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령 논의의 활성화로 사회주의 정당 건설의 사상적 토대를 형성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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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멸을 말하는 생태학(The ecology of Destruction)

    2009년 10월 15일 (목요일)에 등록됨 강령토론 No comments 조회:631 인쇄하기 인쇄하기

    존 벨라미 포스터 (「먼슬리 리뷰」 편집자)

     

    이 글은 포스터가 편집자로 있는 “먼슬리 리뷰” 2007년 2월호에 실렸다. 포스터는 최근 맑스주의적 관점의 생태론에 대해 진전된 성과물들을 생산하고 있는데, 독자들이 그 내용을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번역 게재한다.

    본문은 「http://www.monthlyreview.org/0207jbf.htm」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질로 폰테코르보의 1969년 영화 ‘Burn!’을1) 언급하는 것으로 여기서 내가 ’파멸을 말하는 생태학‘이라고 부르는 것에 관한 나의 분석을 시작하고자 한다. 폰테코르보의 웅장한 영화는 우리가 사는 시대를 염두에 둔 정치적, 생태적 비유로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19세기 초반 ’Burn’이라 불리는 상상 속에 존재하는 카리브 해의 한 섬을 배경으로 설정하였다. ‘Burn’은 세계 경제 안에서 환금작물인 설탕 수출에 의지하며 설탕 생산 단작을 하는 포르투갈 지배 하의 노예 섬이다. 오프닝 신은 우리에게 처음에 포르투갈 식민지배자들이 토착민들을 정복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 섬 전체에 불을 놓아 이곳의 모든 사람들을 죽이고 나서 그 이후에 노예들이 새로 경작된 사탕수수를 베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수입되었다는 사실에서, 섬이 그 이름을 얻었다는 정보를 알게 해준다.

    윌리엄 워커경(말론 브란도 분)은 이 섬의 포르투갈 지배자들을 전복하기 위해 파견된 19세기 영국의 요원이었다. 그는 수많은 흑인 노예들 사이에서 반란을 선동하였으며, 동시에 포르투갈 왕조로부터 독립을 추구하는 소수의 식민지 백인 농장주 계급이 모반을 꾀하도록 계획하였다. 목적은 포르투갈을 패퇴시키기 위해 노예의 반란을 이용하지만, 이후에 영국 제국주의자들에게 복종하는 매판계급으로서 봉사할 백인 농장주 계급에게 섬의 지배권을 넘겨주는 것이었다.

    워커는 그의 임무를 훌륭하게 성공시켰으며, 이전의 노예들과 그들의 지도자인 호세 돌로레스의 승리한 군대가 포르투갈이 패배한 이후 자신의 무기를 내려놓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이 결과는 백인 농장주들에 의해 지배되는―그러나 국제적 자유무역의 법칙에 부합하여 실제 지배자는 영국의 설탕회사들인― 신식민지였다. 워커는 이후 영국 해군을 위한 또 다른 정보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난다. 이번에는 인도차이나라는 곳이었다.

    영화가 10년이 지난 1848년에서 다시 시작하였을 때, 호세 돌로레스가 이끄는 혁명이 ‘Burn’에서 다시 발생한다. 윌리엄 워커경은 영국으로부터 다시 불려서 들어온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왕폐하의 정부가 권한을 부여한 앤틸리스 왕립설탕회사의 피고용인으로서였다. 그의 임무는 과거 노예였던 자들이 일으킨 이 새로운 폭동을 타도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섬을 지배하고 있는 과두집단으로부터 단지 10년밖에 시간이 안 지났으며 상황은 똑같기 때문에, 이 일이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는, 상황은 똑같을지 몰라도 문제는 달라졌다고 대답한다. 칼 맑스를 흉내 낸 것처럼 보이는 말을 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매우 종종, 한 역사적 시기와 다른 시기 사이에서 10년은 갑자기 한 세기 전체의 모순들을 드러내기에 충분할지 모르는 것이다.”

    영국 군대가 반란자들과 싸우기 위해 불러들여지는데, 이 반란자들은 혹독한 게릴라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들을 이기기 위해서, 워커는 섬의 농장 전체를 불태우라고 명령한다. 영국의 설탕 이권세력의 지역 대표가 이를 반대하자, 워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것이 이윤의 논리이다. … 어떤 사람은 돈을 벌고 이를 계속하기 위해 뭔가를 만든다. 그러나 때때로 돈을 벌기 위해서는 뭔가를 파괴할 필요도 있다.” 그는 그의 대화상대에게, 이것이 ‘Burn’이라는 섬이 섬의 이름을 얻게 된 이유였다고 상기시킨다. 섬의 자연은 노동이 그 섬 안에서 향후 수백 년 동안 착취당할 수 있기 위해서 파괴되어야만 했다.

    여기서 나의 의도는 물론 정말로 대단한 폰테코르보의 영화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과 자본주의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이러한 비유를 통해서 몇 가지 중요한 원리들을 끌어내려는 것이다. 조셉 슘페터는 잘 알려졌듯이 한번은 그것의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를 들어 자본주의를 칭찬을 한 바 있었다.2) 그러나 이것은 체제의 파괴적인 창조성으로 가장 잘 이해될지도 모른다. 계급 기반의 축적을 위해 자본의 새로운 배출구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은,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는(pre-existing) 자연조건들과 이전의 사회관계들 모두를 지속적으로 파괴하길 요구한다. 계급착취, 제국주의, 전쟁, 그리고 생태적 재앙은, 단지 서로 관련 없는 역사적 사건들이 아니라 상호 연관된 자본주의 발전의 본질적인 특징들이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파괴적 창조성은, 이스트반 메자로스가 자본의 궁극적 숙명인 “파멸적 통제불가능성(destructive uncontrollability)”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전환될 것이라는 위험이 항상 존재해왔다. 이윤의 논리에 서있는 파멸성(destruction)은 따라서 우세하고 압도적인 것으로, 생산조건들 뿐 아니라 삶 자체의 조건들의 토대를 붕괴시킨다. 오늘날 이러한 파멸적 통제불가능성은 자본주의 세계경제 전체를 특징짓는 것이 되었으며, 이 행성 전체를 포위하고 있다.3)

