시아 10월 혁명에 대한 부정으로 나아간 레스닉과 울프의 국가자본주의론</span></h2>
<p class="바탕글">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미 「강령토론」 제 2호의 글에서 언급하였듯이, “소련사회성격의 규정”문제는 실천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것으로, 소련사회의 성격을 구체적이고 역사적으로 규명하지 못할 경우, 이론적으로뿐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심각한 오류를 낳게 된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레스닉과 울프의 국가자본주의론 역시 소련사회 성격 규정이 지니는 실천적 중요성을 보여준다. 그들의 입장은 러시아 10월 혁명의 의의와 관련하여 심각한 문제를 낳았다. 가령 토니 클리프의 경우에는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보면서, 1920년대 말 국가자본주의로 변질되었다고 보는 반면, 레스닉과 울프는 소련에서는 애시당초 사회주의혁명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span></p>
<p class="바탕글"> </p>
<h3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1) 레스닉과 울프는 1917년 10월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민간자본주의에서 국가자본주의로의 이행만을 낳았다고 주장하였다. </span></h3>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그들은 1917년 혁명을 통해 일어난 일은 민간형태의 자본주의에서 국가형태의 자본주의로의 이행이라고 파악한다. </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LEFT: 52pt; MARGIN-RIGHT: 52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ascii-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소련 전 역사에 걸쳐, 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보편적이었다. 한 종류의 착취적 계급구조가 전복됐을 때, 다른 구조가 곧 그 자리를 차지했다. 1917년 혁명은 산업에서 민간자본주의를 밀어냈지만, 그 대신 거기에 항구적인 국가자본주의를 수립했다.”(253쪽)</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LEFT: 52pt; MARGIN-RIGHT: 52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ascii-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소련은 … 공산주의 계급구조라고 정의한 것에 대해 사회적 주도권을 성취하지도 심지어 이에 접근하지도 못했다.”(253쪽)</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또한 레스닉과 울프는 혁명가나 노동자들은 공산주의의 이행을 재산과 권력의 분배로 오해하여 실제로는 자본주의가 들어섰는데,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것으로 판단하였다고 주장한다. </span></p>
<p class="바탕글" style="MARGIN-LEFT: 52pt; MARGIN-RIGHT: 52pt"><span style="FONT-FAMILY: 나눔명조; mso-ascii-font-family: 나눔명조; mso-hansi-font-family: 나눔명조">“그 당시 사회적으로 우세했던 계급혁명의 담론들은 재산과 권력의 분배에 초점을 맞추었다. 따라서 노동자의 이름으로 행해진 민간자본주의에서 국가자본주의로의 실질적 이행을,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이라고 찬양하는 데 있어서 노동자들은 대체로 동의했다.”(267쪽)</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는 사실 상, 1917년 10월 사회주의 혁명은 혁명가와 노동자들이 착각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러한 방식으로 레스닉과 울프는 소련이 국가자본주의사회였다는 것을 넘어서 1917년 10월 혁명 자체가 사회주의혁명이 아니라 국가자본주의를 낳았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span></p>
<p class="바탕글"> </p>
<h3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2) 레스닉과 울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은 러시아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의 의의와 성과를 모두 부정하면서 심각한 청산주의로 나아갔다.</span></h3>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러시아 10월 사회주의혁명은 “이미 자본주의가 역사의 발전에서 그 진보적인 역할을 다하고 반동적인 것으로 되었음을, 이미 쇠퇴해가는 단계에 들어섰음을 입증해주었으며 전세계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민중, 피억압민족에게 착취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희망과 열정을 불러일으켜 자본주의나라들 특히 독일 등 선진자본주의나라에서의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투쟁과 조선, 중국 등 식민지, 반식민지나라들에서의 민족해방투쟁의 일대 고양을 가져왔다.” 그리고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역사적 이행시기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었다.</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d30a0a;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11)</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그러나 레스닉과 울프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주의혁명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은 것이 된다. 이는 단지 1917년 10월 혁명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아니다. 위에서 10월 혁명의 의의에서 거론하였듯이, 10월 혁명은 전세계적으로 인류 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많은 진보적인 성취를 이루어내었다. 그러나 10월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해석하는 입장에 입각할 때에는 역사적 성과들은 하나하나 부정되게 된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레즈닉과 울프는 실제로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폐지하고 이를 계획과 결합시켜 엄청난 생산성의 발전을 이루게 된 점이나, 민족해방운동과 반나찌즘 투쟁에서 소련이 행했던 적극적 역할, 사회복지의 확대 등 소련사회가 지니고 있었던 자본주의에 비해 진보한 측면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치부하였다.</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COLOR: #d30a0a;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12)</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 소유형태, 경제운영방식 등의 변화, 사회복지의 확대 등은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으며,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성취할 수 있는 것으로 폄하되었다. 민족해방운동의 경우에는 식민지, 반식민지에 국가자본주의를 이식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실천적으로 레스닉과 울프의 이론은 실천적으로 러시아 10월 사회주의 혁명의 의의와 성과를 모두 부정하는 청산주의에 이르렀다.</span></p>
