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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두현 동지의 의견에 대한 간략한 재답변
이 장 규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연대 회원)
「사회주의 강령을 토론하자!」제2호에 실린 성두현 동지의 ‘이장규 동지의 의견에 대한 답변’을 잘 읽어보았다. 답변의 일부는 필자와 성두현 동지의 생각이 서로 다름을 확인한 부분도 있었고, 일부는 필자의 의견이 명확히 표현되지 못해서 성두현 동지가 약간 오해한 부분도 있었다고 보인다. 따라서, 간략하나마 재답변을 통해 이런 부분들을 밝혀보고자 한다.
1. 원리적 부분
소련사회가 ‘관료가 지배하는 공동생산체제’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던 물적 토대를 사적유물론에 의거해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필자의 주장에 대하여, 성두현 동지는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 단계에서는 노동자국가가 토대를 형성해나가기 때문에 사적유물론 일반을 과도기 사회에 곧바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성두현 동지의 의견대로, 과도기 단계에서는 정치가 이행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맞다. 또한 노동자민주주의의 변질이 공산주의적 생산관계의 변질에 선행적이라는 것도 옳다. 그런데 필자의 문제의식은, 그렇다면 이렇게 정치가 이행을 위한 올바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노동자민주주의를 변질시킨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스탈린 개인이 나쁜 놈이었기 때문일까? 이는 한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비과학적 태도일 뿐 아니라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실제로 트로츠키 숙청이나 그 외의 각종 비민주적인 조치들은 당관료 다수의 지지를 얻어서 이루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노동자민주주의를 변질시키는 것이 오히려 자신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당관료층이 이미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형성시키고 이들의 힘을 강하게 만들어준 것이 바로 지시와 통제에 의한 관료적 계획경제 시스템이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계획이 생산 및 소비현장의 노동자의 의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관료의 권한만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들에 의해 노동자민주주의가 변질된 것이다. 필자가 변질의 물적 토대를 강조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분산적이고 민주적인 계획경제를 강조한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성두현 동지의 지적대로 계획 그 자체는 용어의 정의상 당연히 ‘중앙집중적’일 수밖에 없다 (사실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기업 내부에서는 중앙집중적인 계획이 이루어진다). 문제는 최종적인 계획이 중앙집중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 및 계획의 결과를 확인하는 과정에서는 최대한 생산 및 소비현장에서의 의견이 민주적으로 반영되고 의사결정권한이 분산되어야만 관료의 권한집중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계획수립과정에서의 의사결정이 민주적이고 분산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서 필자가 생각하는 것이 드바인의 ‘참여계획-협상조정 모델’이다. 이 모델이 실제로 작동하는 데는 상당한 번거로움이 있기 때문에 초기부터 이를 전면화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지만, 현대정보기술의 발달 및 노동자민주주의의 전진은 이 모델을 처음에는 기본적인 수준에서 시작하여 이후 계속 확대시켜나가는 것을 가능케 할 것이다. 이는 또한 생산영역만이 아니라 소비영역에서의 인민의 의사반영에도 유리하다. 노동자는 생산자일 뿐 아니라 소비자이기도 하며, 현실사회주의 국가에서 인민들의 가장 큰 불만 중 하나가 소비에서의 선택권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음을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정성진은 드바인 모델에 대해 시장사회주의로 퇴행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정성진이 주장하는 참여계획경제나 마이클 앨버트의 파레콘 또한 드바인 모델과 본질적으로는 문제의식이 비슷하다고 생각되며, 실제로는 이행의 초기단계(드바인)-발전단계(앨버트)라는 수준의 차이가 아닐까라고 여겨진다.
또한, 비록 계획수립과정이 참여적이고 민주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계획에 전체 인민들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을 가능성도 항상 존재한다. 따라서 수립된 계획의 결과를 실제로 확인한다는 측면에서 시장은 적절하게 활용될 필요가 있다. 경제의 사전조정(계획)만으로 모든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일종의 자만이며, 사전조정(계획)뿐만이 아니라 사후조정(시장)을 통해서도 인민의 의사가 현실 속에서 확인되어야 한다. 성두현 동지는 필자의 이런 주장을 ‘시장에 대한 투쟁적 관점을 상실’한 오류라고 반박하지만, 계획에 의해 사전조정됨으로써 생산의 무정부성을 제어한 상태에서 계획의 실제결과를 시장을 통해 확인하는 것은 과도기 사회에서는 불가피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확인의 과정이 다음 계획에 반영됨으로써 전체경제에서 계획의 비중을 높여나가는 것 자체가 시장을 실제로 소멸시켜 나가는 ‘투쟁과정’이 아닐까?