     

     

    지구정상회담 : 1992년과 2002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지구적 생태재앙이 지구상에 있는 생명체의 생존가능성을 위협하면서 모든 다른 문제들을 압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 우리 시대의 특징이다. 이것이 어떻게 사회적 원인들과 연관되어 있는가와 그에 대한 응답으로 어떤 사회적 해결책이 제공되어야만 하는가는, 따라서 인류가 직면한 가장 긴박한 질문들이 되었다. 세계는 지금까지 두 번의 주요한 지구정상회담을 소집하였다: 1992년 브라질의 리오 델 자네이로, 2002년의 남아프리가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 이들 정상회담은 오직 10년의 간격을 두고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 회담들은, 한 세기 전체(즉 21세기)의 모순을 드러내면서, 한 역사적 시기에서 다른 역사적 시기를 분리하는 구분선 상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유엔환경개발회의가 조직한 1992년의 리오 지구정상회담은, 인류가 심각해지는 지구적 생태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함께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무한한 희망을 대변하였다. 1980년대 후반, 그리고 1990년대 초반은 지구적 생태위기가 대중의식에 스며드는 시기였다. 지구적 규모의 생태계 파괴의 결과, 오존층의 파괴, 지구온난화, 종 멸종의 증가에 관한 진지한 관심이 갑작스레 생겼다. 나사의 고다드 우주연구소 소장인 제임스 한센은 1988년 6월 미국 상원 에너지 및 자연자원 위원회에 출석하여 증언하면서, 이산화탄소와 여러 온실가스의 대기 중 방출 때문에 기인하는 지구 온난화의 증거를 제출하였다. 동년 유엔은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the Inter- 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IPCC)’이라는 새로운 국제기구를 창설하였다.

    세계의 단결이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리오 정상회담에서 널리 펴졌다. 1991년 걸프전과 그 이후 같은 해 소련의 몰락은 “신세계질서”와 “역사의 종말”이라는 그 당시 지배적이었던 수사를 부각하게 만들었다. 세계는 이제 하나라는 말들을 하였다. 오존 파괴 화학물질들의 생산에 대한 제한을 상정하였던, 몬트리올 의정서의 연이은 발효는 세계의 경제적 강대국이 지구 환경의 위협들에 대응해서 일치하여 행동할 수 있으리라는 점을 확실히 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구정상회담을 위해 선택된 장소인, 아마존의 본고장 브라질은 세계의 생물다양성을 지킨다는 지구적 목표를 상징하는 것으로 의미부여 되었다. ‘아젠다 21’로 알려진, 정상회담의 주요 문서는 21세기를 위한 지속가능한 발전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두 번째 지구정상회담으로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세계정상회담’의 분위기는 처음과 생판 다르지 않을 수도 있었다. 리오에서의 희망은 요하네스버그에서의 실망으로 가는 길을 터주었다. 상황이 시간이 경과한 십년동안 개선되었기보다는, 세계환경은 급속한 악화를 경험하였다. 지구는 단지 지구온난화라는 점만이 아니라 많은 다른 영역에서 파국적인 조건에 도달하고 있었다. 지속가능한 발전은 사실 상 어떤 생태적 비용을 들여서라도 지속적인 자본 축적을 하겠다는 것으로 변화하였다. “신세계질서”와 “역사의 종말”이라는 10년 전의 모든 수사들은―요하네스버그 정상회담에 주목하던 대부분의 환경주의자들에게 이것은 이제 분명하였다― 단지 지구 환경에 대한 진정한 천형은 자본주의 세계경제라는 사실을 감추어 왔을 뿐이었다.

    요하네스버그 정상회담의 장소는, 부분적으로 아파르트헤이트의 종식, 즉 의미 있는 세계적 사회진보의 출현을 상징하려고 선택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 지구정상회담에 대한 비판자들은, 불균등하게 지구의 남부지역에 악영향을 주는 방식으로 북부의 부국들이 환경에 가하는 파괴를 강조하면서, 지구 생태적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자본주의 세계경제 중심에서의 생태적 제국주의는, 지구온난화를 유발하는 온실가스 배출 제한을 목적으로 하는 교토 의정서 비준에 대한 워싱턴의 거부로 상징화되었다. 의미심장하게도 미국의 대통령 조지 W. 부시는 지구정삼회담에 참석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반면 세계의 생태계 미래에 대한 논쟁이 요하네스버그에서 일어나고 있을 그 시점에, 부시 행정부는 표면적으론 대량살상무기를 이유로―비록 요하네스버그에 모여 있는 세계의 환경주의자들에게 그때에도 실제 이슈는 석유라는 것이 분명하였지만― 이라크전을 벌이겠다는 위협을 해가며 세계무대를 주름잡았다.4)

    사실 상 리오 정상회담이후 10여년 사이에 새로운 역사적 시기가 등장하였다. 경제적으로는, 독점자본이 지구적 독점-금융자본5)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으로의 변형되면서, 현실은 폴 스위지가 1994년 “금융자본주의의 승리”라고 불렸던 것을 입증하였다. 20세기 말에 이르러, 자본주의는 어느 정도까지 왔느냐 하면, 이전보다도 게걸스러운 축적에 더 적합한, 지역적/국가적 기반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체제로 진화하였다. 생산의 수준에서는 정체되어 있고, 보다 불안정하고 보다 탐욕적인 불평등한 질서를 창출하였으며, 신자유주의적 경제와 금융거품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세계경제의 상충부에서 지구적 금융팽창이 발생하고 있었다. 소련의 몰락과 함께 온, 세계체제에서의 미국 헤게모니 쇠퇴는, 군사적 수단에 의해 자신의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재구축하려는 되풀이되고 점점 적나라해지는 미국의 시도들을 야기하였다.