<p class="바탕글"> </p>
<h2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마치며</span></h2>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레스닉과 울프의 사례는 어떻게 보면 국가자본주의론이 나아갈 수 있는 가장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스닉과 울프의 입론이 국가자본주의론 전반의 오류를 비판하는데 있어 과도한 사례는 아니다. 각각의 국가자본주의론들은 형태만 다를 뿐, 그 본질에서는 추상적 도식주의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솔직히 이렇게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의 주장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은 상당히 고역이라고 할 수 있다. 맑스주의라고 자칭하면서 실내용에서는 관념적인 방법론으로 입론을 전개하고 현실을 설명하는 모습, 이 과정에서 온갖 궤변과 왜곡을 만들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맑스와 엥겔스를 자의적으로 끌고 오는 모습을 계속 검토하는 것은 많은 정력을 낭비하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각각의 국가자본주의론의 내용을 하나하나 검토하기 시작한다면, 결국 추상적 도식에 소련사회의 현실을 끼워 맞추려고 하는 국가자본주의론의 고질적인 모습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마지막으로 글을 마치기 전에, 이렇게 국가자본주의론을 비판하는 실천적 의미를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 사실 레스닉과 울프의 이론을 검토하는 것은 현실과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이론적인 활동으로 보인다. 그리고 국가자본주의론에서 고질적으로 나타나는 방법론인 추상적 도식주의를 비판하는 것 역시 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이론적 논의로 느껴질 수 있다. 게다가 제 2호의 글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소련도 붕괴하고 현실 사회주의권도 몰락해버린 시점이니, 이러한 논쟁이 얼마나 의미가 있느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판단과 실천에 있어서 이론이 가지는 중요성은 항상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혁명적 이론이 없이는 혁명적 실천이 있을 수 없다는 레닌의 말처럼, 국가자본주의론을 비판하는 것은 올바른 이론을 수립하지 못하면 실천 역시 올바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레스닉과 울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은 이러한 이론과 실천 사이의 관계를 확인시켜준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레스닉과 울프가 범하는 추상적, 도식적 태도는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이해도, 올바른 실천적 결론도 주지 못하였다. 오히려 이들은 추상적 도식주의에 빠진 국가자본주의론이, 얼마나 어리석은 이야기를 하는 정도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레스닉과 울프는 추상적 도식으로 소련 사회를 설명하려는 태도가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반면교사의 사례라 할 것이다.</span></p>
<p class="바탕글">
<p class="바탕글">
<h3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미주)</span></h3>
<p class="바탕글">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1) 국가자본주의론이라는 이름 안에는 각자가 택하는 정치적 관점이나 방법론, 자신만의 자본주의관 등에 따라 무수한 국가자본주의론들이 존재하고 있다. 다종다양한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의 경우에는 그 세부적 내용으로 들어가면 소련을 자본주의로 규정하는 방식들이 너무 상이하여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경우까지 존재한다. 다양한 국가자본주의론자들에 대해서는 아래의 표를 참조하길 바란다. </span></p>
<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center">
<table style="BORDER-BOTTOM: #000000 0.28pt solid; BORDER-LEFT: #000000 0.28pt solid; BORDER-COLLAPSE: collapse; BORDER-TOP: #000000 0.28pt solid; BORDER-RIGHT: #000000 0.28pt solid" border="0" width="669">
<tbody>
<tr>
<td style="width: 389.01pt; height: 14.65pt; border: #000000 0.28pt solid; padding: 1.41pt;" colspan="3" width="660" valign="middle">
<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center; LINE-HEIGHT: 135%; LAYOUT-GRID-MODE: char"><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9pt; FONT-WEIGHT: bold;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lt;표 1&gt; 주요 국가자본주의론자</span></p>
</td>
</tr>
<tr>
<td style="width: 100.94pt; height: 13.65pt; border: #000000 0.28pt solid; padding: 1.41pt;" width="165" valign="middle">
<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center; LINE-HEIGHT: 135%; LAYOUT-GRID-MODE: char"> </p>
</td>
<td style="width: 201.28pt; height: 13.65pt; border: #000000 0.28pt solid; padding: 1.41pt;" width="295" valign="middle">
<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center; LINE-HEIGHT: 135%; LAYOUT-GRID-MODE: char"><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8pt; FONT-WEIGHT: bold;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대표적 논자</span></p>
</td>
