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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

    2009년 10월 15일 (목요일)에 등록됨 강령토론 No comments 조회:1,270 인쇄하기 인쇄하기

    황 정 규 (「사회주의강령을 토론하자!」 편집위원회 편집부장)

    들어가며

     

    ips_v_capitalism2갈수록 심각해져가는 생태문제는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해가야 한다. 그러나 생태문제의 심각성은 많이 인식되고 있지만, 사회주의자들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이 문제를 다뤄야 하는지는 깊이 논의되지 못한 실정이다. 이제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을 올바로 세우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사회주의자들의 과제가 되고 있다. 이 글이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이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풍부한 논의를 시작하기 위한 단초가 되길 기대한다.

    본격적인 글의 전개에 앞서, 이 글의 문제의식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현재의 생태문제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서 나온 문제라는 것이다. 맑스는 인간이 자연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물질대사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는데, 이 관계는 각 사회구성체마다 고유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과거의 다른 사회구성체에서 환경파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자연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며, 이 파괴가 인간에 대한 생존의 위기로까지 발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자본주의 특유의 물질대사 형태에서는 이윤의 추구, 생산을 위한 생산이 체제의 핵심원리가 되면서, 자연에 대한 무제한적인 수탈이 벌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생태문제와 자본주의의 연관성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두 번째로 생태문제를 계급문제, 사회주의와 별개로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주의적 총체성 속에서 이해되어야만 할 문제로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만약 사회주의적 총체성 속에서 생태문제가 설명되지 않는다면, 이는 이론뿐 아니라 실천에서도 큰 오류와 한계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위의 두 문제를 병렬적으로 다룰 경우, 이러한 문제들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노동운동과 생태운동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지 못하여 오히려 서로 분리된 실천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경우에 따라 사회주의노동운동이 청산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이 글은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이 발전해온 과정을 검토하는 방식으로 논지를 전개해갈 것이다. 생태문제의 심각성이 인식되고 생태주의 운동이 성장해온 과정, 생태문제에 대해 맑스주의자들이 대응해온 과정을 순차적으로 점검해가다보면, 왜 자본주의가 생태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이고, 생태문제를 사회주의적 총체성 속에서 사고하는 것이 중요한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1. 생태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과 생태주의 운동의 발전

     

    생태학, 생태주의(Ecology)라는 용어는 1869년 다윈의 진화론을 지지하던 독일의 생물학자 E. H. 헤켈이 처음 사용하였다. 이 당시 생태학은 생물 상호간의 관계 및 생물과 환경과의 관계를 연구하는 한 연구분야로서 정의되었다. 이후 생태학이라는 용어는 자연환경의 파괴에 대한 문제의식의 확산과 함께 이러한 문제와 관련된 철학과 사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의가 확대되었다.

    30008404-r20copy1자본주의의 초기부터 환경 파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1960년대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심각해져가는 환경 파괴의 현실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현대사회가 직면한 생태위기는 이제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생태문제가 점점 더 커져가자 이에 대한 사회적 문제제기 역시 확산되었다. 가령 초창기 생태주의 운동의 대표적 인물인 레이첼 카슨은 1962년 「침묵의 봄」이라는 책을 통해 DDT 등 농약남용에 의한 환경 파괴를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레이첼의 이 책은 근대 환경운동의 탄생을 알린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하나의 사회운동으로서 생태주의(녹색) 운동은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독일 녹색당처럼 정당의 결성에까지 이르기도 하였다.

    운동의 발전과 함께 근본(심층)생태주의, 사회생태주의, 정치적 생태주의 등 다양한 입장의 생태론이 등장하였다. 대개의 신사회운동이 그러했듯이 생태주의운동 또한 자본주의 체제 뿐 아니라 사회주의 역시 비판하면서 스스로의 입론을 세워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즉 이 이론들은 생산양식이나 생산관계라는 맑스주의의 전통적 시대구분을 비판하고,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역시 자연에 적대적인 체제/세계관으로 바라보았다. 독일 녹색당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루돌프 바로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1953년 동독에서 태어나 맑스주의 이론가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동독의 사회주의통일당이 “사회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 목적을 구현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서독으로 망명하였다. 그의 주장의 요지는 마르크주의 공산당 선언을 “문명화된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준 것으로, 동일한 문명 속에서 모든 업무를 프롤레타리아들이 인계받도록 하는 프로그램”으로 보면서, “이런 프로그램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은 노동조합과 사민주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1)

    그러나 기존 생태주의 운동은 생태위기에 대한 문제제기와 해결노력 등 긍정적인 결과들을 많이 산출하였으나, 결국 자본주의라는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는 운동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논리 자체가 자연에 대한 광범위하고 치명적인 파괴를 본질로 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를 생태문제와 밀접하게 결합시켜 이와 투쟁하지 않는 한 지구적 생태위기의 극복은 요원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자본주의의 극복과 사회주의의 실현을 자신의 목표로 하는 맑스주의는, 생태주의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근본적으로 맑스주의는 생산력제일주의, 경제주의 등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반생태주의적이라는 비판에서부터, 그 정도는 아니지만 지구적 생태위기에 직면하여 그 근본원리를 바꾸고 생태주의적 사고를 수용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2)

    1980년대에 이르러, 서구 전반의 정치지형의 보수화와 생태운동의 침체 등을 겪으면서 생태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대립적, 상호불신적 관계를 버리고, 둘을 서로 접합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는 생태주의 세력이나 사회주의 세력 공히 변화된 현실 속에서 새로운 전략과 전술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시도라 할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생태사회주의” 경향을 들 수 있다. “생태사회주의” 조류는 전반적으로 생태주의자들의 사회주의 비판에 대해, 사회주의의 내용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였고 사회주의의 중심적 사상을 포기하면서 생태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하려고 하였다. “때문에 생태사회주의자들 중에는 많은 수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칭호로 불릴 수는 없다 할지라도 이들과 유사하게 노동자의 주체성, 계급투쟁의 절대 우위성, 그리고 생산양식의 변형으로서의 혁명개념에 집착하지 않는 특징을 보여준다.”3)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생태문제를 바라보려는 본격적인 시도는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등장하였다. 맑스주의적 생태론을 제기하기 시작한 대표적 인물은 제임스 오코너로, 그는 1988년 「자본주의, 자연, 사회주의」이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그 서문으로 “자본주의, 자연, 사회주의 – 이론적 서설”4)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이 글은 소위 “이차모순론”을 주장하면서 맑스주의 그룹 내에서 많은 관심과 토론을 이끌어 내었다.5) 오코너 외에도 벤 아거, 엘마 알트파터, 테드 벤튼 등의 학자들이 맑스주의적 생태론을 주조해내기 위한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초기 맑스주의적 생태론을 구성하려는 시도들은 사실 상, 맑스주의에 대한 오독, 문제의식의 협소화, 생태주의자들의 잘못된 비판에 대한 수용 등의 한계를 보여주었으며, 사회주의적 총체성을 유지하는 맑스주의적 관점의 생태론을 만들어내는 데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2. 제임스 오코너의 “이차모순론”은 생태문제에 대해 맑스주의자들이 적극적으로 대처하려는 시도였지만, 생태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협소화시켰으며, 사회주의와 생태주의를 병렬적으로 결합시키는 한계를 드러내었다.

     

    오코너는 “자본주의, 자연, 사회주의 – 이론적 서설”이라는 글에서 두 가지 맑스주의 이론을 계속 대비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였다. 오코너의 이론의 핵심적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이라는 “전통적 맑스주의”의 모순이 있다면, “생태주의적 맑스주의”의 모순은 “자본주의 생산관계들(그리고 생산력)과 자본주의적 생산조건들 사이의 모순, 혹은 자본주의적 관계와 사회적 재생산력들” 사이의 모순이다. 오코너는 이러한 생태주의적 맑스주의의 모순론을 전개하기 위해 “생산조건(conditions of production)”이라는 개념을 끌어왔다.

