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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사회의 진보성과 반동성
이 상 진 (노동해방실천연대(준) 회원)
1. 들어가며
“가칭)한국사회주의 노동자당 강령초안”(이하 “강령초안”)은 1920년대 이후 소련사회를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관료가 지배하는 공동생산체제’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은 우선 소련사회를 사회주의라고 보지 않기 때문에, 소련사회에는 어떠한 진보성도 없는 사회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는 강령초안이 현실사회주의가 실패한 핵심원인을 분석하고 이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내기 위해, 주로 소련사회의 변질과정과 역사적 평가를 강령초안과 해설을 통해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곧 소련사회는 우리가 긍정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진보적 요소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실제 소련사회의 현실도 그렇지 않았다. 사회주의 혁명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반동적인 성격이 있었던 반면, 자본주의 사회와 비교하여 진보적인 측면이 분명히 존재했다.
소련사회의 진보성과 반동성은 실제 역사에서 대단히 심각한 논쟁거리 중의 하나였다.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결정적인 실천방향의 차이를 가져다준 내용이기도 하다. 쉽게 이야기 하자면, 소련사회가 반동적인 사회, 자본주의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사회로 규정한 사회주의자들의 경우, 소련사회를 방어할 어떤 이유도 찾지 못하고 제3자의 위치에 서는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반대로 소련사회에 진보적인 측면이 존재한다고 판단한 사회주의자들의 경우는 소련을 방어하자는 입장을 취하였다. 더 나아가 소련사회의 반동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진보성만을 강조한 경우는 소련에 대한 방어를 넘어 소련사회의 반동적인 측면까지도 용인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에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 등의 문제들에 대해 사회주의자들의 입장이 나누어진 핵심적인 이유가 바로 이러한 인식차이에 기인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우선 소련사회가 가진 진보성과 반동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소련사회가 가진 진보성은 당연히 당시 자본주의사회와 비교한 진보적인 측면이고, 반동성은 사회주의의 기준에서 본 반동성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실제 현실에서 소련사회의 진보성과 반동성을 구체적이고 역사적으로 보지 못하고 실천적 오류를 범한 사례들을 검토할 것이다.
이 글은 논의를 집중하기 위해 소련사회에 국한해서 다루기로 한다. 북한, 중국, 쿠바, 베네수엘라 등의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은 다루지 않을 것이다. 다만 소련사회의 진보성과 반동성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것과 마찬가지 방법으로 다른 사회에 대해서도 평가한다면 명확하고 실천적인 입장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는 점만 덧붙이도록 하겠다.
2. 자본주의 사회와 비교한 소련사회의 진보적 측면
1917년 러시아 10월 사회주의 혁명은 전 세계 인류에게 자본주의의 모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대안을 현실로 입증해보였다. 바야흐로 역사의 흐름이 자본주의 시대에서 사회주의 시대로 이행하고 있음을 보여준 첫 번째 사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과잉생산과 이윤율 하락으로 인한 공황과 제국주의 전쟁, 그리고 궁핍한 민중의 삶, 한 마디로 야만의 세상을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10월 사회주의 혁명은 보여주었다.
10월 사회주의 혁명은 생산수단 사적소유의 폐지를 통해 자본주의 이상의 생산력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자본주의 공황을 더 이상 겪지 않았다.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고, 식민지 민족해방투쟁을 지원하면서 제국주의 국가들과는 확연한 입장 차이를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즘을 격퇴하는데 큰 역할을 함으로써 인류사회가 야만으로 후퇴하는 것을 막는 데 일조하였다. 민중들의 삶에 있어서도 실업문제의 해결,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여성들의 사회적 참여 확대 등을 통해 혁명 이전 러시아 사회, 제국주의 국가와 질적으로 차이를 드러내었다.