<td style="width: 86.79pt; height: 13.65pt; border: #000000 0.28pt solid; padding: 1.41pt;" width="188" valign="middle">
<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center; LINE-HEIGHT: 135%; LAYOUT-GRID-MODE: char"><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8pt; FONT-WEIGHT: bold;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역사적 평가</span></p>
</td>
</tr>
<tr>
<td style="width: 100.94pt; height: 50.44pt; border: #000000 0.28pt solid; padding: 1.41pt;" width="165" valign="middle">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35%; LAYOUT-GRID-MODE: char; MARGIN-LEFT: 10pt; MARGIN-RIGHT: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8.5pt;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1917년 이후 (국가)자본주의</span></p>
</td>
<td style="width: 201.28pt; height: 50.44pt; border: #000000 0.28pt solid; padding: 1.41pt;" width="295" valign="middle">
<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 LINE-HEIGHT: 115%; LAYOUT-GRID-MODE: char"><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8.5pt;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 후기 Bettelheim, Chavance</span></p>
<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 LINE-HEIGHT: 115%; LAYOUT-GRID-MODE: char"><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8.5pt;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 Resnick and Wolff</span></p>
<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 LINE-HEIGHT: 115%; LAYOUT-GRID-MODE: char"><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8.5pt;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 Fernandez 등 자율주의</span></p>
<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 LINE-HEIGHT: 115%; LAYOUT-GRID-MODE: char"><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8.5pt;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 Chattopadhyay, Mattick, 大谷禎之介 등 평의회공산주의</span></p>
</td>
<td style="width: 86.79pt; height: 50.44pt; border: #000000 0.28pt solid; padding: 1.41pt;" width="188" valign="middle">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15%; LAYOUT-GRID-MODE: char; MARGIN-LEFT: 10pt; MARGIN-RIGHT: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8.5pt;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자본주의와 동일하게 반동적</span></p>
</td>
</tr>
<tr>
<td style="width: 100.94pt; height: 30.88pt; border: #000000 0.28pt solid; padding: 1.41pt;" width="165" valign="middle">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35%; LAYOUT-GRID-MODE: char; MARGIN-LEFT: 10pt; MARGIN-RIGHT: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8.5pt;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1928년 이후 국가자본주의</span></p>
</td>
<td style="width: 201.28pt; height: 30.88pt; border: #000000 0.28pt solid; padding: 1.41pt;" width="295" valign="middle">
<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 LINE-HEIGHT: 115%; LAYOUT-GRID-MODE: char"><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8.5pt;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 Dunayevskaya, Kliman, Anderson</span></p>
<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 LINE-HEIGHT: 115%; LAYOUT-GRID-MODE: char"><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8.5pt;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 IS 경향(Cliff, Harman, Callinicos, Haynes)</span></p>
</td>
<td style="width: 86.79pt; height: 30.88pt; border: #000000 0.28pt solid; padding: 1.41pt;" width="188" valign="middle">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15%; LAYOUT-GRID-MODE: char; MARGIN-LEFT: 10pt; MARGIN-RIGHT: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8.5pt;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자본주의와 동일하게 반동적</span></p>
</td>
</tr>
<tr>
<td style="width: 100.94pt; height: 30.88pt; border: #000000 0.28pt solid; padding: 1.41pt;" width="165" valign="middle">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35%; LAYOUT-GRID-MODE: char; MARGIN-LEFT: 10pt; MARGIN-RIGHT: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8.5pt;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1956년 이후 자본주의</span></p>
</td>
<td style="width: 201.28pt; height: 30.88pt; border: #000000 0.28pt solid; padding: 1.41pt;" width="295" valign="middle">