    전통적 맑스주의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은 “가치 및 잉여가치의 생산과 실현사이의 모순”이자, “자본의 생산과 유통 사이의 모순”이라는 특유의 형태를 지니는데, 이는 “실현위기” 혹은 “자본의 과잉생산”이라는 형태를 띠는 경제위기를 야기한다. 그리고 이 위기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자본의 대응과정에서 생산성의 향상, 협업, 계획, 국유화 등 생산력과 생산관계에서 더욱 사회화된 형태를 낳는다. 이는 사회주의로의 “자연적 경향”을 낳지는 않지만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기술적·사회적 전제조건을 어느 정도 창출한다. 이 이론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주체는 노동자계급”이며,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사회변형의 즉각적인 대상을 이룬다.” “변형의 장소는 정치, 그리고 국가와 생산 및 교환과정이다.”

    생태주의적 맑스주의에서, 생산관계 및 생산력과 생산조건 사이의 모순 역시 가치 및 잉여가치의 생산과 실현 사이의 모순을 띠며, “유동성의 위기” 혹은 “자본의 과소생산”이라는 경제위기를 야기한다. 이때 “자본의 과소생산”은, “자본주의 생산관계와 생산력이 그 자신의 조건들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훼손하고 파괴하는 자기파괴적 방식” 때문에 “생산조건의 재생산 비용 상승”을 야기하며, 그 결과 “자기 자신의 이윤과 더 많은 자본을 생산하고 축적할 수 있는 능력을 위협”하면서 발생하는 경제위기이다. 전통적 맑스주의의 경제위기 설명에서처럼 생태주의적 맑스주의 역시,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자본의 대응은 “영구적 수확림, 토지개간, 지역 토지이용, 그리고/또는 자원계획, 인구정책, 보건정책, 노동시장규제, 독성폐기물 처분 계획” 등 생산조건에서도 이를 “재생산하기 위한 새로운 사회적, 정치적 형태”들을 낳는다. 이러한 것들이 사회주의로의 “자연적 경향”을 낳지는 않지만 이를 위한 “미약한 전제조건”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이론에서 “사회변형의 주체는 “신사회운동들” 혹은 작업장 보건, 안전, 독성 폐기물의 생산과 처분 등에 대한 생산 안에서의 투쟁을 포함한 새로운 사회적 투쟁들이다.” “생산조건의 재생산에 관한 사회적 관계들(예를 들어 사회관계의 구조들로서 국가와 가족, 그리고 “새로운 투쟁들이” 자본주의 생산 안에서 발생하는 한에 있어서 생산관계 그 자체)은 사회변형의 즉각적인 대상을 이룬다.” “변형의 즉각적인 장소는 생산조건들의 물질적 재생산 과정(즉 가족 안에서의 노동분업, 토지이용 패턴, 교육 등)과 또 다시 새로운 투쟁들이 자본주의적 작업장 안에서 일어나는 한에서의 생산과정 그 자체”이다.

    요컨대 오코너는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 자본의 과잉생산(over-production)과 경제위기, 그리고 위기가 야기하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보다 명백하게 사회적인 따라서 잠재적으로 사회주의적인 형태들로의 재구조화 과정에 관한 전통적 맑스주의 이론”과 병렬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및 생산력과 생산조건들 사이의 모순, 자본의 과소생산(under-production)과 경제위기, 그 결과 역시 위기가 야기하는 생산조건들과 사회적 관계들의 보다 명백하게 사회적이고 따라서 잠재적으로 사회주의적인 형태들로의 재구조화 과정에 관한 “생태주의적 맑스주의” 이론”을 제기하였다. 즉 오코너에 따르면, 전통적 맑스주의의 설명과는 별도로 기본모순과 경제위기의 원인, 투쟁의 주체와 내용이 다른 “하나가 아닌 두 가지의 사회주의로의 길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태문제에 대한 오코너의 설명은 이러한 이중적 설명구조 때문에 “이차모순(second contradiction)론”이라고 칭해졌다.

    오코너의 이론은 생태문제에 대해 맑스주의적 입장에서 이론화를 시도하였던 거의 최초의 시도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그러나 오코너는 초기 맑스주의적 생태론이 지닌 문제점과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그의 이론은 생태문제에 대해 풍부하고 폭넓게 접근할 수 있는 맑스주의적 생태론을 구축하는 데 실패하였다. 그는 오히려 문제의식을 협소하게 만들었으며, 사회주의와 생태주의의 결합이 병렬적 수준을 넘지 못하는 등 여러 가지 한계를 노정하였다.

     

    1) 오코너의 핵심개념인 생산조건은 맑스주의적 범주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었고, 이에 기초하여 생산관계, 생산력간의 모순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생산관계 및 생산력 대 생산조건의 모순이라는 잘못된 이론을 가공해내었다.

     

    오코너에 의하면 이 “생산조건”이라는 개념은 맑스 자신의 것으로, 맑스는 이 개념을 세 가지로 정리하였다고 한다.

     

    “첫 번째는 “외재적 물리적 조건” 다시 말해 불변, 가변자본으로 들어가는 자연적 요소들이다. 두 번째로 노동자의 “노동력”은 “생산의 인간적 조건”으로 규정되었다. 세 번째로 맑스는 예를 들어 “통신수단들”과 같이 사회적 생산의 공동체적, 일반적 조건들을 언급하였다.”(오코너, “자본주의, 자연, 사회주의 – 이론적 서설”)

     

    즉 오코너는 외재적 자연 및 생산과정에서의 원료, 보조재료, 생산도구와 생산에 직간접적으로 이용되는 사회간접시설 뿐 아니라 인간노동력까지 “생산조건”으로 포함하였다.

    그러나 이는 맑스의 생산조건 규정과는 상이한 것으로 오코너가 자의적으로 규정한 개념이었다. 맑스는 생산조건을 생산과정에 들어가는 객체적, 대상적 요소로 생산수단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사용하였다. 여기서 생산과정의 주체적 요소인 인간노동력(생산자)은 생산조건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범주였다.6) 그리고 맑스는 언제나 노동과정을 두 생산요소인 생산수단(생산조건)과 생산자가 결합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각각의 사회구성체에서 생산조건과 생산자가 결합하는 특유의 방식이 생산관계이므로, 이는 맑스가 생산관계의 하위 범주로서 생산조건을 위치지우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오코너의 자의적 개념규정이 단순히 개념에 대한 정의의 차이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코너는 자기 식으로 생산조건을 규정한 후, 여기에서부터 시작하는 별도의 이론체계를 구성해갔다. 우선 생산력, 생산관계와 생산조건 사이의 모순이라는 새로운 모순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고, 여기서 다시 이 모순으로부터 경제위기, 사회주의 전망, 운동의 주체와 운동의 대상들을 설정해갔다.

    이러한 자의적인 생산조건 개념을 통한 이론의 구성은 생태문제를 잘못된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었다. 인간과 생산조건이 결합되는 방식이 생산관계이며, 이는 인간과 자연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노동과정 속에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생산조건은 생산관계 외부에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오코너의 생산조건 개념은 생산관계의 하위 범주로서 생산조건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관계 외부에 존재하는 별도의 범주로 “생산조건”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오코너는 이러한 오류에 입각해서 생산조건을 생산력, 생산관계에 부당하게 대비를 하였으며 나아가 자본주의의 전통적인 모순과는 구분되는 이차모순이 존재한다는 허상을 만들어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출발한 이론구조가 역시 허구적일 수밖에 없음은 당연하다 하겠다.