소련사회의 이러한 진보적인 측면은 제국주의 국가들을 경계하게 만들었고, 노동자를 포섭하고 체제경쟁을 위해서 제국주의 국가들조차 소련사회가 실시하고 있는 진보적인 조치들을 일부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수정자본주의 등 ‘완화된’ 자본주의는 이렇게 등장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소련사회의 진보성은 민족해방투쟁에 나섰던 민족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반제반봉건의 과제가 대부분이었던 많은 피억압 민족국가들은 소련사회를 긍정적인 사회형태로 여기게 하였다. 미군정이 1946년 7월 서울지역 1만 여명에게 실시한 ‘어떤 정부 형태를 원하는가’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 77%의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압도적으로 지지했다는 사실도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비록 소련사회의 진보적인 측면들이 시기가 지나면서 후퇴하거나 변질되기도 했으나, 자본주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시도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1) 생산수단의 사적소유 폐지, 생산성의 증대
1918년 1월 23일 개최된 제3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노동 피착취 인민의 권리선언’을 채택하였다. 이 내용은 10월 사회주의 혁명의 목적과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이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헌법에 그대로 수록된다. 권리선언이라는 이름으로 채택된 이 문서의 2장은 토지 및 국가 중요자원의 사적소유 폐지, 생산수단 및 운송수단의 사적소유 폐지, 은행의 사적소유 폐지를 천명하고 있다.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는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를 보장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운영원리이다.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는 노동자를 노동으로부터 소외시키고, 노동자로부터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근원이다. 이러한 점에서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철폐한 소련사회는 그 자체로 자본주의보다 진보적인 측면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적소유 폐지는 계획의 결합으로 엄청난 생산력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소련은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기 이전까지, 후진 농업국가였다. 하지만 혁명이후 공업화가 본격화되면서 소련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게 된다.
“자본주의 세계 거의 모든 곳에 드러나고 있는 침체와 쇠퇴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소련의 공업은 대단한 규모로 발전하고 있다. 아래에 제시하는 거시적 지표들은 이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이다. 현재 독일의 공업생산량은 열병에 걸린 듯이 급격히 진행된 전쟁 준비 때문에 1927년 수준으로 하락하고 있다. 영국은 보호주의 장벽을 치고 있는데 지난 6년 동안 기껏해야 3퍼센트 내지 4퍼센트 정도 생산량을 늘렸을 뿐이다. 미국의 공업생산량도 약 25퍼센트 정도 하락했고 프랑스의 경우는 30퍼센트 이상 저하했다. 자본주의 국가들 중 가장 높은 생산량 증가를 기록한 나라는 일본으로 현재 미친 듯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으며 이웃 나라들을 약탈하고 있다. 이 나라의 생산량은 거의 40퍼센트나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 예외적인 지수조차도 소련의 극적인 공업성장에 비하면 초라해 보인다. 이 나라의 생산량은 같은 기간에 3.5배 즉 250퍼센트나 증가하였다. 중공업은 1925년부터 1935년까지 10배 이상 증가하였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첫 1년 동안 자본투자량은 54억 루블이었고 1936년에는 320억 루블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트로츠키 [배반당한 혁명] 중 1936년)
이러한 소련의 경제적 성공에 대해 자본주의 세계는 당황해했다. 당시 자본주의 사회는 1929년 대공황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었고, 사회주의 체제가 인간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증거가 실험적으로나마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소련의 급속한 발전을 “농민에 대한 극도의 착취” 때문이라고 하면서 자본가들은 그 의미를 평가절하하려 했지만, 당시 중국, 일본, 인도가 일상적으로 농민을 무자비하게 착취하는데도 소련의 공업발전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상황에 견주어 볼 때 그것 자체가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소련사회의 생산성이 자본주의 사회와 비교하여 급속하게 증대되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생산수단의 사적소유가 폐지되고 전체적인 계획경제의 실현이 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1960년대 들어서면서 소련사회는 생산력 확대는 정체에 들어섰는데, 1970년대 이후가 되면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보다도 생산력 발전이 더디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자본가들뿐만 아니라 일부 사회주의자들도 소련사회에 시장경제가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의 철폐가 생산력 발전에 걸림돌이 되었다거나 시장이 도입되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는 생산수단의 국유화에 걸맞은 노동자 민주주의의 실패, 민주적 계획이 아니라 관료지시에 의한 계획, 제국주의 세력과의 무망한 군비경쟁 등의 요인에 따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2) 민족해방투쟁의 지원, 나찌즘의 격퇴
1917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이 제1차 세계대전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큰 것이었다. 1917년 혁명 이후 러시아 소비에트 정권은 ‘평화에 관한 포고’를 발표하여 민족국가의 영토를 강탈하거나, 합병하는 것을 반대하고, 배상의 책임을 묻지 않고 즉각적인 평화를 요구하였다. 또한 ‘러시아 제 민족의 자결에 대한 권리’를 발표하여 민족자결권을 옹호하였다. 이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확장 전쟁의 본질을 폭로하여, 제국주의 국가들이 민족자결권을 마지못해 선언하도록 만들었다. 10월 사회주의 혁명과 민족자결권 옹호는 한국의 3·1운동(1919), 중국의 5·4운동(1919), 인도의 사티아그라하 운동(1919)등 대규모 민족운동의 전개와 피억압 민중들의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소련은 식민지 국가들의 민족해방운동에 실질적인 지원을 해 나갔다. 1920년 코민테른 제2차대회에서 채택된 ‘민족, 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는 소련사회가 주장했던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지지의 입장을 전세계적으로 확장시켰다. 이는 제국주의 국가들에 대항한 민족해방운동에 전 세계 사회주의자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호소하였고, 민족해방운동과 사회주의 혁명이 결합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의 시작으로 발생한 중국의 항일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지원, 일제의 침략전쟁으로 일어난 아시아의 민족해방운동도 지원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도, 이집트, 모로코 등에서 일어난 민족해방투쟁도 지원하였는데, 서구 자본주의 국가는 이를 반대하였다.