<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left; LINE-HEIGHT: 115%; LAYOUT-GRID-MODE: char"><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8.5pt;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 초기 Bettelheim 등 마오주의</span></p>
</td>
<td style="width: 86.79pt; height: 30.88pt; border: #000000 0.28pt solid; padding: 1.41pt;" width="188" valign="middle">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15%; LAYOUT-GRID-MODE: char; MARGIN-LEFT: 10pt; MARGIN-RIGHT: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8.5pt;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자본주의와 동일하게 반동적</span></p>
</td>
</tr>
<tr>
<td style="width: 389.01pt; height: 2.82pt; border: #000000 0.28pt solid; padding: 1.41pt;" colspan="3" width="660" valign="middle">
<p class="바탕글" style="LINE-HEIGHT: 135%; LAYOUT-GRID-MODE: char; MARGIN-LEFT: 10pt; MARGIN-RIGHT: 10pt"><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8.5pt; FONT-WEIGHT: bold;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출처</span><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FONT-SIZE: 8.5pt;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 : 정성진, 「소련 (1917-1991)의 사회 성격: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의 “표 1. 소련사회성격론의 유형화”에서 국가자본주의론자들만 발췌함.</span></p>
</td>
</tr>
</tbody>
</table>
<p class="바탕글">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2) 스티븐 레스닉, 리처드 울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은 『소련의 역사와 계급 이론』(이후)를 참고할 것. 이 글에서 검토하고 있는 레스닉과 울프는 미국 메사추세츠 대학교 앰허스트 캠퍼스의 경제학과 교수로 소위 ‘앰허스트 학파’의 대표적 이론가라고 한다. 이들은 「맑스주의를 다시 생각한다(Rethinking marxism)」라는 학술지를 발간하고 있는데, 이들의 입장은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맑스주의와 포스터모더니즘의 창조적 만남”(!)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3) 확실히 맑스가 잉여노동, 잉여생산물의 개념을 생산양식을 분석하는 데에서 중요하게 고려하였다. 그는 『자본론』이나 「고타 강령 초안비판」 등에서 생산관계에서 잉여노동, 잉여생산물이 지니는 의미를 거론하였으며, 공산주의사회에서도 잉여노동, 잉여생산물이 필요함을 지적하였다. 예컨대 맑스는 자본론 1권 제 9장에서 “여러 경제적 사회구성체들 사이의 차이는, 예컨대 노예노동에 근거한 사회와 임금노동에 근거한 사회 사이의 차이는 이 잉여노동이 직접적 생산자인 노동자로부터 강탈되는 그 형태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맑스가 말하는 잉여노동, 잉여생산물의 내용과 레스닉과 울프가 말하는 잉여의 생산, 전유, 분배 과정은 전혀 동일하지 않다. 레스닉과 울프는 단지 자신이 주장하는 잉여 개념의 정당성을 강변하기 위해 맑스를 끌어왔을 뿐이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4) 레스닉과 울프가 무계급사회에 대해 논의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때의 무계급사회는 단지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구분이 결여되어 있는 사회일 뿐이다. 즉 여기서도 무계급사회는 사회주의 운동의 참된 목표로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잉여노동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로 기능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5) 레스닉과 울프는 이러한 시장과 가치 등 자본주의적 범주들과 공산주의 사이의 공존이 “관리된”이라는 “구별 형용사”를 달기만 하면 가능한 것으로 파악한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6) 알튀세의 방법론이 사실 상 인간의 생활조건의 생산이 인간의 역사를 결정한다는 맑스주의의 기본견해를 부정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여러 이론가들이 자신의 청산주의나 반맑스주의를 정당화하는 논거로 알튀세의 방법론을 들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7) 레스닉과 울프의 “계급구조”라는 용어자체가 맑스주의적 용어가 아니다. 그들는 “자신들의 생활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것이 인간의 역사를 결정한다는 견해 자체를 결정론, 본질론이라고 비판하기 때문에, 인간역사의 결정적 요소를 표현하는 “생산관계”나 “생산양식” 등의 표현을 쓰지 않고, 이를 계급구조라는 매우 협소한 용어로 대체해버렸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8) 자본주의의 존재조건에 대해서는 황정규, 「맑스주의에서 벗어난 국가자본주의론의 오류」,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2호를 참고할 것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9) 이것으로 자신의 논거가 불충분하였던지,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밖에 없었던 상황 역시 고려하였다는 주장을 하지만, 이는 핵심적인 논거는 못되고 있으며, 다른 곳의 자신의 주장과 상충된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10) 인류의 발전과 계급사회의 등장에 대해서 더 자세히 이해하려면, 인류학적, 고고학적 성과를 정리하고 있는 크리스 하먼의 「엥겔스와 인간사회의 기원」을 참고할 것.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11) 해방연대(준) 당건설사업추진단, 「(가칭)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 강령초안”」 참고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12) 소련사회의 특수한 성격에서 나오는 자본주의 사회와 비교한 상대적 진보성에 대해서는 「강령토론」 제 2호에 실린 이상진, 「소련 사회의 진보성과 반동성」을 참고할 것 </span></p>
<p class="바탕글"> </p>
]]></content:encoded>
			<wfw:commentRss>http://programto.net/wordpress/?feed=rss2&amp;p=859</wfw:commentRss>
		<slash:comments>0</slash:comments>
		</item>
		<item>
		<title>‘에코자본주의’의 허상과 생태적 대안 제시의 필요성</title>
		<link>http://programto.net/wordpress/?p=856</link>
		<comments>http://programto.net/wordpress/?p=856#comments</comments>