    반면에 지구적 온난화와 여타의 중차대한 환경 문제들은 결정적인 문턱을 넘어섰다. 문제가 되는 것은 더 이상 생태적 사회적 파국들이 예기되고 있는가가 아니라 이것들이 얼마나 거대한 규모인가였다. 지구가 화석연료의 소비 때문에 뜨거워지고 있는 상황인데도, 석유가 풍부한 페르시아만에서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미국의 대통령을 보면서, (나를 포함하여) 2002년 요하네스버그에 있던 사람들에게 세계전체는 불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구의 파멸

     

    두 번째 지구정상회담이 개최된 지 거의 5년이 다 되어가는 상황에서, 자본주의의 고유한 계급적, 제국적 전쟁을 지구 자체에 대한 전쟁과 분리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되었다. 미국이 지구상에서 가장 풍부한 석유지대에 대한 제국적 통제를 위해 싸움을 벌이고 있을 시간에, 지구의 생태계는 지구온난화에 의해 가장 극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난, 급속한 악화를 경험하고 있다. 한편 독점-금융자본이란 새로운 체제로부터 뿜어 나온 신자유주의적 경제 재구조화는 대부분 사람들의 경제적 복지를 침식하였을 뿐 아니라, 몇몇 지역에서는 깨끗한 공기, 식수, 그리고 충분한 식품에 대한 접근권과 같은 인간생존에 기본적인 생태적 조건들을 제거하고 있었다. 한때 묵시록적 미래의 가능성을 경고하였던 생태주의자들은 이제 지구적 재앙이 우리의 현관 앞에 왔다고 주장하였다.6)

    “자연의 종말(The End of Nature)”의 저자, 빌 맥키번은 잡지 “롤링스톤”에 발표된 그의 2005년 11월 17일 사설, ‘논쟁은 끝났다(The Debate is Over)’에서 우리가 이제 지구온난화의 ‘이런 젠장(Oh Shit)’ 시기에 들어서고 있다고 천명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무엇이 일어날까 궁금하네?(I wonder what will happen)’ 시기가 있었다고 썼다. 그 다음에는 ‘이게 정말 진짜야?(Can this really be true?)’ 시기가 있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젠장’ 시기에 있다. 우리는 이제 너무 늦어서 지구적 재앙을 전부 다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는 그 규모와 강도를 제한하는 것이다. 불확실성의 대부분은 “세계는 … 몇 가지 트랩도어(trapdoor)를 가지고 있다(정직한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 대신에 험악한 연쇄반응을 유발하는 메커니즘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가이아 가설의 창시자로 잘 알려진 과학자 제임스 러브룩은, “가이아의 복수”라는 그의 책에서, 이러한 갑작스런 연쇄반응에 기반을 둔 지구의 전망에 대한 가혹한 평가를 발표하였다.7) 수많은 과학자들의 우려를 대변하면서, 러브록은 지구 온난화 경향을 증폭시킬 수 있는―그의 시각에서는 거의 확실히 그럴 것으로 보고 있는― 여러 확실시되는 피드백 메커니즘들에 주목한다. 지구 온도의 상승이 해양 조류와 (우림지역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노골적 벌목의 핵심에 있는) 열대우림에 주는 파괴적 영향은, 이것이 무서운 일인데, 이산화탄소를 흡수할 수 있는 해양과 산림의 능력을 감소시키며, 지구온도를 한층 더 상승시킬 것이다. 북극 툰드라의 영구 동토층이 지구온난화 때문에 녹게 되어 막대한 양의 매탄가스(이산화탄소보다 24배 효과가 강한 온실가스)가 대기 중으로 자유롭게 해방된다면, 또 다른 악순환이 형성될 것이다. 불길한 징조인 극지방 빙하의 해빙이 해수를 대체해서 생기는 지구 반응력의 감소는 지구 온도를 서서히 올리는 위협이 될 것이다.8)

    격변을 예상하는 러브록의 시각에서, 지구는 아마도 돌아올 수 없는 지점(point of no return)을 이미 지나갔으며, 온대지역에서는 기온이 결국에는 현재보다 8℃(14℉)까지 오를 것이라고 예상된다. 인류 종은 어떠한 형태로든 생존은 할 것이라고, 그는 우리를 안심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쉽게 말해 지옥으로 묘사될 수 있는 지점까지로 현재 기후의 급박한 변동, 그래서 너무 뜨겁고 너무 죽을 것 같아서 현재 살고 있는 수십 억 명 중 한줌의 사람들만이 생존할 것이다”9)라고 지적한다. 그는 국부적이지만 유일한 구제수단으로서 다량의 기술적 마약주사를 제공한다: 이산화탄소를 방출하는 화석연료 경제에 대한 제한적 대체물로서 전지구에 걸쳐 원자력 발전설비를 확대하는 지구적 프로그램. 그러한 파우스트적 계약이 지옥으로 가는 길을 닦을 것이라는 사고는 그의 마음속에서는 거의 거리낌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러브록의 공포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지구온난화라는 이슈가 세계적 이목을 끌도록 하는 데 정말로 많은 역할을 했던 제임스 한센은 최근 그 자신이 보내는 경고를 활자화하였다. “지구에 대한 위협(The Threat to the Planet)”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한센은 동물과 식물종이 지구 온난화에 반응하여―그들의 생존환경들의 변화와 관련해 보면 충분히 빠르지는 않을지라도― 지구 전체에 걸쳐 이동하고 있으며 고산지대 종들은 “지구 밖으로 떠밀리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50%에서 90%의 생물종이 사라졌던 지구 역사의 초기 시기와 비교할 수 있는, 지구 온도의 증가와 결부된 대규모 멸종의 가능성에 직면하고 있다.