파시즘에 맞선 소련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소련은 독일을 주축으로 하고 이탈리아, 일본 등 파시즘에 맞선 투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소련은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는 등 파시즘을 막아내는 투쟁보다 소련사회를 지키는데 주요 관심을 보였지만, 결국 사회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한 파시즘의 공격이 시작되자 파시즘과의 투쟁을 전면적으로 벌이게 되었다. 파시즘의 종말을 야기했던 독일의 패망은 다름 아닌 독일의 소련침공의 패배에서 기인하였고, 이 전쟁에서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전체의 70%이상의 인명피해를 보았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제국주의 국가들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제2차 세계대전의 결정적인 분수령이 되어 파시즘 독일을 물리친 것이라기보다, 소련이 독일침공을 물리친 것이 더욱 결정적인 것이었다.
(3) 사회복지의 확대
1917년 10월 사회주의 혁명은 소련 민중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교육의 저변이 확대되어 1927년 790만명이라는 학생수가 1933년에는 970만명으로 늘어났다. 물론 교육은 무상으로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문맹률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여성도 남성과 평등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고용에서의 평등도 법적으로 보장되었다. 현실적으로 이러한 조치들이 전적으로 성공적이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서 높았다는 사실 자체는 긍정적인 요소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의료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국영의료체제였다. 예방의학의 발달, 광범위한 면역프로그램의 실시로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전반적으로 감소하였고, 이는 민중의 수명을 향상시켰다.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전 세계에 민중의 삶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서구 유럽 등 자본주의국가에서 이러한 사회복지체계를 부분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것도, 소련사회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3. 소련사회의 반동적 측면
10월 사회주의혁명 직후 소련사회의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말할 것도 없었으며 , 이로 인해 현격히 줄어든 노동자들은 소련의 발전에 지장을 주었다. 이러한 위기상황은 당과 국가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끼쳤다. NEP(신경제정책)를 실시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소련사회는 허약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산당의 대리주의적 실천은 강화되었고, 당은 분열을 막아야한다는 명분으로 당내분파형성권을 일시적으로 정지시켰다. 공산당이 유일한 합법정당인 상황에서 당내 민주주의의 중요성은 더더욱 높아져야 했음에도, 소련사회는 이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결국은 스탈린의 등장을 통해 당내민주주의가 완전히 말살되었고, 당내 경쟁자들은 숙청되었다. 위기상황에서 임시적으로 취해졌던 조치들이 소련사회를 지배하는 조치들로 변질되었다. 스탈린을 비롯한 관료들의 이해가 관철되는 과정에서 당은 독재화되었고, 노동자들의 권리는 해체되어 갔다.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노동자 국제주의의 원칙에서 벗어난 일국사회주의론을 관철시킨 스탈린과 관료들은 소련의 방어를 명분으로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소련 외교의 하부기관으로 전락시키고, 다른 민족국가들을 관료집단의 이해에 따라 통제하고 억압하였다. 사회 전반적으로도 이러한 관료지배와 억압이 관철되고, 각종 억압기구들이 강화되면서 소련 사회에는 반동적인 문화가 다시 자리를 잡게 된다.