		<pubDate>Mon, 15 Mar 2010 04:40:33 +0000</pubDate>
		<dc:creator>강령토론</dc:creator>
				<category><![CDATA[생태문제]]></category>
		<category><![CDATA[제 4호]]></category>
		<category><![CDATA[강령토론]]></category>
		<category><![CDATA[강령토론 4호]]></category>
		<category><![CDATA[기후변화]]></category>
		<category><![CDATA[맑스주의생태론]]></category>
		<category><![CDATA[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4호]]></category>
		<category><![CDATA[생태위기]]></category>
		<category><![CDATA[에코자본주의]]></category>
		<category><![CDATA[코펜하겐기후협약]]></category>

		<guid isPermaLink="false">http://programto.net/wordpress/?p=856</guid>
		<description><![CDATA[<p><!--StartFragment--></p>
<p class="본문"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박 남 일 (노동해방실천연대(준) 회원)</span></p>
<p class="바탕글">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그간 남한 사회의 노동자계급과 변혁운동 진영은 지구적 위기인 생태 문제에 대한 의제를 선점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생태운동을 일부 시민운동가들의 전유물로 보면서 방치하거나, 애써 외면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당면한 계급적 의제에 힘겹게 매달리느라 생태환경문제에 대해서는 체계적인 논의조차 갖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이 생태 문제를 피해가는 변명이 되지는 못한다. 생태위기는 전 인류적이고 전 계급적인 문제인 동시에, 그로 인한 고통과 피해가 노동자계급에게 심각하게 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span></p>
<p><a href="http://programto.net/wordpress/?p=856" class="more-link">Read more on ‘에코자본주의’의 허상과 생태적 대안 제시의 필요성&#8230;</a></p>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tartFragment--></p>
<p class="본문"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박 남 일 (노동해방실천연대(준) 회원)</span></p>
<p class="바탕글"> </P></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그간 남한 사회의 노동자계급과 변혁운동 진영은 지구적 위기인 생태 문제에 대한 의제를 선점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생태운동을 일부 시민운동가들의 전유물로 보면서 방치하거나, 애써 외면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당면한 계급적 의제에 힘겹게 매달리느라 생태환경문제에 대해서는 체계적인 논의조차 갖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이 생태 문제를 피해가는 변명이 되지는 못한다. 생태위기는 전 인류적이고 전 계급적인 문제인 동시에, 그로 인한 고통과 피해가 노동자계급에게 심각하게 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그런 터에 본지 3호에 실린 황정규 동지의 글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은 몇 가지 면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우선 생태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논의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소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획기적이었다. 또 마르크스주의에 씌워진 ‘반(反)생태적’이라는 누명이 근거 없는 비난일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야말로 생태계 위기라는 지구적 문제를 올바르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시도는 사회주의노동자당 건설의 여정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생태관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지피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그런 성과를 밑절미로 하여 이 글에서는 부르주아 세력이 생태문제에 대하여 대응해온 과정과 현황을 거칠게나마 짚어보고자 한다. 세계의 부르주아계급과 제국주의 세력은 생태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해 왔을까, 또 그렇게 의제를 선점한 생태문제의 본질을 어떻게 왜곡시켜왔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생태위기 해법의 반면교사와 더불어,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생태 강령에 대한 배경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span id="more-856"></span></span></p>
<p class="바탕글">
<p class="바탕글"> </p>
<h2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유엔기후변화협약을 뼈대로 한 국제적 대응</span></h2>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지난 1990년대, 생태 위기에 대한 전 세계 NGO들의 실천적 문제제기와 일부 과학자들의 끔찍한 경고가 이어지면서 국제사회는 비로소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92년 6월 유엔환경개발회의(UNCED, 일명 리우회의)에서 기후변화에 관한 기본협약(United Nations Framework Convention on Climate Change)이 채택되었다.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해 온실가스의 인위적 방출을 규제하자는 내용의 협약으로, 통상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이라고 부른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1994년 3월에 발효되어 전 세계 190여 개 국가가 참여하는 이 협약은, 각국의 온실가스 배출과 흡수 현황에 대한 국가통계 및 정책이행에 관한 국가보고서 작성, 온실가스 배출 감축을 위한 국내 정책 수립 및 시행, 그리고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 권고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1995년 3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기후변화협약 제1차 당사국총회(Conference of the Parties 1, COP1)에서는 구체적 이행을 위한 방안으로, 선진국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치를 규정하는 ‘베를린 위임사항(Berlin Mandate)’을 채택하였다. 