     

    2) 오코너는 자본주의의 경제위기를 낳는 것으로 생태위기를 설명하려고 하여, 오히려 생태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협소화시켰다.

     

    오코너는 “맑스가 어떻게 생태위기가 자본주의의 축적 위기를 발생시키는가를 설명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의 분석은 불완전하고, 비체계적이며, 미발전된 상태”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이차모순론에 입각하여 일차모순과 연관되어 있는 과잉생산공황처럼, 자본주의는 생태문제와 관련하여 이차모순과 연관된 고유한 경제위기를 낳는다고 이론화 하였다. 오코너는 “생산조건”이라는 개념에 근거하여, 생산관계, 생산력과 생산조건 사이의 모순의 결과로 “과소생산”이라는 경제적 위기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즉 생태위기는 자본주의에서 특수한 경제적 위기의 형태를 띤다는 것이 오코너의 주장이다.

    이것은 생태문제와 자본주의의 연관성을 적극적으로 해명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담긴 문제의식의 적절성에도 불구하고, 생태위기를 경제위기를 초래하는 문제 수준으로 설명하려는 오코너의 이러한 시도는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을 매우 협소하게 만들었다.

    존 벨라미 포스터는 생태위기를 경제위기와 연관시키려는 태도가 지닌 문제점을 적절히 비판하였다.

     

    “생태문제들에 대한 맑스주의적 접근이 반드시 자본주의 하에서의 경제위기론을 직접적으로 이끌어내야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온당한 것인가? 맑스주의적 생태주의 분석이 발전된 견해로 인식되는 정도가 이것이 특수한 경제위기론으로 통합되는 정도에 의해 결정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문제가 이러한 방식으로 틀지어질 때에 기어들어오는 일종의 경제주의와 기능주의가 존재한다.”(존 벨라미 포스터, “자본주의와 생태: 모순의 성격”)

     

    이러한 비판과 함께 포스터는 오코너처럼 생태문제를 자본주의의 경제적 위기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다음을 간과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1) “가장 노골적인 생태 파괴의 한가운데에서도 축적을 하고, 환경의 퇴화로부터 이윤을 얻으며(예를 들어 폐기물 처리산업의 성장을 통해), 돌아오지 못하는 지점―인간사회나 이 세계의 살아있는 대부분의 생물종 모두에게―까지 지구를 계속해서 파괴해가는 자본주의의 능력을 낮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2) “환경에 가해진 손상이, 주되게 이것이 생산조건들에 영향을 주는 곳에서 가장 심각하다고 믿을 근거는 하나도 없다.” 포스터는 생산조건과 관련이 없지만 심각한 생태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사례로 아마존 우림, 종의 멸종, 오존층의 파괴를 들고 있다.7)

    “자연적, 사회적 종인 인류가 발전하기 위한 조건이 광범위하게 악화되었다는 의미에서의 환경위기와 자본축적 환경의 위기를 구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이 둘이 모두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고는 해도 결코 앞의 것이 곧바로 뒤의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8)는 폴 버켓의 비판 역시 경청할 만 하다.

    여러 생태문제에서 나오는 위기는 단지 자본의 축적의 위기가 아니라 인간의 생존의 위기로 나타나며, 더 나아가 지구를 구성하는 생명 종의 위기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생태문제는 단순히 자본주의의 경제위기를 초래한다는 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보다 포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그러나 오코너의 이론은 이러한 포괄적 접근을 가로막는 한계를 보여준다.

    생태위기를 경제위기를 초래하는 것으로 설명하려는 오코너의 한계는 생태문제를 올바르게 접근하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되는 것이다.

     

    3) 오코너는 생태문제를 경제위기와의 관련 속에서만 바라보면서 문제를 협소화시켰을 뿐 아니라, 그의 이차모순론은 사회주의노동운동과 생태운동을 병렬적인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하면서 이 둘의 기계적 결합을 넘지 못하였고 결국 실천 상의 문제점을 야기하였다.

     

    앞에서 오코너의 이론을 간략하게 요약하였는데, 오코너는 전통적 맑스주의와 생태주의적 맑스주의, 일차모순과 이차모순, 과잉생산 위기와 과소생산 위기, 전통적 노동자계급과 신사회운동 등의 식으로 양자를 대비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를 통해 생태문제를 맑스주의의 이론 틀 속에서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맑스주의와는 대비되는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내고자 하였다.

     

    오코너의 “자본주의, 자연, 사회주의 – 이론적 서설”의 병렬적 이론구조

    구 분

    전통적 맑스주의

    생태주의적 맑스주의

    주요모순

    일차모순 :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이차모순 : 생산력, 생산관계와 생산조건의 모순

    경제위기형태

    과잉생산 위기, 실현 위기

    과소생산위기, 유동성 위기

    경제위기의 결과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더욱 사회화된 형태

    생산조건을 재생산하기 위한 새로운 사회적 정치적 형태

    투쟁의 주체

    노동자계급

    신사회운동

    투쟁의 대상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생산조건의 재생산에 관한 사회적 관계

    투쟁의 공간

    정치, 국가, 생산 및 교환과정

    생산조건의 물질적 재생산과정, 자본주의적 작업장 안에서의 생산과정

     

    오코너는 이런 이원적, 병렬적 구조를 지니는 이론, 운동전망, 실천을 서로 화해시키고, 결합시키고자 하였다. 완전히 다른 모순과 운동 전망, 주체에 기반을 두는 이 둘의 결합근거는 생산조건에 관한 투쟁 역시 자본에 대항하여 계급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이다.9) 그러나 이러한 병렬적인 이론구성을 기계적으로 결합시키려는 시도는 유지되기 어려운 것이었고, 실천 상에서 더 큰 한계를 낳았다.

    이러한 병렬적인 이론구성이 지닌 문제점에 대해서, 포스터와 버켓 역시 강한 비판을 하고 있다. 우선 버켓의 비판은 다음과 같다.

     

    “오코너가 제시하는 “두 가지 모순”이라는 이분법은 생산조건을 자본의 노동착취에 “외부적”인 것으로 취급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이 요구하는 조건과 인간적 발전이 요구하는 조건 사이의 구별을 완화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완화가 노동자의 투쟁과 생태적 투쟁을 인위적으로 분할하고, 후자를 기본적으로 “비계급적” 투쟁으로 정의하는 효과를 생산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내부적” 모순과 “외부적” 모순 사이의 이원론은 차이와 특수성이라는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적” 정치에 대한 오코너의 비판을 약화시킨다.”(폴 버켓, “적색과 녹색의 융합”)

     

    더 나아가 포스터의 경우에는, 이 병렬적 구조가 실천적으로 계급투쟁을 종속적인 위치로 전락시킬 수 있다고 비판을 한다.