소련사회의 반동적 측면을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1) 노동자 민주주의의 소멸
노동자 민주주의는 사회주의 사회의 핵심이다. 하지만 1920년대 후반 이후 소련사회에서 그나마 형식적으로 유지되던 노동자민주주의는 거의 소멸하게 된다. 노동자들의 경우 소련사회의 주인이 아니라 관료지배의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공장의 경영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노동조합은 점차 당과 전문관료에 의해 권한을 박탈당했으며, 1934년 이후부터는 단체협약이라는 것이 더 이상 체결되지 않았다. 소련사회의 관료는 소련사회가 사회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더 이상 단체협상이 필요하지 않다고 그 이유를 들었지만, 노동자들은 관료의 억압으로 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을 원천적으로 빼앗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은 관료들의 수탈, 강제노동, 생필품의 부족 등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는 수단을 잃고 개별화되었다.
노동자계급의 전위라는 소련공산당 또한 1인 중심의 당으로 변질되었다. 대의원대회, 중앙위원회의 비중은 극도로 축소되었고, 스탈린이 장악하고 있었던 서기국으로의 권한집중이 이루어졌다. 당의 구성 또한 노동자들의 비중이 축소되고, 전문관료들의 진출 비율이 높아졌다. 혁명직후인 1917년 10월 인민위원회 구성원 15인 가운데 단 한사람만이 스탈린의 대숙청 이후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당이 민주적으로 운영되지 않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파리콤뮨 이후 사회주의 사회의 기본운영원리로 자리 잡았던 소환권, 상비군의 폐지, 노동자 평균임금 적용 등 선출직 공직에 대한 견제장치들은 대부분 폐기되었다. 소환권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상비군은 부활하여 장교들이 점점 더 많은 특권을 누리기 시작했으며, 관료와 노동자의 임금격차는 갈수록 커졌다.
체카, 게페우(GPU:국가정치보안부), 오게페(OGPU:연방국가정치보안부), 엔카베테(NKVD:내무인민위원회), KGB 등 노동자에 대한 감시기구가 강화되었으며, 농민들에 대해서도 수탈은 계속되었다.
(2) 일국사회주의론의 승리와 노동자 국제주의의 왜곡, 민족국가에 대한 억압
스탈린은 맑스-레닌주의의 원칙이었던 노동자국제주의의 전통과 단절하고, 일국사회주의론을 주장하면서 노동자 국제주의를 왜곡하게 된다.
“일국사회주의론은, 자본주의의 불균등발전으로 사회주의혁명이 한나라 혹은 몇나라에서 먼저 발생하고 이것이 확산되어 갈 수 있으며, 일국에서 혁명이 일시적으로 승리할 수는 있지만 일국단위에서 혁명이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였다. 일국사회주의론은 불가피하게 소련 일국에서의 사회주의건설과 ‘사회주의조국’의 방위를 국제적 연대에 우선하게 하고 여기에 국제적 연대를 종속시켰다. 그 결과 일국사회주의론은 자본주의세계체제와의 투쟁은 세계적 차원의 혁명이 승리해야만 궁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전망에서 이탈하여 국제적 연대를 왜곡하고 무망한 선진제국주의나라와의 국가적 경쟁에 매몰되게 되었다. 이것이 소련에서 무리한 속도의 축적과, 폭력과 유혈이 낭자한 강제집산화가 강행되고 세계혁명을 위해 건설된 조직 제 3인터내셔날이 소련외교의 하부기관으로 전락한 근본 이유이다.”((가칭) 한국사회주의 노동자당 강령초안 중)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핀란드 침공, 1968년 체코 침공, 1979년 아프카니스탄 침공 등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 등장이후 노동자 국제주의를 대표적으로 왜곡한 사례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소불가침조약과 이를 바탕으로 진행된 동부 폴란드 점령, 이어진 핀란드 침공은 파시즘에 맞선다는 명분하에 소련의 생존만을 취하는 관점에서 실시되었다.
(3) 문화적 반동성
사회 전반적인 억압은 활기차고 생동감이 넘쳐야 할 사회주의 사회를 경직되게 만들었고, 소련사회 전반에서 새로운 사회주의적 인간형을 만들어 내는 데에서도 실패하였다.