에너지 소비가 많고 기술적, 경제적 능력이 있는 선진국이 선도적 역할을 하면서 개도국의 사정을 배려한다는 원칙하에 국가별 수준에 따라 당사국을 ‘부속서Ⅰ’, ‘부속서II’, ‘기타국(개도국)’ 등으로 구분하여 각기 차등적인 의무를 부과한 것이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베를린 위임사항에 대한 의정서는 2년 뒤인 1997년에 일본 교토에서 열린 제3차 당사국총회에서 채택되었다. 이른바 ‘교토의정서(Kyoto protocol)’로, 주요 선진국 38개국을 의무이행 대상국으로 지정하여 2008∼2012년 사이에 온실가스 총배출량을 1990년 수준보다 평균 5.2% 감축키로 한 것이 골자다. 이산화탄소(CO2), 메탄(CH4), 아산화질소(N2O), 불화탄소(PFC), 수소화불화탄소(HFC), 불화유황(SF6) 등의 여섯 가지 감축 대상 가스에 대하여 당사국은 에너지효율향상, 온실가스의 흡수원 및 저장원 보호, 신·재생에너지의 개발과 같은 감축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이었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의무이행 당사국들은 감축 이행 과정의 신축성을 위하여 ‘배출권거래’, ‘공동이행’, ‘청정개발체제’ 등과 같은 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1998년 11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개최된 제4차 당사국총회에서는 신축적인 제도운용과 관련한 작업을 2000년까지 완료한다는 행동계획을 세웠다. 부르주아 국가들의 이러한 장치는, 입으로는 온실가스 감축을 말하지만 여전히 개발과 성장을 멈출 수 없다는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한편, 한국은 제3차 당사국총회에서 기후변화협약 상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되어 의무대상국에서 제외되었다. 총회가 열리기 직전에 IMF 구제 금융 사태를 맞았던 것이 큰 이유였다. 이어 제4차 당사국총회 때는 아르헨티나, 카자흐스탄 등 일부 개발도상국이 자발적 의무 부담을 선언하였지만, 한국은 줄곧 모르쇠로 일관하여 생태환경 후진국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하지만 한국은 IEA(국제에너지기구) 통계 기준, 2000년에 연간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세계 9위에 해당하는 4억 3400만 톤을 넘어섰다. 이는 세계 전체 배출량의 1.8%를 차지하는 수치였다. 더욱이 1990년 이후 10년 동안 배출량 증가율이 세계 최고 수준인 85.4%로 나타났다. 이에 몇몇 선진국은 감축 목표 합의를 명분으로 한국이 멕시코와 함께 2008년부터 자발적으로 선진국 의무를 부담하라고 요구했다. 한국 정부의 태도를, 자국의 온실가스 감축 부담을 덜어내는 빌미로 활용한 것이다. 특히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28%를 차지하던 미국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실상은 자국의 산업보호를 위해 2001년 3월, 교토의정서를 탈퇴하였다. </span></p>
<p class="바탕글"> </p>
<h2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토크쇼’로 끝난 코펜하겐 당사국총회</span></h2>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교토의정서는 그 시한이 2012년에 끝나게 된다. 그래서 최근에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15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가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2009년 12월. 세계 193개국 대표가 2주간 코펜하겐에서 기후회의를 가졌고, 더불어 150개국 정상회의가 열렸다. 세계 각국에서 기자들이 5000명이나 몰려들어, 기후변화에 대한 팽배한 위기의식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코펜하겐 총회를 ‘호펜하겐’이라며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뚜껑을 열고 보니 ‘토크쇼’에 불과했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 토크쇼에서 미국은 1990년 대비 4% 감축안을 내놓으며 교토의정서보다 완화된 수준으로 선진국과 개도국이 함께하는 단일 협정을 주장했다. 하지만 개도국은 이에 대해 ‘교토의정서를 약화시키면 안 된다고 비판하였다. 독일 등 유럽 나라도 미국이 최소한 20%는 감축해야 한다며 개도국의 주장을 거들었다. 그로써 교토의정서를 약화하려는 미국의 시도를 막아내고, ‘코펜하겐 협정’을 채택했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협정에 따르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 각각 205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감축하고, 지구 온난화로 인한 평균 온도 상승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섭씨 2도 이내로 제한키로 하였다. 이에 따라 2050년까지 선진국은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대비 80%까지, 그리고 개도국은 최소 15%에서 최대 30%까지 감축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법적 구속력을 가진 협약이 아니라 정치적 선언일 뿐이었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가장 중요한 국가별 온실가스 감축량을 포함한, 2013년 이후의 포스트 교토 체제는 2010년 12월에 멕시코에서 열릴 제 16차 당사국총회로 미뤄지게 되었다. 결국 교토의정서를 대신할 ‘코펜하겐의정서’는 탄생하지 않았다. 코펜하겐 기후회의는 부르주아 진영 안에서도 실패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 가장 큰 책임이 미국의 미온적 태도에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한편 코펜하겐 당사국총회에서 한국정부는, 정상회담에 참가한 이명박의 입을 통해 ‘함께 행동하자(Taking Action Together)’고 하며 기후변화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너부터’가 아니라 ‘나부터’로 전환하는 ‘Me First’ 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 정부는 또 ‘개도국감축행동등록부’ 설치를 제안하고, 개발도상국의 ‘녹색성장’ 정책수립을 지원하는 국제기구로 ‘글로벌 녹색성장연구소(GGGI)’를 내년에 한국에 설립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2012년 제18차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를 한국에서 개최하기를 희망한다며 껍데기만 화려한 수사를 남발하였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에 앞서 한국 정부는 2020년 국내에서 배출될 것으로 예상되는 온실가스량(배출전망치)에 비해 30%, 5억6900만 톤을 감축하는 감축목표치를 미리 발표한 바 있었다. 기후변화협약에 선제적 대응으로 나선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눈가림식 숫자 장난으로 선진국의 비웃음을 샀다. 그것은 2020년에 적어도 13억 톤의 온실가스를 배출하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지금보다 줄이겠다는 것이 아니라 ‘덜 늘리겠다’는 것이었다. 온실가스 배출 증가율이 세계 1,2위를 다투는 국가로서 한국은 매우 교활하고 간교한 태도로 세계적 의제에 임한 것이었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코펜하겐 의정서는 실패했지만, 당분간 부르주아 국가들의 토크쇼는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앞으로도 계산기를 두드리며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게 될 것이다. 그것이 토크쇼의 한계다. 따라서 유엔기후변화협약은 자본주의 국가간의 틀로는 기후변화와 생태위기에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줄 뿐이다. </span></p>