     

    “자본주의 개념규정에 있어 “이차모순”―생태주의적 맑스주의를 정의하는 방식에서처럼―이 지닌 더 큰 난점은 이것이 한번 빠져들면 헤어 나오기 어려운 이원적인 경제전망을 강제한다는 것이다. … 이러한 것들은 역으로 사회운동의 두 가지 형태를 창출하는데, 일차모순에서 나오는 전통적인 계급 기반의 운동들과 “이차모순”에서 나오는 신사회운동들이 그것이다. 자연스럽게 이는 두 가지 모순들의 결합된 힘에 기반을 둔 운동의 두 가지 유형 사이의 연합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차 모순”이 이제 지배적으로 되고 신사회운동들이 결과적으로 더욱 활기 있게 되면서, 계급 기반의 운동들은 이러한 분석과 전략에서 종속적인 역할을 점점 맡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된 생태주의적 맑스주의는 명백히 노동 기반의 계급투쟁이 하찮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는 접근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 이론은 틀림없이 운동을 인위적으로 분리하며(현존하는 분리에 이론적인 층위도 더 추가한다), 희망의 공간을 축소시킨다.”(존 벨라미 포스터, “자본주의와 생태: 모순의 성격”)

     

    사회주의노동운동과 생태운동을 병렬적이고 기계적으로 대비시키고, 생태문제들을 설명하는 이론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사고는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다. 또한 오코너의 경우에서처럼 생태운동을 사회주의노동운동과 병렬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 다룰 경우, 둘 사이의 기계적 결합을 극복하지 못할뿐더러 더 나아가 사회주의노동운동을 청산하는 실천적 오류를 낳을 수도 있다. 따라서 생태문제를 맑스주의의 이론 속에서 총체성을 유지하면서 유기적인 결합을 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오코너의 글은 맑스주의적 입장에서 생태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려고 한 거의 최초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오코너는 맑스주의에 대한 생태주의의 도전에 대해서 이론적 해명을 하고자 하였다. 가령 “자연의 한계”에 대해서는 “생산조건”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해명하려고 하였으며, 맑스주의에 대한 생태주의자들의 비판, 생태문제와 자본주의의 연관, 생태운동의 이론적 근거 등의 문제에도 자기 나름대로의 답을 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오코너는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생산조건”이라는 개념에 대해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생산력, 생산관계와 모순관계에 있는 것으로 부당하게 설정하면서 “이차모순”이라는 허구적 모순을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다양하고 폭넓은 생태문제를 자본주의의 경제위기와의 관련 속에서 설명하고자 하면서 생태문제에 대한 인식을 경제주의적, 기능주의적으로 협소하게 만들어버렸다. 마지막으로 오코너는 사회주의적 총체성의 관점에서 생태운동을 바라보지 못하고, 사회주의 노동운동과 별도의 내용을 지니는 병렬적 운동으로 바라보았다. 이는 오코너 스스로가 비판하였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의 실천과 사실 상 별 차이가 없게 되는 실천상의 오류를 야기하였다.

    오코너의 이론은 생태문제에 대해서 왜 사회주의적 총체성을 지녀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오코너의 이론을 통해서, 생태, 여성, 소수자 등의 문제를 “하나의 부분적 부문으로 사회주의노동운동에 기계적으로 결합하는 방식은 이들 문제의 보다 심도 높은 해결을 불가능하게 하고 역으로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여러 병렬적 부문 중 하나의 부문으로 협소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청산주의를 가져 온다”10)는 강령초안의 문제의식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3. 맑스주의적 생태론에 관한 최근 성과들은 맑스주의가 생태문제에 대해 풍부한 설명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전반적으로 생태문제를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설명하려고 하였던 초기의 시도들은, 맑스주의의 사상과 이론구조 속에서 생태문제를 제대로 위치지우는 데 실패하였으며, 맑스주의 외부에서 생태주의자들이 가하는 비판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면서 맑스주의를 사실 상 수정하려는 시도로 전락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생태론을 새롭게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성장하게 된다. 이들은 맑스와 엥겔스의 사상 속에 생태주의적 인식이 풍부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파악하고, 이러한 맑스와 엥겔스의 생태주의적 인식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자 하였다.11) 이러한 흐름의 대표적 인물로는 폴 버켓과 존 벨라미 포스터를 들 수 있다.12) 존 벨라미 포스터는 기존의 생태주의적 맑스주의(ecological marxism)의 흐름과 스스로를 구별 짓기 위해서, “맑스의 생태학(Marx’s ecology)”을 자신의 책 제목으로 잡았다. 이 새로운 흐름은 기존의 생태주의적 맑스주의자들이 범하였던 맑스에 대한 통상적 비판을 부정하고 맑스의 생태주의적 인식을 맑스의 후기 사상, 특히 ‘정치경제학비판’으로서의 「자본론」에서 찾아내고자 하였다. 이는 맑스주의의 이론 속에서 생태문제를 접근하려고 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이전의 이론들과는 차별되는 긍정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이 자신의 이론을 제기한 후 10 여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는 탄소 순환, 해양생태계 연구 등과 같은 구체적 사례연구도 속속 축적이 되고 있다.

     

    1) 맑스와 엥겔스의 초기의 입장은 생태문제가 인간과 자연간의 관계의 문제라는 기본적인 사상적 틀을 제공해준다.

     

    버켓, 포스터 등의 최근 성과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검토하기에 앞서, 생태문제와 관련된 맑스와 엥겔스의 초기사고를 잠깐 검토하고자 한다.

    marx_31맑스와 엥겔스는 청년기 저작에서 생태문제와 직접 연관되어 있는 문제를 다루지는 않지만, 자신들의 유물론 철학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 대한 풍부한 고찰을 하였으며, 이는 맑스주의적 입장에서 생태문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사상적 틀을 제공해준다. 특히 초기 저작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우리는 맑스의 사고를 충분히 확인해볼 수 있다. 다소 길지만 이 글의 일부를 인용해보도록 하겠다.

     

    “동물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있어서도 유적 생활은 육체적으로는 첫째로 인간이 (동물과 마찬가지로) 비유기적 자연에 의해 생활한다는 점에 그 본질을 두고 있는바, 인간은 동물보다 더 보편적이며, 그가 그것에 의해 생활하는 비유기적 자연의 범위도 동물보다 더 보편적이다. … 인간이 자연에 의해 생활한다는 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자연은 인간이 죽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과의 지속적인 [교호] 과정 속에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의 몸이다.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생활이 자연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은 자연이 자기 자신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 이외에 어떠한 의미도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 존재로서 그리고 살아 있는 자연 존재로서 자연적 힘들·생명력들을 갖추고 있는 활동적 자연 존재이며, 이 힘들은 그의 안에 소질과 능력, 충동으로 존재한다; 한편 인간은 자연적·육체적·감각적·대상적 존재로서 식물이나 동물과 마찬가지로 시달리고, 제약되고 한계 지어진 존재이다. 그의 충동의 대상들이 그의 밖에, 그로부터 독립된 대상들로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 대상들은 그의 욕구의 대상들로서 그의 본질적 힘들을 실증하고 확증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본질적 대상들이다. 인간이 육체를 지니고 자연적 힘들을 지니고 살아 있고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대상적 존재라는 것은 인간이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대상들을 자신의 존재의 대상으로, 자신의 생활 표현의 대상으로 가진다는 것 혹은 그가 오직 현실적인 감각적 대상들에만 자신의 생활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 배고픔은 자연적 욕구이다; 그러므로 배고픔은 충족되고 가라앉혀지기 위해 그것 바깥에 있는 자연, 그것 바깥에 있는 대상이 필요하다. 배고픔은 그것을 채우고 그것의 본질을 표현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그것 바깥에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내 육체의 욕구이다. 식물이 생명을 일깨우는 태양의 힘, 태양의 대상적인 본질적 힘의 표현으로서 태양의 대상이듯이, 태양은 식물의 대상이며 식물의 생명을 확증하는 필수 불가결한 대상이다.”(맑스,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

     

    여기서 드러나는 맑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맑스는 인간을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접근하는 대신 인간을 “직접적으로 자연 존재”로 보았다. 즉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로서 다른 생명종과 같은 생명활동을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에 대해서 특권적인 위치를 부여한다는 생태주의자들의 비판과는 전혀 상반된 생각이다.13) 두 번째로 맑스는 인간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욕구충족을 위해 자신의 바깥에 있는 자연 대상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였다. 즉 맑스는 자연존재로서 인간과 인간의 바깥에 존재하는 자연존재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였다. 세 번째로 맑스는 비단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존재 전체가 서로가 서로에게 대상으로서 존재한다고 파악하였다. 모든 자연존재는 본질적으로 “대상적 존재”이며, “자신의 바깥에 자신의 자연을 갖고 있지 않은 존재는 결코 자연적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모든 자연 존재는 서로에게 대상으로서 상호 긴밀한 영향을 끼치는 관계를 맺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14)