2. 실천적 부분
실천적 부분에 있어서 필자와 성두현 동지의 의견이 가장 차이가 나는 부분은 한국자본주의의 성격규정 문제이다. 강령초안은 한국자본주의를 아제국주의 단계로 규정했는바, 필자는 한국자본주의가 아제국주의의 진로를 순항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해 애초의 의견글에서 몇 가지 지적을 한 바 있다. 성두현 동지는 필자의 이런 주장을 한국자본주의의 특수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자본주의적 발전의 보편적 경향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의 주장은 과거의 식민지반자본주의론이나 천민자본주의론 등등 이른바 ‘나쁜 자본주의’ 내지 ‘제대로 된 자본주의가 아님’을 강조하는 주장과는 애초의 입지가 다른 것이다. 그런 주장들은 성두현 동지의 말대로, ‘좋은 자본주의’와 ‘나쁜 자본주의’를 구별함으로써 우리도 ‘제대로 된 자본주의’를 해보자는 일종의 단계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좋은 자본주의라고 해서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이 완화되는 것도 아니고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를 극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자본주의의 특수성은 자본주의 일반의 보편성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나쁜 자본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좋은 자본주의’조차도 순수한 의미에서의 자본주의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자본은 자신의 이윤실현을 위해서라면 ‘나쁜 것’이든 ‘제대로 된 자본주의가 아닌 것’이든 뭐든지 이를 최대한 이용하려고 한다. 즉, 한국자본주의의 특수성이란 자본주의 일반의 보편적인 위기가 한국적 조건 하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현실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가령 토지문제의 경우, 현재 한국의 토지문제 악화는 자본가들이 주도한 것이다. 토지문제가 자본주의 발전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음에도 서구자본주의 초기단계처럼 자본가들이 반지주적 요구를 주장하지 않는 것은 현재의 한국에서는 대자본가가 바로 대지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본주의 일반의 보편적 모순에 근원을 둔 축적의 위기를 노동자에 대한 초과착취와 지대추구에 의한 경제전반의 수탈을 통해 해결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그들의 해법이 위기를 해결하기는커녕 장기적으로는 한국자본주의의 축적 위기를 더욱 심화시킨다는 것이다.
성두현 동지는 필자의 주장이 한국자본주의의 몰락위기를 ‘보다 나은 자본주의’를 통해 극복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필자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한국자본주의의 몰락위기란 것 그 자체가 자본주의 일반의 모순이 한국사회에서 현상화한 것이며 단지 그 현상화하는 모습은 나라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바 한국에서는 여러 가지 조건 상 자본주의의 축적 위기가 보다 심각하게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 위기가 본질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일반적 모순에서 근원한 것인 이상 그 해결책은 ‘보다 나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좋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만이 대안이라는 점에서는 강령초안과 필자의 입장은 완전히 일치한다. 하지만 사회주의만이 대안인 이유는 한국이 아제국주의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논리라면 아제국주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사회에서는 사회주의가 대안이 아니란 말인가? 아제국주의든 아니든 자본주의 체제의 대안은 사회주의일 따름이며, 굳이 그렇게 간다는 보장이 불확실한 (필자의 생각으로는 오히려 그 반대로 갈 가능성이 큰) 아제국주의 규정을 강령에 삽입할 필요가 없다.
물론 해방연대가 강령초안에 아제국주의 규정을 넣은 실천적인 이유는 충분히 이해된다. 노동운동 내에서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있는 어용 내지 기회주의 세력에 대한 투쟁의 의미와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노동운동 내의 어용 내지 기회주의 세력에 대한 투쟁은 한국이 아제국주의가 아니더라도 중요하다. 아제국주의가 아니더라도 자본은 항상 어용 내지 기회주의 세력을 매수함으로써 노동자들을 분할통치하려고 한다. 그들과 투쟁하는 것은 사회주의자의 당연한 임무이며, 아제국주의라는 규정이 없다고 그 의미나 중요성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아제국주의라는 규정은 오히려 대공장 노동자 일반이 자본에 포섭될 정도로 강력한 물적 토대가 있는 것으로 해석될 위험이 있다. 하지만 대공장 노동자들의 미래가 그렇게 안정적인가? 대공장 노동자들 상당수가 가진 대공장 이기주의 내지 계급적 연대에 대한 회피는 틀림없이 비판받아야 하지만, 그들을 아예 자본의 대리인 정도로 바라보는 것은 실천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투쟁의 대상을 지나치게 확대하면 오히려 투쟁의 예봉이 무디어진다. 대공장 노동자 일반이 아니라 어용 내지 기회주의적 지도부에 대해 날카롭고 집중적으로 투쟁하는 것이 더 올바른 방향이 아닐까?
3. 맺음말
서로 의견이 다른 부분이 여전히 있지만, 성두현 동지의 답변글 상당수는 필자가 명료하게 표현하지 못했거나 오해의 빌미를 줄 수 있는 부분에 대한 적절한 지적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성두현 동지에게 고마움의 뜻을 표하며, 견해가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앞으로의 보다 심화된 토론을 통해 좀 더 접근된 의견이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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