    한센의 주장은, 기후변화로부터 오는 인간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직접적인 위협은 그린란드와 남극의 빙상의 불안정화와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1℃(1.8℉)를 조금 넘는 온도가 해수면이 16피트(4.87m) 더 높았던 앞선 시기 50백만 년간의 따뜻했던 간빙기와 오늘날의 기후를 구별해준다. 더 나아가 이번 세기에 ‘business as usual(BAU)’ 상태 하에서 대략 2.8℃(5℉)까지 기온이 오른다면 장기적으로 지구의 기온이 이렇게까지 올랐던 마지막 시기(3백만 년 전)에 발생했던 것으로 판단되는, 80피트(24.38m)까지의 해수면 상승을 낳을 수 있다. 한센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그러한 재앙적인 결과들이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을 막으려 한다면 “우리는 길게 잡아 10년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행동을 결심하기 위한 10년이 아니라 온실가스 배출의 궤도를 근본적으로 대체하기 위한 10년을.” 다시 말해, 한 번의 중대한 10년이,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들 수도 있는 역행할 수 없는 변화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킬 것이다. 충적세―인류문명이 발전해온 지질학적 시기― 전시기의 모순들은 갑자기 우리의 시대에 드러나게 되었다.10)

    ‘이런 젠장’ 시기에서, 맥키번의 말마따나 논쟁은 종결되었다. 지구온난화가 지구를 흔드는 정도의 위기를 대변한다는 것은 더 이상 의문의 여지도 없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우리가 환경의 위기라고 부르는 것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다. 지구적 차원의 생태적 위협 전체는 우리가 동시에 직면하고 있는 무수한 상호연관된 위기들과 문제점들로 구성되어 있다. 1994년도 나의 책, “취약한 행성(The vulnerable Planet)”에서 나는 이것들 중 몇 가지의 짧은 호칭나열을 시도하였으며, 다른 이들이 이제 여기서 더 추가하였을지도 모른다:

     

    과잉인구, 오존층의 파괴, 지구 온난화, 종 소멸, 유전적 다양성의 상실, 산성비, 핵오염, 열대림 벌목, 극지림 제거, 습지파괴, 토양침식, 사막화, 홍수, 기근, 호수와 개천 및 강들의 약탈, 지하수 고갈과 오염, 연안해역과 하구 오염, 산호초 파괴, 석유유출, 남획, 쓰레기 매립지 확장, 독성 폐기물과 살충제 및 제초제의 유해한 영향, 직업상 재해, 도시 혼잡, 재생불가능한 자원들의 고갈.11)

     

    요지는 단지 지구 온난화뿐만 아니라 이들 여타 문제들 대다수가 똑같이 각각 지구적 차원의 생태위기를 구성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오늘날 지구상의 모든 주요 생태계들은 악화되고 있다. 환경정의라는 이슈는 우리가 몸을 돌리는 어떠한 곳에서나 한층 두드러지고 절박한 것이 되고 있다. 이것이 기초하고 있는 사실은 자본주의를 세계체제로 규정하며 그것의 축적체제를 지배하는 계급적/제국적 전쟁은 한계를 알지 못하는 불가항력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치명적인 싸움 속에서, 자연의 세계는 단지 세계차원의 사회적 지배도구로서 이해된다. 따라서 그 자체의 논리에 의해 자본은 사실 상 지구를 말려 죽이는 전략이라 할 만한 것을 강요한다. 지구적 생태 위기는 점점 더 사방팔방을 둘러싸고 있으며 급속히 세계화되고 있는, 기하급수적인 팽창에 대한 그 자신의 충동 외에는 다른 어떤 법칙도 알고 있지 않는, 자본주의 경제가 지닌 파괴적 통제불가능성의 산물이다.

     

     

    Business as Usual12)을 극복하자

     

    러브룩과 한센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기후연구자들은 IPCC를 따라 지구온난화에 관한 그들의 주된 프로젝트들을 “business as usual”로 묘사되는 사회경제적 시나리오에 기초하고 있다. 여기서 가정된 암담한 추세는 기본적인 경제적 기술적 발전과 자연과 맺는 우리의 기본적 관계들이 과거와 동일한 상태로 남아있을 것이라고 단언되는 것이다. 이때 우리가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는 질문은 실제로 ‘business as usual’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이다. 무엇이 변할 수 있으며 얼마나 빠르게 변할 수 있을까? 시간은 계속 가고 있는 상황에서, 파국을 모면하거나 경감하기 위해 급진적 방식으로 ‘business as usual’ 상태를 바꿔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게 의미하는 바이다.