    맑스는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의 산물이며, 인간과 자연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인식하였다. 따라서 대안사회로서 공산주의는 “완성된 자연주의=인간주의로서, 완성된 인간주의=자연주의로서 존재하며,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충돌의 참된 해결”이라고 보았다. 이는 맑스가 인간과 자연을 분리된 관계로서 보지 않았으며, 인간과 자연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구성하는 가운데, 이를 통한 인간과 자연의 공존, 자연적,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발전을 전망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2) 자연과 인간 사이의 물질대사 관계와, 이를 매개, 규제, 통제하는 매개체로서 노동 규정

     

    버켓과 포스터는 초기의 맑스, 엥겔스가 지녔던 생각이 후기에 와서 더욱 구체화되고 체계화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맑스의 개념으로서 “물질대사”(metabolism, 신진대사로도 번역될 수 있다) 개념에 주목을 한다. 물질대사 개념은 맑스가 의식적으로 사용한 개념인데도 불구하고 사실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지 못하였던 개념이다.15)

    포스터는 이 “물질대사” 개념이 수용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물질대사” 용어는 일찍이 1815년 도입되었으며, 1830년대와 1840년대 호흡작용과 관련된 신체 안에서의 물질교환을 언급하기 위하여 독일의 생리학자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 용어는 토양에 관한 초기의 저작에 뒤이어 1842년에 나온 리비히의 위대한 저작, ‘동물화학(Animal Chemistry)’에서, 그에 의해 다소 더 포괄적으로 적용되었는데, 이 책에서 그는 (조직 퇴화라는 맥락에서의) 물질대사 과정이라는 생각을 도입하였다. 이는 이후 훨씬 더 일반화되었고, 생화학의 발전 속에서 세포수준과, 유기체 전체에 대한 분석 모두에 적용될 수 있는 핵심 개념들 중 하나로 부상하였다.

    생물학적, 생태학적 분석 안에서 물질대사 개념은 1840년대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의미 확장이 되었으며, 유기체들과 그들의 환경들의 관계에 대한 체계이론적 접근에서 중심적 범주로 사용되어 왔다. 이것은 물질대사 교환의 복잡한 과정에 주의를 돌리는데, 이 과정에서 유기체(혹은 일정한 세포)는 자신의 환경으로부터 물질과 에너지를 끌어와서, 이것들을 다양한 물질대사 반응을 통해 성장에 필요한 단백질 및 다른 여러 합성물 등의 구성요소들로 전환한다. 물질대사 개념은 또한 유기체들과 그들의 환경 사이의 이러한 복잡한 상호교환을 지배하는 조절과정들을 언급하는데 이용된다. 오덤(Odum)과 같은 지도적 체계생태학자들은 단일 세포에서 시작하여 생태계로 끝나는 전생물학적 수준과 관련하여 “물질대사”를 채택한다.”(존 벨라미 포스터, “물질대사의 균열에 관한 맑스의 이론”)

     

    포스터는 맑스가 이 “물질대사”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그의 사상의 보다 확고하고 과학적인 기반을 제공하였으며, 동시에 이 개념이 그의 이론에 포함되어 중심적 위치를 지니게 되면서 그가 이 개념의 보다 포괄적인 함의들을 끌어올 수 있도록 고무하였다”고 보았다.

    이제 맑스가 실제 물질대사 개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보도록 하자. 우선 맑스는 자본론 1권, 1장에서 상품에 투하되는 노동의 이중성을 논하면서, 상품의 가치를 생산하는 “추상적 인간노동”의 측면을 제거하고,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구체적 유용노동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사용가치의 창조자로서의 노동, 유용노동으로서의 노동은 사회 형태와 무관한 인간생존의 조건이며,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 따라서 인간생활 자체를 매개하는 영원한 자연적 필연성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맑스가 인간과 자연사이의 관계를 물질대사로 표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맑스는 자본론 1권, 7장에서 노동과정에 대해 분석하며 이러한 자신의 사고를 더욱 구체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여기서 맑스는 “노동과정은 우선 첫째로 어떤 특정 사회형태와 관계없이 고찰되어야 한다”고 파악한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자 유기체의 하나로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동이 불가피하며, 이는 어떤 사회형태에서도 벗어날 수 없는 “자연이 부과한 인간생존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맑스는 이 노동의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노동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를 자기 자신의 행위에 의해 매개하고 규제하고 통제한다. 인간은 하나의 자연력으로서 자연의 소재를 상대한다. 인간은 자연의 소재를 자기 자신의 생활에 적합한 형태로 획득하기 위해 자기의 신체에 속하는 자연력인 팔과 다리, 머리와 손을 운동시킨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자기 자신의 자연(즉 인간본성: 역자)을 변화시킨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며, 이 힘의 작용을 자기 자신의 통제 밑에 둔다.”16)(맑스, 「자본론」 1권, 7장)

     

    맑스는 노동을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매개하는데 있어, 다른 유기체와 구분되는 인간만의 고유한 특징으로 보았다. 그리고 노동이 다른 유기체의 생명활동과 다른 차이는 노동자가 단순히 “자연물의 형태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적을 자연물에 실현”시키는 의식과 의지를 지닌 합목적적 활동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맑스의 분석은 역사유물론과 통합되어 있다. 맑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노동과정이 인간과 자연 사이의 단순한 과정인 한, 그것의 단순한 요소들은 노동과정의 모든 사회적 발전형태들에 공통된 것이다. 그러나 노동과정의 특수한 역사적 형태들은 각각 이 과정의 물질적 토대와 사회적 형태를 더욱 발전시킨다. 일정한 성숙단계에 도달하면 그 일정한 역사적 형태는 벗겨지며 더 높은 형태에 자리를 양보한다.”(맑스, 「자본론」 3권, 51장)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밖에 없으며, 자연과 인간이 노동을 통해서 매개되는 이 노동과정은 어떤 사회, 시대를 불문하고 인간에게 공통된 것이며, “자연이 부과한 인간생존”의 조건이다. 그러나 이 자연과 인간 사이의 물질대사를 규제, 매개, 통제하는 노동과정의 형태는 구체적 사회구성체마다 고유한 모습을 지닌다. 즉 각각의 사회구성체에는 고유한 방식의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맑스는 이 역사유물론 틀 속에서 인간과 자연, 사회의 문제를 모두 총체적으로 파악하려고 하였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맑스의 이론 틀 속에서 사고해보면, 자본주의에서도 역시 고유한 방식의 물질대사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는 그 본질적 속성 상 이윤(잉여가치)의 추구를 목적으로 하며, 이 목적을 추구하는 과정은 생산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이윤 획득 과정은 그 한계가 없는 무제한적 과정이다. 또한 자본주의는 이윤의 획득을 위해, 생산규모를 항구적으로 확대 시키려는 경향을 지닌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과의 물질대사 관계도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 이윤을 위해 자연에 대한 약탈을 가속화하는 과정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자연을 스스로 회복할 수 없는 수준까지 파괴해간다.17)

     

    3) 19세기 자본주의 농업위기와 이에 대한 맑스의 분석

     

    맑스는 토지 비옥도를 고갈되고, 영양분의 순환체계를 파괴되어 심각한 농업위기를 야기한 19세기 유럽 및 북미의 농업위기를 분석하면서 “물질대사” 개념을 현실 분석에 이용하였다.