선출된 공직에 대한 소환권은 무력화되었다. 선출된 공직의 임금은 노동자의 평균임금을 넘지 않도록 하는 제도도 무력화 되었다. 관료 등 특권화된 계층과 노동자의 임금격차는 갈수록 커졌다. 성과급 제도가 확대되면서 노동자들은 서로 무모한 경쟁으로 내몰리게 되었으며, 극단적인 생산성향상 운동에 동원되었다. 생산에 대한 노동자의 통제도 관료집단에게로 넘어가 버렸다. 군대에서는 장교계급이 다시 복원되었고, 계급장의 착용, 특권이 인정되기 시작했다. 자유로운 토론보다는 지시와 복종이 중시되었고, 감시기구의 강화로 노동자들 간의 신뢰도 무너졌다.
“학생들의 학교 및 사회생활은 형식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다. 수많은 죽도록 따분한 모임들, 피할 수 없는 명예회장님의 훈화, 경애하는 지도자들을 칭송하는 구호 제창, 어른들과 똑같이 속과 전혀 다른 발언을 남발하는 미리 짜여진 목청 높은 토론회 등을 아동들은 참아내야 한다. 극소수 순수한 아동들은 엄하게 다스려진다. 비밀경찰은 소위 “사회주의 학교”에 끄나풀들을 들여보내 배움의 장에 배신과 밀고의 구역질나는 부패상을 도입하고 있다. 당국이 강요하는 낙관주의에도 불구하고 학교생활을 짓누르는 억압, 거짓, 지루함 속에서 생각이 깊은 교사들과 아동들은 글을 통해 몰래 일상적으로 느끼는 공포감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제1차 5개년 계획이 시행되던 조금 전만 해도 학교와 공산주의 청년동맹은 어린이를 이용하여 술주정뱅이 부친과 종교를 가진 모친을 폭로하고 모욕하고 일반적으로 “재교육”시켰다.” (트로츠키, 배반당한 혁명)
4. 역사에서 드러난 사회주의 세력의 태도에 대한 판단
소련사회의 진보성과 반동성에 대한 판단은 현실에서 첨예한 입장차이로 발전되었다. 특히 1930년대 후반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전쟁 시기 소련에 대한 판단으로 첨예한 입장차이가 드러났다. 트로츠키는 소련사회를 ‘타락한 노동자국가’로 규정하고, 생산수단 국유화를 유지하고 있는 소련사회를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소련을 과연 노동자국가라고 볼 수 있는가라는 문제제기와 함께 ‘소련방어’를 부정하는 주장까지도 등장하게 된다. 트로츠키 사후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도 이러한 입장의 연장선상에서 사회주의자들의 태도는 나누어졌다.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태도를 살펴보고, 소련사회의 반동성과 진보성을 바탕으로 사회주의자들은 어떠한 입장을 취했어야 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에 대한 입장
이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사회는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반동적인 사회였다. 당과 국가는 관료화, 독재화되었고, 노동자계급의 상태는 열악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은 사회주의를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곧이어 1939년 독일과 러시아는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였다. 이때부터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에 대해 사회주의자들의 입장은 여러 가지로 나누어진다. 과연 나찌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는 사회가 사회주의라고 볼 수 있는지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특히 소련이 핀란드를 무력으로 침공한 상황에 이르면서 문제제기는 더욱 심각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사회를 ‘관료적 집산주의’로 본 부르노 알 등은 이미 소련사회, 독일 나찌즘 등 관료집산주의사회가 전세계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국가소유를 위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더라도 사회적 소유관계는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로, 제2차세계대전 시기 소련에 대해 어떠한 입장도 취하지 않는 기회주의로 빠져버렸다. 또 한편에서는 스탈린의 도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소련방어노선을 포기하면서 사실상 기회주의로 빠져든다. 이들은 스탈린하의 소련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와 차별점이 없는 사회로 판단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시기 전쟁에 돌입한 소련에 대해 사회주의자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소련방어’ 노선을 취해야 했다.