    그러나 지배적인 해결책들―지배적 이데올로기, 다시 말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결합되어 있는 것들―은 우리가 곤경에서 여하튼 벗어나게 해줄 ‘business as usual’ 상태의 변화가, 최소한도에 그칠 것이라고 강조한다. 지구온난화, 종 멸종이라는 점증하는 지구적 규모의 위협들이 지적된 후에, 우리는 개선된 가스 마일리지, 개선된 배출 기준, 수소연료차의 도입, 대기 중에 방출되는 이산화탄소의 포집과 격리, 개선된 보전대책, 그리고 자발적인 소비축소가 해답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환경정책연구자들은 국가와 시장 규제로 구체화되는, 새로운 환경정책체제의 구축을 특화하였다. 환경관련 경제학자들은 거래 가능한 오염배출권(pollution permit)이나 모든 환경요인들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도록 하기 위해 시장으로 이런 요인들을 통합하자고 이야기한다. 어떤 환경관련 사회학자들(내가 속해있는 영역이다)은 생태적 근대화에 대해 발언한다: 환경세, 친환경규제책, 새로운 친환경기술, 게다가 자본주의 자체의 친환경화 등으로 구성된 종합선물세트. 미래학자들은 경제가 디지털화되어 “탈물질화”된 결과로, 지구상에서 국가들의 비중이 기적과 같이 가벼워진 신기술의 세계를 묘사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각들 모두에서 한 가지 변치 않는 것이 있다: ‘business as usual’이란 기본적 성격은 전혀 변화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러한 분석들 모두가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는 것은, 어떤 초보적인 상식선에서 봐도 우리 사회에서 ‘business as usual’은 자본주의 경제―이윤과 축적의 논리로 움직이는 경제―를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홉스적인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 자연에 대한 광범위한 전쟁의 수행을 요구한다는 사실에 대해 인정은커녕 제대로 된 평가도 거의 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기술은 불가피하게 더한 계급전쟁을 위해, 경제규모의 확대를 위해, 따라서 환경악화를 위해 이용될 것이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생산이 말라붙거나 사회의 저항이 자본의 팽창에 장애물들을 부과할 때마다, 해답은 항상 자연을 보다 집중적으로 착취/악화시키는 새로운 방법을 찾는 것이다. 폰테코르보의 ‘Burn!’에서 인용한 말대로, “이것이 이윤의 논리이다. … 어떤 사람은 돈을 벌고 이를 계속하기 위해 뭔가를 만든다. 그러나 때때로 돈을 벌기 위해서는 뭔가를 파괴할 필요도 있다.”

    반어적인 사실은, 환경에 대한 자본주의의 이러한 파멸적 관계는 필경 19세기―사회분석가들은 생산양식이 대체되고 있던 혁명적 변화라는 문제,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변형시키고 있었는지에 대해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시기―에 가장 잘 이해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경제와 생태계 사이의 모순이 특히나 극심한 곳인 미국에서, 급진적인 부류의 환경사회학자들은 19세기로 되돌아가서 맑스와 자본주의 정치경제학 비판으로부터 세 가지 상호 연관된 견해를 진지하게 끌어내었다: (1) 생산의 쳇바퀴(the treadmill of production), (2) 자본주의의 이차모순(the second contradiction of capitalism), 그리고 (3) 물질대사의 균열(metabolic rift).

    이들 중 첫 번째 견해인 ‘생산의 쳇바퀴’는, 이윤과 축적을 위한 자기 추구의 한 부분으로써 에너지와 원자재 처리량의 규모를 항구적으로 증가시키는, 따라서 지구의 수용능력을 압박하고 있는, 멈출 줄 모른 채 이를 더 가속하고 있는 쳇바퀴로 자본주의를 묘사한다. 맑스가 쓴 것처럼, “축적하라, 축적하라!”, 이것이 자본을 위한 “모세이며 예언자이다!”13)

    이들 관념 중 두 번째 것인 ‘자본주의의 이차모순’은, 자본주의가 생산과 분배에서의 계급 불평등에서 나온 자신의 주요한 경제적 모순 외에도, 경제적 발전이 궁극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생산의 인간적, 자연적 조건들(즉 환경조건들)을 훼손하고 있다는 견해이다. 예를 들어 산림을 체계적으로 파괴하여, 우리는 이 영역에서 희소성을 증가시키는 배경을 만든다―그리고 세계화가 이러한 모순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 정도까지 더욱 확대된다. 이것은 경제발전의 비용 전체를 높이고, 생산에서 공급측면의 제한에 기반을 하는 자본주의의 경제위기를 창출한다.14)

    세 번째 관념인, ‘물질대사의 균열’은 자본축적의 논리가 초보적인 자연의 재생산과정을 단절시켜서, 사회와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에서 균열을 가차 없이 만들어내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생태적 지속가능성―단지 경제의 규모와 관련해서만 아니라 자본주의 하에서 자연과 사회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형식과 강도라는 측면에서 더욱 중요하게 제기되는―이라는 이슈를 제기한다.15)

    나는 이 관념들 중 세 번째 것인 물질대사의 균열에 집중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세 가지 사회-생태주의적 개념들 중 가장 전면적인 것(most complex)이며, 이 영역에서, 특히 나의 책 ‘맑스의 생태학(Marx` Ecology)’에서, 나의 독자적인 연구초점이 있어 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맑스는 그가 살던 시대의 지도적인 농화학자인, 유스투스 폰 리비히의 저작에서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리비히는 산업화된 자본주의 농업의 생태주의적 모순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켰다. 그는 영국에서 가장 발달된 형태로 제시되었던, 이런 종류의 산업화된 농업이 약탈체계로, 토양을 고갈시킨다고 주장하였다. 식품과 의복은 농촌에서 도시로 수백 마일―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수천마일―에 걸쳐 운송되었다. 이것은 질소, 인, 칼슘과 같은 필수 토양 영양분 또한 운송되었음을 의미한다. 런던 템즈강의 환경파괴의 사례처럼, 이러한 필수 영양분이 토양으로 되돌아가기 보다는 도시들을 오염시키는 것으로 끝이 났다. 토양의 재생산을 위한 자연조건들은 따라서 파괴되었다.