<p class="바탕글"> </p>
<h2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에코자본주의’의 허상</span></h2>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지난 1990년대 초반, 현실 사회주의 블록의 잇따른 붕괴와 더불어 한국 내 계급운동이 분화과정을 거치면서 상당수 활동 역량이 이른바 ‘환경운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하여 지난 20여 년 가까이 남한에서 생태환경에 대한 문제제기는 주로 다양한 NGO들에 의하여 주도되어 왔다. 이들은 불교적 세계관이나 생명사상 등 관념론적 조류와 연대하거나 더러는 생활협동조합과 같은 생활공동체와 연결망을 형성하면서, 계급운동 진영과는 일정한 선을 그어왔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한편, 유력한 환경운동단체들은 재정을 핑계로 부르주아정부나 재벌기업의 후원을 받으며 그들과 유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또 스스로 관료화된 간부들이 부패상을 드러내며 부르주아 권력에 약점을 제공하였다. 결국 그들은 겉으로는 권력과 자본에 대립하는 듯싶었지만 속으로는 점점 자본의 논리에 종속당해온 것이다. 요컨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토건자본과 결탁하여 무지막지한 개발 사업을 벌이는 경우, 흔히 환경론자들은 형식적으로 열린 공청회 객석을 채워주는 역할을 자임하였다. 그 자리에서 환경론자들은 사업의 문제점을 비판한다. 그러면 토건자본과 권력은 고개를 끄덕이며 비판을 일정 정도 수용한다. 그런 다음에 ‘민간의 의견을 수렴하였다’고 생색을 내며 파괴적 개발에 속도를 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환경론자들이 생태 파괴적 개발 사업에 면죄부를 발부해준 꼴이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지금까지 NGO세력과 부르주아권력은 생태 문제를 두고 한 마디로 ‘밀고 당기는’ 거래 양상을 보여 왔다. 이즈막의 코펜하겐 당사국총회가 열리는 기간에 국내 환경재단 기후변화센터 최열 공동대표가 LG전자 김영기 부사장 등과 함께 코펜하겐 근교에서 해상 풍력 발전단지를 사이좋게 둘러보는 사진이 인터넷신문에 공개된 적이 있다. 그것은 국내에서 ‘환경운동’을 주도하는 인사들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었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국내의 주류 환경론자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를 넘지 못하였다. 아니 넘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도 마르크스주의가 반환경적이라고 믿는다. 결국 그들이 추구하는 종착역은 ‘에코(ECO)자본주의&#8217;다. 이른바 ’신사회운동가‘들이 꿈꾸는 ’착한 자본주의‘와 통하는 논리다. 그러한 생태관은 필연적으로 생태위기에 대한 의제를 자본과 권력의 품으로 넘어가게 만들었다. 의도를 하였든, 하지 않았든 그들은 열심히 죽을 쑤어서 생태 위기의 피의자들에게 갖다 바치는 우(愚)를 범하였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명박이 2008년 8·15 경축사에서 국가비전으로 &#8216;저탄소 녹색성장&#8217;을 선언한 것은 그 절정이었다. 줄곧 ‘고탄소 회색성장’을 주도해온 자의 입에서 갑자기 ‘저탄소 녹색성장&#8217;이라는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물론 그 후에도 남한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줄어들기는커녕 여전히 늘어났다. 그처럼 애초부터 온실가스 감축 따위에는 관심도 없던 자들이 녹색성장을 외친 것은 그간 NGO(비정부단체) 중심으로 진행되어 온 생태문제에 대한 의제를 자신들이 독점하고, 이를 생태위기 시대의 새로운 이윤창출사업으로 삼으려는 의도였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lang="EN-US">4대강사업에 대한 집착은 그 단적인 예다. 그래서 남한 부르주아체제는 엄청난 비용을 들여가며 ‘저탄소 녹색성장&#8217;이라는 광고 콘셉트를 홍보하는 데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녹색’과 ‘성장’이라는 적대적 개념을 억지로 흘레붙여놓고, 상품 판매를 위한 일종의 기업 이미지 광고 기법을 차용하여 대규모 물량주의 광고를 가동한 것이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사실 남한 부르주아체제가 내세우는 ‘녹색성장&#8217;은 실제로는 생태계를 유린하는 4대강 토목 공사를 시작으로 2022년까지 원자력발전소 12기를 신규로 건설하고자 하는 일종의 &#8216;그린 워시&#8217;(Green Wash)다. 생태와는 관련이 없는 회색사업에 녹색 페인트를 칠한 것이다. 이처럼 부르주아체제는 화석연료에 대한 대체제로서 원자력이라는 마약 처방을 계획하고 있다. ‘녹색’을 빙자한 성장을 통하여 더 많은 에너지와 상품을 소비하게 하려는 것이다. </span></p>
<p class="바탕글"> </p>
<h2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총체적 생태 복원에 대한 전망을 제시해야 </span></h2>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계급운동과 선을 그은 환경론자들은 ‘에코자본주의’라는 몽롱한 이정표 앞에서 표류하며 생태계 파괴의 주범들에게 면죄부를 발부하였다. 그렇다면 그동안 노동자계급운동 진영은 무엇하고 있었느냐는 비판도 나올 법한 일이다. 그간 사회주의자들 대다수는 생태계 문제자체에 대해 그다지 관심과 적극성을 보여주지 못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환경론자들의 관점으로는 생태문제에 대한 실천적 해법을 도출하기 어렵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정부 간 협상으로 온실가스 배출을 어느 정도 줄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생태계 전반의 위기를 막을 수는 없다. 사람들은 아직도 시간이 남아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슬로 모션으로 진행되기에 느끼지 못할 뿐이다. 자본주의적 소유와 지배의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면 인류는 멸망을 피할 수 없다. 지금의 생태계 위기는, 끊임없이 이윤과 축적을 무제한적으로 추구해온 자본주의의 결과다. 아마도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는, 노동자국가가 등장하기도 전에 자연의 저항과 복수에 의하여 멸망할 지도 모른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지구온난화, 그리고 생태계의 위기와 관련하여 논쟁의 단계는 지났다. 이제는 오직 결행의 단계만 남았다. 하지만 거기에 인류적 합의를 끌어내기는 어렵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태위기는 불가항력이다. 