소련은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노동자 민주주의가 말살되고, 노동자 국제주의가 지켜지지 않는 등 반동적인 사회였다. 하지만 소련사회에는 이런 반동성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의 근원인 생산수단의 사적소유가 철폐된 사회였고, 국가 계획을 통해 소련사회는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의료 교육 등 사회복지 부분에서도 국가가 책임지는 사회였다. 반제반봉건 민족해방투쟁에 대해 적극적인 지원을 하고, 파시즘을 분쇄하는데 앞장섰던 사회였다. 반면 독일 파시즘은 독일 자본주의의 존속을 추구하며 노동자계급과 사회주의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를 드러내며 대대적인 공격을 자행하던 체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2차세계대전시기 소련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입장은 소련의 반동성을 이유로 들어 기회주의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소련방어’입장을 취했어야 했다. 소련사회가 가진 진보적 측면을 방어하고, 반동적 측면을 갈아엎기 위해 소련을 방어하는 것이 사회주의자의 태도여야 했다.
(2) 한국전쟁 및 베트남 전쟁에 대한 태도
이 부분은 이 글에서 다루려고 했던 부분은 아니므로 참고로 언급하기로 하겠다.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한 사회주의자들은 북한과 베트남 또한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국가로 규정하면서, 한국전쟁 및 베트남 전쟁을 자본주의 국가 간의 전쟁으로 파악하고 기회주의적 태도를 취하였다. 기회주의적 태도의 결정판은 미국에서 베트남 반전운동이 시작되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자, 이들은 입장을 바꾸어 베트남의 미제국주의에 대한 전쟁을 지지하는 것으로 순식간에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는 노동계급의 입장에 서지 않고, 자본주의 사회와 비교하여 소련사회가 가진 진보적인 측면을 간과했기 때문에 드러난 심각한 오류였다.
5. 결론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소련사회는 진보성과 반동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던 사회였다. 사회주의 혁명을 했지만 사회주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심각한 반동적 측면이 존재했으며, 동시에 자본주의와 비교한 진보적 측면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전자의 측면에서 사회주의자들은 관료가 지배하고 있는 소련사회를 비판하거나 소련사회의 혁명을 주장하였고, 후자의 측면에서 소련사회를 방어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이러한 상황자체가 소련사회에 진보성과 반동성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반영해 주는 것이다.
인간 개인을 판단할 때도 긍정적 부분, 부정적 부분을 동시에 판단해야 제대로 판단할 수 있듯이, 소련사회를 판단할 때에도 이러한 지점들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은 매우 당연한 것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의외로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반동적인 측면 부정적인 측면을 확대하여 그것이 전부인 것으로 판단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반대로 진보적인 측면, 긍정적인 측면만을 확대하여 반동적인 부분은 상황논리로 덮어두려는 경향도 자주 발생한다. 인류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켰던 소련사회를 보는데 있어서도, 진보성과 반동성을 구체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제대로 가져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렇게 당연하게 보이는 상식적인 관점도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반동성을 소련사회의 전체적인 성격으로 파악한 세력은 실제 현실에서는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형태로 드러났다. 반대로 스탈린주의자들은 진보성을 강조한 나머지 현실에서 심각하게 드러난 반동성을 은폐하거나 상황논리로 비켜나가면서 소련사회를 옹호하는 오류를 범했다. 트로츠키의 경우 소련사회의 진보성과 반동성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시기 ‘소련방어’노선을 취하였다. 하지만, 국유화라는 소유관계를 강조한 나머지 독소불가침조약, 폴란드 분할점령, 핀란드 침공 등 스탈린의 정책을 용인해주는 오류를 범했다. 이는 소련사회를 진보성과 반동성이 가지고 있는 연관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회혁명이 아니라 정치혁명이 필요하다는 트로츠키 주장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현실에서 교조적 입장이나, 기회주의적인 입장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진보적 측면과 반동적 측면,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사회에 대한 입장과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입장은 어떠했어야 하는 가를, 우리가 다시 한 번 평가해보는 것은 그러한 점에서 중요하다.
“소련사회의 진보성과 반동성”에 대한 하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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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사무당파 2009, 9월 15th, 7:13 오후
동지의 날카로운 글을 인상 깊게 읽고 갑니다.
“한국전쟁 및 베트남 전쟁에 대한 태도”란 부제에서 참고로 언급하신다는 점을 밝히셨는데…
왠지 그부분이 확장되고 깊이 있는 연구와 사색이 가미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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