    이 결과 생겨난 토양 비옥도의 저하를 상쇄하기 위하여, 영국은 자국 시골의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데 이용될 뼈를 얻기 위해 나폴레옹이 누빈 전장들과 유럽 각지의 카타콤들을 급습하였다. 그들은 또한 페루 해변 주위 섬들에서 막대한 규모의 조분석(guano)을 수입하는 것에 의지하였으며, (페루와 볼리비아의 풍부한 조분석과 질산염 지대를 칠레가 점령한 태평양 전쟁 이후) 칠레의 질산염 수입이 뒤따랐다. 미국은 조분석을 찾기 위해 대양의 이곳저곳에 배를 보냈으며, 1856년 ‘조분석 매장 도서(島嶼) 점령법(Guano Island Action)’이 통과된 후 1903년까지 94개의 섬과 암초, 산호초가 占領된 것으로 끝이 났는데, 그중 66개는 미국의 부속영토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으며 여기서 9개는 오늘날까지 미국 속령으로 남아있다.16) 이는 20세기 초에 들어서야 합성비료의 발달로―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그자체가 주된 환경문제가 된 질소비료의 남용으로 이끌었다― 부분적으로나마 해결되는 19세기 자본주의 농업의 거대한 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자본주의 농업 위기의 반영으로, 맑스는 리비히 등 19세기 생물학자들과 화학자들에 의해 도입된 물질대사라는 개념을 받아들였으며, 이를 사회-생태적 관계에 적용하였다. 모든 생명체는 유기체들과 그 주위 환경 사이의 물질대사적 과정들에 기반하고 있다. 유기체들은 그 주위의 환경과 에너지 및 물질의 교환을 실행하는데, 이것은 그들 자신의 내적 생명과정과 통합되어 있다. 이것은 새의 물질대사과정의 일부로서 새 둥지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억지해석이 아니다. 맑스는 명백히도 노동과정을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적 상호작용”으로 규정하였다. 생태적 문제라는 측면에서, 그는 “사회적 물질대사의 상호의존적 관계에서 치유가 어려운 균열(rift)”을 말하였는데, 그것에 의하여 토양의 필수적 재생산의 조건들은 지속적으로 가혹해져서, 물질대사의 순환은 깨지게 되었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맑스에 따르면, “따라서 모든 부의 원천인 토지와 노동자를 동시에 파괴함으로써만 사회적 생산과정의 기술과 결합도를 발전시킨다.”

    맑스는 이러한 균열을 단지 국가적 관계에서만 본 것이 아니라, 또한 제국주의와 관련하여서도 보려고 하였다. “영국은”, 맑스에 따르면, “아일랜드의 농민들에게 소모된 토지성분을 보전할 수단조차 남겨주지 않음으로써 간접적으로 아일랜드의 토지를 수출했다.”

    이러한 물질대사의 균열이라는 원리는 분명히 매우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으며, 그리고 사실 상 최근 년에는 환경사회학자들에 의해 지구온난화나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해양 생태의 악화와 같은 문제들에 적용되고 있었다.17) 그렇지만, 좀처럼 인식되고 있지 않은 것은, 맑스가 “자본주의적 생산은 자연발생적으로 조성된 물질대사의 상황을 파괴함으로써, 물질대사를 사회적 생산을 규제하는 법칙으로서 체계적으로 재건할 것을 강제한다”라고 주장하는 와중에, 물질대사의 균열이라는 개념에서 직접적으로, 물질대사의 복원(restoration)으로 나아갔다는 점이다. 물질대사의 균열이라는 현실은 지속가능한 생산을 통한 자연의 복원의 필요성을 지적하였다.

    맑스를 아마도 지금까지 연구된 사회-생태적 지속가능성의 가장 급진적인 개념이라 할 만한 것으로 인도한 것은 사회-생태적 문제에 대한 이러한 변증법적 이해이다. 따라서 그는 자본론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더 고차원적인 사회-경제 체제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구를 특정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이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합리하게 보일 것이다. 심지어 사회 전체나 국가, 모든 사회를 합쳐서 생각한다고 해도 이들은 단지 점유자이자 수혜자일 뿐 소유자일 수 없다. 그리고 훌륭한 가장들이(boni patres familias) 그렇듯, 후손들에게 좀 더 나은 상태로 물려줘야 한다.

     

    다시 말해, 맑스가 볼 때에는 현재의 사적 축적 하에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노예제와 비교될 수 있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한 사람의 사적 소유”가 용인할 수 있는 것으로 더 이상 생각되지 않는 것처럼, 인류(또한 어떠한 나라들이라도)에 의한 지구/자연의 사적 소유는 극복되어야 한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따라서 “후손들에게 좀 더 나은 상태로” 그들의 생존을 보장하도록 규제되어야만 한다. “훌륭한 가장(boni patres familias)”이라는 관념에 관한 그의 언급은 우리가 쓰는 “economy”(oikonomia, 즉 가정관리학)와 ”ecology” (oikologia, 즉 가정에 대한 연구)라는 두 단어의 어원이 되는 가족을 뜻하는 oikos라는 고대 그리스의 개념에서 유래된 것이다.18) 맑스는 지금의 우리가 보기에 단지 경제적 관념이라고만 하기에는, 되려 생태주의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 것과 부합하는, 생산과 인간 사이의 보다 급진적이고 지속가능한 관계가 필요함을 지적하였다. “자유는 이 영역에서,” 이 영역은 자연적 필연의 왕국을 말하는 것으로 맑스의 주장을 따라가 보면, “오직 다음과 같은 점에 있는 데, 즉 사회화된 인간, 결합된 생산자들이 합리적인 방식으로 자연과 맺는 인간의 물질대사를 지배함으로써 이것을 그들의 집단적인 통제 아래에 두는 것 … 이를 최소한의 에너지 지출로 성취하는 것이다.”19)