    19세기 자본주의 농업은 토양의 영양분이 상실되면서 토양의 자연적 비옥도가 고갈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당대에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또한 농촌과 도시의 분리, 그 결과 발생한 농업생산물의 원거리 무역을 통한 도시로의 이동은 토양 영양분이 도시로 이전된 후 다시 토지로 순환될 수 없게 했으며, 이 순환되지 못한 영양분은 도시에 남아 환경을 오염시키는 폐기물이 되었다. 이는 자본주의 농업이 농촌의 영양분을 약탈하여 영양분의 순환을 파괴하는 체제라는 인식을 낳았다.

    대표적으로 토양의 비옥도 고갈에 대해 리비히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상인들의 “경험적 농업”은 토양의 “재생산 조건들”을 침식하는 “약탈체제”가 되었다. 그에 따르면 “무언가가 영구적으로 빼앗긴 들판에서,” “자체적 생산력을 증가시키지도, 심지어 동일하게 지속시키지도 못한다.” 진정 “토지의 약탈에 기반을 둔 모든 농업체제는 빈곤을 야기한다.” “약탈적 농업체제와 대조적으로 합리적 농업은 회복의 원칙에 기반을 둔다; 비옥도의 조건을 들판에 되돌려줌으로써 농부는 전자의 영구성을 보장한다.” 리비히에게, 영국의 “집약적 농업”이 “미국 농부의 공공연한 강탈체제인 것은 아니지만 … 한 눈에는 강도짓으로 보이지 않는 더 정제된 종류의 약탈이다.””(존 벨라미 포스터, “물질대사에 관한 맑스의 이론”)

     

    약탈적인 자본주의 농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미국과 유럽 각국은 “천연비료를 구하기 위해 지구 곳곳을 뒤지고 다녔고”, “근대적 토양학이 등장하고 합성비료가 점진적으로 도입되었다.”18)

    맑스 역시 이 위기를 자본론을 포함한 여러 글 속에서 언급하였다. 우선 토양 영양분의 약탈에 의한 토양의 비옥도의 악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본주의적 농업의 모든 진보는 노동자를 약탈하는 방식상의 진보일 뿐 아니라 토지를 약탈하는 방식상의 진보이며, 일정한 기간에 토지의 생산력을 높이는 모든 진보는 생산력의 항구적 원천을 파괴하는 진보이다. 한 나라가 대공업을 토대로 발전하면 할수록[예컨대 미국처럼], 이러한 토지의 파괴과정은 그만큼 더 급속하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의 원천인 토지와 노동자를 동시에 파괴함으로써만 사회적 생산과정의 기술과 결합도를 발전시킨다”(맑스, 「자본론」 1권 15장)

     

    그리고 약탈적 농업체제에 의한 영양분 순환의 파괴의 측면은, 도시와 농촌의 분리라는 측면과 결합되어 다음과 같은 논의를 전개하였다.

     

    “소비의 폐물은 인간의 자연적 배설물, 누더기 형태의 의복 등을 가리킨다. 소비의 폐물은 농업에서 가장 중요한데, 그것의 이용에 관한 한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막대한 낭비가 일어나고 있다. 예컨대 런던에서는 450만 명의 분뇨로 템스 강을 오염시키는 것보다 더욱 좋은 처리방법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은 큰 낭비이다.”(맑스, 「자본론」 3권 5장)

     

    “인구의 도시집중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사회의 역사적 동력을 집중시킨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과 토지 사이의 신진대사를 교란한다. 즉, 인간이 식품과 의복의 형태로 소비한 토지의 성분들을 토지로 복귀시키지 않고, 따라서 토지의 생산력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원한 자연적인 조건이 작용할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은 도시노동자의 육체적 건강과 농촌노동자의 정신생활을 다 같이 파괴한다.”(맑스, 「자본론」 1권 15장)

     

    이러한 물질대사의 파괴를 맑스는 물질대사의 “균열”(rift)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대규모 토지소유는 농업인구를 점점 감소시켜 최소한도로 축소시키고 점점 증대하는 공업인구를 대도시에 밀집시킨다. 이리하여 대규모 토지소유는 생명의 자연법칙이 명령하는 사회적 신진대사의 상호의존적 과정에 회복할 수 없는 균열이 생기도록 하며 지력을 탕진하는데, 이것은 무역에 의해 한 나라의 국경을 넘어 타국에서도 발생한다[리비히(Liebig)].”(맑스, 「자본론」 3권 47장)

     

    요컨대, 맑스는 19세기 농업위기를 분석한 결과, 자본주의가 인간과 자연간의 물질대사 관계를 파괴하며, 이를 통해 노동자뿐만 아니라 사회적 부를 생산하는 또 다른 원천인 토지(자연) 역시 파괴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는 물질대사 관계에 “회복할 수 없는 균열”을 낳는다고 보았다. 인간이 자연과 관계를 맺는 데 있어 하나의 고유한 형태인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노동자와 자연 모두에게 파괴적인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맑스는 강력하게 비판하였던 것이다.

     

    4) 생태문제 해결에 대한 맑스의 전망: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의 합리적 규제와 인간의 완전한 발전

     

    생태문제 해결에 대한 맑스의 전망을 알아보기에 앞서, 보다 포괄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 엥겔스의 견해를 확인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은 그 의의가 폄하되는 경우가 많은데,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견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에 포함되어 있는 “원숭이의 인간화에 있어서 노동의 역할”을 반드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자연에 대한 우리 인간의 승리에 대해 너무 득의양양해 하지는 말자. 우리가 승리할 때마다 자연은 매번 우리에게 복수한다. … 따라서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상기해야 할 것은 우리가 자연을, 마치 정복자가 타민족을 지배하듯이, 자연 바깥에 서 있는 어떤 자처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우리는 살과 뼈, 머리까지 포함하여 전적으로 자연에 속하는 존재이며, 자연의 한 가운데에 서 있으며, 우리의 자연에 대한 지배의 본질이 모든 다른 피조물보다 우수하게 자연의 법칙을 인식하고 이를 올바로 사용할 줄 아는 데 있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자연법칙을 하루하루 더 잘 이해해 가고 있으며, 자연의 관행적인 과정에 대한 우리의 침범이 가져올 가깝고 먼 장래의 결과들을 인식해 가고 있다. 특히 금세기에 이루어진 자연과학의 엄청난 진보의 결과 우리들은 이제 최소한 우리의 일상적인 생산행위가 낳을 비교적 먼 장래의 자연적 결과들을 알게 될 것이며, 이로써 이 결과들을 지배할 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진전될수록 인간은 다시 스스로를 자연과 하나로서 느낄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이 자연과 하나임을 알게 될 것이며, 저 불합리한 반자연적 관념 … 정신 대 물질, 인간 대 자연, 영혼 대 육체라는 대립관념은 더욱 설 자리를 잃어가게 될 것이다. … 그러나 이러한 통제를 실현하는 데에는 단순한 인식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에는 종래의 생산양식과 이와 더불어 현재의 전 사회질서를 완전히 변혁하는 것이 필요하다.”(엥겔스, 「자연변증법」)

     

    이 글에서 엥겔스는 자연을 “정복자가 타민족을 지배하듯” 대할 수 없다는 온당한 지적을 한다. 그리고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자연에 대한 이해를 증대시키면, 이를 자연바깥의 지배자처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에 야기하는 여러 결과들을 올바로 인식하고 이에 대처하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통해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면서 인간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이해의 확대와 이의 올바른 적용은 현존 체제에서는 불가능함을 밝히고 있다.