전면적으로 생산양식이 변하지 않는 한 지구의 종말은 피하기 어렵다. 이에 사회주의노동자정당은, 자본주의 체제로는 생태위기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더욱 강하게 제시해야 한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본지 창간준비호에 제출된 (가칭)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 강령초안 Ⅱ-26항에 제시된 생태 관련 강령 초안은 ‘물질대사’의 관점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식의 혁명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자연을 수탈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인간과 공존하는 유기체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강령 초안은 2020년까지 1990년 대비 이산화탄소 배출량 40% 감축을 제시하고, 그 실천 방법으로 태양력, 풍력 등 재생 가능한 대체에너지 전환을 들고 있다. 또 의식의 혁명적 전환을 위해 생태교육의 의무화를 규정하였다. 이러한 강령 초안에 몇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첫째, 생태문제에 접근하는 물질대사의 관점은 전적으로 옳다고 본다. 또 기후변화에 대하여 이산화탄소 감축량을 부르주아 국가 간 감축목표치의 거의 10배에 달하는 40%로 설정한 것도 획기적이다. 하지만 여기에 도달하는 방법은 태양력이나 풍력과 같은 에너지 공급 방법의 전환으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에너지 수요를 감축하는 방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가령 전 에너지 수요의 40%가 물자 수송으로 인한 것이라면, 운송체계의 전환이 필요치 않을까.</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둘째, 사회주의노동자당 강령에서는, 이미 파괴된 생태계에 대한 ‘복원’ 개념이 도입되어야 한다. 생태계의 위기는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전 단계 위기에 해당하는 토양, 수질, 산림훼손 등 여러 측면까지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산업자본주의 시스템에 따라 급속하게 전개되어온 ‘도시화’와 ‘집중화’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와, 물질대사의 선순환 구조를 어떻게 복원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따라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강령에서는 먼저 ‘복원’을 개념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끝으로 생태문제와 관련한 용어의 문제를 짚어보자. 먼저 부르주아체제의 담당자들은 자신들이 저질러놓은 ‘기후변화’에 주목한다. 하지만 기후가 변하기 이전에 이미 흙과 물, 대기 등 다양한 자연물의 순환구조에 이상이 생긴 사실을 건너뛸 수는 없다. 성장주의에 따른 무제한적 생산과 소비, 그리고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수탈이 빚어낸 결과가 바로 기후변화이기 때문이다. 또 ‘환경’이라는 용어에서는 인간중심주의적 관점이 묻어난다. 인간과 자연을 물질대사의 유기적 관계가 아니라, 여전히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관계로 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환경주의자’는 생태 위기에 대한 총체적 대안을 내놓을 수 없다. </span></p>
<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이에 비하여 사회주의자는 기후변화와 환경문제를 ‘생태’적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이는 생태문제는 인간을 둘러싼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물질적 존재로서 인간과 자연 사이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물질대사관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생태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인간과 자연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형성되어야 하며, 이는 인간과 인간사의의 관계에서의 변화, 이를 통한 인간 본성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 자본주의 하에서 형성된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자본주의적 착취관계의 철폐와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span></p>
]]></content:encoded>
			<wfw:commentRss>http://programto.net/wordpress/?feed=rss2&amp;p=856</wfw:commentRss>
		<slash:comments>0</slash:comments>
		</item>
		<item>
		<title>「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4호를 발간하며</title>
		<link>http://programto.net/wordpress/?p=820</link>
		<comments>http://programto.net/wordpress/?p=820#comments</comments>
		<pubDate>Mon, 01 Mar 2010 15:07:33 +0000</pubDate>
		<dc:creator>강령토론</dc:creator>
				<category><![CDATA[알림]]></category>
		<category><![CDATA[제 4호]]></category>
		<category><![CDATA[강령]]></category>
		<category><![CDATA[강령토론 4호]]></category>
		<category><![CDATA[사회주의]]></category>
		<category><![CDATA[사회주의강령]]></category>
		<category><![CDATA[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4호]]></category>

		<guid isPermaLink="false">http://programto.net/wordpress/?p=820</guid>
		<description><![CDATA[<p class="바탕글2"><span style="font-family: 나눔고딕; mso-ascii-font-family: 나눔고딕; mso-hansi-font-family: 나눔고딕;"><img class="alignright size-thumbnail wp-image-821" title="pt5" src="http://programt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0/03/pt5-150x150.jpg" alt="pt5" width="150" height="150"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제 4호가 다소 늦게 동지 여러분을 찾게 되었다. 4호 발간이 늦어지게 된 것은 우선 여러 가지 활동들이 겹쳐지면서 글을 기고할 동지들의 글 작성이 늦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4호가 늦어지게 된 더 큰 이유는 3호의 발간사에서 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