    따라서 계급적/제국적 착취 체제이자 지구 자체를 대상으로 한 노예상인/파괴자의 체제인, 자본주의가 지닌 파멸적 통제불가능성을 맑스는 잘 이해하고 있었다. 영화, ‘Burn!’에서처럼 우리는 어떻게 인류에 대한 착취가 지구의 파멸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았다. 지배관계는 변화하였으나 해답은 동일하였다: 계급적/제국적 전쟁을 이기기 위한 방책으로서 섬을 불태우는 것. 오늘날 수백에 불과한 소수의 사람들을 다 합치면 수십 억명에 달하는 세계 인구의 소득보다도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다. 이런 지구적 불평등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지구적 억압체제가 발전해왔으며 여전히 부단하게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따라 현대 농업관련산업(agribusiness)의 예처럼, 지구에 대한 파멸적 착취 체제들이 막대한 규모로 새롭게 진화해갔다.

     

     

    사회혁명과 물질대사의 복원

     

    카리브해의 혁명에 관한 폰테코르보의 영화, ‘Burn!’은 실제 세계역사에서도 혁명의 해였던, 1848년에 절정을 맞이한다. 1848년, 맑스는 잘 알려진 대로 자유무역에 관한 그의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관찰하였다: “여러분, 여러분은 아마 커피와 설탕의 생산이 서인도의 자연적 운명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2세기 전 상업에 거의 말려들지 않은 자연은 그 곳에 커피나무도 사탕수수도 심지 않았었습니다.”20) 우리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의 대부분이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실로,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관계가 자연 속의 어떠한 것보다 더 자연적이고 더 명백한 것이라고 믿도록 배워왔다. 이러한 사고방식이야말로, 지구와 맺어온 우리의 관계를 복원하고자 한다면(즉 우리가 물질대사의 균열을 뒤집고자 한다면) 우리가 단절해야만 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파멸성에 관해 말하는 생태학이 말해주는 유일한 대답은, 물질대사의 복원을 가능케 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생산관계들을 혁명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주의의 고유한 “사회적 물질대사의 재생산” 체계, 다시 말해 이윤의 논리와 단절하길 요구할 것이다.21)

    오늘날 처해있는 ‘business as usual’ 상태와의 이러한 혁명적 단절이 가져다주는 것은, 물론 지속가능한, 평등주의적인(그리고 사회주의적인) 사회의 창출을 통한 사회적, 생태적 변화의 가능성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러브록이 말한 “가이아의 복수”는―프리드리히 엥겔스가 19세기에 자연의 “복수”라고 불렀으며, 이제는 지구적 규모로 거대해진 것으로― 단순히 현존하는 체제의 논리를 파괴하는 것을 통해서만으로는 자동적으로 극복되지 않을 것이다.22) 그러나 이러한 파괴는 여전히 인류문명을 구원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합리적인 시도의 필수적인 첫 단계이다. ‘Burn’은 더 이상 섬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눈앞에서 불타오르고 있는 세계 전체를 대변한다.

    폰테코르보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호세 돌로레스는 살해당한다. 그러나 그의 혁명적 정신은 살아있다. 인간을 노예화하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는 전략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던 정신인― 볼리바르와 체의 혁명적 정신을 재각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사회의 혁명적 변화가 또한 자연과 우리의 물질대사 관계를 혁명적으로 복원하는 것―이전에는 거의 이해되지 못했던 사실인―이 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평등과 지속가능성은 양자 모두 승리하고자 한다면, 공진화해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살아남고자 한다면 역시 그래야 할 것이다.

     

     

    [미 주]

     

    1) 최근에 작고한 이탈리아의 영화제작자 질로 폰테코르보(1919~2006)는 맑스주의자이면서 반제국주의자로서 혁명적 반란에 대한 고전적 영화인, ‘알제전투(The Battle of Algiers)’(1966)의 감독으로 유명하다. ‘Burn!’은 베트남에 대한 반응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전쟁에 대한 비유로서 기획된 것이었으나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확장된 영화이다.

     

    2) Joseph schumpeter, 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 (New York: Harper and Row, 1942), 81~86

     

    3) Istvan Meszaros, Socialism or Barbarism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2001), 61.

     

    4) 두 차례의 지구정상회담에 관한 보다 세세한 분석에 대해서는 John Bellamy Foster, “The Failure of Global Environmental Reform,” Month- ly Review 54, no. 8 (January 2003), 1~9를 보라

     

    5) Paul M. Sweezy, “The Triumph of Financial Capital,” Monthly Review, 46, no. 2 (June 1994), 1~11; John Bellamy Foster, “Monopoly- Finance Capital,” Monthly Review 58, no. 7 (December 2006), 14.

     

    6) Bill McKibben, “The Debate is Over,” Rolling Stone, November 17, 2005, 79~82.