    맑스는 이러한 생각을 인간과 자연 간의 물질대사과정에서 발생한 균열을 체계적으로 복원하는 것과 연관 지어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였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자연발생적으로 조성된 신진대사의 상황을 파괴함으로써, 신진대사를 사회적 생산을 규제하는 법칙으로서 그리고 인간의 완전한 발전에 적합한 형태로 체계적으로 재건할 것을 강제한다.”(맑스,「자본론」 1권 15장)

     

    “이 영역[필연의 왕국:필자]에서 자유는 오직 다음과 같은 점이다. 즉 사회화된 인간, 결합된 생산자들이 자연과의 신진대사를 합리적으로 규제함으로써 그 신진대사가 맹목적인 힘으로서 그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 신진대사를 집단적인 통제 아래에 두는 것, 그리하여 최소의 노력으로 그리고 인간성에 가장 알맞고 적합한 조건 아래에서 그 신진대사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아직 필연의 왕국이다. 이 왕국을 넘어서야만 진정한 자유의 왕국―즉 인간의 힘을 목적 그 자체로서 발전시키는 것―이 시작된다.”(맑스,「자본론」 3권 48장)

     

    위 인용문의 핵심적 내용은, 맑스가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 과정의 균열을 회복하는 것과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사회주의의 전망을 총체적이고 유기적인 관계로 사고하였다는 것이다. 이 사회주의적 전망의 구체적 내용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이윤 추구, 생산 그 자체가 목적인 생산 등을 위해 자본이라는 대상이 주체인 인간을 종속시키는, 전도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처럼 인간이 사회의 운영과 통제에 대해서 소외되어 있는 상황, 인간의 노동이 소외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자본의 이윤추구 과정에서 발생하는 물질대사의 균열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이 관계를 맺는 과정을 “사회화된 인간”, “결합된 생산자”들이 직접 통제할 때에만 물질대사의 균열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인간 개개인의 다방면에서의 발전이 진행될 때에만 물질대사의 균열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선 이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식의 발전과 이 지식을 올바로 이용할 수 있는 인간본성의 발전을 의미한다. 인간이 자연의 맹목적 힘에 지배받지 않기 위해서는 자연에 대한 지식이 발전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을 자연과 공존하는 관계를 맺는데 이용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성이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해가야 한다.

    또한 이는 인간이 자연과 맺고 있는 노동의 형태를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 인간발전과 양립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맑스는 인간노동이 자연(nature)을 자신의 목적에 맞추어 변화시키는 과정인 동시에 스스로의 본성(nature) 역시 변화시키는 과정으로 보았다. 여기서 인간과 자연간의 관계를 매개하는 노동이 어떤 형태를 취하는가는 인간의 발전과 긴밀한 연관이 있음은 분명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에 치유하기 힘든 균열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인간발전을 왜곡시키고 있음은 자명하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 사이의 왜곡된 관계를 극복하는 것이 인간해방을 자신의 목적으로 하는 사회주의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맑스의 전망은 위의 인용문에서 “인간의 완전한 발전”, “인간의 힘을 목적 그 자체로서 발전시키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19)

    이러한 맑스의 전망은 모든 억압과 착취의 극복과 노동의 소외의 극복이라는 사회주의 본연의 목표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복원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함을 인식하게 해준다. 이는 “완전한 인간주의=완전한 자연주의”라는 1844년 초고에서의 맑스의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나가며

     

    맑스주의적 생태론을 구축하려고 하는 시도가 1980년대 말부터 본격화되었지만, 맑스주의적 관점을 올곧게 유지하면서 생태문제에 제대로 접근하는 이론이 나오기까지는 10여년의 시간이 걸렸다. 글을 마무리하며 지적하고 싶은 것은 맑스주의적 생태론이 구축되어오는 과정에서, 우리는 서두에서 언급한 문제의식이 매우 중요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우선 맑스주의적 생태론이 더욱 심화되는 과정에서 생태문제와 자본주의의 연관성이 보다 분명하게 인식되었다. 맑스의 물질대사 개념은 생태문제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한 심각한 균열에 의해 야기된 문제임을 강조하고, 이것이 자본주의 특유의 물질대사관계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자연은 무제한적 이윤추구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게 되었으며, 자본에 종속된 인간은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통제력을 가진 주체로 나서지 못하는 소외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분석은 생태문제의 해결 역시 사회주의 전망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관계를 올바로 복원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반드시 극복해야 하며, “사회화된 인간”, “결합된 생산자”가 자연과 관계 맺는 과정을 직접 통제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아가 맑스는 자본주의의 극복과 이를 통한 물질대사 관계의 복원을 인간의 발전이라는 전망과 연결 지어 사고하였다. 인간과 자연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다른 자연환경과 관련을 맺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러한 인식은 인간과 자연이 관계 맺는 형태에 따라 때로는 인간과 자연 모두에게 파괴적인 방향으로 갈 수도 있고, 양자가 보다 높은 차원에서 상보하면서 발전할 수도 있음을 이해하게 해준다. 따라서 진정한 인간의 발전과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은 서로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오코너의 이론은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설명을 하려는 선구자적 시도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지만, 생태문제를 사회주의적 총체성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지 못할 경우 큰 한계를 지님을 보여주었다. 인간과 사회의 문제와 별도로 존재하는 생태문제라는 인식방식, 여기서 나오는 이중적, 병렬적 전망은 이론적으로도 문제가 있고, 실천 상에도 오류를 낳았다. 즉 오코너는 생태문제와 계급문제를 인위적으로 분리하였으며, 사회주의노동운동과 생태운동을 유기적으로 결합하지 못하여 포스트맑스주의자들과 다를 바 없는 실천을 야기하였다. 반면 포스터와 버켓이 강조하는 것처럼, 맑스의 역사유물론의 틀 속에서 볼 때 인간, 사회, 자연의 문제를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것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맑스주의적 생태론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ecology-fist생태문제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 문제가 발생하였음을 의미한다. 생태문제가 말 그대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고 변형을 가하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들을 자연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으며, 이것이 인간 스스로의 생존까지 위협하는 상황을 낳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인간이 자연과 얼마나 서로 공존할 수 있는 관계를 구축해갈 수 있느냐에 실마리가 존재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무제한적인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지속불가능하게 만들어가고 결국에는 인간과 자연 모두에게 파멸적 결과를 가져온다.

    결국 생태문제의 해결은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인간과 자연이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 있다. 이는 인간이 자연을 합리적으로 규제하기 위해 노동자가 생산 및 사회운영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하는 과정과, 자연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한 전제이자 결과로서 인간의 완전한 발전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내용들은 결국 사회주의 본연의 문제의식, 포부를 복원하고 이를 실현해가는 것이 생태문제 해결의 핵심임을 의미한다. 이는 “(가칭) 한국사회주의노동당 강령초안”이 말하는 것처럼, “경제주의, 주체가 결여된 구조주의와 객관주의에 의해 왜곡된 본래의 사회주의의 문제의식, 소외된 노동의 극복, 자연으로서의 인간, 인간해방의 관점은 총체성 속에서 새로운 문제의식을 수용하는 훌륭한 틀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미 주]

     

    1) 문순홍, 「생태학의 담론」(아르케) 중 제 6장, “사회 생태학과 루돌프 바로”를 참조함. 문순홍의 책은 여러 생태학 경향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제공해준다.

     

    2) 맑스주의와 생태주의의 관계에 대한 여러 입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맑스의 사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반생태주의적이며, 소비에트의 실천과 구별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 … (2) 맑스가 생태주의에 빛을 비춰주는 통찰을 제공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프로메테우스주의”(친기술적, 반생태주의적 시각들)에 굴복하였다고 주장하는 경우 … (3) 맑스는 농업 안에서 생태주의적 퇴보에 대한 분석을 제공하였지만, 그의 핵심적 사회분석과 분리된 채로 남아 있다고 논하는 경우 … (4) 맑스는 그의 다른 사상과 복잡하게 얽혀있는 자연과 환경 퇴보(특히 토양 비옥도와 관련하여)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을 발전시켰으며, 생태주의적 지속가능성의 문제를 제기하였다고 단언하는 경우”(존 벨라미 포스터, “물질대사의 균열에 관한 맑스의 이론” 참조)

     

    3) 문순홍, 「생태학의 담론」(아르케) 중 제 2장 참조

     

    4) 제임스 오코너의 이글은 「공간과 사회」 제 3호(1993)에 번역되어 실렸다.

     

    5) 오코너의 “이차모순론”과 관련된 각종 토론글은 카피레프트에 의해 번역 소개된 바 있다. 제임스 오코너 외, “자본주의의 이차모순에 대하여”, 「읽을꺼리 6호」를 참고할 것

     

    6) 맑스가 생산조건에 대해서 어떻게 사용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인용을 할 수 있지만 간단히 대표적인 사례만 한 가지 언급하고자 한다. “직접적 생산자에 대한 생산조건 소유자의 직접적인 관계 ·‥ 에서 우리는? 언제나 사회구조 전체의, 그리하여 또한 주권·종속 관계의 정치적 형태 … 의 가장 깊은 비밀, 은폐된 토대를 발견하게 된다.”(맑스, 「자본론」, 3권, 제 47장)

     

    7) 여기서 오코너에 대한 비판 중 인용한 부분은 존 벨라미 포스터, “자본주의와 생태: 모순의 성격”,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과 생태론」(공감)을 참고함

     

    8) 폴 버켓, “적색과 녹색의 융합”,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과 생태론」(공감)을 참고함. 오코너의 이론에 대해서는 위의 포스터의 글과 버켓의 이 글이 적절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9) 오코너는 이 둘의 결합을 중요하게 보았던 것은 나름대로 “더 이상 노동자계급을 역사 변화의 특권적 주체로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을 역사적 의제에서 우선시하지도 않는” 포스트맑스주의에 맞서, 새롭게 등장하는 신사회운동에 대한 맑스주의적 입장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고 이를 기존의 맑스주의적 입장과 결합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10) 해방연대(준) 당건설사업추진단, “(가칭)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 강령초안 해설”의 내용을 참고할 것.

     

    11)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맑스와 엥겔스에게 생태주의적 인식이 풍부하다고 보는 것보다, 맑스와 엥겔스의 유물론 철학의 온전한 의미가 생태문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사실 서구의 맑스주의 중 상당수는 맑스와 대비하여 엥겔스는 실증주의적이고 경험주의적이라고 비판하고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을 부정해오는 편향적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들은 맑스주의를 협소하게 인식하여 자연과학을 경시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흐름 속에서 자연철학으로서 유물론은 반신불구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역사유물론이 “유물론적인 역사파악”을 의미한다는 것이 온전히 인식될 수 없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페리 앤더슨은 『서구 마르크스주의 연구』라는 책에서 적절하게 비판한 바 있다.

    “사실상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엥겔스의 철학적 유산에 대한 단호한 이중적 부정 즉 코르쉬의 마르크스주의와 철학, 그리고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나타난 비판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후에 엥겔스의 후기 저작에 대한 혐오감은 싸르트르에서 꼴레띠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알뛰세에서 마르쿠제에 이르기까지 사실 상 마르크스주의 내의 모든 사조에 걸쳐 공통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엥겔스의 업적이 논의에서 배제되어 버리자 마르크스 자신이 남긴 저작의 한계가 이전보다 더욱 명백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그것을 보완할 필요성이 매우 절실해졌다. 이 목적을 위해 유럽사상권 내에 있는 마르크스 이전의 철학적 권위를 등에 업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이론이 마르크스 이전으로 후퇴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유물론은 자연 및 자연과 인간, 사회 사이의 관계에 대한 풍부한 고찰을 제공해줄 수 있었다.

     

    12) 이들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존 벨라미 포스터,? 『맑스의 생태학』(MRP, 2000), 폴 버켓, 『맑스와 자연: 적색과 녹색의 전망』(Palgrave Macmillan, 1999) 등을 들 수 있다.

     

    13) 엥겔스 역시 인간은 다른 종과 마찬가지로 생성과 발전, 소멸의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는 “수백만 년에 걸쳐 계속된 발전 과정의 생산물”임을 강조하면서,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인식에 있어 변증법의 올바름을 형이상학에 대비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엥겔스의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참고할 것.

     

    14) 이는 인간과 인간 외부의 자연과의 관계 뿐 아니라 가령, 생명종 사이의 상호 관계, 지구환경과 생명종 사이의 관계 등으로 사고가 더욱 확장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으로 흡사 진화론의 중요한 개념인 “공진화(coevolution)”를 떠올리게 한다.

     

    15) 한국의 경우, 이성백이 물질대사 개념의 중요성에 주목한 바 있다. 이성백, “맑스주의와 생태론 패러다임의 전환”을 참고할 것

     

    16) 「자본론」의 역자인 김수행은 전체적으로 “metabolism”을 물질대사보다는 신진대사로 번역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글을 읽어주기 바란다.

     

    17) 소련 등 “현실사회주의”권에서도 자본주의와 비슷한 환경파괴가 발생하자, 생태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역시 자본주의와 동일하게 반생태주의적이라고 비판을 하였다. 그러나 이는 관료가 지배하는 공동생산체제로 전락한 “현실사회주의”가 인간 해방이라는 사회주의 본원의 목표를 실현해가는 데 실패하고 새로운 지배와 억압체제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현실사회주의”에서 생산력의 발전은 인간이 자연에 가하는 변형의 결과들을 올바로 예측하고 인간과 자연이 지속가능한 공존관계를 형성하는 과정과 결합되지 못하였다. “현실사회주의”의 교훈은 다음과 같다. 사회주의에서 생산력의 발전, 민주적인 계획 등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완전한 발전을 위한 수단이라는 점, 그리고 인간의 완전한 발전은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사이의 관계에서 근본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한편 “현실사회주의권”의 환경파괴를 자본주의가 야기하는 것과 동일한 수준으로 볼 수는 없다. 기본적으로 현실 사회주의권은 사용가치의 생산이 주목적이었으며, 따라서 경제성장, 생산규모의 확대에 대한 욕구가 자본주의의 그것과 같지 않았다. 반면 자본주의 하에서는 생태계 파괴가 극단적인 양상을 띠어가고 있다. 이는 두 체제에서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 관계의 차이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18) 19세기 농업위기의 내용과 이에 대한 자본주의 체제의 대응에 대해서는 「강령토론」 이번호에 게재되어 있는 존 벨라미 포스터의 “파멸을 말하는 생태학”과 「생태계의 파괴자, 자본주의」(책갈피)에 실려 있는 “리비히, 마르크스와 토양 비옥도 고갈문제”를 참조할 것.

     

    19) 폴 버켓은 생태문제와 관련된 맑스의 해결전망에 대한 문제에서 포스터보다 더 진전된 측면이 존재한다. 버켓은 포스터와 동일하게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 관계를 중시하지만, 자본주의가 야기한 물질대사의 균열, 생태위기가 인간발전의 조건에 심각한 위기를 낳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태문제의 극복 전망으로 맑스의 사상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측면을 중요하게 바라본다. 폴 버켓의 주장은 “자본과 자연”이라는 2007년의 인터뷰와 “지속가능한 인간발전에 관한 맑스의 견해”(먼슬리 리뷰 2005년 10월호)를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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