     

    7) 지구상의 생명체들이 항상 전체 유기체들에 우호적인 방식으로 행성의 표면조건들을 유지한다고 주장하는, 유사 종교적인 가이아 가설은 다윈적 진화와는 양립하지 않는 것이었으며, 지금은 러브록 자신이 이 이론의 원래 형태에서 이 생각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이 생각은, 생물권(biosphere)과 지구권(geosphere)이 하나의 변증법적 통일을 구성하고 있는 단일한 자기조절체계로서 지구를 이해하고자 하면서 보다 전체론적인 지구 시스템과학을 추구하는 많은 과학자들이 연구발전을 이루도록 고무하게 해주었다. 이제 러브록은 그가 “가이아 이론”이라고 부르는 것에 천착하고 있으며 이것은 지구 시스템과학의 기본적 생각에 적합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생명체에 우호적인 조건들의 지속적 재생산이라는 “목적”이, 어쨌든 살아있는 지구 시스템의 “점점 명백해지는” 특성이라는 생각에 목적론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가이아의 복수”는 문명에 대한 복수로, 문명은 가이아가 인간이 야기한 기후변화에 대응하여 갑작스레 새로운 균형상태로 움직임에 따라 위협받는다. James Lovelock, The Revenge of Gaia (New York: Basic Books, 2006), 23~25, 147, 162를 참조하라.

     

    8) Lovelock, Revenge of Gaia, 34?35; John Atcheson, “Ticking Time Bomb,” Baltimore Sun, December 15, 2004.

     

    9) Lovelock, Revenge of Gaia, 55?59, 147; Bill McKibben, “How Close to Catastrophe?,” New York Review of Books, November 16, 2006, 23~25.

     

    10) Jim Hansen, “The Threat to the Planet,” New York Review of Books, July 13, 2006, 12~16; Goddard Institute for Space Studies, “NASA Study Finds World Warmth Edging Ancient Levels,” September 25, 2006, http://www.giss.nasa.gov/.

     

    11) John Bellamy Foster, The Vulnerable Planet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94), 11.

     

    12) [역자] ‘언제나처럼’이나 ‘평상시대로 영업한다’는 정도의 사전적 의미를 지니는 ‘business as usual(약어 BAU)’이라는 개념은 환경문제의 영역에서는 평소대로 경제활동을 지속하였을 때나 현상유지되었을 때 예측되는 예상치를 산정하기 위해 사용되는 개념이다. 여기서는 ‘business as usual’이 환경문제와 관련하여 원문대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개념으로 이 개념이 가지는 의미를 살리기 위해 별도의 번역을 하지 않고 원문 그대로 사용하였다.

     

    13) Karl Marx, Capital, vol. 1 (London: Penguin, 1976), 742. 생산의 쳇바퀴 이론은 알란 쉬나이버그의 글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Allan Schnaiberg, The Environment: From Surplus to Scarcit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0); John Bellamy Foster, “The Treadmill of Accumulation,” Organization &Environment 18, no. 1 (March 2005), 7~18을 보라.

     

    14) 이차모순론은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자, 제임스 오코너가 고안하였다. James O’Connor, Natural Causes (New York: Guilford, 1998). 이런 견해가 가지는 몇 가지 한계들에 대해서는 John Bellamy Foster, “Capitalism and Ecology: The Nature of the Contradiction,” Monthly Review 54, no. 4 (September 2002), 6~16을 보라.

     

    15) 물질대사의 균열이라는 맑스의 이론은 John Bellamy Foster, Marx’s Ecology: Materialism and Nature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2000)에서 상세하게 이야기되어 있다. 또한 Paul Burkett, Marxism and Ecological Economics (Boston: Brill, 2006), 204~207, 292~293을 보라.

     

    16) Jimmy M. Skaggs, The Great Guano Rush (New York: St. Martin’s Press, 1994).

     

    17) Brett Clark &Richard York, “Carbon Metabolism: Global Capitalism, Climate Change, and the Biospheric Rift,” Theory and Society 34, no. 4 (2005), 391~428; Rebecca Clausen and Brett Clark, “The Metabolic Rift and Marine Ecology: An Analysis of the Oceanic Crisis within Capitalist Production,” Organization &Environment 18, no. 4 (2005), 422~44.

     

    18) [역자] 홍기빈의 책,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책세상, 2001)”의 38~40에는 보다 자세한 내용이 나왔다. 이를 인용하자면 “경제 economy 라는 말의 어원은 ‘가정’을 뜻하는 그리스어 oikos와 ‘다스린다’는 뜻을 가진 합성어근 nem-이 합쳐져서 생긴 말이다. 그대로 풀이해보면 ‘가정관리’라는 뜻이 된다. 이 가정관리의 가술, 그것을 연구하는 학문인 oikonomoikos는 ‘가정관리학’ 정도로 풀이될 수 있다. 가정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오이코스나 라틴어 파밀리아 familia는 ‘자급자족의 경제단위’라는 의미가 훨씬 더 강하다 로마의 파밀리아는 오늘날의 가정처럼 아버지, 어머니, 나, 동생으로 구성된 집단이 아니다. 일정한 크기의 장원처럼 경제적 자급자족이 가능한 단위에서 동일한 가부장 pater-famillia의 권위와 지배 하에서 생계를 함께 해결하는 모든 사람의 집단을 일컫는다. … 결국 그 기원에서 경제라는 말은 단지 가정의 살림살이라는 뜻이었다. 가정이라는 구체적이고도 독특한 인간관계 속에서 그 내용이 규정되는 것이 경제였던 것이다. 따라서 경제와 경제학의 내용은 윤리나 도덕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으며 사람들은 이를 아주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다.”

     

    19) Marx, Capital, vol. 1, 283, 290, 636~639, 860; Marx, Capital, vol. 3 (London: Penguin, 1981), 911, 959.

     

    20) Karl Marx, On the Question of Free Trade, MECW Volume 6, p. 450

     

    21) “사회적 물질대사의 재생산”의 체계로서의 자본에 관한 분석은 Istv?n M?sz?ros, Beyond Capital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95), 39~71에서 발전시켰다.

     

    22) Karl Marx and Frederick Engels, Collected Works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75), vol. 25, 460~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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